구산선문 실상사 (3)
약사전의 철불을 보고 나와 요사채가 있는 사잇길로 들어서면 극락전 앞에 홍척국사부도가 있다. 실상사를 창건한 홍척국사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다. 공식 명칭은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이다.
실상사 극락전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
증각(證覺)은 스님의 시호이고 응료(凝蓼)는 부도의 이름이다. 높이가 2.4m이며 팔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 기단부분
기단은 팔각형의 석재를 여러 층 쌓은 뒤 앙련(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의 돌을 올렸다. 각 면의 조각들은 닳아 없어져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가 힘들고 윗받침돌의 연꽃잎만이 뚜렷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었는데 낮은 편이다. 몸돌은 기둥 모양을 새겨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 앞뒤에는 문비가 있고 좌우에는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을 돋음새김하였다. 지붕돌에는 목조건축의 처마선이 잘 묘사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앙화, 보륜, 보주가 남아 있다.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극락전 안에서 바라본 증각대사부도비
증각대사부도 옆에는 증각대사부도비가 있다. 공식 명칭은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비(보물 제39호)이다. 비는 몸돌이 없어진 채 현재 귀부(거북받침돌)와 이수(머릿돌)만이 남아있다. 이수의 높이가 1.03m, 귀부의 너비가 1.61m에 이른다. 귀부는 당시에 유행한 용의 머리를 형상화하지 않고 거북의 머리를 그대로 충실히 따랐다. 이수는 통일신라 초기의 대표적인 작품인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와 비슷하다. 앞면 중앙에 ‘응료탑비(凝蓼塔碑)’라는 비 명칭을 새겨 두었다.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의 신라 무열왕릉비와 같이 한국 석비의 고전적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다. 증각대사부도비는 부도보다 마모가 더 심하다. 아마 처음에는 동시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데 중간에 보수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거나 석질에서 차이가 좀 나는 것 같다.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
극락전을 지나 뒤쪽으로 가면 실상사를 창건한 홍척스님의 법을 이은 수철스님의 부도가 나온다. 공식 명칭은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보물 제33호)이다. 수철(秀澈)은 시호이고 능가보월(楞伽寶月)은 부도의 이름이다.
높이는 3m이다. 수철화상의 사리를 모셔 놓은 사리탑이다. 수철화상은 신라 후기의 승려로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다가 후에 실상사에 들어와 이 절의 두 번째 창건주가 되었다. 진성여왕 7년(893)에 77세로 입적했다.
탑은 신라 석조 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아 맨 아래 바닥돌에서 지붕까지 모두 8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은 아래받침돌에 구름과 용무늬와 사자가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다. 중대석은 얕고 좁지만 각 면에 안상이 음각되어 있고 그 안쪽에는 사리함 또는 주악상 등이 장식되어 있다. 상대석에는 앙련이 삼중으로 조각되어 둘러져 있다. 8각의 몸돌은 각 모서리마다 우주(기둥 모양)가 새겨져 있다. 앞뒷면에 문비가 있고 그 좌우에 사천왕상이 양각되었다.
지붕돌은 얇고 경사가 완만하며, 처마 부분에는 엷은 곡선을 이루고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 경사면에는 기왓골을 표시하였고, 그 끝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함으로써 목조건축의 지붕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였다. 꼭대기에는 몇 층의 단이 있고, 그 위에 원형의 작은 돌만 있을 뿐 모두 없어졌다.
이 부도의 석재를 보면 색깔이 약간 검은 돌이다.
이는 백장암 석탑과 재질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건립 연대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석질이 단단하지 못해서 비바람에 직접 노출되는 지붕과 하대석 등의 문양이 손상되기는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매우 뛰어난 솜씨이다. 내가 보기엔 증각대사부도보다 한 수 위로 보인다.
수철화상부도비
수철화상부도 옆에는 수철화상부도비가 있다. 수철화상(817∼893)은 비문이 남아있어 그 내용을 많이 알 수가 있다.
공식 명칭은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다.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까지의 행적과 사리탑을 세우게 된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심원사의 승려였기 때문에 비문에는 ‘심원사수철화상’으로 적고 있다.
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이라서 그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는 달리 거북 모양의 받침돌 대신 안상 6구를 얕게 새긴 직사각형의 받침돌을 두어 그 위로 비를 세웠다.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 이수
비를 꽂아두는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연꽃을 둘렀다.
머릿돌인 이수에는 구름 속에 용 두 마리가 대칭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이수 중앙에는 '능가보월탑기(楞伽普月塔記)'라는 전자(篆字)로 음각되어 있다. 글씨는 당대를 전후하여 성행한 구양순체를 따랐다.
이젠 실상사 경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다 보았다. 그러나 눈썰미가 있는 독자는 빠진 게 하나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바로 실상사부도이다. 지금 여기서 부도를 또 하나 더 설명을 하면 대부분의 독자는 그만 덮어버릴 것 같아 부도가 있는 위치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실상사 보광전 뒤쪽으로 나가면 절 뒤로 약 500m 정도 운치가 있는 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실상사부도(보물 제36호)가 다소곳이 앉아 있다. 이 부도는 찾는 이가 거의 없어 좋은 사람과 같이 호젓한 이 길을 다정스럽게 손을 잡고 가면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될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부도와 탑이다.
우리나라의 부도는 도의선사의 진전사지부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통일신라 말에 선종이 들어옴으로써 부도문화가 성립된 것이다. 그 이전 신라불교의 주된 사상은 화엄종이었다. 화엄종의 주된 철학적 이념은 '왕과 부처는 같다'는 왕즉불(王卽佛)이다.
그러나 도의선사에 의해 심즉불(心卽佛)인 선종이 들어옴으로써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따라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성립된 것이다. 이 믿음은 신라하대의 지방 호족들에게 새로운 정치철학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해 준 것이다. 이는 곧 호족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철학적인 이념을 제공한 것이다. 이에 호족들은 다투어 지방에 선종사찰을 세우게 된다. 구산선문 중에서 경주 근처에는 하나도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신라가 망하고 호족 중 하나인 고려태조 왕건이 통일을 함으로써 불교의 이념은 선종이 교종보다는 우위를 점한 것이다. 왕건의 왕사는 태안사의 적인선사 제자인 도선국사와 광자대사이다. 결국 고려 불교의 주된 사상적인 기반은 6조 혜능의 남종선을 이어받은 것이다.
따라서 스님도 부처에 준한다는 의미에서 부처님을 모신 탑보다는 못하지만 그에 버금가는 의미에서 부도를 세운 것이다.
그럼 당대의 이름높은 스님들이 입적한 연대를 시대 순으로 알아보자.
스님들의 입적 연도는 부도의 변천과정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우선 도의선사와 홍척국사는 정확한 생몰 연대가 없어 알 수 없으나 도의선사가 제일 먼저라고 추증되고, 그 다음이 도의선사의 제자인 염거화상(844)이다. 그리고 세 번째가 이곳 실상사의 홍척국사와 쌍계사의 진감선사(850)가 비슷하게 추증되고 있다. 그런데 진감선사는 예외다. 진감선사는 부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부도를 세우지 않았다가 36년이 지난 후 부도를 세웠다. 따라서 쌍계사 진감선사부도는 886년에 세운 것이다.
그 다음은 태안사의 적인선사 혜철(861), 쌍봉사의 철감선사 도윤(868), 창원 봉림사를 창건한 진경심희대사의 스승인 고달선원의 원감국사 현욱(869), 보림사의 보조선사 체징(880), 선림원지의 홍각선사 이엄(880), 봉암사의 지증대사 도헌(882), 월광사의 원랑선사 대통(883), 성주사의 낭혜화상 무염(888), 굴산사의 통효대사 범일(889), 이곳 수철화상(893)순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부도로 알려진 도의선사부도를 보면 기단부는 삼층석탑의 정형인 이중기단을 그대로 사용하고 그 위에 팔각원당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그러나 그의 제자인 염거화상의 부도에서는 그 이후에 나타나는 부도의 전형을 갖추고 있다.
즉 장구 모양인 고복형(鼓腹形)의 연꽃받침대에 팔각원당을 얹은 모습이다. 이는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모든 부도의 기준이 된다.
부도의 꽃이라고 알려진 쌍봉사의 철감선사가 이 가운데에 있다. 이와 쌍벽인 연곡사동부도는 정확한 연대를 알 수가 없으나 그의 비슷한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번 여행에서 부도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공부를 다짐하면서 이젠 실상사를 떠나야 한다.
해거름 실상사의 풍광은 아름답다. 서산에 비친 노을은 쓸쓸하면서도 한편 마음의 여유와 평안을 준다. 이와 같이 오래된 절과 그 속의 문화재를 답사하는 것은 일상에서 벗어나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 이 새롭게 충전된 에너지로 다시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번 지리산 여행은 뜻 깊은 여행이었다. 많은 것을 알게 해 준 여행인 것이다. 올겨울 직원 연수 때 다시 올 것을 기약하면서 실상사를 떠난다.
지금까지 계속 읽어준 독자는 아마 대단한 인내심을 갖고 계신 분이다.
뜻한 바가 꼭 이루어질 것이다. 더 많은 복을 받기를 간절히 기원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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