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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구산선문 실상사 (1) - 장승과 풍수

by 황교장 2007. 12. 20.

구산선문 실상사 (1)

 

  백장암을 나와 마천 방향으로 2km쯤 내려오면 구산선문 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실상사가 있다. 실상사(實相寺)를 가려면 우선 다리를 건너야 한다.

옛날에는 이곳에 돌로 징검다리를 놓아 두었는데, 지금은 현대식 다리가 놓였다. 다리 이름은 해탈교(解脫橋)이다. 해탈교 밑을 흐르는 내가 만수천이다.

 

  나는 고향이 낙동강가여서인지 살아오면서 늘 물길이 궁금했다. 물을 보면 항상 이 물이 어디에서 시작하여 이렇게 힘차게 흘러 내려온 것인지 늘 궁금했다. 하지만 어느 책에도 이런 의문은 시원하게 풀어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물을 보면 내 발로 물길을 따라 몇 십 년을 보낸 후에야 물길의 시원을 알 수 있었다.

실상사에 와서 보니 이 다리 밑을 지나는 물길은 또 어디서 시작하여 여기까지 왔다가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가 궁금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물길을 먼저 이야기하고 실상사를 돌아보고자 한다.

 

해저녁의 실상사 전경

 

  바래봉에서 발원, 정령치, 운봉, 인월을 거쳐 내려온 만수천은, 지리산 노고단과 반야봉에서 발원, 심원, 달궁, 뱀사골을 거쳐 흘러온 물과 산내면에서 합류하여 이곳 실상사 앞을 흐른다.

  이 만수천은 천왕봉에서 발원한 한신계곡과 칠선계곡의 물을 받아들여 휴천면 송전리의 용유담에 이르면 임천강이 된다.

 

  또 다른 큰 물줄기인, 남덕유산과 육십령에서 발원한 물은 남강의 본류이다. 이 물은 금천(錦川)으로 불리다가 함양군 서상면을 지나 군자정, 농월정을 돌아서 함양군 안의면에서 금원산 기백산에서 발원되어 흐르는 지우천 등과 합류하여 함양에서는 남계천으로 불리다. 다시 남쪽으로 흘러 유림면과 산청군 생초면 상촌리 경계 부근에서 임천강과 합쳐지면 경호강이다.

이처럼 시내가 모여 강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경호강은 산청을 지나 지리산 남쪽에서 발원한 물줄기들과 만나 남강이 된다. 따라서 경호강이나 남강이나 같은 물길이다. 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이름만 달리 했을 따름이다. 비록 이름만 달리 한 것이 남강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강의 이름이 이처럼 그 지역에 따라 달리 불린다.

  남강은 진양호를 거쳐 진주 촉석루 앞을 흘러서 함안군을 지나 의령군 지정면과 창녕군 남지읍에서 낙동강의 본류와 합류하여 낙동강물이 된다. 낙동강물도 다시 흘러 밀양 하남, 삼랑진을 지나 부산의 다대포 앞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물길은 그 지역의 문화적인 특성을 구분 짓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도의 경계와 군의 경계 등을 나눌 때 산맥과 물길이 그 중심점이 된다. 이러한 원리에 근거하면 운봉, 인월, 산내는 전라북도가 아닌 경상남도로 분류하는 것이 오히려 맞다. 옛날에는 이 지역이 신라 땅에 속했다고 한다. 지금도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말씨를 들어보면 경상도식 발음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이후에 남원에 포함시킨 것은 아마 남원에서 운봉까지 길이 잘 닦여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거리가 가깝기 때문일 게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실상사 입구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반겨 주는 것은 다리 양쪽에 서 있는 세 기의 석장승이다. 해탈교를 건너기 전에 한 기가 있고 다리를 건너면 두 기가 있다. 본래 석장승은 네 기가 있었으나 1936년 대홍수 때 한 기가 떠내려 갔다고 한다.

 

보통 장승은 남녀 한 쌍으로 세워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일반적인데 특이하게도 이 장승들은 모두 남성처럼 보인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일종으로 주로 마을이나 절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는 잡귀의 침입을 막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 실상사 입구에 있는 장승도 잡귀(雜鬼)를 막기 위하여 절 어귀에 세워 놓은 것이다. 이 곳 사람들은 벅수라고도 한다. 이 장승들 역시 절집의 경계 표시와 함께 경내의 부정을 금하는 뜻에서 세운 것이다.

 

장승은 지역마다 이름이 다르다. 지역에 따라 장성·벅수·법수·당산할아버지 등으로 불린다.

장승의 이름을 분류해 보면 도교적인 색체가 강한 장군류와 방위 수호신인 신장류, 불교의 영향을 받은 호법류, 풍수도참과 관련된 비보 장승류 등으로 나눌 수 있다.

1. 도교적 색채가 나는 장군류 :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등

2. 방위 수호신인 방위신장류(方位神將類) : 동방청제장군(東方靑帝將軍), 서방백제장군(西方白帝將軍), 북방흑제장군(北方黑帝將軍), 남방적제장군(南方赤帝將軍) 등

3. 불교의 영향을 받은 호법류 : 호법선신(護法善神), 방생정계(放生定界), 금귀(禁鬼), 수조대장(受詔大將) 등

     4. 풍수도참과 결부된 비보 장승류 : 진서장군(鎭西將軍),

     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 등이다.

  이 가운데 천하대장군ㆍ지하여장군의 명문이 가장 많다.

 

  장승의 시원으로 알려진 장생표주가 보물로 지정된 것은 양산시의 통도사 국장생 석표(보물 제74호)가 유일하다. 그리고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것으로는 통영시 문화동 벅수(제7호), 통영시 삼덕리 부락제당 벅수(제9호), 나주시 불회사 석장승(제11호), 나주시 다도면 운흥사지의 석장승(제 12호), 이곳 실상사 석장승이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부안군 서문안 당산(제18호), 부안군 동문안 당산(제19호)의 장승, 남원시 서천리 당산(제20호)의 석장승, 영암군 도갑사 석장생(제21호), 순창군 충신리 석장승(제101호), 순창군 남계리 석장승(제 102호) 등이 있다.

 

 「장생」이란 문자가 문헌상으로 나타난 것은 신라 헌강왕 10년(884)으로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에 是以乾元二年 特敎植 長生標柱 至今存焉(시이건원이년 특교식 장생표주 지금존언, 건원 2년에 특별히 교지를 내려 장생표주를 세우게 했는데 지금도 볼 수 있다.)이란 기록이 처음이다.

 

 옹호금사축귀장군

 

  그럼 실상사 입구의 장승들을 자세히 살펴보자.

  시내를 건너기 전에 마을 쪽의 강가 왼편에 서 있는 석장승이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沙逐鬼將軍)이다. 옹호(擁護)란 절을 보호한다는 뜻이고, 금사(金沙)란 중국의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의 진법으로 8개의 문을 만들어 두고 진을 치는 것을 말한다. 축귀장군(逐鬼將軍)이란 귀신을 쫓아내는 힘센 장군이란 뜻이다. 따라서 이 장승의 역할은 사찰을 보호하기 위해 진을 치고 잡귀를 쫓아내는 장군의 일을 맡고 있는 것이다.

  옹호장군의 크기는 높이가 3m이고 몸통의 둘레가 1.8m되는데, 벙거지(아래를 접어 올린 겨울철의 방한모)모양의 모자를 썼고 눈과 코, 귀가 크게 조각되어 있는데 비해 입은 다물고 있다. 가슴에서 배로 擁護金沙逐鬼將軍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는데, 흐릿하게 보여서 자세히 보아야 판독할 수 있다.

 

  해탈교를 건너면 길의 양편에 각각 석장승 1기씩이 서 있는데, 왼쪽 것이 대장군(大將軍)이고 맞은편에 있는 것은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다.

 

 

대장군

 

  대장군은 돌의 색깔이 다른 두 기보다 희고, 얼굴의 조각 수법도 상당히 다르다. 가슴에 대장군이라고 새긴 것으로 보아 절을 지키는 힘센 장군이란 뜻이다. 이 돌장승의 아래 기단 부분에 擁正三年乙巳三月立東邊(옹정삼년을사삼월입동변)이란 희미한 명기가 있어, 이 장승은 청나라 옹정제 3년인 1725년에 동쪽 가장자리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상원주장군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의 모습은 머리에 벙거지 모양의 관모를 썼다. 상원주장군의 짝이 되는 장승은 일반적으로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다. 그러나 이 장승은 상원주장군과 대장군(大將軍)이라 되어 있다. 

  상원주장군과 하원당장군이 짝이 되어 있는 것은 나주시 불회사 석장승과 나주시 다도면 운흥사의 석장승 등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민족정기 수호 중앙회에서 장승에 주(周)자와 당(唐)자가 들어간 것을 이상히 생각해서 연구한 결과를 아래와 같이 발표했다.

 

“두 사찰 입구에 버티고 서서 중요민속자료 11, 12호로 보호를 받아온 두 장승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은 통일신라가 ‘당나라의 보호를 받아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인식을 백제 사람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세운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민족사되찾기운동본부(회장·윤두병)가 20일 백제 고찰 불회사에서 가진 ‘돌장승 이대로 둘 것인가’ 현장 세미나에서 밝혀졌다.

이날 김정권(민족정통사상사 연구소장)씨는 강의를 통해 ‘上元周將軍(상원주장군)이라 새겨진 돌장승은 중국이 기자(箕子)라는 자를 기자조선(箕子朝鮮)왕으로 봉하여 준 주나라 무왕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下元唐將軍(하원당장군)은 신라와 연합군을 형성,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이적장군을 상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 소장은 '이는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우리나라는 위급할 때나 평화스러울 때나 항상 중국이 지켜주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대주의적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밝혔다.

나주 운흥사 입구에 세워진 돌장승은 건립 연대가 숙종 45년 1719년 전후인 것으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이후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 미루어 전국적으로 ‘사대 상징’인 주장군과 당장군 장승을 전국에 보급, 사대사상을 주입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전국에 산재한 ‘사대주의 상징 장승’을 조사하여 종합적인 대책을 세워나갈 계획이다. 나라를 잃은 설움에 후손들의 무능으로 천 년을 방치해온 사실을 조상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오늘도 이를 모르는 관광객들은 친근감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정정수(민족정기수호중앙회 사무총장)”

 

  위의 글을 보면 역사적 관점에서 논리적 오류가 보인다. 운흥사 돌장승이 세워진 숙종 45년인 1719년은 임진왜란(1592-1598)이 끝난지도 무려 121년이나 지난 시기다. 그리고 중국도 명(1367-1644)나라가 망한지 75년이나 지났다. 이 해는 역대 중국 왕조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인 강희제(재위 1661-1722) 시대이다. 강희제는 청나라 제4대 황제로 1681년 삼번의난을 평정함으로써 명실공히 청나라 황제의 위상을 정립했다. 그리고 명나라 주원장 때 보다도 영토를 2배나 확장시킨 황제다. 강희제 때의 유럽은 영국도 아니고 프랑스도 아닌 러시아가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그 당시 러시아의 황제는 표트르대제였다. 표트르대제와 전쟁을 벌여 이긴 사람은 강희제밖에 없다. 이는 동양의 자존심이다. 그 결과가 네르친스크조약(1689)이다. 이 조약으로 강희제는 중국의 판도를 최대로 넓혔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 중국 한족 알기를 우습게 여긴 만주족(여진족)인 강희제시대에 어느 누구라도 중국 한족의  정통역사인 주나라 무왕의 주장군이나 당나라의 이적장군의 당장군을 선전하여 사대주의를 강요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어보였다.

  上元周將軍의 '주'를 꼭 주나라로 해석해야만 하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下元唐將軍의 '당'도 마찬가지다. 주는 두루, 진실한 장군, 당은 큰 장군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상원을 두루 진실한 장군, 하원을 큰 장군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설령 민족정기수호중앙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사대주의의 산물인 것이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이것 역시 거스를 수 없는 우리의 역사이기에 잘난 역사만 남겨두고 못난 역사는 없애서는 안 된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이것을 계기로 참다운 역사교육을 시켜 두 번 다시 나라를 잃는 설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돌장승에도 숨어 있는 역사가 이리도 많은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과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것은 살아 숨 쉬는 산 교육의 장이다.

 

  실상사 풍수는 특이하다. 대부분의 절은 산에 있는데 실상사는 평지에 있다. 절 입구에서 보면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이 거의 정면에 있다.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이 나란히 이어져 있다.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이다.

 

  천왕봉을 보는 순간 내 머리에 뚜렷이 각인된 것이 생각났다. 십 수 년 전 가을에 초등학교 2학년짜리 아들과 둘이서 중산리에서 출발하여 천왕봉에 올랐다. 전형적인 가을날이라 천왕봉 정상에서 실상사를 바라보니 아주 가까이 뚜렷이 보였다. 가시거리가 정말 좋은 날이었다. 그 당시 풍수책을 한창 읽던 시절이라 초등학교 2학년짜리를 상대로 실상사 풍수를 설명한 기억이 어제인 듯 생각난다.

 

  실상사의 풍수를 설명한 글을 보면 대략 세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행주형국, 또 하나는 매화낙지, 마직막은 연화부수형국이다.

 

  배가 떠나가는 모양을 행주형국(行舟形局)이라고 한다. 배가 물건을 가득 싣고 떠나려 하는 모양이다. 마을이나 도읍 풍수에서 행주형국이 아마 제일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안동, 평양, 공주, 무주, 청주, 운봉, 해인사, 실상사, 운주사가 대표적인 행주형국이다. 행주형국은 부자들이 많고 번창한다고 한다.

도선국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의 지형이 행주형국이라고 한다. 한반도의 지형이 동해를 향해 나아가는 배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태백산맥이 있는 동해안의 관동지방, 영남지방은 지대가 높아서 몹시 무겁지만 호서 지방, 호남지방은 평야가 많아서 가볍기 때문에 동쪽으로 기울어져서 국운이 바다 쪽, 동쪽으로 흘러들어 일본으로 기가 빠져 나간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결점을 보완하기 위한 비보 차원에서 서쪽 지방에 높은 탑을 많이 세워서 그 탑을 배의 돛대로 삼고 배에 싣는 짐의 역할로 부처를 많이 만들어 눌러 놓으면 배는 균형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으로 기가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먼저 실상사에 탑을 세우고 철불로 기를 눌러 균형을 취했다. 그래도 못 미더워 마지막으로 화순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만들어서 그 천불이 사공이 되어 대양을 향해 저어가면 풍파를 만나더라도 평안하게 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두 번째는 매화낙지형국이다. 실상사에서 주변의 산세를 보면 사방이 모두 다 높은 산이다. 이처럼 동서남북의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명당자리에 실상사가 있는 셈이다. 이는 풍수상으로 동서남북으로 둘러싸인 산들이 매화꽃의 꽃잎이라면 실상사가 있는 곳은 꽃술에 해당한다. 전형적인 매화낙지(梅花落地)형의 명당인 것이다. 매화는 사군자의 으뜸으로 봄을 알리는 희망의 꽃이요 선비의 꽃이다. 매화는 낙화하게 되면 그윽한 향기가 사방에 퍼지기 때문에 자손의 발복이 크다고 알려진 명당이다.

 

  세 번째로는 실상사의 형국이 연꽃이 물위에 떠있는 모습인 연화부수(蓮花浮水)형이라고 주장한다. 연꽃은 물 위에 뜰 때 그 향기가 그윽하다. 이러한 형국은 자손이 고귀하고 화려하게 생활한다고 한다. 대표적인 연화부수형은 안동하회마을이다.

 

  풍수의 형국론은 이처럼 코에 걸면 코거리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이다. 지리산 자락의 사찰 중 평지에 자리한 절은 이곳 실상사와 단속사가 있는데 단속사는 폐허가 되어 석탑만 남겨져 있는데 비해 실상사는 여전히 번성하고 있다. 아마 이런저런 명당이라서 절이 폐사되지 않고 계속 이어져 오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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