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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충주의 문화유적을 찾아서 1-탄금대

by 황교장 2008. 7. 13.

 

충주의 문화유적을 찾아서 1-탄금대

 

지난 번 안동 일대를 답사하여 많은 호평을 받았다. 이어서 이번에도 안동문화의 원류인 퇴계선생을 찾아 나서기를 계획으로 세웠다. 순서는 퇴계 태실-퇴계 종택-이육사 생가-도산서원-청량산으로 잠정적으로 정했는데 그 중 몇 분이 연달아 안동에만 가면 식상하지 않느냐? 충청도까지 왔는데 충청도에는 좋은 곳이 없느냐? 라는 질문을 하였다.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내 머리 속에 하나의 그림이 펼쳐졌다. 아름다운 강, 탑, 비석이 있는 충주가 떠오른 것이다. 태백의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이 만나는 합수머리에 아름다운 탄금대가 있다. 그리고 남한강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중앙탑, 고구려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인 중원고구려비가 있는 아름다운 충주의 정경이 눈앞에 아른거린 것이다.

2008년 7월 11일 오후 13시 30분, 교원대학교를 출발하여 충주로 향했다. 청주를 지나 충주까지 가는 차창 밖의 풍광은 조선시대 노론의 발상지답게 양반이 살 만한 풍수를 지녔다. 충청도 양반이 그냥 나온 게 아닌 것이다. 야트막한 야산과 적당히 너른 평야와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개천이 올망졸망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출하면서 달리는 차창을 스쳐 지나간다. 충청도(忠淸道)라는 명칭은 충주(忠州)의 충(忠)과 청주(淸州)의 청(淸)에서 따와 충청도가 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청주는 서쪽에 있다 하여 서원경이고 충주는 통일신라의 한가운데 있다하여 중원경이라고 불렸다.

출발 후 약 1시간 50분 만에 충주 시내에 진입했다. 충주는 근초고왕 때(350년)는 백제 땅, 장수왕 때(475년)는 고구려 땅, 진흥왕 때(557년)에는 신라 땅이다. 중원을 장악하는 자가 패권을 차지한다는 설이 있다. 따라서 신라가 중원을 장악하여 패권을 차지함으로써 이 설이 입증된 것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주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속리산의 아홉 여울 여덟 구비의 물이 북쪽으로 청주 산동에 와서 청천(靑川, 화양동 청화산에서 흐르는 물과 속리산 물이 합친 물)이 되고, 괴산에 와서 괴강(槐江, 청천 하류 괴산 남쪽에 있는 물)이 되며, 충주읍에서는 달천이라 불린다. 임진년에 명나라 장수가 달천을 건너다가 물맛을 보고 중국 여산에 있는 수렴과 같다고 했다..... 한 고을에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많이 나오기로는 팔도에서 으뜸이다. ... 고을이 경기도와 영남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기 때문에 유사 시에는 반드시 서로 차지하려고 할 것이다...임진년에 신립이 왜적에게 패한 곳도 이 지방이다. ... 읍에서 서북쪽으로 7리쯤 가면 두 강이 합류하는 곳 안쪽에 작은 산 하나가 솟아 있다. 이것은 신라 때 우륵선인이 가야금을 타던 곳으로 탄금대라 한다. 강가에 있는 암석의 경치가 좋다.” -이민수 역, 평화출판사-

충주 시내에서 탄금대까지의 거리는 불과 4키로밖에 안 된다. 첫 목적지인 탄금대에 도착한 것이다.

 


 

탄금대(彈琴臺)는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 중 한분인 우륵이 가야의 멸망을 예견하고 신라에 귀부한 뒤 이곳 충주 대문산(원래는 犬門山인데 개 犬자를 충주사람이큰大자로 바꾸어서 부른다)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하여 탄금대에 올라 제자들에게 가무와 가야금을 가르치니 그 음악소리에 모여든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에 탄금대란 명칭이 붙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탄금대의 경관은 절경이다. 넓은 평야와 산과 강이 함께 어우러져 그림같이 펼쳐진 아름다움을 무딘 내 글로써 표현하기에는 무리다. 내가 느끼기에는 여주의 신륵사 주변의 경관과 수종사에서 바라보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부근의 경치보다도 오히려 이곳이 한 수 위가 아닌가 한다. 어제 신문에 탄금대가 명승 제42호 지정되었다고 실려 있었다. 이처럼 충주 탄금대는 경관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의미가 높아 국가에서 보호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탄금대의 아름다운 경치에 우리 일행의 입가에 마냥 미소가 번지고 있다.

그러나 탄금대의 아름다움 뒤에는 슬프고도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배수의 진을 쳐 왜군과 대적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장렬하게 투신자살한 곳이기 때문이다.

장군은 500명의 기병으로 2만 명의 여진족 기병을 물리쳤을 정도로 대단한 무인이었다. 그러나 왜군과의 전투에서는 그 전날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그 일대가 수렁으로 변해 장군의 주특기인 기병이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배수진(背水陣)을 쳤다. 적과 싸워 이겨야 살 수 있는 것이 바로 배수진이다. 다리가 놓이기 전의 탄금대를 상상해보자 달천과 남한강에 막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는 위치다. 결국 팔천여 명에 이르는 군사들이 전원 순절했다. 이처럼 이곳은 처절한 한이 맺힌 장소이다.

후세 사람들은 신립장군이 싸움에서 유리한 문경세재를 두고 탄금대에 진을 친 것을 안타깝게 여겨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신립이 젊은 시절 사냥을 하다 밤늦게 산 속 외딴집을 찾아 들었는데 이 집에 는 괴물이 매일 밤 나타나 가족을 차례로 죽이고, 마지막으로 그 집 처녀를 잡아갈 차례였다. 그날 밤 괴물이 나타나자 신립은 활로  괴물을 쏘아 죽였다. 신립이 처녀를 구한 것이다. 이에 처녀는 신립을 따라나서려 했다. 그러나 신립은 거절했다. 이에 처녀는 그만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후 처녀는 귀신이 되어 신립을 따라다니면서 신립의 꿈에 나타나 도움을 주곤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충주 싸움 때는 조령으로 가지 말고 탄금대로 가도록 꼬여서 그만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여자가 한을 품으면 끝까지 가는 것이다. 남성동지들이여! 젊은 시절이라도  한을 한 번 맺은 사람이 있다면 항상 여자를 경계해야 할 지어다.

 

이러한 슬픈 역사를 간직한 탄금대의 경관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 우리 일행은 슬픈 역사를 잠시 뒤로하고 아름다운 경관에 감탄을 한다. 우리 연수팀의 일원인 대신여중 교장선생님이 바로 이곳 충주가 고향이다. 충주여고를 나왔다. 고향에 왔다고 시원한 아이스바로 한 턱을 쏘았다. 7월의 더위를 얼음으로 달래는데, 가계집 스피크에서 맑고 구성진 노래가 잔잔하게 들려온다. 주현미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탄금대 사연’이란 노래다. 이 노랫말은 1968년에 이병환이 가사를 쓰고 그 동안 6명의 가수들에게 불린 충주를 대표하는 향토성이 짓은 노래다.

- 탄금대 사연-

탄금정 굽이 돌아 흘러가는 한강수야

신립장군 배수진이 여기인가요

열두 대 굽이치는 강물도 목메는데

그 님은 어데 가고

물새만이 슬피 우나...

 

송림이 우거져서 산새도 우는가요

가야금이 울었다 탄금인가요

우륵이 풍류 읊던 대문산 가는 허리

노을진 남한강에

님 부르는 탄금 아가씨...

 

이곳 전투는 후세 사람들에게 많은 의문점을 남겼다. 조령의 요충지를 버리고 왜 이곳에서 배수진을 쳐야만 했는가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많다.

좀더 객관적으로 이 당시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류성룡(柳成龍,1542-1607)이 지은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132호)과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나오는 내용을 첨부한다. 역사적인 진실은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징비록

임진년 봄의 일이다. 신립과 이일이 변방에 파견하여 순시토록 하였다. 이일은 충청, 전라도로 가고 신립은 경기도와 황해도를 순시하였다. 한 달이 지나 그들은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조사해 온 내용이란 것은 고작 활과 화살, 창과 칼 같은 것 뿐이었다. 군이나 읍에는 문서 상으로만 무기가 갖추어져 있을 뿐 실제로 필요한 무기는 전혀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성질이 사납다는 소문이 있던 신립은 사람을 해치면서까지 위엄을 보이려 하였다. 그러자 수령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백성들을 동원하여 길을 닦고 융숭한 대접을 베풀었는데, 어떤 대신의 행차보다도 떠들썩했다.

4월 1일, 두 사람은 서울로 돌아와 임금께 보고했다. 그 무렵 집으로 찾아온 신립에게 내가 물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큰 변이 일어날 것 같소. 그렇게 되면 그대가 군사를 맡아야 할 터인데, 그래 적을 충분히 막아낼 자신이 있소?” 신립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까짓 것 걱정할 것 없소이다.” 나는 다시 말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과거에 왜군은 짧은 무기들만 가지고 있었소. 그러나 지금은 조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닌 것 같소.” 그러나 신립은 끝까지 태연한 말투로 대꾸했다. “아 그 조총이란 것이 쏠 때마다 맞는답니까?” 그렇지만 걱정이 된 나는 다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라에 태평한 세월이 계속되면 병사들은 모두 나약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때에 변란이라도 일어나면 속수무책이 될 것입니다. 몇 해가 지나면 우리 병사들도 강해지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참으로 걱정입니다.”

그러나 신립은 내 말을 무시한 채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녁 무렵 개령 사람 하나가 와서 적들이 코앞에 왔음을 알렸다. 그러나 그의 말을 믿지 못한 이일은 그를 목 베려 하였다. 민심을 현혹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잠시 동안만 나를 가두어 두고 기다려 보십시오. 내일 아침에도 적이 이곳에 오지 않으면 그때 죽이십시오.” 당시 적들은 장천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곳은 상주에서 겨우 20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나 이일의 진영에서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척후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이일은 개령 사람을 옥에서 끌어낸 후 말했다. “아직 적의 그림자도 볼 수 없다. 네가 민심을 현혹시키기 위해 지어낸 거짓임이 분명하다.” 그러고는 죄 없는 사람의 목을 베고 말았다.

잠시 후 신립이 신임하는 군관이 들어와 조용히 전했다. “적이 이미 조령을 넘었다 합니다.” 이때가 27일 초저녁이었다. 이 말을 들은 신립은 갑자기 성 밖으로 뛰어 나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자 병사들 또한 동요하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 신립은 조용히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신립은 자신에게 보고했던 군관을 불러들였다. “네 어찌 그런 망령된 보고를 하여 우리 진영을 동요케 하느냐?” 신립은 그를 목 베어 죽였다. 그러고는 즉시 임금께 글을 올렸다. ‘적은 아직 상주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적은 10리 밖까지 진격해 온 상태였다.

 

연려실기술

신립이 새재[鳥嶺]를 막고 방어하려다가 길이 험해서 말달리고 활쏘기 불편하다고 물러와 충주에 진을 쳤다. 이일은 신립이 충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새재를 버리고 충주로 갔다. 신립이 적세(賊勢)를 물으니 이일은, “이번 왜적은 경오ㆍ을묘년과는 비교가 안 되며 또 북쪽 오랑캐 같이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소. 이미 험한 곳에 주둔하지 못하여 넓은 들판에서 싸움을 하게 되어 당해 낼 도리가 만무하니 차라리 물러가 서울을 지킵시다.” 하였다.

신립이 화를 내어 말하기를, “네가 패군(敗軍)하고 또 다시 군중을 놀라게 하여 요동시키니 군법에 의하여 마땅히 목을 벨 것이지만, 적이 이르거든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 하라.” 하고 또, “바다를 건너온 적은 능히 달리지 못한다.” 하였다. 드디어 달래강[㺚川]을 뒤에 두고 탄금대(彈琴臺)의 달래강 두 물길 사이에 배수진(背水陣)을 쳤다. 군사가 겨우 수천 명이었다.

 

[출처] [토론정리] 탄금대 전투 - 전투전까지 신립의 행동 평가| 작성자 앨런비에서 인용

탄금 아가씨를 뒤로하고 국보 제6호인 중앙탑으로 향했다.

 

 

8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내가 근심의 시기에 처해 있을 때,

Mother Mary comes to me

어머니께서 다가와

Speaking words of wisdom

지혜의 말씀을 해주셨어요.

Let it be

"순리에 맡기거라."

And in my hour of darkness

내가 암흑의 시간 속에서 헤매이고 있을 때에도

She is standing right in front of me

어머니는 내 앞에 똑바로 서서

Speaking words of wisdom

지혜의 말씀을 해주셨어요.

Let It be

"순리에 맡기거라."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그냥 그대로 둬요.", "순리에 맡기자구요." ...

Whisper words of wisdom

지혜의 말씀을 속삭여 봐요.

Let it be

"순리에 맡기거라."

And when the broken hearted people

Living in the world agree

세상을 살아가며

상심을 겪게 되는 사람들이 좌절을 할 때에도

There will be an answer

현명한 대답이 있어요.

Let it be

"순리에 맡기거라."

For though they may be parted

왜냐하면 비록 헤어짐을 겪게 될지라도

there is still a chance that they will see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죠.

There will be an answer,

현명한 대답이 있어요.

Let it be

"순리에 맡기거라."

And when the night is cloudy

구름 덮인 밤일지라도

There is still a light that shines on me

다음 날이 밝을 때까지

Shine on until tomorrow

나를 밝혀줄 등불은 여전히 있어요.

Let it be

"순리에 맡기세요."

I wake up to the sound of music

음악소리에 잠을 깨어 보니

Mother Mary comes to me

어머니께서 내게 다가와

Speaking words of wisdom,

지혜의 말씀을 해주셨어요.

Let it be

"순리에 맡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