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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중국여행

중국연수 2 -항주 영은사

by 황교장 2008. 8. 20.

중국연수 2 -항주 영은사

 

전날 잠을 잘 못 이루어서인지 아주 잠을 잘 잤다. 특급호텔이라서 잠자리도 편안하고 부족한 게 없었다. 평소에 아침운동을 하지 않으면 아침식사를 거르는 것이 30년 이상 지켜온 습관인데 이 날 아침은 호텔에서 양식과 현지식으로 잘 먹었다. 출발 전에 1단의 미인 교감선생님과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우리 2단 버스를 놓쳐버렸다. 이미 출발을 한 것이다. 황당했다. 우리 연수생들은 인원이 많아서 3단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각각의 단별로 움직인다. 하루의 전체 관람은 같지만 가는 순서와 식사 장소는 서로 다르다. 나는 2단 소속이다. 그런데 2단 버스는 이미 가버렸다. 마침 3단이 영은사로 간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영은사에서 2단과 다시 합류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영은사에 도착하기 전에 3단 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다음과 같이 당부를 하였다.

 

버스에 내리자마자는 절대로 물건을 사지 말라고 한다. 별로 쓸 만한 물건들이 없다고 한다. 만약에 마음이 드는 물건이 있으면 영은사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서 사라고 한다. 가격 차이가 많이 난다는 뜻이다. 최소한 그 돈의 반 값만 주면 된다고 한다. 그리고 특히 주의사항은 물건 파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말라는 것이다. 한 번 눈이 마주치면 끝까지 따라와서 괴롭다는 것이다. 이때를 대비하여 우리들에게 한 마디 중국어로 교육을 시킨다. ‘뿌-야오’라고 성조까지 연습을 시킨다. 즉 한자로 불요(不要)인 것이다.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리라.

아니나 다를까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나에게 달려드는 사람은 선글라스를 파는 사람이었다. ‘만원이다. 싸다 그리고 질도 좋다’라고 비교적 또렷하게 우리말을 한다. 우선 보기에는 좋아 보인다. 선글라스가 만 윈이면 오늘같이 뜨거운 태양 아래 괜찮은 가격이다. 그러나 배운 대로 ‘뿌-야오’라고 제법 큰소리로 외쳤다. 그런데도 계속 나를 따라오고 있다. 이유인즉 가이드가 눈을 절대 마주치지 말라고 했는데 평소에 관상을 보는 습관 때문에 그만 눈이 마주 친 것이다. 그래도 못 본척하고 갔다.

 

3단 사람들과 함께 영은사에 도착하니 입구에 '咫尺西天(지척서천)'이란 글씨가 크게 쓰여 있다. 즉 극락이 지척에 있다는 뜻이리라.

 

  지척서천

 

지척에 있는 영은사가 천국이라는 의미일 게다. 그런데 이곳이 중국선종 10찰 중 하나라고 하니 선종의 선문답으로도 볼 수도 있겠다. 곧 극락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척에 있는 내 마음에 천국인 서방 극락정토가 있다는 의미도 되리라.

 

3단에도 부산의 연수 동기생 몇 분이 있다. 이분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는데 평소에 여성동지와 친하게 지내는 심, 정교감이 나를 반기면서도 제일 먼저 경계를 한다. 이유인즉 3단의 총무가 40대 초반의 교원대 여성 실장인데 지금까지는 자기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만 내가 합류를 하자 경계 대상 1호가 된 것이다. 그 분들 왈 3단 총무에게 ‘황도사한테 꼬이면 약도 없으니까 조심하란다.’ 아직까지 내가 경쟁력이 있다는 소리다. 그 말 한마디가 아침부터 왠지 기분을 좋게 한다.

 

 

영은사는 동진(東晉, 326년) 시대에 인도 승려 혜리(慧理)가 항주에 왔다가 이곳 산의 기세가 매우 아름다워 ‘仙靈所隱(선령소은, 신선의 영혼이 이곳에 깃들어 있다)’ 이라고 말한 후 사찰을 짓고 이름을 영은(靈隱)이라 했다고 한다. 영은사 입구의 현판은 비교적 최근에 쓴 것으로 강택민 국가주석의 글씨다.

 

 강택민 주석의 친필

 

입구의 왼쪽에는 전국의 유명한 불상들의 모양을 그대로 본떠 만들어져 있다. 사천지방 안악(安岳)의 와불(臥佛), 용문석굴(龍門石窟), 운강석굴(雲岡石窟) 등이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다.

입구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이공지탑(理公之塔)이 있다. 영은사를 창건한 혜리스님을 기리는 탑이라고 한다.

 

비래봉 앞 이공지탑 

 

이공지탑 뒤에는 비래봉(飛來峰)이란 산이 있다. 비래봉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로 높이가 209m, 둘레 800m 정도의 바위 봉우리다. 이 비래봉에는 제공스님에 대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공스님은 출가 스님인데도 계율을 잘 지키지 않고 자유분방했다.

술과 고기를 너무 좋아했다. 그리고 복장 또한 낡은 모자를 쓰고 찢어진 부채를 들고 마을에 나타나 어슬렁거리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술과 고기를 자주 얻어먹었다.

그러나 이러한 스님이지만 신통력이 뛰어났다. 마을에 일어난 문제들을 해결해 주고, 나쁜 사람은 혼내주고, 어려운 사람은 도와주었다.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를 신뢰 하지는 않았다.

하루는 스님이 인도에서 큰 산이 날아 올 것을 알아차리고 동네 사람들에게 이곳에서 피신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산이 날아 온다'라는 어이없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냥 두면 마을 사람들이 다 죽게 되어 스님은 꾀를 내었다. 마침 그때 마을에 결혼식이 한창이었다. 이때 스님은 결혼식의 신부를 납치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이것을 본 동네사람 모두가 스님을 잡기 위하여 달려가는데, 달리는 뒤로 거대한 바위가 떨어졌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다. 이때 떨어진 바위가 비래봉이라고 한다. 그 이후 스님은 마을 사람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게 되었다. 지금도 비래봉에는 제공스님의 여러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고 한다.”

 

 

비래봉 석굴조각품 중 인기 있는 석불

 

이러한 전설을 가진 비래봉에는 10-14세기경에 만들어진 석굴조각품들이 정교하고도 아름다운 불교 굴각상 115굴, 334보살상이 있다. 이 불상들은 송나라의 조형예술을 대표하는 걸작품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특히 강남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고대석굴예술을 보여주고 있어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고 한다. 이 모든 불상들은 신비에 가까울 정도로 잘 조각되어 있었으나 문화대혁명 시기에 많이 파손되었다고 한다.

이 불상들 중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송대의 것인 미륵좌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 눈에는 별로라고 생각되었다. 우선 배가 너무 많이 나왔다. 뚱뚱한 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해서다. 그런데도 중국 사람들에게는 가장 인기가 있는 불상이라고 한다. 그것은 가치관과 세계관의 차이일 것이다. 그저 마음 좋고 게으르면서 맛있는 것을 잘 먹을 수만 있다면 이승이 바로 극락이라는 의미일 게다. 이 미륵불상은 경북지방의 지방소주인 금복주의 인물상을 많이 닮았다고 느껴진다.  

 

  향장목으로 만든 천왕전 불상

 

비래봉을 지나면 천왕전을 만난다. 천왕전의 불상은 향장목이라는 나무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다른 나무들은 세월이 가면 속이 비어 큰 불상 같은 것을 조각하지 못하는데 이 향장목은 다르다고 한다.

 

 

향장목

 

속이 꽉 차서 조각을 잘 할 수가 있다고 한다. 항주의 가로수는 대부분 향장목이다. 이유인즉 나무도 고급이지만 향장목에서 나는 향기가 독특하기 때문에 모기들이 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항주에는 밤에도 모기가 없었다.

 

여기까지 설명을 듣고 있는데 누가 내 어깨를 툭 친다. 바로 우리 2단 가이드였다. 길 잃은 어린양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표정이다. 길 잃은 이유를 알고 보니 여행사에서 따라온 간호사가 매일 차를 바꾸어서 타고 있단다. 어제는 1단 차를 타고 오늘은 2단 내일은 3단 순으로 타는데 이를 알지 못하고 그만 머리 숫자가 맞는 관계로 떠난 것이다.

 

영은사 중간까지 3단 가이드의 설명으로 안내를 받았다. 3단 가이드는 비교적 젊은 조선족 총각이라고 한다. 그런대로 설명을 잘 하는 편인데도 우리 2단 가이드와는 수준차가 많이 났다. 발음의 부정확성이나, 표정, 기초적인 지식이나 일반상식, 이야기의 서술방식에서 두 수쯤이나 떨어진다. 이 두 사람이 비교가 된 관계로 내 머리 속에 잠시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다. 교사의 지식과 자질, 그리고 설명 즉 교수방법이 학생들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한 번 더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우리 2단은 벌써 대웅전 관람을 끝내고 나한전으로 가는 길이었다. 어쩔 수 없이 대웅전 내부는 보지 못하고 따라갈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호기심 많은 나는 얼른 대웅전으로 달려갔다. 대웅전은 높이는 33.6m에 이르는 웅장한 건물이다.

 

영은사 대웅보전 앞에서

 

그리고 잠깐 그 안을 살펴볼 수가 있었다. 대웅전 내에 황금색으로 만들어진 석가모니좌상이 있다. 이 불상의 높이는 자그마치 24.8m나 된다. 이는 세계 최대의 여래불상이라고 한다. 여래불상은 1956년에 절강미술대학 교수와 예술인들이 합작해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이 불상의 소재는 향나무 24 개를 따로 조각하여  붙였다고 한다. 불상을 도금하는 데만 순금이 자그마치 44kg이나 들어갔다고 한다. 자세히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 단은 이미 나한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백나한(五百羅漢)을 모신 나한전은 얼마 전에 지어졌다. 그 중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 불상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라의 김교각 스님인 지장보살이다.

원래 김교각(金喬覺) 스님은 통일신라 성덕왕의 장남으로 태어나 왕위를 버리고 중국 안휘성(安徽省) 구화산(九華山)으로 들어와 수도를 했다고 한다. 서기 719년 그의 나이 24세였다. 99세까지 살았다. 스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 자신의 시신을 석함에 넣고 3년 후에도 썩지 않으면 등신불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 스님이 열반에 든 후 산이 울면서 허물어졌고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났다고 한다.

아직도 구화산에는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이 지장보살로 모셔져 있다. 그리고 매년 음력 7월 30일은 김교각 스님 탄생일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김교각 스님

 

여기서 통일신라의 역사를 잠깐 짚고 넘어가자.

29대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인 문명왕후 사이에 태어난 왕이 삼국을 통일한 제30대 문무왕(661-681, 재위 20년)이다.

문무왕의 아들이 31대 신문왕(681-692, 재위 11년)이고, 신문왕의 장남이 32대 효소왕(692-702, 재위 10년)이다. 효소왕은 아들이 없는 관계로 동생인 33대 성덕왕(702-737, 재위 35년)이 왕위를 이어 받았다. 성덕왕의 장남이 바로 김교각 스님인 것이다. 스님은 신문왕의 손자이자 문무왕의 증손자이다.

만약에 김교각 스님이 왕위를 받았으면 34대 왕이다.

그러나 동생인 34대 효성왕(737-742, 재위 5년)이 이어받았다. 이 효성왕도 후사가 없이 일찍 돌아가시자 동생인 경덕왕(742-765 ,재위 23년)이 35대왕이 되었다.

경덕왕은 삼국유사에 옥경(玉莖, 남근)의 길이가 8치(약 24cm)라고 기록되어 있는 왕으로 불국사와 석굴암,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등 신라 천 년 역사에서 최고 전성기를 구가한 왕이다.

따라서 효성왕과 경덕왕은 김교각 스님의 동복 동생이다.

 

그런데 영은사에도 김교각 스님이 지장보살로 모셔져 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도 구화산과 멀지 않은 곳이라 생전에 이곳까지 많은 가르침을 주었던 것일 거다. 이곳에서도 김교각 스님의 동상이 가장 가운데, 그리고 가장 크게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면 중국인들이 신라의 김교각 스님을 얼마나 존경했는가를 알 수가 있겠다.

 

처음 들어 갈 때는 천왕전 뒤쪽으로 갔다가 나한전을 보고나면 천왕전 앞쪽이 나온다. 이 천왕전 입구 편액이 영은사에서 가장 보고 싶은 것이었다. 역대 중국황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강희제의 친필이기 때문이다. ‘雲林禪寺(운림선사)’라고 쓰인 편액이다.

 

 강희제 친필인 운림선사

 

강희제가 남쪽 지방을 순찰하던 중 항주에 들러서 북고봉(北高峰)에 올랐는데, 구름이 자욱하고 안개가 덮인 곳에 영은사가 있는 것을 보고 이 네 글자를 생각해 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또 재미있는 이야기도 함께하고 있다.

청나라 강희제는 경치가 아름다운 항주에 자주 놀러왔다. 어느 날 영은사 주지 스님이 황제에게 현판 글씨를 부탁했다. 전날 밤 지나치게 과음을 한 황제는 ‘靈’자를 쓴다는 게 雨자를 너무 크게 쓰서 그 다음에 들어가야할 입 구(口)자 세 개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 때 강희제는 기지를 발휘하여 ‘雲’자를 크게 쓰고 말았다. 곁에서 보고 있던 주지 스님은 감히 황제에게 다시 써달라고 말은 할 수 없기에 "폐하, 여기는 영은사이옵니다"라고 살며시 말했다.

그러자 황제 대답하기를

"내 그걸 모르는 바 아니다. 나는 사찰의 이름을 쓴 것이 아니라 사찰의 풍경을 두고 편액을 쓴 것이다. 주변에 나무가 우거지고 구름이 자욱하며 안개가 덮인 곳에 영은사가 있지 않느냐?"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에 어쩔 수 없이 편액을 '운림선사'로 달게 되었다고 한다.

 

강희제다운 발상이다. 내가 아는 강희제는 충분히 이러할 수 있다고 느껴진다. 김용의 작품 중에서 강희제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 있다. 바로 ‘녹정기’ 이다. 10여 권이나 되는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가공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무협의 형식을 빌어 아주 재미 있게 그린 작품이다. 내가 보기에는 김용 작품의 최고라고 생각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강희제와 동갑내기인 환관이다. 주인공의 이름이 ‘위소보’로 기억된다. 김용은 이 작품에서 강희제를 천재성과 결단성 그리고 호전성과 예술성, 인간적인 순수성 또한 임기응변에 아주 뛰어난 황제로 그리고 있다.

 

또 예일대학 역사학과 석좌교수인 ‘조너선 스펜스’가 지은 강희제(이산, 2001, 이준갑 옮김)를 보면 이러한 점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 책은 단권으로 되어 있어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으니 관심 있는 분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여기서 강희제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을 하면 다음과 같다.

 

강희제는 중국 청나라의 제4대 황제(1661-1722, 재위 61년)로서 오늘날의 중국영토 대부분을 다 넓힌 황제다. 주원장의 명나라보다 배 이상 넓혔다. 중요한 업적으로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와 전쟁에서 이겨 네르친스크 조약(1689)을 청나라에 유리하게 맺었다. 또한 외몽골을 합병시켰고 티베트에까지 세력 판도를 넓혔다. 그리고 대만도 합병했다. 대외 무역항을 개항했고 서구의 교육, 예술, 천주교 등을 도입 장려했다. 그리고 강희제는 양쯔강 이남의 지역을 1684-1707년 사이에 6번이나 방문했다. 그때마다 드는 비용은 황제의 사재를 털어 충당했을 정도로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애쓴 황제다. 아마 이때에 항주 영은사에 와서 운림선사의 현판 글씨를 썼을 것이다.

 

현판 글씨를 바라보니 강건하면서도 부드러운 글씨다.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황제의 친필을 직접 감상한다는 것은 여행의 백미이자 한 편의 감동(感動) 그 자체인 것이다. 한 번이라도 더 보기위해 일행과 뒤쳐지면서도 보고 또 보았다.

 

 천왕전 정문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영은사를 나왔다. 영은사를 나오는 경내에는 조그마한 계곡이 있다. 특히 비가 올 때면 계곡의 물소리와 사원 전체가 안개에 쌓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고 한다. 그러나 고즈넉한 우리나라의 산사와 비교를 한다면 우선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좁은 면적에 비해 절집의 규모가 너무 크다. 그런데도 한 번 더 올 가치는 충분하다. 사람이 없는 이른 아침이나 해거름에 좋은 사람과 다정히 손잡고 비래봉의 불상들을 자세히 감상하면서 산책을 하는 것도 재미가 있겠다. 다시 한 번 영은사에 꼭 오리라 다짐을 해 본다.

 

 주차장으로 나오는데 만원인 선글라스가 어느 새 오 천원이 되어 있었다. 이제 다음 목적지인 항주의 특산물 용정차의 산지로 떠난다.

 

 

5

 

You believe that I've changed your life forever

and you're never gonna find another somebody like me

And you wish you had more than just a lifetime

to give back all I've given you and that's what you believe

 

I owe you all the sunlight in the morning

and the nights of all this loving that time can't take a way

and I owe you more than life, now more than ever

I know that it's the sweetest debt ever have to pay

 

I'm amazed when you say it's me you live for

you know that when I'm holding you your right where you belong

and my love I can't help but smile with wonder

when you tell me all I've done for you cause I've known all along

 

Cause I owe you the sunlight the morning

and the nights of all this loving that time can't take a way

I owe you more than life now more than ever

I know that it's the sweetest debt I'll ever have to pay

 

당신은 믿지요 내가 당신의 삶을 영원히 바꾸었다고
그리고 나와 같은 다른 이는 절대로 찾지 못할 거라고
그리고 당신은 바라지요 한 평생 이상의 시간이 주어지기를...
내가 당신에게 준 모든 것을 갚기 위해 그것은 당신이 믿는 것이지요

나는 당신 덕분에 아침의 햇살과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랑의 밤들을 얻게 되었어요
삶 이상의 것을 얻었어요, 당신 덕분에 어느 때보다 지금
그것은 내가 갚아 나가야 할 세상에서 가장 기분 좋은 빚이예요

난 놀라워요 당신이 사는 이유가 나라고 말할 때
내가 당신을 안고 있을 때 바로 당신은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걸 안다고
내 사랑, 난 의아해하며 미소 지을 수 밖에 없지요
내가 당신을 위해 한 모든 일을 말할 때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