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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태재부 천만궁

by 황교장 2012. 2. 19.

태재부 천만궁

-모라중학교 부장교사연수 4일차-

 

어제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고속도로로는 후쿠오카까지 갈 수가 없고, 지방도로를 이용하면 시간이 더 많이 걸려 부산으로 돌아가는 시간에 맞추기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예정보다 2시간을 당겨 7시에 출발을 하기로 했다. 5시 30분에 온천탕 문을 열자마자 제일 먼저 노천온천에 들어갔다. 머리카락이 뻣뻣해졌다. 얼은 것이다. 날씨가 영하 9도라고 한다. 워낙 목욕을 즐기는지라 일본에서 아침저녁으로 온천욕을 하였다. 아침식사를 안 한 지가 30년이 넘었는데도 일본여행 사흘 동안 한 끼도 거르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후쿠오카로 출발을 했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학생들이 등교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추운 겨울에 반바지에 긴 양말만 신고 걸어서 가고 있다. 일본은 온돌문화가 아닌 다다미 문화다. 따라서 외부 기온에 적응을 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춥게 키운다고 한다. 의도적으로 어릴 때부터 아이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반면에 우리나라 부모들은 과잉보호가 문제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가 출발하자 다행히 고속도로가 열렸다는 연락이 왔다. 2시간을 번 셈이다. 면세점을 들렸다가 태재부 천만궁으로 갔다.

 

 

이곳은 헤이안시대(平安時代,794-1185)의 학자이며 시인, 정치가인 스가와라미찌자네(菅原道真)를 신으로 모시는 신사다. 신사 입구부터 오래된 건물들과 예스런 거리 모습이 역사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차가 다니지 못하게 통제되어 있고 거리가 아주 잘 정돈되어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신사로 들어가는 문인 도리이(鳥居)가 돌로 만들어져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가 죽 이어져 있는 것이었다. 도리이는 속세와 신사의 경계가 되는 상징물이라고 한다. 원래는 주황색의 나무문이었으나 점차 돌 등 다른 재료들로도 만들기도 하였다. 성공한 사람들이 감사의 의미로 이 문을 기부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유명한 신사에는 이런 문들이 많다고 한다.

 

 

길가에 있는 상점에는 찹쌀떡 같은 것을 팔고 있는데 이것이 이곳의 특산품인 우메가에모찌(매화가지떡)다. 스가와라미찌자네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딸이 갑자기 죽자 그는 밥도 먹지 않고 밤낮으로 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이웃의 할머니가 찹쌀떡 위에 매화 가지를 얹어 준 것이 그 기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제사 때에는 우메가에모찌를 올리고 있으며 길가에 우메가에모찌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선 이유라고 한다.

 

 

신사 입구에는 소의 동상이 있다. 소가 누워서 신사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의 머리가 반질반질 윤이 나는데 소 동상의 머리를 문지르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만져서 그리된 것이라 한다. 우리의 호프 장 부장도 만지고 있다.

여기에는 숨은 이야기가 있다. 스가와라미찌자네는 다섯 살에 일본 고유의 시인 와카를 지었고, 열 살부터 한시를 완벽하게 지어내는 신동이었다고 한다. 왕의 총애를 받아 일찍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많은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56세이던 901년 우대신이라는 높은 관직에서 갑자기 다자이후의 관리로 좌천된 이후 2년 만에 세상을 뜨게 되었다. 903년 생애를 마친 스가와라의 유해를 소달구지에 싣고 가던 중 수레를 끌던 소가 지금의 텐망궁 자리에서 꼼짝을 안했다고 한다. 아무리 잡아 당겨도 소용이 없자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예정된 장소를 바꾸어 이곳에 무덤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스가와라는 학문의 신, 지성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해마다 전국에서 700만 명 정도의 참배자가 방문하고 있다. 특히 입시철이 되면 합격 기원 부적을 사기 위해 일본 전역에서 백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린다고 한다.

 

 

사원 입구에는 아름드리 녹나무가 많이 있다. 녹나무가 이렇게 크게 자라는지는 처음 알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오늘이 의식을 행하는 날이라고 한다. 가이드도 수없이 많이 이곳을 왔지만 의식을 행하는 것은 처음 본다고 한다. 이것 또한 행운이다. 아주 진지하게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본전 앞에는 오래된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스가와라는 매화나무를 아주 사랑했다고 한다. 스가와라가 죽자 그의 무덤 앞에는 그가 평소에 돌보던 매화나무의 씨가 교또에서 이곳까지 날아와서 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매화나무의 이름이 비매이고, 이 나무 앞에 있는 전각의 이름도 비매전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이 매화나무가 꽃을 피워야지 여기 있는 다른 3000여 그루의 매화나무가 꽃을 핀다고 한다. 그런데 홍매와 노란 색의 납매가 먼저 피어 있어 사실과는 조금은 차이가 있어 보였다.

 

 

 

 

 

 

납매

 

 

지금까지 나는 우리나라 매화가 일본보다 오래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일본에 와서 보니 내가 알고 있던 상식과는 많이 달랐다. 우리나라에는 호남오매, 산청삼매, 그리고 화엄사 매화가 가장 유명하다. 선암사의 무우전매(천연 기념물 제488호)가 약 600여 년이고, 백양사 고불매(古佛梅, 천연기념물 제486호)가 350여 년, 전남대학교 대명매는 400여 년이지만 이는 명나라에서 가져온 것이어서 토종 우리매가 아니다. 이 셋에다가 소쇄원 아래 담양지실마을 계당매(400여 년), 소록도 수양매(100여 년)을 합하여 ‘호남 오매’라 한다.

산청삼매로는 산천재에 있는 남명매 450여 년, 단속사터에 있는 정당매가 650여년, 남사마을에 있는 원정매는 700년 이상 되었으나 몇 년 전에 이미 죽었다. 그리고 화엄사 매화(흑매, 천연기념물 제485호) 600여 년이다. 이를 통틀어 천 년이 넘은 매화가 없는데 이곳의 비매는 천년이 넘었으니 신선한 충격이다.

 

 

본전 뒤로 돌아가면 부부장으로 명명된 녹나무 두 그루가 연리근으로 되어 있다. 이 나무는 천오백 년 이상 두 나무가 사이좋게 붙어 있어 사랑을 나눈다고 하여 신혼부부들은 반드시 이곳에 경배를 한다고 한다.

 

 

뒷뜰에는 오래된 고매들이 즐비하다. 매화가 만발할 때쯤이면 굉장한 경치가 될 것 같다. 언젠가 매화가 절정일 때 반드시 이곳에 다시 오고 싶다.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도시락으로 점식식사를 맛있게 하고는 부두로 향했다. 배는 예정시간보다 10여 분 일찍 출발했다. 올 때와 달리 돌아갈 때는 파도가 약간 거칠어 고생을 좀 한 분들도 있었지만 3박 4일의 일본 여행을 의미 있게 잘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다. 함께한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대마도

 

그동안 의식, 무의식으로 일본을 좀 멀리하고 살았다. 그런데 비록 3박 4일 짧은 기간이지만 직접 가보니 많은 생각이 달라져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가지는 본능적인 적대감은 비생산적이다. 그들을 알고, 그럼으로써 명확히 판단하고 대처해야만 불행한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는다.

 

일본 가기 전에 읽었던 이원복 교수가 쓴 ‘먼 나라 이웃나라’ 중 일본의 고민에 대한 내용이 마음에 닿아 여기에 옮기고자한다.

 

일본의 고민

1. 세계최고의 품질 그러나 비용이 너무 든다.

2. 저축하는 국민 그러나 돈이 돌지 않는다.

3. 엘리트 관료가 일본을 이끈다. 그러나 기업의 발목을 잡는 관료주의

4. 규격제품 대량생산 그러나 이제는 다품종 소량생산시대

5. 정, 경, 관의 밀착 그러나 부정부패의 고리가 되었다.

6. 회사는 가정이다. 그러나 노동시장이 경직되었다.

7. 아이토코토리-좋은 것은 기꺼이 취한다. 그러나 창의력이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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