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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백제의 수도 공주

by 황교장 2012. 3. 18.

백제의 수도 공주

-재송여자중학교 수학여행 사전답사2-

 

마곡사를 나와 공주로 가는 길은 옛길 그대로다. 고갯마루에서 보는 이곳의 풍수는 정말 십승지답다. 주변이 제법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밖에서 보면 이렇게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겠다. 차도가 새로 생기지 않았다면 좁은 계곡 외에는 이곳으로 들어올 방법이 없겠다.

다시 고속도로를 타고 조금 더 가니 공주IC가 나왔다. 도로 이정표를 따라서 공산성 방향으로 3km 정도 가니 멋진 한옥마을이 나왔다. 직감으로 이곳이 숙소로 예약된 공주한옥마을임을 알겠다. 한옥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한옥마을 관계자의 안내를 받으면서 숙박시설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공주시에서 운영하는 현대식 한옥마을이다. 단체 숙박동 6동 37객실과 식당 편의점 저잣거리 등이 있다. 인상적인 것은 아궁이에 장작을 땐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란 나로서는 너무도 반가웠다.

아궁이로 때는 온돌은 원적외선이 발산하여 감기에 잘 걸리지 않고, 땀과 노폐물을 몸 밖으로 배출하여 각종 질병을 치료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내 기억 속에 어린 시절 감기로 고생한 기억이 없이 건강하게 자랐다. 특히 아랫목은 뜨겁고 윗목은 시원하게 하여 머리를 맑게 한다고 한다. 온돌이 따뜻하여 잠시 누웠더니 금방 눈이 감겨 잠이 쏟아졌다. 단 10분이라도 자고 싶었지만 일정에 쫒겨 그럴 수 없어 아쉬웠다.

 

 

한옥마을을 나와 마지막날 점심식사를 할 예정인 식당을 답사했다. 식당주인도 친절하고 시설도 괜찮아 보였다. 식당을 나와 다음 일정인 무령왕릉을 보려고 했는데 수리 중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수학여행 전까지는 수리가 마무리된다고 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공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은 몇 번이나 가 본 적이 있어 답사는 생략하였다.

 

여기서 공주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를 하고자 한다.

공주는 택리지에 의하면 ‘고을 북쪽에 조그만 산 하나가 강가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모양이 公 자와 같아서 이 고을 이름을 공주라고 했다’ 한다.

 

공주는 백제의 수도 중 한 곳이다. 백제는 서울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일대로 추정되는 하남 위례성이 첫 수도이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를 했다. 따라서 문주왕(475-477)이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여 동성왕(479-501), 무령왕(501-523)을 거쳐 성왕(523-554)때인 528년 사비(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약 53년간 백제의 수도였다.

 

특히 무령왕은 왕권과 귀족 사이에 세력의 균형을 이루어 정국을 안정시키고 군사력을 회복시켰다. 또한 중국 남조의 양에 사신을 파견 ‘영동대장군’의 작위도 받고 전국 22담로를 설치하여 왕족을 파견했다. 이러한 왕의 무덤이 무령왕릉이다.

 

“무령왕릉은 1971년 송산리 고분군의 배수로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래서 고구려나 백제의 다른 무덤과는 달리 완전한 형태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중국 남조의 영향을 크게 받아 연꽃 등 우아하고 화려한 백제 특유의 무늬를 새긴 벽돌로 무덤 내부를 쌓았다.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과 왕비임을 알리는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무덤이기도 하다. 석수(石獸), 토지매지권(土地買地券), 양나라의 철전인 오수전 외에 왕과 왕비의 장신구와 금관장식, 귀고리, 팔지 등 3,000여점의 부장품이 출토되어 백제 미술의 귀족적 특성을 알 수 있는 대표적 무덤이다.”  -EBS 한국사능력검정시험 1급-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실'에 전시 되어 있다.

 

여기서 또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무령왕릉 지석〔매지권〕이다.

 “공주 무녕왕릉에서 나온 6세기 전반 경 백제의 매지권은 중국의 도교사상에 기인한 것으로, 묘지를 영조할 때 돈을 함께 넣어 그 돈으로 지신에게 묘소로 쓸 땅을 매입하는 형식을 밟아 그 증서에 해당하는 문권을 작성하고 이것을 돌에 새겨서 무덤구덩이에 함께 넣는다. 곧 무덤을 쓴 뒤에라도 아무도 이 땅을 침범하지 못하며 또 유해의 안호를 신에게 부탁한다는 사상에서 나온 중국의 민속이다. 무녕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의 매지권 2개가 발견되었다. 글씨는 육조풍의 행서(行書)이고 중국의 견고한 조형구조를 유연한 필획으로 묶어 자연스러움을 살려낸 일품으로 백제의 높은 예술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송호상 한국사-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무령왕릉의 목관이다. 이 목관에 사용된 나무가 바로 금송으로 밝혀졌다는 점이다.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금송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삼나무 녹나무는 배를 만들고, 편백나무로는 궁궐을 짓고, 금송은 시신을 감싸는 관재로 쓴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송의 특성은 습기에 강하고 잘 썩지 않는다. 무령왕릉의 목관으로 사용된 나무는 지름이 150cm 나이는 약 300년으로 추증되고 있다. 금송은 일본 남부에서만 자라는데 일본말로는 고우야마끼(고야전)이라고 한다. 마끼란 큰 나무를 뜻한다.

 

즉 고야전이란 고야라는 산에 자라는 큰 나무라는 뜻이다. ‘고야산’이란 명칭에서 ‘고야’는 우리식 한자음이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우리말 ‘고야’와 일본식 발음인 ‘다카노’를 혼용하고 있다고 한다. 무령왕의 관재는 고야산에서 생산된 금송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일본과 백제와의 관계가 아주 밀접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고 또한 어릴 적 무령왕이 일본에서 자랐다는 설을 뒷받침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공주는 고려 현종(제8대, 재위 1009-1031)이 거란의 침입으로 1011년 1월 공주를 거쳐 나주에서 피난을 하고는 상경하는 도중에 다시 공주에 들러 5박6일을 머무르게 되었다. 당시 공주 절도사였던 김은부의 딸 셋을 왕비로 취함으로써(원성태후, 원혜태후, 원평왕후) 이후 그 사이에서 세 임금(덕종, 정종, 문종)과 두 왕비(효사왕후, 인평왕후)가 배출되었다. 대각국사 의천은 공주절도사 김은부의 외손자이다.

 

그리고 조선 인조(16대, 재위 1623-1649)는 1624년 이괄의 난으로 공주에 피란하여 역시 5박 6일 동안 공주에 머물렀다. 그리고 지금의 공주는 야구선수 박찬호의 고향이기도 하다.

 

공주 답사를 마치고 부산을 향해 출발을 했다. 해가 질 때까지 남아 있는 시간은 약 1시간 반 정도 남아 있다. 그래서 올 때와 달리 논산을 거쳐 익산 삼례를 지나 진안 휴게소에서 잠깐 쉬었다. 휴게소가 진안 마이산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마침 석양이 넘어가고 있다. 지는 해에 물든 마이산은 이름 그대로 말 귀처럼 보였다.

 

 

다시 출발하여 대전 통영 간 고속도로에 접속을 하여 생초IC에서 내려 이곳의 명물인 어탕국수를 맛있게 먹고는 밤 11시 경에 학교에 도착했다.

 

하루 동안 다녀오기에는 시간상으로 힘든 일정이었다. 하지만 고생한 만큼 우리 학생들에게는 유익할 것이라고 믿는다. 공주는 부산에서는 잘 가기 힘든 곳이다. 그러니 사전 답사는 꼭 필요하다. 답사를 철저히 하면 준비를 소홀히 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인재를 예방할 수 있다.

요즈음 학생들은 수학여행이라고 하면 재미있는 놀이공원을 더 좋아한다. 물론 재미 있는 놀이공원의 경험도 필요하다. 그러나 수학여행이 재미만을 추구할 것은 아니다. 재미없어하는 문화유적지를 수학여행지에 꼭 넣어야 하는 이유는 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반드시 그곳을 기억하여 다시 가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한편으로는 외롭고 쓸쓸한 존재이다. 삶이 힘들고 고달플 때 이를 극복하는 방법 중 학창시절 즐거운 한때를 떠올려 그 곳으로의 여행은 일상의 고민이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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