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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담양 몽한각과 삼지내 마을

by 황교장 2012. 6. 6.

담양 몽한각과 삼지내 마을

 

여름방학 재송여중 직원연수를 위한 사전 답사를 다녀왔다. 여정은 부산을 출발, 남해고속도로 - 호남고속도로 - 창평IC - 몽한각 - 삼지마을 - 명옥헌 - 소쇄원 - 인촌생가 - 미당 서정주 문학관 - 선운사 - 도솔암 - 내소사 - 부산이었다.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하동IC로 내렸다. 연수 첫날 점심으로 하동 재첩국을 먹기 위해서다. 전라도 쪽으로 답사를 오면 으레 하동에서 재첩국을 먹는 게 습관처럼 되어 있다. 미리 해장국을 먹어두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재첩국의 맛은 여전한데 재첩의 씨알이 해가 갈수록 작아지고 있다. 남획의 영향일 것이다. 강가에 재첩을 잡기 위해 만들어 둔 간이 배에서 흘러가는 강물의 이쪽저쪽을 구경하였다. 섬진강의 풍광은 언제 보아도 강과 포구가 어우러져 있어 한 폭의 그림이다.

 

 

다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는 창평IC에서 내렸다. 명옥헌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정면에 보이는 안내판에 삼지내 마을이 멋지게 그려져 있다. 처음 들어보는 마을이어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마을 표시를 따라서 차를 몰았다. 한창 지났는데도 삼지내 마을을 찾지 못하였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몽한각(夢漢閣)으로 가는 길이라는 표지가 나왔다. 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몽한각으로 차를 몰았다. 제법 웅장한 건축물인데 막상 들어가 보려고 하니 문이 잠겨 있다. 내부를 보기 위해 언덕으로 올라가자 마침 주차하는 차에서 노인 한 분이 내리면서 안으로 들어가서 구경을 하라고 한다. 옆으로 돌아가자 쪽문이 나왔다. 노인이 문을 열어주어서 그 문으로 들어섰다. 잔디가 잘 가꾸어진 것이 비교적 관리가 잘 되어 있다.

 

 

 

노인은 이 마을에 살면서 몽한각을 관리하고 있는 분이었다. 몽한각은 재각(齋閣)이다. 즉 조상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어진 재실인 셈이다. 재각은 재실(齋室)보다 격이 한 수 높다. 안동에 가면 안동 김씨, 안동 장씨, 안동 권씨, 하회 류씨의 재각이 서로 경쟁을 하듯이 잘 지어져 있다. 이 몽한각 역시 이들 재각보다는 규모면에서는 조금 작게 보이지만 당당한 모습이 가문의 위풍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몽한각은 조선 태종(재위 1400-1418)의 5대 후손이며 양녕대군의 증손인 이서(李緖, 1482-?)를 추모하기 위하여 순조 3년(1803) 양녕대군의 후손들인 담양부사 이동야와 창평현령 이훈휘가 지은 것이다. 이서는 모반을 꾀한다는 이유로 중종 2년(1507)에 창평으로 유배되었다가 15년 만에 풀려났지만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담양에서 자손과 제자를 가르치는데 전념하였다고 한다. 몽한각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되어 있다.

몽한각(夢漢閣)의 현판을 처음 보았을 때 ‘꿈에서 한(漢) 나라를 생각한다’라는 뜻인가 하고 추측을 해보았다. 그런데 몽한각은 이서가 유배 시절 지은 시 구절 “分明今夜夢 飛渡漢江波(분명금야몽 비도한강파, 어젯밤 꿈은 한강수를 건너리라)”에서 ‘夢’자와 ‘漢’자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노인은 양녕대군의 14대손이라고 하면서 매년 양녕대군의 제사에 서울로 간다고 한다. 서울에 올라가면 나름대로 문중에서 대접을 받는데에는 이렇게 멋지고 오래된 재각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양녕대군은 부인이 7명인데 제사를 지낼 때 7명의 부인도 같이 지낸다고 한다. 몽한각에서 바라보면 정면에 잘 생긴 노송이 한 그루 있다.

 

 

그런데 50여 년 전에 태풍에 한 쪽 가지가 부러져 멋이 그전만큼은 못하다고 하면서 아쉬워했다.

노인분에게 좋은 설명 감사하다는 인사를 나누고는 다시 차를 몰고 나가자 미처 발견하지 못한 삼지내 마을이 나타났다.

 

2007년 12월 1일,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슬로우 시티로 전남지역 네 곳이 선정되었다. 전남 완도군의 청산도, 신안군의 증도, 장흥군의 장평 유치지역, 그리고 바로 이곳 담양군의 ‘삼지내 마을’이다.

 

 

슬로우 시티는 1999년에 이탈리아 중북부의 인구 1만4천명인 작은 도시 그레베 인 키안티(Greve in Chiantti)의 당시 시장인 파울로 사투르니가 마을 사람들과 세계를 향해 '느리게 살자고' 호소한데서 비롯되었다. 슬로라는 것이 불편함이 아닌 자연에 대한 인간이 기다림이란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다. 슬로우시티는 '먹을거리야말로 인간 삶의 총체적 부분' 이라는 판단에서 지역 사회의 정체성을 찾고 도시의 문화를 바꾸자는 운동으로 확대된 것이다.

‘Slow’는 단순히 ‘Fast’의 반대가 아니라 환경, 자연, 시간, 계절은 물론 우리 자신을 존중하며 느긋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슬로우 시티의 슬로건은 한가롭게 거닐기, 듣기, 권태롭기, 꿈꾸기, 기다리기, 마음의 고향 찾기 등 '느리지만 행복한 삶'이다.

결국 슬로우 시티란 바쁜 현대인에게 마음의 안정과 여유를 줄 수 있는 곳을 말하는데 삼지내 마을은 그에 걸맞게 무척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느림의 미학을 간직한 길이라는 싸목싸목길-‘싸목싸목’은 ‘천천히’의 토속어-을 천천히 거닐면 아직도 수 세기 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돌담길이 나타난다. 돌담 위로 붉은 빛의 찔레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유월의 햇살은 따가웠지만 맑은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고 있어서 천천히 걷다보면 말 그대로 시간이 천천히 흐를 것 같다.

 

삼지내의 현재 행정구역 명칭은 삼천리이다. 삼천(三川)이란 월봉산에서 시작한 월봉천(月峰川)과 운암천(雲岩川) 그리고 유천(柳川)이다. 이들 세 갈래 하천물이 모인다고 해서 삼지천이 되었고, 삼지천이 줄어 삼천리가 된 것이다. 삼지내 마을의 풍수를 보면 좌청룡은 월봉산, 남주작은 국수봉이다. 그리고 봉황이 날개를 펴 감싸 안은 형국인 봉황포란형이라고 전해진다.

주변 산세에 둘러싸인 들 한가운데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봉황포란형으로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된다.

 

이 마을에는 100년 가까이 된 전통가옥 13채와 300년 전 쌓은 담장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들 옛 담장과 고가는 현재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마을 전체의 돌담길은 등록문화재이고, 고재선 가옥, 고광표 가옥, 고정주 가옥은 전남 민속자료이다. 이들 외에 남극루가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마을의 대표 가옥인 고재선 가옥으로 들어갔다. 전남민속자료 5호로 지정된 이 집은 대문채와 사랑채, 안채, 헛간채 등 전통적인 상류 주택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1915년경에 원래 가옥이 있던 자리에 다시 지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가 담으로 막혀 있고, 중문이 놓여 있다. 단순히 열린 하나의 공간이라기보다 대문을 열고 들어간 후 다시 중문을 통해 다른 공간이 독립적으로 되어 있다. 안채는 일자형의 기와집으로 전통 주거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사랑 마당의 동북쪽으로는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었다.

‘태당(苔塘)이란 이름의 이 연못은 이집의 전성기 때에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연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물도 말라버리고 꽃도 물고기도 없다. 연못 한가운데 오죽(烏竹)만 쓸쓸이 서 있다.

 

 

역시 집은 사람이 살아야 한다. 특히 목조건물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퇴색되기 마련이다. 이 집도 안동의 농암종택과 같이 한옥 체험장으로 사용했으면 한다. 고재선 가옥을 보고 나오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방송국에서 나와 촬영을 하고 있다. 내가 지나가자 잠깐 인터뷰를 좀 하자고 한다. 이 마을에서 고쳐야 할 점이 없는지를 물어본다. 먼저 옛 전통을 잘 살리기 위해서는 슬레이트로 된 집은 초가나 기와, 아니면 띠풀로 새롭게 고쳐야하고 고재선 가옥은 한옥체험장으로 사용하여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느 방송사인지 물어보자 광주지역 방송인 KBC라고 한다.

 

삼지내 마을에 이처럼 전통이 남아있는 데에는 유래가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순절한 제봉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후손들이 대대로 이어져온 마을이다.

고경명은 두 아들 고종후, 고인후와 함께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전투에서 고경명, 고인후 부자는 장렬히 전사했다. 고경명의 시신은 화순현 흑토평에 묻히게 되었고, 고인후의 시신은 창평현 수곡리에 묻히게 되었다. 고인후가 창평에 묻히게 된 것은 처가인 함풍 이씨가 창평에 세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인후는 32세의 나이로 죽었지만 함풍 이씨와의 사이에 이미 네 아들이 있었다. 이들이 창평에 터를 잡고 살면서 장흥 고씨들이 퍼지게 되었다. 창평 삼지내 마을에 살고 있는 고씨들은 모두 고인후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역시 뼈대가 있는 집안의 후손들은 오래 간다.  

'조용헌의 명문가'에 의하면 

"호남의 원로들이 꼽는 4대 명문집안이라 하면 하서 김인후(1510-1560)를 배출한 울산 김씨, 고봉 기대승(1527-1572)을 배출한 행주 기씨, 제봉 고경명(1533-1592)을 배출한 장흥 고씨, 송강 정철(1536-1593)을 배출한 연일 정씨 집안이다.

고씨집안은 교육, 민간 구휼, 국난 극복이라는 명문가 조건을 전방위적으로 갖춘 집안이다. 일제의 자본시장 침탈을 막기 위해 창평상회를 세워 민간대출과 생필품 보급에 힘썼고, 근대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 임진왜란 때는 3부자가 전쟁터에 나가 전사했다. 또 일제 강점기에는 또 다시 3부자가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고씨 집안에는 구한말 호남의 유명한 의병장이었던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1848-1907)과 창흥의숙을 세워 호남의 인재들을 길러냈던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1863-1933)라는 두 노선이 공존했다. 고광순은 목숨을 던져 의병을 일으켰고 고정주는 재산을 털어 학교를 세웠다. 그러면서도 서로 간에 반목 없이 공존했다. 후손으로는 고재욱 전 동아일보 사장, 고재필 전 보사부 장관, 고재청 전 국회 부의장, 고윤석 전 서울대 부총장 등이 있다."

 

삼지내 마을에는 전통 방식으로 쌀엿을 만드는 집이 여럿 있다. 조선시대 양녕대군과 함께 창평에 온 궁녀들에 의해 전수된 이 지역 고유의 쌀엿은 바삭해서 입안에 붙지 않고, 먹고 나서도 찌꺼기가 남지 않는다고 한다. 쌀엿만큼이나 한과와 죽염장류도 유명하다. 특히 죽염장류는 담양의 명물 대나무를 이용하는 것으로 농림부로부터 전통식품 인증을 받았다.

 

전통 한옥 민박이 있어 언젠가 시간이 나면 이곳에서 며칠 머무르면서 슬로우 시티의 진수를 맛보고 싶다. 여유를 가지고 이곳 특산품을 맛보고 싶었지만 바쁜 답사 일정으로 다음 여정인 명옥헌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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