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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담양 소쇄원

by 황교장 2012. 6. 9.

담양 소쇄원

 

명옥헌원림에서 소쇄원으로 가는 길은 광주호를 끼고 돌아 주변의 풍광이 아름답다. 소쇄원 주차장에는 차가 벌써 만원에 가깝다. 소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매표소가 생겼다. 입장료 천원을 받고 있다. 아직 명옥헌은 인적이 없어 입장료도 없었는데 이곳 소쇄원은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전에 왔을 때는 입장료도 사람들도 그의 없었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담양 소쇄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원림(園林)으로 민간 최고의 정원이다. 소쇄원(瀟灑園)의 소(瀟)는 ‘빗소리 소’나 ‘물 맑고 깊을 소’, 쇄(灑)는 ‘깨끗할 쇄’라는 비교적 어려운 한자를 쓴다. 즉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다. 이 말은 제(齊) 나라 시대의 공치규(孔稚圭)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며 ‘씻은 듯이 맑고 깨끗하여 홍진을 뛰어넘는 기상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소쇄원은 조선 전기의 문신 양산보(1503-1557)가 조성했다. 양산보는 15세 되던 1517년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정암 조광조(趙光租,1482-1519)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 2년 뒤 스승 조광조가 대사헌으로 있을 때 자기 문하의 신진사류를 대거 등용시킨 현량과에서 양산보는 이때 급제를 하였다. 그러나 그 해에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되는 기묘사화가 일어나 양산보는 낙향하여 이곳 창암촌으로 돌아왔다. 그해 겨울 조광조는 사약을 받아 죽었다. 그후 양산보는 두문불출하고 55세로 인생을 마칠 때까지 이곳에서 은일자적인 삶을 보냈다고 한다.

 

소쇄원을 만든 양산보는 후손에게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 것이며, 후손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훈을 남겼다고 한다.

 

 

소쇄원 입구에는 대나무들이 많이 우거져 있다. 길도 걷기 좋게 닦여져 있다. 입구를 따라 올라가면 대봉대(待鳳臺)라는 초가지붕 정자가 나온다. 대봉대는 "봉황을 맞이하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봉황은 반드시 벽오동 나무에만 앉는다. 봉황이 먹는 음식은 대나무 열매인 죽실(竹實)만 먹는다. 그리고 먹는 샘물은 동쪽 냇가의 맑고 푸른 샘물인 예천(醴泉)이라고 한다.

 

그래서 봉황이 깃을 들이고 앉을 수 있도록 대봉대의 맞은 편 담벼락에 오동나무가 심어져 있다. 대나무를 많이 심어 봉황의 먹이를 마련했으며, 봉황이 먹는 샘물은 소쇄원의 오곡문이란 곳을 넘어서면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예천인 샘물이 자리하고 있다. 봉황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곳이 바로 이곳 소쇄원인 것이다.

 

소쇄원은 "봉황처럼 귀한 손님을 맞을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하는 곳"이라고 한다. 봉황처럼 귀한 손님으로는 고경명, 김인후, 송순, 정철, 김성원, 기대승, 백광훈, 송시열 등 당대의 이름 있는 문인, 선비들이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들이 남긴 여러 시문 가운데 고경명의 유서석록과 김인후의 소쇄원 사십팔영에 소쇄원의 옛 모습이 잘 묘사되었다.

대봉대(待鳳臺)는 또한 스승이었던 조광조 같은 세상의 구원자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그의 간절한 염원이 서린 명칭이라고도 한다.

 

 

소쇄원의 담장에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는 소쇄처사 양공지려(瀟灑處士 梁公之廬)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다리를 건너면 제월당이 나온다. 마침 지나가는 소나기를 피하느라 제월당 마루에는 젊은 청춘 남녀가 쌍쌍이 앉아 있다. 그 중 한 쌍은 남자가 여자의 허벅다리를 베게 삼아 누워 있다. 내가 가도 아무렇지도 않게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제월당의 벽면에 걸려있는 제액(題額)을 보면 호남의 대표적인 유학자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시가 걸려 있고 그 옆에는 송강 정철, 석천 임억령, 제봉 고경명 등의 시가 걸려 있다. 제월당(霽月堂)은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 이라는 뜻으로 주인이 거처하면서 학문에 몰두하는 공간이다. 제월당 현판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직접 쓴 글씨라고 전해진다.

 

 

제월당 주변과 광풍각으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다양한 나무들이 심겨 있다. 이 나무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건강과 무병장수(無病長壽)의 의미에서 심어졌다고 하는 살구나무, 사철 변하지 않는 효(孝)를 상징하는 동백나무, 자손의 번성함을 의미하는 산수유, 무릉도원을 상징하는 복숭아, 귀신의 범접을 막아준다는 배롱나무, 집안의 결속을 상징하는 석류나무, 우애의 상징인 앵두나무 등이 심어져 있다. 그리고 회화나무가 심겨 있다.

회화나무는 인생 일장춘몽이라는 남가일몽의 고사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집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한다고 해서 학자수 또한 상서롭다는 의미의 길상목(吉祥木)으로도 불린다.

 

 

소쇄원의 제일 중심지에는 광풍각이 있다. 광풍각(光風閣)은 이곳을 찾는 손님들에게 그 공간을 이용하도록 내주었다고 한다. 광풍각은 송나라의 명필이었던 황정견이 주무숙(주돈이)의 사람됨을 가르켜 흉회쇄락 여광풍제월(胸懷灑落 如光風霽月, 가슴에 품은 뜻이 밝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맑은 날의 달빛과도 같네)라고 한데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광풍각에 앉아서 주변 풍광을 보니 평화롭고 고요하여 절로 잠이 왔다. 새벽부터 일어나 장시간 운전을 하고 돌아다녔으니 피곤 할 수밖에 없었다. 광풍각 뒤 쪽에 약간 높은 마루에는 사람 한 몸 누울 만큼의 공간이 있다. 그곳에 누우니 내 몸과 딱 맞았다. 팔베개를 하자 저절로 잠이 들었다. 낮잠 한 잠 잘 자고나니 맑은 정신이 들었다. 간간 뿌리던 비도 그새 그쳐 있었다.

 

소쇄공 양산보는 벼슬의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가 좋아했던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항상 옆에 두고서 학문을 수련하고 의와 충을 닦았다고 한다. 귀거래사 구절을 떠올리면서 선운사로 향했다.

 

귀거래사(歸去來辭) - 도연명 作

歸去來兮 (귀거래혜) 자, 돌아가자.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奚惆悵而獨悲 (해추창이독비) 어찌 슬퍼하여 서러워만 할 것인가.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 없음을 깨달았다.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앞으로 바른 길을 좇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實迷塗其未遠 (실미도기미원) 내가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그리 멀지 않았다.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이제는 깨달아 바른 길을 찾았고, 지난날의 벼슬살이가 그릇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舟遙遙以輕颺 (주요요이경양)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바람은 한들한들 가볍게 흔들리고,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길손에게 고향이 예서 얼마나 머냐 물어 보며,

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새벽빛이 희미한 것을 한스러워한다.

乃瞻衡宇 (내첨형우) 마침내 저 멀리 우리 집 대문과 처마가 보이자

載欣載奔 (재흔재분) 기쁜 마음에 급히 뛰어갔다.

僮僕歡迎 (동복환영) 머슴아이 길에 나와 나를 반기고

稚子候門 (치자후문) 어린 것들의 대문에서 손 흔들어 나를 맞는다.

三徑就荒 (삼경취황) 뜰 안의 세 갈래 작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松菊猶存 (송국유존)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꿋꿋하다.

携幼入室 (휴유입실) 어린 놈 손 잡고 방에 들어오니,

有酒盈樽 (유주영준) 언제 빚었는지 항아리엔 향기로운 술이 가득,

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술단지 끌어당겨 나 스스로 잔에 따라 마시며,

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뜰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倚南窓以寄傲 (의남창이기오) 남쪽 창가에 기대어 마냥 의기 양양해하니,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작은 집이지만 이 얼마나 편한가.

園日涉以成趣 (원일섭이성취) 날마다 동산을 거닐며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門雖設而常關 (문수설이상관) 문이야 달아 놓았지만 찾아오는 이 없어 항상 닫혀 있다.

策扶老以流憩 (책부노이류게)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하며 발길 멎는 대로 쉬다가,

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때때로 머리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날기에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影翳翳以將入 (영예예이장입) 저녁빛이 어두워지며 서산에 해가 지려 하는데,

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고 있다.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왔노라.

請息交以絶遊 (청식교이절유) 세상과 사귀지 않고 속세와 단절된 생활을 하겠다.

世與我而相違 (세여아이상위) 세상과 나는 서로 인연을 끊었으니,

復駕言兮焉求 (복가언혜언구)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친척들과 정담을 나누며 즐거워하고,

樂琴書以消憂 (낙금서이소우)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래련다.

農人告余以春及 (농인고여이춘급) 농부가 내게 찾아와 봄이 왔다고 일러 주니,

將有事於西疇 (장유사어서주) 앞으로는 서쪽 밭에 나가 밭을 갈련다.

或命巾車 (혹명건차) 혹은 장식한 수레를 부르고,

或棹孤舟 (혹도고주) 혹은 한 척의 배를 저어

旣窈窕以尋壑 (기요조이심학) 깊은 골짜기의 시냇물을 찾아가고

亦崎嶇而經丘 (역기구이경구) 험한 산을 넘어 언덕을 지나가리라.

木欣欣以向榮 (목흔흔이향영) 나무들은 즐거운 듯 생기있게 자라고,

泉涓涓而始流 (천연연이시류) 샘물은 졸졸 솟아 흐른다.

善萬物之得時 (선만물지득시) 만물이 때를 얻어 즐거워하는 것을 부러워하며,

感吾生之行休 (감오생지행휴) 나의 생이 머지 않았음을 느낀다.

已矣乎 (이의호) 아, 인제 모든 것이 끝이로다!

寓形宇內復幾時 (우형우내복기시)이 몸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이 그 얼마이리.

曷不委心任去留 (갈불위심임거류) 어찌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으며.

胡爲乎遑遑欲何之 (호위호황황욕하지) 이제 새삼 초조하고 황망스런 마음으로 무엇을 욕심낼 것인가

富貴非吾願 (부귀비오원) 돈도 지위도 바라지 않고,

帝鄕不可期 (제향불가기) 죽어 신선이 사는 나라에 태어날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懷良辰以孤往(회양진이고왕) 좋은 때라 생각되면 혼자 거닐고,

或植杖而耘耔(혹식장이운자) 때로는 지팡이 세워 놓고 김을 매기도 한다.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聊乘化以歸盡 (요승화이귀진)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하는 대로 돌아가니,

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복해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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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노야  세노야 

- 고은 작시, 양희은 노래 

 

세노야  세노야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산과 바다에 우리가 가네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저산에 주고
슬픈 일이면 내가받네


세노야 세노야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산과 바다에 우리가 가네


세노야 세노야
기쁜일이면 바다에 주고
슬픈일이면 님에게 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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