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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선운사와 도솔암

by 황교장 2012. 6. 17.

선운사와 도솔암

 

  아침 일찍 일어나 선운사로 향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매표소에 표를 팔고 있다. 일요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 걷다보면 오른쪽 숲 속에 잘 단장된 부도밭이 나온다. 이 부도밭에 추사 김정희의 백파율사비가 있다. 전에 올 때는 남포오석으로 된 비가 이곳에 있었는데 현재는 약간 작은 모형을 만들어 원래 있던 자리에 세워 놓았다. 원비는 1998년 선운사 성보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선운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비문의 제목은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다. 추사가 백파율사의 업적을 찬양한 선운사 백파율사비는 추사의 글씨체 연구와 백파율사의 업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백파율사는 오랫동안 억불 정책의 영향으로 인하여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조선 불교계를 다시 꽃피우게 한 화엄종의 종주이다. 선운사 백파율사비는 평소 백파와 교유하며 사상적 논쟁을 벌였던 추사가 1858년에 직접 비문을 짓고 비명을 썼다. 추사는 비문에서 백파율사를 “가난해서 송곳을 꽂을 땅도 가지지 못하였으나 기운은 수미산도 누를 만하다”라고 표현했다. 이는 백파의 대기대용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다. 대기(大機)는 마음의 청정함이고, 대용(大用)은 마음의 광명이다.

 

 

 

  부도밭에서 선운사 천왕문에 이르는 도솔천은 아침햇살을 받아 계곡물에 반영된 오래된 나무들과 어울려 선경의 경치를 보여준다.

 

 

천왕문에 들어서면 먼저 만나는 건물이 만세루이다. 만세루를 지나면 대웅전(보물 제290호)이 나온다.

 

 

 

선운사 대웅전은 우리나라 어느 대웅전보다 작지 않는 규모를 자랑한다. 조선 전기에 보이는 매우 간결한 모습과 조선 후기의 장식적인 경향의 중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안쪽 우물천장의 단청 벽화는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대웅전 건물은 전체적으로 조선 중기의 뛰어난 건축 기술과 조형미를 함께 지녔다는 평을 받는다.

 

  대웅전 뒤쪽에는 울창한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184호)이 있다. 수령이 500년에 달하는 동백나무 3,000여 그루가 있다. 이는 동백열매를 따기 위한 것과 산불로 인한 절의 화재를 막기 위해 심었다고 한다. 꽃이 만개하는 봄이면 사찰 뒤로 꽃 병풍을 펼쳐 놓은 듯한 장관을 이룬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동백꽃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선운사 동백꽃/김용택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특히 눈 내리는 날에 붉은 꽃송이를 피워내는 선운사 동백꽃의 고아한 자태가 제일 좋다고 한다.

 

  선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검단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고 검단선사가 창건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선운사터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선사가 이 용을 몰아내고 선운사를 세웠다. 못을 메우는 과정도 특이하다. 당시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검단선사는 도력으로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을 씻은 듯이 낫게 해 주었다. 눈병 걸린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선운사의 선운(禪雲)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는 의미라 한다.

 

  선운사에 와서 본절만 보고 가면 반밖에 보지 못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암자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암자가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이다. 암자도 좋지만 암자에 이르는 길이 단연 최고다. 이곳에 올 때마다 마라톤 연습 삼아 뛰어서 도솔암까지 가려고 했는데 매번 주님 때문에 실패를 했다. 이번에는 며칠 전 테니스를 하다가 종아리 근육을 다쳐 뛰지 못했다. 뛰기에도 좋지만 걷기에도 적당한 거리다.

 

 

 

  계곡을 따라 가다 보니 새롭게 숲속으로 조성된 길이 나타났다. 도솔암이 커져 차가 많이 다니기 때문에 숲속에 새롭게 탐방로를 낸 것이다. 그런데 차가 다니지 않는 이른 새벽에는 찻길이 더 운치가 있다. 아직 포장을 하지 않은 흙길 그대로라서 더 좋다.

 

 

 

  도솔암으로 가는 숲속에는 산딸나무꽃과 때죽나무 꽃이 피어 있다. 이곳 선운사 인근에는 동백꽃 못지않게 아름다운 꽃이 있는데, 바로 꽃무릇이다. 이 숲은 꽃무릇 자생지이다. 꽃무릇은 수선화과에 속하는 다년생초이다. 돌밭 모래땅을 좋아한다고 하여 석산(石蒜, 돌마늘)이라고도 부른다. 상사화처럼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하여 상사화라고 잘못 불리는 경우도 있다. 우선 상사화와 꽃무릇은 꽃 색깔이 다르다. 상사화는 붉노랑상사화, 진노랑상사화, 위도상사화, 제주도상사화 등 여러 종류가 있으며 꽃 색깔과 꽃 피는 시기가 약간씩 다르다. 그리고 상사화는 봄에 잎이 돋았다가 진 후 여름에 꽃이 핀다. 꽃무릇은 9월 중순께 꽃이 먼저 피었다가 시든 후 잎이 돋는다.

 

 

  꽃무릇은 이곳 선운사,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 장성 백양사, 하동 쌍계사가 유명하다. 꽃무릇이 절집에 많은 이유는 알뿌리에 독성이 많아서라고 한다. 탱화를 그릴 때나 불경을 만들어 묶을 때 풀에다가 독성이 강한 뿌리를 넣어서 만들면 좀이 슬거나 벌레가 먹지 않는다고 한다. 즉 천연방부제다. 보통 추석 전후면 선운사 도솔천 주변에 피어 장관을 이룬다.

 

 

 

  도솔암을 지나쳐 곧장 내원궁으로 올라갔다. 4월 초파일이 얼마 전이라서 올라가는 길에 연등이 걸려 있다. 이 길은 오르막 바위산이라 제법 힘이 든다. 하지만 이른 아침에 맑은 공기를 마시고 걸으니 어느 새 내원궁에 도착했다.

 

  나는 불교신자가 아니다. 그런데 십 수 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 아침 햇살에 비친 금동지장보살좌상이 하도 장엄하여 나도 모르게 합장을 한 곳이다.

 

금동지장보살좌상은 청동 불상 표면에 도금한 불상으로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두건을 쓴 지장보살의 모습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였던 것으로 현존하는 많은 고려불화에서 그 예를 살펴볼 수 있다. 오른손은 가슴 부분에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품인(中品印)을 취하고 왼손은 가슴과 배 중간쯤에 들어 법륜(法輪)을 잡고 있다. 이는 육도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로서 보주(寶珠)ㆍ석장(錫杖)ㆍ법륜 등의 지물을 들고 있는 지장보살의 일반적인 특성을 표현한 것이다. 이 보살상은 고려 후기의 불상양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우아하고 세련된 당대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가 받는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부처가 입멸한 뒤 미륵부처가 출현할 때까지 즉 56억 7천만년동안 중생을 제도할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억압받는 자, 죽어가는 자, 나쁜 꿈에 시달리는 자 등의 구원자로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벌을 받게 된 모든 사자(死者)의 영혼을 구제할 때까지 자신의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지장보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먼 옛날 18세의 꽃다운 소녀가 살았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와 살았다. 그런데 엄마는 불교를 비방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소녀는 남겨진 재산을 모두 팔아 음식과 옷 등을 마련하여 엄마의 재를 지내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날 따라 불쌍한 사람이 많이 나타났다. 소녀는 그들이 달라는 대로 다 주었다. 그러다 보니 속옷마저 다 주고 말았다. 소녀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흙구덩이에 몸을 감추고 부처님께 기도를 하였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 불쌍한 이들을 구제하여 주소서. 저의 어머니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어머니가 태어난 곳을 알게 하여 저의 괴로움을 그치게 하소서.”

  이때 부처님이 나타나 소녀의 마음을 칭찬하고 보살이라 부르며 소원을 들어주었다. 소녀의 어머니는 무간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의 정성과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어머니뿐만 아니라 주위의 고통 받는 중생들도 함께 천당에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처럼 흙구덩이에 몸을 감추었기 때문에 땅 지(地)에 감출 장(藏)자를 써서 지장보살(地藏菩薩)이라 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 도솔암 내원궁은 기도발로도 유명한 곳이다. 우리나라 3대 지장기도처 중 하나라고 한다. 3대 지장기도처는 이곳과 철원의 심원사 그리고 북한에 한 곳이 있다고 한다. 내가 보아도 이곳이 바위 위에 세워져 있어 기도발이 세게 보인다. 언젠가 이곳에 왔을 때 밑에는 구름이 자욱하게 깔려 있고 이곳은 구름 위에 두둥실 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선계가 따로 없었다. 오늘 역시 주변의 경관이 절경이다.

  햇빛을 받은 지장보살님께 합장을 하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나한전이 나온다. 나한전 옆에는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좌상이 있다.

 

 

무려 15m나 된다. 이 마애불의 공식 명칭은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로 보물 제1200호이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재위 554-597년)이 검단선사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마애불을 조각하고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는데, 조선 영조 때 무너졌다고 한다. 아직도 그 흔적으로 머리 위에는 사각형의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고 부러진 서까래가 꽂혀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지붕만 있는 누각 형태의 목조 전실(前室)을 마련하였던 흔적으로 보인다. 불상은 낮은 부조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며, 머리에는 뾰족한 육계가 있다.

 

  이 불상의 배꼽에는 신기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 비결이 세상에 나타나면 한양이 망한다고 전해졌다. 또한 누구든지 그것을 꺼내려면 벼락에 맞아 죽는다고 했다.

 

백사십 년 전 전라감사 이서구가 어느 날 선화당에 앉아 조용히 천지의 기운을 관찰하고 있는데 매우 상서로운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말을 몰아 그곳으로 올라갔다. 상서로운 기운은 선운사 도솔암 미륵불의 배꼽에서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 배꼽을 쪼아보니 책 한 권이 나왔다. 그 순간 뇌성벽력이 치는 바람에 이서구는 그만 책을 다시 그곳에 밀어 넣고는 회로 봉해 버렸다. 이때 이서구는 ‘전라감사이서구개탁(全羅監司李書九開坼)’이라는 글자만 보았다고 한다.

 그 사건이 있은 뒤로 벼락이 무서워 아무도 꺼내보지 못했다.

 

그 후 동학의 주도 세력인 손화중이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893년 가을에 이 비결을 꺼냈다. 현세를 구원해 줄 미륵의 출현을 내세워 민심을 모으기 위해 이 비기를 꺼내간 것이다. 이후 손화중 휘하에는 만 명이 넘는 인원이 모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부처의 배꼽에 있는 것은 감실이다. 여기에는 불경이나 불화 그리고 시주자의 이름 등 조성 내력이 기록된 문서가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손화중이 꺼냈다는 비결은 지금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른다고 한다. 아마 어딘가 깊숙이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들을 떠올리면서 천천히 내려갔다. 지나치고 올라온 장사송과 진흥굴을 보고 내려왔다.

 

 

 

다시 선운사 본절로 내려와서 성보박물관을 보고 싶었지만 아직 개관을 하지 않고 있다.

 이곳 성보박물관에는 남포오석으로 된 백파율사비와 금동보살좌상(보물 제279호)이 있다.

이 금동보살좌상은 선운사 도솔암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선운사지장보살좌상과 목걸이 장식이나 밋밋한 가슴표현 등이 유사하지만, 머리가 크고 하체가 빈약하여 신체비례가 부자연스러운 점, 목이 짧고 어깨가 올라가 움츠린 듯한 자세, 간략한 장식과 형식적인 옷주름 등은 고려 보살상의 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선운사지장보살좌상과 함께 그 예가 드문 지장보살상의 하나로, 조선시대 지장신앙의 양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금동보살좌상은 일제강점기에 도난을 당한 적이 있다. 1936년 어느 여름에 일본인 두 명과 우리나라 사람 한 명이 공모하여 보살상을 훔쳐갔다. 이들은 거금을 받고 매매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런데 금동보살좌상이 소장자의 꿈에 수시로 나타나서 "나는 본래 전라도 고창 도솔산에 있었다. 어서 그곳으로 돌려 보내 달라"고 하였다. 소장자는 이상한 꿈으로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후로 병이 들고 가세가 점점 기울게 되자 꺼림칙한 마음에 보살상을 다른 이에게 넘겨 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지장보살이 소장자의 꿈에 나타났다. 이 또한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게 되자 다시 다른 이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 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이 보살상을 소장한 사람들이 겪은 일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소장하게 된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고창경찰서에 신고하여 모셔갈 것을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당시 선운사 스님들과 경찰들이 일본 히로시마로 가서 모셔오게 되었는데, 이때가 도난당한 지 2년여 만인 1938년 11월이었다고 한다.

 

  내려오는 길가의 휴게소에서 커피를 팔고 있다. 모닝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다리쉼을 하였다.

사람들이 서서히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역시 여행은, 특히 절집 구경은 이른 아침이거나 해질 무렵이 좋다. 사람이 많아지면 번잡해져서 조용한 절집의 맛을 다 느끼기가 어렵다. 아무리 좋은 절이라고 해도 한낮에 사람들이 번잡할 때 가면 그 맛이 감해진다.

  호텔에 해수온천이 있어 아침피로를 풀고는 다음 여정인 내소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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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ning Has Broken

Morning has broken like the first morning

Blackbird has spoken like the first bird

Praise for the singing, praise for the morning

Praise for the springing fresh from the world

Sweet the rain"s new fall, sunlit from heaven

Like the first dewfall on the first grass

Praise for the sweetness of the wet garden

Sprung in completeness where his feet pass

Mine is the sunlight, mine is the morning

Born of the one light Eden saw play

Praise with elation, praise every morning

God"s recreation of the new day

Morning has broken like the first morning

Blackbird has spoken like the first bird

Praise for the singing, praise for the morning

Praise for the springing fresh from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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