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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담양 명옥헌 원림

by 황교장 2012. 6. 9.

담양 명옥헌 원림

 

삼지내 마을을 나와 명옥헌 원림(鳴玉軒苑林, 명승 58호)으로 가는 길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10여 년 전에 담양 메타세쿼이아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은 1970년에 조성되었다. 메타세쿼이아는 중국이 원산지이나 미국으로 건너가 개량이 된 것이라고 한다.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은 2002년 산림청과 생명의 숲 가꾸기 국민운동본부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 숲’으로 선정한 곳이기도 하다.

 

 

명옥헌 입구에는 주차장이 새롭게 잘 정비되어 있다. 이곳에 주차를 하고는 걸어서 후산마을 한가운데를 걸어 작은 고개를 하나 넘으면 명옥헌이 나온다. 19년 전 여름에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손에 들고 이곳에 처음 찾았을 때의 감흥이 아직도 남아 있다.

고개를 넘어서는 순간 흐드러지게 핀 붉은 배롱나무 꽃이 연못에 반영되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던 환상적인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다.

 

흔히 한국의 3대 전통 정원으로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 부용동, 영양의 서석지를 꼽지만 이곳의 명옥헌도 앞의 세 곳에 전혀 밀리지 않는다.

 

 

명옥헌 원림은 산골짜기를 내려오는 계곡물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위 연못과 아래 연못을 바라볼 수 있도록 북서향으로 앉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계골물은 먼저 위의 연못을 채우고 다시 아래 연못을 채우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가 마치 옥이 부딪치는 소리와 같다는 의미에서 명옥헌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위 연못 위쪽에는 있는 낮은 바위에 ‘명옥헌 계축(鳴玉軒 癸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고 전해져 오는데 지금 명옥헌에 걸려 있는 현판은 이 글씨를 모각한 것이라 한다.

 

 

 

명옥헌(鳴玉軒)은 조선 중기 오희도(吳希道,1583-1623)가 자연을 벗 삼아 살던 곳으로 그의 아들 오이정(吳以井)이 명옥헌원림을 조성했다고 한다. 1300평이 넘는 넓은 뜰에 아담한 정자를 짓고 건물 앞뒤에는 네모난 연못을 파고 주위에 배롱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등을 심었다. 우리나라의 옛 연못은 대부분이 네모난 연못에 가운데 둥근 섬이 있다.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사상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한다.

 

에 

 

명옥헌 정자에 올라가서 마루에 누워 19년 만에 다시 갖고 간 유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펼쳐들고 다시 한 번 읽어 보면서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정자마루에 서서 걸려 있는 현판과 편액들을 둘러 보았다. 명옥헌 계축(鳴玉軒 癸丑)이라는 현판과 삼고(三顧)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아마도 삼고는 삼고초려(三顧草廬)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조가 이곳에 사는 오희도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곳이라고 한다.

 

명옥헌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배롱나무다. 우리나라 어디든 유서 깊은 곳에는 배롱나무가 많다. 특히 경주의 서출지와 안압지에는 오래된 배롱나무가 운치를 더해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롱나무는 부산 양정의 정묘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된 배롱나무로 무려 800년이나 된 나무이다. 그런데 수십 그루가 한꺼번에 모여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은 이곳 명옥헌의 배롱나무가 최고일 것이다.

 

 

배롱나무만큼 다양한 이름을 가진 나무도 없을 것이다. 목백일홍, 간지럼나무, 파양수(怕揚樹), 자미(紫薇), 원숭이가 떨어지는 나무, 피나무, 쌀밥나무, 바람나무, 선비나무 등으로 불린다.

배롱나무는 대갓집 안채에는 절대 심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나무줄기의 매끄러움 때문에 여인의 나신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다. 즉 여인들이 벗고 있는 형상이어서 바람이 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절 마당이나 선비들이 기거하는 앞마당에는 많이 심었다.

절 마당에 많이 심는 것은 배롱나무가 껍질을 다 벗어 버리듯 스님들 또한 세상의 번뇌를 벗어버리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라는 의미이다.

 

선비들이 생활하는 서원이나 향교에 심는 것은 배롱나무가 껍질 없이 벗고 있는 것처럼 선비들도 엉큼하게 감추지 말고 모든 생각과 행동을 청렴결백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라 한다. 오래된 서원이나  정자에 배롱나무가 많은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배롱나무 꽃은 ‘못난이꽃’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속설이 있다.

평생 바람만 피우던 미운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남편의 묘 옆에 배롱나무를 심어준다는 것이다,

배롱나무 꽃은 향기가 없다.  더운 한 여름에 향기도 없이 100일 동안 질리게 피어 있다는 의미다. 우리 속담에 여름 한 철은 ‘첩을 팔아서 부채를 산다’라는 말이 있다. 더운 여름에 사랑하는 첩도 싫어서 이를 팔아 시원한 부채를 산다는 의미다. 그런데 바람둥이 남편이 죽어서도 향기도 없는 여자와 한여름 백일 동안 묘 옆에서 같이 질리게 피어 괴로움을 당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백일홍은 질리는 꽃이 아니라 ‘가슴 아픈 사랑의 꽃’이기도 하다.

옛날 어느 바닷가의 한적한 마을에 목이 세 개 달린 이무기가 나타나 매년 처녀 한 명씩을 제물로 받아갔다. 마지막으로 마을에서 가장 아름답고 착한 처녀의 차례였다. 그런데 평소에 이 아름다운 처녀를 짝사랑하던 이웃마을의 잘생기고 용감한 청년이 처녀의 옷으로 대신 갈아입고 제단에 앉아 있다가 이무기가 나타나자 칼로 이무기의 목 두 개를 베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당당하고 용감하여 처녀는 기뻐하며 "저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사오니 영원히 당신을 공경하며 모시겠습니다."라고 하자 청년은 "아직은 이르오, 이무기의 남은 목 하나도 마저 베어야 하오. 내가 성공을 하면 흰 깃발을 달고 실패하면 붉은 깃발을 달 것이니 그리 아시오"하고 길을 떠났다. 처녀는 백일 간 기도를 드렸다. 백일 후, 멀리 배가 오는 것을 보니 붉은 깃발이 걸려 있었다. 그만 처녀는 실망하여 자결하였다.

그런데 그 깃발은 붉은 깃발이 아니라 이무기가 죽을 때 뿜은 피가 흰 깃발에 묻은 것이었다. 처녀는 그것을 붉은 깃발로 생각하고 청년이 죽은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 후 처녀의 무덤에서는 붉은 꽃이 피어났다. 백일 간 기도를 드렸기에 백일 동안이나 피는 꽃이 되어 백일홍이라고 하는 가슴 아픈 전설이다.

 

배롱나무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 인조가 오희도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오면서 타고 온 말을 매었다고 전해지는 후산리 은행나무(전라남도 기념물 제45호)를 보러 갔다. 한적한 시골마을을 걸어가는데 향기가 은은히 난다. 향기가 나는 곳을 찾아보니 담벽에 피어 있는 흰 마삭줄 꽃이다.  

 

 

후산리 은행나무는 인조대왕 계마행(仁祖大王 繫馬杏)이라고도 불린다. 인조가 반정을 하기 위해 사람을 모을 때 의병장인 고경명의 손자인 월봉 고부천(1578-1636)을 찾아왔다. 그러나 고부천은 뜻은 같이 하나 광해군의 녹을 먹은 일이 있어 자신은 동참할 수 없고 후산마을에 사는 오희도를 찾아가라고 천거했다고 한다.

 

 

이때 인조가 이곳 은행나무에 말을 매어놓고 명옥헌 터에 살고 있는 오희도를 찾아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후산마을을 나와 다음 여정인 소쇄원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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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면

박인환 작시, 박인희 노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그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그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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