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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중국여행

동서대학교 공자아카데미 1 - 중국 산동성 조장시 태아장

by 황교장 2013. 8. 11.

동서대학교 공자아카데미 1 - 중국 산동성 조장시 태아장

 

2013년 7월 29일부터 8월 5일까지 7박 8일 일정으로 중국 산동성 일원을 다녀왔다. 이는 동서대학교 공자아카데미에서 주관하여 이루어진 연수에 참가한 것이다. 중고등학교 교장 10명과 동서대학교 중문과 교수이자 공자아카데미 학원 원장이신 김언하 원장님이 함께 참가했다. 김원장님은 북경대학교에서 노신을 연구하여 문학박사학위를 받은 중국문학에 정통한 분이다.

 

공자아카데미는 중국 정부가 전 세계에 중국의 언어와 문화를 보급하고, 세계 각국과 교류와 협력을 증진하기 위하여 각국의 대학과 협력하여 설립한 중국어 및 중국 문화 보급기관이다. 105개 국가와 지역에 350여 개의 공자아카데미가 설립되어 있으며, 한국에도 총 20개의 공자아카데미 및 공자학당이 있다. 동서대학교 공자아카데미는 중국 국가 한판, 중국 산동대학교가 협력하여 운영하고 있다.

 

7월 29일 아침에 김해공항을 출발하여 대한항공으로 중국 청도로 출발했다. 꼭 2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가는 셈이다. 비행기 좌석은 운 좋게도 경치를 잘 감상할 수 있는 창가의 자리였다. 그러나 출발할 때는 날씨가 흐려서 주변의 경치를 별로 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낙동강과 주변의 풍광들이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비행기는 육지를 벗어나 바다로 나아갔다. 한 30여 분이 지나 청도 시가지가 보이기 시작하자 비행기는 고도를 낮추면서 청도공항에 착륙했다. 산동대학의 관계자분들이 우리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비행기에서 기내식을 먹었지만 앞으로 갈 길이 멀어서 배를 두둑이 채워서 떠나야 한다면서 식당으로 안내를 했다. 2년만에 맛보는 중국음식이다. 역시 중국은 음식이 푸짐하다. 하지만 기름진 음식들과 독특한 향이 내게는 맞지 않았다.

 

 

2년 전에도 동서대학교에서 주관하는 공자아카데미에 참가했다. 당시 북경과 천진 그리고 피서산장을 다녀왔다. 하지만 당시 기록을 해 두었던 수첩을 잃어버려서 여행기를 남겨두지 못하였다. 이번 산동성 방문은 네 번째 중국을 방문하는 셈이다. 그러나 산동성은 처음이어서 가슴이 설렌다.

 

식사를 마치자 우리들을 태운 차는 청도 시가지를 달리고 있다. 길가의 가로수는 수양버들과 버드나무가 주종이다. 이 두 나무들이 중국의 고대 시가에 많이 나오는 양류(楊柳)를 뜻하는지를 원장님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원장님은 산동대학교 관계자분에게 물었다. 그분이 맞다고 하시면서 버드나무가 양(楊)목이고 수양버들이 류(柳)목이라고 대답을 한다.

 

양류를 보니 당시(唐詩)중 가장 왕성할 때 활동을 한 성당 시인인 왕창령의 규원을 떠올렸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몰랐던 어린 새 색시가 봄날 새잎 돋아나는 양류를 보고 벼슬길 찾아 집을 떠나 있는 낭군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시다.

 

여름이라 잎이 무성했지만 봄에 새 잎이 돋을 때는 그 연록빛이 참으로 아름다울 듯하였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사랑하는 이가 떠오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閨怨(규원)

王昌齡(왕창령)

閨中少婦不知愁(규중소부부지수)

春日凝粧上翠樓(춘일응장상취루)

忽見陌頭楊柳色(홀견맥두양류색)

悔敎夫壻覓封侯(회교부서멱봉후)

 

규방의 젊은 아낙네 시름을 모르고

봄날에 예쁘게 화장하고 아름다운 누대에 올라보네.

문득 길가에 버들나무 색 새로워진 것을 바라보다가

낭군을 벼슬길 찾아나서게 한 것을 후회하네

 

 

 

청도시내를 벗어나자 바닷가가 나왔다. 그런데 바다를 가로지르는 왕복 6차선의 다리가 나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부산의 광안대교보다도 몇 배나 더 긴 다리다. 청도시 중심부를 기점으로 교주만(膠州灣) 해역을 지나 황도(黃島)까지 연결되는 해상 교량으로 2011년 6월 30일 개통한 총길이 41.58㎞의 다리다.

 

 

이는 종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긴 해상 교량이었던 미국 코즈웨이대교(총길이 38.4㎞)보다 약 3.2㎞ 더 길다고 한다. 너비 35m에 왕복 6차로이며, 청도 해만대교(海灣大橋 HǎiwānDàqiáo) 또는 교주만과해대교(膠州灣跨海大橋 JiāozhōuwānkuàhǎiDàqiáo)라고도 불린다. 중국의 발전 속도는 무서울 정도다.

 

 

2시간이 조금 지나 휴게소에 도착을 했다. 휴게소 간판에 우리말로 슈퍼마켓이라고 적혀 있어 반가웠다. 휴게소룰 나와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이다. 주변에 산을 볼 수가 없다. 평야가 넓어서 그렇겠지만 스모그로 시야가 흐려서 산을 볼 수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길가의 가로수는 양류가 아니면 내 어릴 적 고향마을에서 ‘뽕탱이나무’라고 불렀던 플라타너스(버즘나무)가 주종이다. 밭에는 다양한 식물들이 심겨 있는데 그 중 가장 많은 것이 옥수수다. 끝없이 넓고 길게 펼쳐진 경관이 한결 같다. 아침부터 출발하느라 피곤했던 우리 일행은 곤히 잠이 들었다. 나도 달콤하게 졸고 나니 머리가 한결 맑아졌다.

 

두 번째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휴게소는 거의 다 비슷하게 보인다. 특이한 것은 우리처럼 화장실로 직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진열대를 거쳐서 화장실로 갈 수 있도록 한 점이다. 중국인의 상술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차가 다시 출발을 하자 주변의 풍경은 계속 같은 모습으로 이어졌다. 원장님이 이곳 산동성은 공자님의 고향이니 미리 준비된 자료에 있는 논어를 한번 배우자고 하신다. 서당식 교수법을 그대로 사용을 했다. 원장님이 선창을 하면 우린 다 같이 큰 소리로 따라 읽었다. 다들 재미있어 한다. 놀랍게도 원장님은 논어를 모두 암송을 하고 있었다. 해설도 함께 하신다. 역시 프로는 다르다.

 

논어 첫 구절인 학이편은 잘 알려진 구절이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하지만 이 구절에서 기쁠 ‘열’과 즐거울 ‘락’의 차이점을 분명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나도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알지는 못했다. ‘열’은 혼자 기쁜 것이고, ‘락’은 같이 즐거운 것이라 한다. 그러니 학습을 하는 것은 혼자 기쁜 것이고,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같이 즐거운 것이다.

 

그리고 자공이 말한 공자의 오덕을 다시 되새겨볼 수 있었다.

자공이 “스승께서는 ‘온’(溫) ‘량’(良) ‘공’(恭) ‘검’(儉) ‘양’(讓)의 5덕(五德)을 지니셨다”고 말하였다.

첫째, ‘온’(溫)은 ‘온후’(溫厚)하다.

둘째, ‘량’(良)은 ‘선량’(善良)하다.

셋째, ‘공’(恭)은 ‘공손’(恭遜)하다.

넷째, ‘검’儉)은 ‘검약’儉約)하다.

다섯째, ‘양’(讓)은 ‘겸양’(謙讓)하다.

 

원장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이 오덕 중 한 가지라도 제대로 가지고 있는지 반성을 해 보았다.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하려면 쉬운 것은 없는 것 같다.

 

이윽고 목적지인 조장시에 도착을 했다. 중국 산동성(山東省) 조장시(棗莊市)는 청도와 약 460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그런데 중간 중간에 비가 많이 왔고 운전기사가 제대로 길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길을 되돌아 나왔다. 그만큼 중국은 넓은 땅이다. 산동성만 해도 우리나라 인구의 2배가 넘는 약 9천7백만의 인구라고 한다.

 

조장시는 인구 380만 명으로 석류 생산지로 유명하다. 또한 석탄, 건재, 방직, 선박기계 제조업이 발달한 도시로, 고속도로와 철도 등 지리적 위치가 우수하며 교통이 편리해 남북 교통의 요충지로 손꼽힌다. 때문에 최근에는 이 같은 지리적 장점을 활용한 관광산업 육성으로 종합적인 산업진흥정책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조장시에서 숙소인 태아장까지는 한참을 더 가야만 했다. 원래 예정은 6시간 만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1시간 30분이 더 걸렸다. 무려 7시간 반이 걸린 것이다. 태아장 앞에 도착을 하자마자 폭우가 내린다. 제법 많은 시간을 기다리자 빗줄기가 약해졌다.

늦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태아장 정문에 들어섰다.

 

 

태아장은 '천하제일장'이라고  청나라 건륭제가 명명 했다고 한다. 야경이 휘황찬란하다. 중국다운 곳에 왔다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모를 정도로 황홀한 곳이다.

 

 

 

지금까지 어지간한 경관을 보고는 놀라지 않는데 정말 멋있었다. 고색창연한 건물의 야경을 보면서 약 십여 분을 걸어서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니 숙소인 태장호텔이 나왔다.

 

 

호텔 역시 굉장하다. 옛 건물을 본따서 지은 것 같았다. 방에 들어가 창문을 열어보니 앞이 수로다. 늘어진 수양버들이 수로를 따라 양쪽으로 멋들어지게 늘어져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몇백 년을 거슬러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밖에 나가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태아장을 한 바퀴 돌았다. 수로가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다. 조그마한 배들이 많다.

 

 

 

 

 

 

 

 

 

이 배를 타고 태아장을 전체를 유람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새벽이라 배를 탄 사람들은 없었다. 작은 배라 두 사람 정도가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은 사람과 같이 배를 타고 유람한다면 정말 멋질 것 같았다. 아쉽게도 배를 탈 기회는 없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소나기를 만났다.

 

 

 아침식사를 하고서 태아장 관광에 나섰다. 조장시청에 근무하는 담당 공무원이 직접 나와서 가이드를 해주었다. 원래 태아장은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 북경에서 항주까지 연결된 운하)의 중간 기착지이자 물류가 모이는 곳이다. 명, 청 시절에는 굉장한 상업 중심도시였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는데 화려하게 장식된 배가 운하를 따라 음악을 연주하면서 다가오고 있다. 청나라 건륭제(1711-1799)가 이곳을 순방할 때를 재연해 보이는 행사다. 그 시절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실감나게 하고 있다.

 

 

 

태아장은 건륭제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이곳 상인들이 8개의 갑문을 만들자고 건의를 했다고 한다. 갑문을 만들고는 배가 원활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비가 잘 내리지 않을 때에는 한 달에서 석 달 정도 이곳에서 발이 묶인다. 그래서 자연히 상인들이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시장이 번성한다. 특히 남자들이 많이 있는 곳에는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기루, 즉 기방이다. 태아장에는 기방이 37곳이 있었다고 시 공무원은 설명을 한다.

 

 

그러면서 제일 윗자리에 있는 이름이 이 기방에서 가장 예쁘고 화대가 가장 비싼 기녀라고 한다. 그 다음 줄에 있는 것은 화대의 순서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자들이 하는 일은 거의 비슷한 것 같다.

 

그런데 이처럼 아름다운 곳이 중일전쟁 때는 격전지였다고 한다. 거의 폐허가 된 것을 최근에 복원해 놓았다. 중일전쟁에서 처음으로 중국이 일본을 이긴 전투가 태아장 전투다. 이때 지휘를 한 장군은 이종인 장군으로 중국인들이 영웅시하고 있다. 당시의 총탄에 맞은 건물들을 그대로 남겨두어 후손들에게 좋은 교훈으로 삼고 있다.

 

 

 

다음에 조금 더 여유 있게 태아장을 유람할 것을 기약하면서 아쉬움을 남겨둔 채 태아장을 떠나 조장시내에 있는 조장제3중학교에 갔다.

 

이 학교는 산동성 안에서 5위 정도의 중학교라고 한다. 12년간 17명이 북경대와 청화대에 진학한 것과 매년 북경대 1명과 청화대 1명을 학교장 추천으로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다.

학교 관계자들이 아주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이분들과 중국의 교육제도와 실상에 대하여 많은 대화와 토론을 했다.

 

 

 

특이한 것은 보충수업을 선생님들이 무보수로 한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교직을 신성시하기 때문에 돈과 무관하다고 답변을 한다.

질문과 답변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러다간 오늘 일정이 늦어질 것 같아 억지로 중단을 시켰다. 이번 연수반에 내가 회장을 맡고 있어 원활한 일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시간 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조장시를 고향으로 둔 유명한 분이 두 분 있다. 묵자(BC 470(?)-BC 391(?))와 맹상군(? -BC 279)이다. 개인적으로 맹상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이참에 맹상군에 대해 정리를 한번 하고자 한다.

 

 

맹상군(孟嘗君)은 성은 전(田)이고 이름은 문(文)이며, 맹상군은 시호이다. 제나라 위왕(威王)의 막내 아들인 전영(田嬰)의 아들로 태어났다. 맹상군은 위(魏)의 신릉군(信陵君), 조(趙)의 평원군(平原君), 초(楚)의 춘신군(春申君)과 함께 전국시대 말기 4군 가운데 한 사람이다. 진(秦) 소양왕의 초빙으로 재상이 되었으나 곧 의심을 사게 되어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그의 식객 중에 좀도둑질[狗盜]을 잘하는 사람과 닭울음소리[鷄鳴]를 잘 흉내내는 사람이 있어 그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고 하는 고사 '계명구도'(鷄鳴狗盜)와 '교토삼굴'(狡兎三窟)이 유명하다. 제와 위에서 잠시 재상을 지냈고, BC 284년 제의 민왕이 죽은 후에 자립해 제후가 되었다. 사마천의 사기 중 맹상군 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전영에게는 아들이 40여 명이나 있었는데, 그 중 첩에게서 태어난 문(文: 맹상군의 이름)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문은 5월 5일에 태어났다. 당시 5월에 태어난 아이는 커서 키가 문 높이에 닿으면 아비를 해친다는 속설 때문에 죽이라고 하였으나 그 어머니가 몰래 키웠다.

몇 년 후에 맹상군 부친인 전영이 이를 알고 격노하자 어린 문이 부친에게 "인간의 운명이 하늘로부터 받는 것입니까, 문설주로부터 받는 것입니까 (人生受命於天乎, 將受命於戶邪)"라 질문하고 '키가 닿지 않게 문 높이를 높이면 될 것 아니냐'며 문지방을 헐어버림으로서 그 재주를 인정받아 결국은 첩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후계자가 되었다.

 

맹상군은 삼천여 명의 식객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진나라의 반간지계(反間之計)로 재상자리에서 파면되었다. 그러나 풍환(馮驩)이라는 식객의 지략으로 재상자리에 복직되었다. 떠나갔던 식객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맹상군은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손님을 소중히 여기고 대접에도 소홀함이 없어 수하에 식객수가 3천 명이 넘나들었소. 그런데 그들은 내가 자리를 잃자 모두 하루 아침에 떠나버렸소. 다행이 선생 덕분에 재상에 복직되었는데 지금 와서 무슨 낯짝으로 나를 만나러 온단 말이오. 찾아온다는 자가 있다면 면상에 침을 뱉어 모욕을 주겠소.”

 

이 말을 듣자 풍환은 말고삐를 매어놓고 수레에서 내려와 맹상군에게 절을 하였다. 맹상군도 내려와 풍환을 맞으며

“선생이 식객들을 대신해서 사과하는 것입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자 풍환은 “식객들을 대신해서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께서 말실수를 하셨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풍환이 다시 말하기를 “무릇 물건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결과가 있고, 일에는 당연히 그렇게 되는 도리가 있습니다. 선생께서 그것을 아십니까?” 라고 하니

맹상군이 “나는 어리석어 선생이 말하는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자 풍환이 말하기를

“살아 있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사물의 필연적인 결과이며, 부귀한 몸이 되면 따르는 선비가 많으며, 가난하고 비천한 몸이 되면 벗이 적어지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生者必有死 物之必至也 富貴多士 貧賤寡友 事之固然也.) 맹상군께서는 저자거리를 구경해 보셨겠지요. 아침에는 너무 북적거려 어깨를 부딪치지 않으면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우나 해가 저문 저녁에는 시장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아침을 좋아하고 저녁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저녁에는 볼 만한 물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맹상군께서 지위를 잃으니 빈객들이 다 떠나갔는데, 이것을 가지고 선비들을 원망하면서 일부러 빈객들의 길을 끊을 필요가 없습니다. 맹상군께서는 예전과 같이 식객들을 대우하시기 바랍니다.”

맹상군이 두 번 절하며 “삼가 그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선생의 말을 듣고 어찌 감히 가르침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하였다.

 

맹상군에게는 최고의 멘토가 풍환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이런 멘토가 있다는 것은 정말 복 받은 인생일 것이다. 또한 주변에 풍환과 같은 멘토가 있어도 멘토를 알아보는 눈이 없어 삶이 고달픈 사람이 많을 것이다. 멘토도 중요하지만 멘토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리더의 포용력 또한 중요하다. 우리가 맹상군에게 공감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멘토를 알아보고, 그 멘토의 말을 귀 담아 듣고 실행할 수 있는 넓고 깊은 그릇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국책 제책편(戰國策 齊策扁)에는 교토삼굴 (狡兎三窟)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토삼굴은 꾀 많은 토끼가 굴을 세 개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교묘한 지혜로 위기를 피하거나 재난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유비무환(有備無患)과 많이 비슷하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국시대 말엽 제나라에 재상인 맹상군이 있었다. 선비을 좋아해 식객이 삼천 명이나 되었다. 맹상군은 왕족인 정곽군 전영의 아들로 이름은 전문이고, 맹상군은 그의 호이다.

그 식개 중에 풍훤(馮諼)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풍훤은 가난한 선비였는데 맹상군이 식객을 좋아한다는 말에 짚신을 신고 먼 길을 걸어왔다. 맹상군은 그의 몰골이 하도 우스워 별 재주는 없어 보였지만 받아주었다. 맹상군 식객의 숙소를 1, 2, ,3등급으로 분류하여 기거하게 했다.

맹상군은 그를 3등 숙소에 배치했다. 풍훤은 괴짜였다. 칼을 뽑아들고 “내 긴 칼을 짚고 왔음이여 그런데 고기반찬이 없구나”하면서 노래했다. 그래서 맹상군은 그를 2등급 숙소로 옮겨줬다. 그는 또 칼을 뽑아들고“내 긴 칼을 짚고 왔음이여 그런데 수레가 없구나”하면서 노래했다. 1등 숙소로 옮겨 주자 “내 긴 칼을 짚고 왔음이여 그런데 집도 없구나”하면서 노래했다. 이에 맹상군이 들어주자 풍훤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당시 맹상군은 설(薛)에 1만 호의 식읍을 가지고 있었다. 3천 명의 식객을 부양하기 위해 식읍 주민들에게 돈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도무지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것을 받아 올 사람이 없었는데, 마침 풍훤이 이 일을 맡겠다고 나섰다. 풍훤은 일을 나가기 전에 맹상군에게 말했다.

"빚을 다 받아오면 저에게도 돌아오는 게 좀 있겠지요?"

맹상군은 풍훤이 빚을 얼마나 걷어올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되는 대로 대답을 하였다.

"집안에 부족한 것이 있거든 좀 사도록 하게."

풍훤은 맹상군의 이 말을 듣고 설 지방에 가서, 빚진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말했다.

"맹상군께서 여러분들의 빚을 받지 않으시겠답니다."

풍훤이 채권을 모두 불에 태워 버리자, 빚을 갚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그에게 감사하였다. 풍훤은 마차를 타고 곧장 돌아왔다.

맹상군은 풍훤이 빨리 돌아온 것을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빚은 얼마나 받아냈나?"

풍훤이 대답했다."전부 받아냈습니다."

맹상군은 이 말에 매우 기뻐하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무엇을 사 가지고 왔나?"

"군께서는 집에 없는 것을 사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제가 생각해보니, 금은보화나 미녀 같은 것은 이미 있으시지만, '의(義)'자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군께 '의(義)'를 하나 사 가지고 왔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맹상군은 매우 화가 났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1년 후 맹상군이 제나라의 새로 즉위한 민왕에게 미움을 사서 재상직에서 물러나자, 3천 명의 식객들은 모두 뿔뿔이 떠나버렸다. 풍훤은 그에게 잠시 설에 가서 살라고 권유했다. 맹상군이 실의에 찬 몸을 이끌고 설에 나타나자 주민들이 노인은 부축하고 어린 것은 손목을 끌고 나와 환호하며 맞이했다. 맹상군이 풍훤에게 말했다.

“선생이 전에 의(義)자를 샀다고 한 말뜻을 이제야 겨우 깨달았소.”

풍훤이 말했다.

“교활한 토끼는 구멍을 세 개나 뚫지요[狡兎有三窟]. 지금 경(卿)께서는 한 개의 굴을 뚫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아직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 없이 잠을 즐길 수는 없습니다. 경을 위해 나머지 두 개의 굴도 마저 뚫어드리지요.”

 

그래서 그는 위(魏=사기에서는 秦나라로 표시)나라의 혜왕을 설득하여 맹상군을 등용하면 부국강병을 실현할 것이며 동시에 제나라를 견제하는 힘도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마음이 동한 위의 혜왕이 금은보화를 준비하여 세 번이나 맹상군을 불렀지만 그 때마다 풍환은 맹상군에게 응하지 말 것을 은밀히 권했다.

이 사실이 제나라의 민왕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아차 싶었던 민왕은 그제서야 맹상군의 진가를 알아차리고 맹상군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다시 재상의 직위를 복직시켜 주었다. 두 번째의 굴이 완성된 셈이다.

 

두 번째의 굴을 파는데 성공한 풍훤은 세 번째 굴을 파기 위해 제민왕을 설득, 설 땅에 제나라 선대의 종묘를 세우게 만들어 선왕 때부터 전승되어 온 제기를 종묘에 바치도록 했다. 선대의 종묘가 맹상군의 영지에 있는 한 제왕의 마음이 변심한다 해도 맹상군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이것으로 세 개의 구멍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주인님은 고침안면 하십시오.”

 

이리하여 맹상군은 재상에 재임한 수십 년 동안 별다른 화를 입지 아니했는데 이것은 모두 풍훤이 맹상군을 위해 세 가지 보금자리를 마련한 덕이다.

 

(사기에는 풍환(馮驩)이라고 되어 있고, 전국책에는 풍훤(馮諼)으로 되어 있다. 또한 두 번째 굴을 파는 내용도 조금 다르다.)

 

戰國策11齊四140-01 齊人有馮諼者, 貧乏不能自存, 使人屬孟嘗君, 願寄食門下. 孟嘗君曰: "客何好?" 曰: "客無好也." 曰: "客何能?" 曰: "客無能也." 孟嘗君笑而受之, 曰: "諾." 左右以君賤之也, 食以草具.

策11齊四140-02 居有頃, 倚柱彈其劍, 歌曰: "長鋏歸來乎! 食無魚." 左右以告. 孟嘗君曰: "食之, 比門下之客." 居有頃, 復彈其鋏, 歌曰: "長鋏歸來乎! 出無車." 左右皆笑之, 以告. 孟嘗君曰: "爲之駕, 比門下之車客." 於是, 乘其車, 揭其劍, 過其友曰: "孟嘗君客我." 後有頃, 復彈其劍鋏, 歌曰: "長鋏歸來乎! 無以爲家." 左右皆惡之, 以爲貪而不知足. 孟嘗君問: "馮公有親乎?" 對曰: "有老母." 孟嘗君使人給其食用, 無使乏. 於是, 馮諼不復歌.

策11齊四140-03 後孟嘗君出記, 問門下諸客: "誰習計會, 能爲文收責於薛者乎?" 馮諼署曰: "能." 孟嘗君怪之, 曰: "此誰也?" 左右曰: "乃歌夫'長鋏歸來'者也." 孟嘗君笑曰: "客果有能也, 吾負之, 未嘗見也." 請而見之, 謝曰: "文倦於事,  於憂, 而性 愚, 沈於國家之事, 開罪於先生. 先生不羞, 乃有意欲爲收責於薛乎?" 馮諼曰: "願之."

策11齊四140-04 於是, 約車治裝, 載券契而行. 辭曰: "責畢收, 以何市而反?" 孟嘗君曰: "視吾家所寡有者." 驅而之薛, 使吏召諸民當償者, 悉來合券. 券 合, 起, 矯命以責賜諸民, 因燒其券, 民稱萬歲.

策11齊四140-05 長驅到齊, 晨而求見. 孟嘗君怪其疾也, 衣冠而見之, 曰: "責畢收乎? 來何疾也!" 曰: "收畢矣." "以何市而反?" 馮諼曰: "君云'視吾家所寡有者'. 臣竊計, 君宮中積珍寶, 狗馬實外廐, 美人充下陳. 君家所寡有者以義耳! 竊以爲君市義." 孟嘗君曰: "市義奈何?" 曰: "今君有區區之薛, 不부愛子其民, 因而賈利之. 臣竊矯君命, 以責賜諸民, 因燒其券, 民稱萬歲. 乃臣所以爲君市義也." 孟嘗君不說, 曰: "諾, 先生休矣!"

策11齊四140-06 後朞年, 齊王謂孟嘗君曰: "寡人不敢以先王之臣爲臣." 孟嘗君就國於薛. 未至百里, 民扶老携幼, 迎君道中. 孟嘗君顧謂馮 : "先生所爲文市義者, 乃今日見之.

 

策11齊四140-07 馮諼曰: "狡兎有三窟, 僅得免其死耳. 今君有一窟, 未得高枕而臥也. 請爲君復鑿二窟." 孟嘗君予車五十乘, 金五百斤, 西遊於梁(魏), 謂惠王曰: "齊放其大臣孟嘗君於諸侯, 諸侯先迎之者富而兵强." 於是, 梁王虛上位, 以故相爲上將軍; 遣使者, 黃金千斤,車百乘, 往聘孟嘗君.

策11齊四140-08 馮諼先驅, 誡孟嘗君曰: '千金, 重幣也; 百乘, 顯使也. 齊其聞之矣.' 梁使三反, 孟嘗君固辭不往也. 齊王聞之, 君臣恐懼, 遣太傅賚黃金千斤, 文車二駟, 服劍一, 封書謝孟嘗君曰: "寡人不祥, 被於宗廟之崇, 沈於諂諛之臣, 開罪於君, 寡人不足爲也, 願君顧先王之宗廟, 姑反國統萬人乎!"

策11齊四140-09 馮諼誡孟嘗君曰: "願請先王之祭器, 立宗廟於薛." 廟成, 還報孟嘗君曰: "三窟已就, 君姑高枕爲樂矣." 孟嘗君爲相數十年, 無纖介之禍者, 馮諼之計也.

 

전국책11제사140-01 제인유풍훤자, 빈핍부능자존, 사인속맹상군, 원기식문하. 맹상군왈: "객하호?" 왈: "객무호야." 왈: "객하능?" 왈: "객무능야." 맹상군소이수지, 왈: "락." 좌우이군천지야, 식이초구.

책11제사140-02 거유경, 의주탄기검, 가왈: "장협귀래호! 식무어." 좌우이고. 맹상군왈: "식지, 비문하지객." 거유경, 부탄기협, 가왈: "장협귀래호! 출무차." 좌우개소지, 이고. 맹상군왈: "위지가, 비문하지차객." 어시, 승기차, 게기검, 과기우왈: "맹상군객아." 후유경, 부탄기검협, 가왈: "장협귀래호! 무이위가." 좌우개악지, 이위탐이부지족. 맹상군문: "풍공유친호?" 대왈: "유노모." 맹상군사인급기식용, 무사핍. 어시, 풍훤부부가.

책11제사140-03 후맹상군출기, 문문하제객: "수습계회, 능위문수책어설자호?" 풍훤서왈: "능." 맹상군괴지, 왈: "차수야?" 좌우왈: "내가부'장협귀래'자야." 맹상군소왈: "객과유능야, 오부지, 미상견야." 청이견지, 사왈: "문권어사,  어우, 이성 우, 침어국가지사, 개죄어선생. 선생부수, 내유의욕위수책어설호?" 풍훤왈: "원지."

책11제사140-04 어시, 약차치장, 재권계이행. 사왈: "책필수, 이하시이반?" 맹상군왈: "시오가소과유자." 구이지설, 사리소제민당상자, 실래합권. 권 합, 기, 교명이책사제민, 인소기권, 민칭만세.

책11제사140-05 장구도제, 신이구견. 맹상군괴기질야, 의관이견지, 왈: "책필수호? 래하질야!" 왈: "수필의." "이하시이반?" 풍훤왈: "君云'시오가소과유자'. 신절계, 군궁중적진보, 구마실외구, 미인충하진. 군가소과유자이의이! 절이위군시의." 맹상군왈: "시의내하?" 왈: "금군유구구지설, 부부애자기민, 인이가리지. 신절교군명, 이책사제민, 인소기권, 민칭만세. 내신소이위군시의야." 맹상군부설, 왈: "락, 선생휴의!"

책11제사140-06 후기년, 제왕위맹상군왈: "과인부감이선왕지신위신." 맹상군취국어설. 미지백리, 민부노휴유, 영군도중. 맹상군고위풍 : "선생소위문시의자, 내금일견지.

책11제사140-07 풍훤왈: "교토유삼굴, 근득면기사이. 금군유일굴, 미득고침이와야. 청위군부착이굴." 맹상군여차오십승, 김오백근, 서유어량(위), 위혜왕왈: "제방기대신맹상군어제후, 제후선영지자부이병강." 어시, 량왕허상위, 이고상위상장군; 견사자, 황김천근,차백승, 왕빙맹상군.

책11제사140-08 풍훤선구, 계맹상군왈: '천김, 중폐야; 백승, 현사야. 제기문지의.' 량사삼반, 맹상군고사부왕야. 제왕문지, 군신공구, 견태부뢰황김천근, 문차이사, 복검일, 봉서사맹상군왈: "과인부상, 피어종묘지숭, 심어첨유지신, 개죄어군, 과인부족위야, 원군고선왕지종묘, 고반국통만인호!"

책11제사140-09 풍훤계맹상군왈: "원청선왕지제기, 입종묘어설." 묘성, 환보맹상군왈: "삼굴이취, 군고고침위락의." 맹상군위상수십년, 무섬개지화자, 풍훤지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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