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기/중국여행

동서대학교 공자아카데미 2- 중국 산동성 곡부시 삼공

by 황교장 2013. 8. 21.

동서대학교 공자아카데미 2- 중국 산동성 곡부시 삼공

 

 

7월 30일 오후 조장3중학교를 나와 곡부시가 소속되어 있는 제녕시로 향했다. 주변의 풍광은 거의 비슷하다. 광활한 평야지대다. 논농사는 보이지 않고 거의 밭농사다. 1시간 반이 지나자 제녕성도호텔에 도착을 했다. 식사를 하고는 둘쨋날 밤을 보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주변을 산책했다. 아침해가 떴는데도 스모그 현상인지 주변의 가시거리가 너무 짧다. 호텔 부지가 하도 넓어서 한 바퀴 도는데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리나라 호텔에서는 볼 수 없는 넓은 부지를 가지고 있다. 역시 중국은 땅이 넓다. 아침을 먹고는 고대했던 곡부시로 향한다. 가는 도중에 원장님의 논어와 간체자의 구성원리 강의가 계속되었다.

 

특히 간체자의 구성원리 강의는 탁월했다. 간체자 구성원리를 5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였다. 이젠 간체자 공부가 쉬워질 것 같다. 공부는 습(習)도 중요하지만 학(學)도 중요하다. 즉 가르치는 사람의 자질이 중요한 것이다. 간체자 강의를 듣고는 길가 간판에 있는 간체자 글자들 맞추기를 했다. 현장에서의 생생한 가르침이었다.

이번 연수에서 가장 보고 싶은 곳이 공자의 고향인 곡부이다. 숙소인 호텔에서 곡부까지는 약 50분이 걸렸다. 곡부에 도착하여 곡부사범대학 교수에게 ‘공자와 유학’이라는 주제로 두 시간 동안 강의를 들었다. 이 강의도 아주 진지하게 이루어졌고, 마지막 부분에는 심도 있는 토론이 전개되었다.

 

이 강의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예(禮)에 관한 부분이었다. 예는 인(仁)의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단언을 하였다. 그리고 인은 ‘己所不欲勿施於人(기소불욕물시어인,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마라)’이라고 강조하였다.

곡부사범대학교의 교훈이 學而不厭 誨人不倦,(학이불염 회인불권,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으며, 사람을 가르치는 데 게을러 하지 않는다)이라고 한다. 이 또한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결국 중국과 한국은 공자를 통해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강의 마지막에 중국 중등교육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면서 서광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한국 교장선생님들에게 해결책을 좀 이야기해 달라고 한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교육에 있어서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빈부격차’와 ‘관민의 부조화’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자의 화(和)사상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결론을 내린다(有子曰, 禮之用, 和爲貴, 유자는 예를 갖추는데 있어서 조화로움이 가장 귀중하다 하였다.)

 

점심식사를 마치고는 본격적으로 삼공을 참관하였다. 오늘 날씨가 정말 대단하다. 35도라고 한다. 조선족 가이드가 차근차근 설명을 잘해 주었다.

 

삼공이란 공묘(孔廟), 공부(孔俯), 공림(孔林)을 말한다.

먼저 공묘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을 뜻한다. 중국 무협소설을 보면 관묘, 악묘 등이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중국을 직접 가보기 전에는 중국 사람들은 숙박할 장소를 찾지 못하면 묘지 속에서 잠을 자나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서호에 있는 악왕묘(岳王廟)를 보고서는 악왕묘가 금나라와 맞서 싸운 남송의 애국 명장 악비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라는 것을 알았다. 안동에 있는 삼태사묘도 같은 의미다.

공묘의 대성전은 북경 고궁의 태화전, 태안 대묘의 천황전과 함께 중국 3대 전(殿)이라고도 하고, 자금성 태화전(太和殿), 승덕의 피서산장과(避暑山庄), 태안의 대묘(垈廟)와 더불어 중국 4대 고(古)건축물이라고도 불린다.

 

공묘는 노(魯)나라의 애공(哀公)이 공자 사후 1년에 건설한 사당이다. 처음에는 공자가 제자들에게 강의하던 행단에 대성전(大成殿)을 세운 것으로 시작해 그후 역대의 황제들이 계속하여 증개축하여 현재의 규모가 되었다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 중 ‘공자세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자가 살던 집과 제자들이 쓰든 내실은 훗날 공자의 묘로 만들어져, 공자가 사용하던 의관과 거문고, 수레, 서적 등이 소장되었는데 그것은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200여 년 동안이나 그대로 있었다. 고황제(한 고조 유방)가 노나라를 지나게 되었을 때 대뢰로써 공자의 묘에 제사를 지냈다. 그 후 제후, 경대부, 재상이 부임하면 항상 먼저 공자의 묘를 참배한 연후에 정사에 임하였다.”

 

 

중국 각지에는 크고 작은 여러 개의 공묘가 있지만 이곳 곡부의 공묘는 공자의 고향에 지어진 것으로 규모가 제일 큰 것으로 전체의 길이가 약 1㎞이며, 면적은 약 22만㎡로서 전체 건물의 방의 개수가 466개에 이른다.

 

대성문을 기준으로 동, 서, 중 삼로로 나뉘며 공묘의 사방에는 붉은 담이 둘러싸고 있다.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까지는 12개의 문이나 방(坊)을 거쳐야 한다.

 

 

 

공묘에서 제일 처음에 보이는 금성옥진(金聲玉振)은 명대 건축물로 길함을 상징하는 동물이 새겨져 있다.

 

 

 

다음의 영성(靈星)문이다. 영성문의 기둥은 불이 하늘로 치솟는 모습을 상징하며, 현판은 청나라의 건륭황제의 글씨라고 한다.

 

 

 

태화원기는 공자의 유가학설이 우주천체와 같이 영원하다는 뜻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 다음문은 지성묘방(至聖廟坊)이다.

 

 

 

지성(至聖)이란 지극한 성인, 즉 공자를 말한다. 지성묘를 지나면 성시문(聖時門)이 있다.

 

 

 

성시문을 지나면 홍도문이 나온다.

 

 

 

홍도문은 명태조 주원장이 건립한 문으로, 도(道)가 사람을 넓힐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다음은 건륭황제가 직접 썼다는 대중문(大中門)이다. 이 문은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 이곳을 방문했는데 이 문을 보고서는 아주 좋아했다고 가이드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문과 문 사이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많다. 천년이 넘었다는 측백나무들이 원백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조금 더 들어가자 삼층의 거대한 건물이 나온다. 이 건물을 보는 순간 나는 완전히 압도되었다. 규문각이다. 1018년에 세워진 건물로서 단 하나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완성한 건물이라고 한다. 높이 23m에 달하는 3층 목조 누각으로 중국 10대 명루(名樓)의 하나이다. 규문각 앞에는 규문각비정(碑亭)이라고 하는 황제의 휘호나 공자의 글을 새긴 비석이 있는 비각이 있다.

 

 

 

이 비석들은 깨어진 것을 다시 붙였다. 문화대혁명의 상처다.

 

시간이 많으면 일일이 다 꼼꼼이 보고 싶었는데 벌써 가이드는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급하게 따라가니 눈에 익은 글자가 나온다. 행단(杏亶)이다.

 

 

 

행단은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자리에 집을 짓고 그 이름을 살구나무 행(杏) 또는 은행나무 행(杏), 믿음 단(亶)이라 이름 붙였다. 이곳을 본받아 행단은 ‘학문(學文)을 닦는 곳’을 말한다.

 

 

 

 

 

행단 앞이 바로 공묘의 본전인 대성전(大成殿)이다. 엄청난 규모와 기둥의 화려한 용 조각이 나를 압도한다. 대성전은 1103년에 건립되었다. 명나라 효종 2년인 1499년에 다시 보수하면서 기둥에 용을 새겼다고 한다. 대성전은 높이 24.8m, 폭 45.7m, 길이가 24.9m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3층 누각인 규문각이 높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성전이 1.8m 가 더 높다. 2층과 3층의 착시 현상일 것이다.

 

대성전의 건물을 받치는 외부 기둥은 모두 28개로 돌기둥이다. 이중 정면의 10개 기둥은 2마리의 용이 휘감는 조각으로 되어 있다. 이 기둥은 한구산에서 생산되는 청석 중에서 가장 귀한 어자석이라고 전해진다.

 

 

 

고대부터 중국에서 용은 하늘과 황제를 상징했다. 따라서 황궁에서만 용을 새길 수 있었고 다른 건축물에는 용의 도안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으나 공묘만 예외라고 한다. 황제의 대우를 받은 셈이다.

 

 

 

 용은 발톱이 다섯 개인데 간혹 부잣집 정원에 용을 새긴 곳이 있다 하더라도 발톱은 3개만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용의 발톱이 다섯 개가 그대로 새겨져 있다. 건륭제가 이곳을 방문할 때에는 기둥의 용을 천으로 가렸다고 한다.

 

 

 

  대성전 안을 들여다보면 공자의 초상과 그 위에 쓰여진 글자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萬世師表(만세사표)와 斯文在慈(사문재자)다. 만세사표는 '영원한 세월 동안 학식과 인격의 모범'을 뜻한다. 사문재자의 사문(斯文)이란 유학자(儒學者)의 높임말로서 즉 공자님을 뜻하고, 재자(在慈)는 공자님의 '인자하심과 자비로움이 여기에 있도다'라는 의미이다.

 

 

 

대성전을 보고나니 한비자의 오두(五蠹)라는 글이 떠올랐다. 오두는 다섯 가지의 좀벌레를 말한다. 나라를 갉아먹어 황폐하게 만드는 다섯 부류의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다.

 

오두의 첫째는 인의도덕의 정치를 주장하는 유가(儒家)를 말하고, 둘째는 언담자(言談者) 즉 세객(說客)과 종횡가(縱橫家)이며, 셋째는 대검자(帶劍者) 즉 사사로이 무력으로 나라 질서를 해치는 유협(游俠)을 말하며, 넷째는 환어자(患御者) 즉 귀족에게 의탁한 자나 공권력에 의지해 병역이나 조세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권문귀족, 다섯째는 상공업 종사자로, 농민들의 이익을 빼앗는 상공인(商工人)이다.

 

한비자는 이러한 다섯 좀벌레를 법의 힘으로 없애야 나라를 강하고 부유하게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두 중 첫째가 유가이다. 유이문란법(儒以文亂法, 유가들은 문헌에 대한 지식을 이용하여 법을 어지럽게 한다고 보았다.)이라 하여 유가들은 선왕의 도를 따를 것을 주장하고, 인의를 내세우지만 쓸데없이 용모나 복장 등이나 따지며, 행동보다는 말에 열중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른 법제에 시비를 걸며 사사건건 현실에도 맞지 않는 고사를 빌려 그들의 사욕을 채우려고만 하고 국가의 궁극적 이익은 돌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한비자의 책을 읽은 진시황은 분서갱유(焚書坑儒)를 감행한 것이다. 이때 불타지 않고 남아 있었던 곳이 대성전 뒤에 있는 노벽(魯壁)이다.

 

 

 

노벽은 기원전 154년 한나라 경제(景帝) 때 노공왕(魯恭王)이 궁실 증축을 위해 낡은 건물을 허물다가 벽속에서 경서가 나온 곳이다.

 

책에서만 보던 역사의 현장을 실제로 보니 감개가 무량하였지만 주마간산 격으로 공묘를 보고는 공자와 후손들이 살았던 공부(孔府)로 향했다.

 

 

 

 

 

 

 

대성전 바로 뒤에 있는 성부(聖府)문부터 공부마을이 시작된다. 성부란 공자와 직계 후손들이 살던 ‘거룩한 곳’, 즉 ‘거룩한 마을’이란 뜻이다. 이곳의 규모는 웅대하여 누각과 대청이 총 463칸이나 되는 역사상 가장 큰 장원이라고 한다. 공부 또한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중국 봉건시대 관청의 전형적인 건축물로 ‘천하 제일의 가옥’이라고 불린다.

 

공부는 대대로 황제로부터 보호를 받아 벼슬이 주어졌다. 기원전 195년, 한고조 유방은 공자의 9대 자손인 공등을 봉사군(奉祀君)에 봉했다. 송나라 때 인종황제는 공자의 46대손인 공종원(孔宗願)을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벼슬인 연성공(衍聖公)에 봉하고는 이후부터 곡부지역을 다스리게 하였고, 1038년에 공부(孔府)가 지어졌다고 한다.

 

그후 명대에도 다시 황제의 명에 의해 연성공부(衍聖公府)로 봉해진 후 증축이 계속되었다. 청나라 시대에도 건륭제의 공주가 72대 연성공인 공헌배와 결혼을 하여 황제의 부마가 되었다. 이처럼 이곳에는 역대의 황제들에게 많은 혜택을 받으면서 현재와 같이 되었다고 한다. 공부는 중국 역사상에서 가장 넓은 농지를 소유하며 관리하는 대지주이기도 했다.

 

 

 

 

 

공부에는 너무 많은 건물과 방이 있어 답답함을 느끼게 하였다. 그런데 마지막 뒷뜰의 정원은 잘 꾸며져 있었다.

 

 

 

 

공부를 보고서는 삼공 중 마지막인 공림을 보러 나섰다. 공림으로 가는 길에는 만고장춘(萬古長春)이라는 문이 중국특유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가로수는 수백년 묵은 측백나무로 보인다.

 

 

 

공림(空林)은 공자와 후손들의 묘지로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씨 일족의 묘(墓)이다. 공림은 ‘지성림(至聖林)’이라는 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 일행은 전기자동차를 타고 이 묘역을 돌았다. 공림에는 무덤이 10만여 봉, 역대 석의(石儀) 85쌍, 석비 3.600개, 교목 42.000여 그루가 있다. 현재 공림의 둘레는 7km이고 총 면적은 약 60만평이다.

 

 

 

10여 분 동안 빠른 속도로 무덤을 달렸다. 묘가 10만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차가 서서히 멈추었다. 공자 무덤으로 가기 위해 내리라고 한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이 심었다는 해(楷)나무의 죽은 밑둥과 비석이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자공은 공자의 제자이지만 공자가 미워했다고 한다. 자공은 돈이 많아 더욱 싫어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의 왜곡이다. 곡부로 오는 차 안에서 원장님으로부터 자공에 대한 구절을 배웠기 때문이다. 아무 말 없이 참고 듣고 있으려다가 가이드에게 ‘가이드님이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고 하면서 ‘논어 학이편에는 공자님이 자공을 아주 칭찬한 대목이 나온다’고 하고는 ‘옆에 계시는 분이 전문가이니 확인해 보라’고 말하자. 원장님이 내 말이 맞다고 대답을 했다.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구절인 이 말은 많이 알려져 있는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원문이다.

 

子貢曰,“貧而無諂,富而無驕,何如?” 子曰,“可也, 未若貧而樂,富而好禮者也.”

(자공왈, “빈이무첨, 부이무교, 하여?” 자왈, “가야, 미약빈이락, 부이호례자야.”)

자공이 말했다. 가난해도 아첨하지 아니하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아니하면 어떻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면서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 예를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다.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자공왈, “시운, ‘여절여차, 여탁여마’, 기사지위여?”

자왈, “사야, 시가여언시이의, 고제왕이지래자.”)

자공이 말했다. 시에 여절여차 여탁여마가 바로 그 뜻을 말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야, 비로소 너와 시를 말할 만하구나. 가는 것을 알려주니 오는 것을 아는구나.

 

여기서 '‘如切如磋, 如琢如磨, 여절여차, 여탁여마’의 내용을 줄여서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숙어가 나왔다. 절차탁마는 옥석을 자르고 갈아서 서서히 완벽한 예술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인간의 덕성의 함양의 과정에 비유한 말이다.

 

이 말은 공자가 자공을 아주 높게 칭찬한 말이다. 그런데도 가이드는 공자님이 자공을 아주 싫어했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설명을 해주고 왔다고 생각하니 가이드의 잘못된 안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점 교육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것으로 느껴졌다.

 

 

 

  조금 더 들어가니 제법 큰 무덤이 나온다. 묘비에는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무덤이다. 자사는 중용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사의 무덤을 나와 뒤쪽에 있는 무덤이 공자의 아들인 사수후 공리(孔鯉)의 무덤이다. 리(鯉)는 잉어를 말한다. 공자의 부인이 잉어를 먹고 낳았다고 해서 지었다고 한다. 공리는 공자보다 3년 먼저 죽었다. 공자는 자식의 죽음으로 단장지정을 느꼈을 것이다.

 

 

 

드디어 공자의 무덤에 이르렀다. 묘비에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의 전서체로 음각한 비석이 있다.  공자를 왕으로 추봉한 것은 738년 당나라 현종이다. 당 현종은 공자를 문선왕(文宣王)의 시호를 내렸다. 1008년  송나라 진종은 시호 지성(至聖)을 추가하여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이 되었다. 원나라에와서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 되었다고 한다.

무덤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벌초하는 문화가 중국에는 없는 모양이다. 공묘는 거대했으나 정작 공자가 묻힌 무덤은  생각보다 초라했다.

 

이것으로 공림을 대충 다 둘러보았다. 바삐 전기자동차를 타고는 정문으로 나왔다. 우리 일행은 호텔에서 공자후손들이 즐겨 먹었던 음식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공자후손들이 빚은 술인 공부가주를 마시면서 공자님의 의미를 되새겼다. 공자의 삶에 대하여 가장 명쾌하게 표현된 글은 사마천의 사기에 나와 있는 글이라고 생각되어 여기에 옮기고자 한다.

 

  “나는 공자의 저술을 읽어보고, 그 사람됨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상상할 수 있었다. 노나라에 가서 공자의 묘당, 수레, 의복, 예기를 참관하였고, 여러 유생들이 때때로 그 집에서 예를 익히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는 경모(敬慕)하는 마음이 우러나 머뭇거리며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역대로 천하에는 군왕에서 현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 생존 당시에는 영화로웠으나 일단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공자는 포의로 평생을 보냈지만 10여 세대를 지나왔어도 여전히 학자들이 그를 추앙한다. 천자, 왕후로부터 나라 안의 육예를 담론하는 모든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 공자의 말씀을 판단기준으로 삼고 있으니, 그는 참으로 최고의 성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공자는 사마천이 이렇게 평가한 후 2천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변함없는 존경을 받고 있다. 문화대혁명 이후 논어 대신 모택동어록이 한동안 강조되었지만 지금은 공자로 되돌아 왔다고 곡부사법대학의 교수님께서 강조를 했다.

 

곡부사람 중에 공(孔)씨가 90%라고 하는데 죽은 공자님이 살아 있는 후손들을 다 먹여 살린다고 하는 말이 빈말은 아닌 것 같다. 공자가문이 이처럼 오랫동안 유지되는 이유 중 하나는 과욕을 경계한 흔적이 공부에 많이 남아 있다. 일하는 하인들조차 과욕을 하거나 부정부패가 발견되면 엄벌에 처했다고 한다. 특히 하인들이 욕심이 과하면 살이 찐다 해서 하인들이 다니는 통로를 아주 좁게 만들어 놓아 그 통로를 지나갈 수 없는 하인은 해고하였다고 전한다.

 

'절제의 철학'이 있어야 가문의 번영이 오래 간다는 것은 역사의 진리인 것 같다.

 

 

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