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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중국여행

동서대학교 공자아카데미 4 - 중국 산동성 치박 청도

by 황교장 2013. 8. 31.

동서대학교 공자아카데미 4 - 중국 산동성 치박 청도

 

제남을 떠나 치박(淄博)으로 향했다. 치박까지는 약 2시간이 소요되었다. 길가의 가로수나 농작물들은 여전히 양류와 옥수수다. 치박은 2500년 전 춘추전국시대에 제나라의 수도였던 임치(臨淄)가 지금의 치박시 임치구다. 제나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강태공이다. 그리고 관포지교의 관중과 포숙, 환공 등이다. 제나라의 수도였던 임치가 치박시에 있다고 하니 우선 정감이 먼저 간다.

 

 

 

우리 일행이 치박에서 처음 도착한 곳은 복왕홍목박물관이다. 홍목은 홍송을 말한다. 홍송은 우리나라 금강송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치박의 홍송도 유명하다고 한다. 홍송으로 만든 다양한 가구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 중에는 10억 원이 넘는 가구들도 많다. 이들 가구들로 집을 장식한다면 수십 억이 필요하겠다. 인간이 사치를 하려고 하면 끝이 없어 보인다.

 

 

다음 코스는 도자기박물관에 들렀다. 각종의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고대에서부터 현재까지의 도자기들이 시대별로 나라별로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우리나라 장인들이 만든 것들도 있어 반가웠다. 치박은 도자기와 유리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개인적으로는 치박에 있는 제나라 유적지를 보고 싶었다.

 

주나라 문왕이 은나라를 물리치고 주나라를 건국할 때(BC 1122년) 일등공신이 강태공(姜太公)이었다. 강태공이 제나라 제후로 봉해진 것이 제나라의 시작이다. 강태공의 본명은 강상이나 ‘여상, 태공, 태공망여상’이라고도 불리었다.

강태공은 문왕 이후 무(武)왕, 성(成)왕, 강(康)왕 등 4대에 걸쳐 태사를 역임했다.

 

강태공과 부인에 얽힌 이야기로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라는 고사숙어가 있다. ‘한 번 엎지른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요즘 들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의사결정을 하기 전에 심사숙고하지 않고 쉽게 결정하고 나면 잘못 결정되었을 때는 되돌리기가 힘들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한 학교를 이끌어가는 교장으로서는 이러한 점을 항상 생각하면서 신중히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

 

강태공의 일생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강태공이 80세까지는 가난하게 살았다고 궁팔십(窮八十)이라 하고, 벼슬한 후 80세는 부유하게 살았다고 달팔십(達八十)이라 하여 160세까지 살았다는 설과,  BC 1211년에 출생하여 139세까지 살았다는 설이다.

 

인간은 유한적인 삶을 살아야 하기에 이처럼 건강하게 장수한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닮아가고 싶다. 요즘 유명한 위인들이 과연 몇 살까지 살다가 죽었는지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나도 이젠 많이 늙었다는 증거일 게다.

 강태공의 장수 비결을 곰곰 생각하면서 치박을 떠났다. 다음에 개인적으로 오면 반드시 치박에서 강태공과 관련된 유적지를 보고 싶다.

 

치박에서 청도로 가는 고속도로는 잘 닦여 있다. 제법 한창을 달리자 표지판에는 유방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원장님이 유방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중국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채소라고 한다. 정말 넓은 들판이다.

 

 

마침내 청도에 도착했다. 청도에 들어서자 가시거리가 좋아졌다. 주변에 산들이 빼어나다. 노산 자락이라고 한다. 노산은 산동성에서 태산에 견줄 수 있는 산이다.

 노산에는 원래 등산로가 없었는데 한국 사람들이 등산로를 개발했다고 원장님이 설명을 한다. 노산은 바위산으로 도교로 이름난 산이며 해발 1,133m이다.

중국 해안선 상에서 유일하게 해발 1,000m 이상인 산봉우리로 ‘해상명산제일(海上名山第一)’이라고 불린다.

 

청도는 중국 동부의 해안 도시로 서울에서 비행기로 1시간 거리에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했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값싼 현지 노동력 덕분에 액세서리, 의류 등 중소기업 하청업체들이 많이 진출한 곳이라고 한다. 청도에는 11만 명의 한국인과 18만여 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다. 해질녘에 호텔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는 청도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대로변은 상당히 깨끗하다. 그러나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 쓰레기더미다. 곳곳에 악취가 난다. 아직 중국은 쓰레기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동서대학교에 유학 온 중국학생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 중 하나가 쓰레기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돈을 주고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쓰레기 문제에서만은 우리나라가 참으로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쓰레기 봉투제를 실시한 이후 쓰레기가 3분의 1로 줄었다.

 

아침식사 후에 청도시내 관광을 나섰다. 가장 먼저 간 곳이 팔대관이다. 팔대관은 입구부터 유럽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중국과는 다른 집들이다. 24개 국가의 대표적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300여 채의 최고급 별장들이 들어서 있다. 팔대관은 중국의 유명한 거리 이름 여덟 개를 따와 도로 이름을 붙였다. 팔대관의 도로 중 눈에 익은 도로명이 있다.

함곡미로와 거용미로다. 함곡미로는 만리장성 관문 중 서쪽에 있는 함곡관(函谷關)을 딴 것일 게고 거용미로는 만리장성 관문 중 동쪽에 있는 거용관(居庸關)을 딴 이름 같이 보인다.

 

 

팔대관 도로를 따라 바닷가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장개석 별장이 있다. 별장 앞 바닷가에서 건너편 언덕을 바라보니 잡지책에서 청도를 소개할 때 단골손님으로 나오는 독일식 집들이 보였다.

 

 

 

원래 청도는 조용한 어촌마을이었다. 그런데 청일 전쟁 후, 삼국 간섭으로 중국에 은혜를 베풀었던 독일이 1897년 청도 일대를 조차하면서 산둥 반도 일대를 자기들 세력 하에 두었다. 독일은 청도를 극동의 근거지로 삼았고, 1898년 독일에 의해 개항된 이후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청도는 ‘중국 속의 유럽’, ‘중국의 작은 독일’ 혹은 ‘중국의 나폴리’라는 애칭도 갖고 있다. 청도에 남아 있는 서양풍의 건물이나 청도 맥주는 당시 독일이 남기고 간 유산이다.

 

특히 청도 맥주는 독일 맥주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면서도 청도의 명산인 노산의 광천수로 만들어 물 속에 녹아 있는 미네랄 성분으로 인해 깔끔하고 개운한 맛이 특징이다.

 

팔대관을 보고는 청도 중심지인 청도시청 앞으로 갔다. 청도의 발전상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고층의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하다. 우리 일행은 시청 앞 5.4광장에 도착했다. 청도를 소개할 때 단골메뉴 중 하나인 붉은 횃불 모양의 거대한 조형물이 거기에 서 있었다. 이 거대한 조형물의 이름은 '오월의 바람'이다.

 

 

오월의 바람은 1919년 5월 4일 천안문 광장에서부터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던 북경대학생들의 항일시민운동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당시 횃불을 들고 항일운동 선봉에 서서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올라서라"라고 외친, 노신의 기상을 담고 있다고 한다.

 

 

 

광장을 지나 바닷가 공연장에는 한창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흰 천막 안에서 연주회를 하고 있었다. 연주회에 참여하는 분들이 다 노인들이다. 노래를 부르는 여자 가수 역시 노인이다. 중국에도 노령사회가 도래했음을 한 번 더 실감나게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장면들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지금 내나이를 생각하니 내가 처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서 잠시 슬픔이 몰려 왔다.

 

 

 

호텔로 돌아와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재래시장에 갔다. 그곳에는 한글로 된 상점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재래시장을 일명 짝퉁시장이라고도 한다.

아직도 짝퉁시장의 주고객은 한국인이라고 한다. 많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숙소로 돌아와서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맥주 한잔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하고는 중국이 자랑하는 기업인 하이얼그룹 본사를 견학하러 갔다. 이곳이 중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이다.

 

차 안에서의 원장님의 마지막 논어강의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가장 가슴에 남아 있다. 특히 제2장 위정편-18 이다.

 

子張學干祿. 子曰, 多聞闕疑 愼言其餘 則寡尤. 多見闕殆 愼行其餘 則寡悔.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

(자장학간록. 자왈, 다문궐의 신언기여 즉과우. 다문궐태 신행기여 즉과회 언과우 행과회 록재기중의.)

자장이 공무원 잘하는 방법을 배우고자 하므로, 공자님이 말씀하셨다. 많이 듣되 의심스러운 것은 내버려두고 그 나머지 것만 신중하게 말하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 많이 보고 위태로운 것은 내버려두고 그 나머지 것만 신중하게 실행으로 옮긴다면 후회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후회할 일이 적으면 공무원의 봉급은 그 가운데 있다.

 

이천오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가슴에 와 닫는 말이다. 공무원은 말과 행동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

 

논어강의가 끝나자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전시관 입구 전광판에 우리들을 환영한다는 글귀가 나왔다.

 

 

 

 

전시관을 둘러보았는데 중국의 발전 속도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미국 보스톤 자문회사에서 발표한, 혁신역량을 갖춘 세계 10대 기업 중 중국기업으로는 유일하게 하이얼이 포함되었다고 자랑을 한다.

1위가 애플, 2위가 구글, 7위가 소니, 8위가 하이얼이라고 하면서 정작 3위인 삼성과 10위인 현대는 빠뜨렸다.

일부러 한국을 낮추려는 옹졸함이 느껴졌다. 기념관을 관람하고는 회사 내에 있는 대학교를 방문했다.

 

 

 

 

 공장 내에 대학을 설립했다는 것이 참 특이한 발상이라고 생각되었다.

 

마지막 방문지를 나와서 청도공항으로 가서 부산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탔다. 산동대학 관계자들과 미모의 여교수가 공항까지 나와서 우리를 배웅했다.

 

비행기를 타니 운좋게도 창가 자리였다. 비행기가 우리나라 상공으로 접어들자 날씨가 좋아서 우리나라 산천의 풍수를 잘 볼 수 있었다. 특히 나의 고향마을 앞에 있는 낙동강과 우포늪이 뚜렷이 보여서 가슴이 뛰었다.

중국이 아무리 크고 넓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도 역시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은 우리나라, 내 고향땅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7박8일 동안 함께한 모든 분들게 감사의 마음을 보내며 특히 좋은 강의와 안내를 해 주신 김언하 원장님께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또한 7박 8일 동안 한 방에서 지낸, 나의 흑기사, 김승수 교장선생님, 여러 가지로 세심하게 준비해준 서현옥 총무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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