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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중국여행

동서대학교 공자아카데미3 - 제남시 산동대학교 표돌천 이청조기념관 대명호

by 황교장 2013. 8. 29.

동서대학교 공자아카데미3 - 제남시 산동대학교 표돌천 이청조기념관 대명호

 

2013년 8월 1일 아침식사를 마치고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시로 향했다. 아침부터 비가 조금 내리기 시작했다. 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달리자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다. 어제 일정이 오늘과 바뀌었으면 아찔할 뻔했다. 삼공을 보는 날이 오늘이었다면 거의 불가능 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 일행 중 삼대적선을 한 분이 타고 계셨을 것이다.

 

빗줄기가 조금 약해질 때쯤 태안휴게소에 도착을 했다. 원장님이 내가 보고 싶어 하는 태산이 태안시에 있다고 하면서 잘하면 태산의 옆모습이라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정말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가 태산 자락을 지날 때에는 태산이 먼발치에서 얼굴을 조금 내밀고 있다. 다음에 꼭 오라고 맞보기로 보여주는 것 같다. 차창가로 스쳐지나가는 태산줄기가 예사롭지가 않다.

 

한 시간여를 달리자 제남에 도착했다. 제남시는 북쪽으로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인 황하가 흘러가고 남으로는 천하 제일의 태산을 품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제나라의 서부 도시로 번영하였고, 한나라때부터 제수(濟水,황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오늘날까지 濟南(제남)이라고 불리었다. 이후 수, 당, 송, 금, 원, 명, 청등 2500년 동안 역사와 문화도시로 이어오고 있다. 지금은 중국 20대 대도시 중 하나이며 산동성의 성도이다.

 

제남에서 홍콩식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내 입맛에는 홍콩식 음식이 오히려 더 맞았다. 향이 덜하고 단맛이 더 많았다.

 

호텔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는 오후에 산동대학으로 갔다. 산동대학교는 중국교육부 직속 중점 종합대학이다. 동서대학교 공자아카데미는 산동대학교와 중국 국가한판과 협력하여 운영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온 가장 큰 목적지가 어찌 보면 산동대학교이다. 산동대학교는 산동성 최고의 대학교이자 중국내에서도 서열이 상위에 있다고 한다. 캠퍼스가 3개로 분리되어 있다.

 

우리가 간 곳은 문리과 대학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산동대학교 교수님에게 ‘당대중국사회생활변화’에 대하여 강의를 들었다. 우리 모두 참 진지하게 들었다. 중국의 개방 개혁정책 이후의 변화를 각종 수치로 설명하면서 현 시점의 문제점과 개선점까지 진지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강의 후에는 산동대학교에서 정식 초청만찬이 있었다. 낮에 열강을 해주신 교수님을 포함하여, 미모의 여자교수님 3분이 참여했다.

 

 

 

만찬에는 음양의 조화가 있어야만 분위기가 좋아진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윤병진 교장이 등려군(鄧麗君)의 첨밀밀(甛蜜蜜)을 열창했다. 윤교장은 제2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밀려오는 파도소리에’로 대상을 받을 때 부산대학교 썰물팀의 솔로이다. 여자교수님들이 그 자리에서 바로 열혈팬이 되었다.

 

분위기가 점점 더 고조되자 그때서야 내가 나섰다. 세 분의 관상을 봐 준 것이다. 한 분은 자식복이 많은 상이고, 한 분은 남자복이 좋은 상이고, 한 분은 재물복이 좋은 관상이었다.

 

관상이란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관찰하여 그 사람이 가장 하고 싶고 바라는 것을 읽어내는 것이다. 이분들이 너무 좋아하면서 러브샷을 하자며 내가 있는 자리로 왔다. 건강상 술을 못하는 관계로 흑기사를 쓰기로 했다. 흑기사는 룸메이트인 김승수교장이다. 김교장은 전문직 동기이자 이번으로 세 번째로 같이 중국에 왔다.

 

나 대신 러브샷으로 독한 독주를 스트레이트로 3잔을 마셨다. 한편 고맙기도 하고 한편 아쉽기도 하였다. 미모의 여성과 러브샷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윤교장 팬에서 내 팬으로 옮겼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하여 윤교장에게 가수보다는 관상가가 한 수 위라고 자랑했다.

 

역시 우리 인간은 미래지향적인 희망을 주어야 한다. 관상이나 사주를 볼 때는 단점보다는 장점을 주로 이야기 해주어야 한다. 중국의 유명한 대학교의 교수님들조차도 칭찬과 희망을 이렇게까지 좋아하는데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희망적인 칭찬은 당연한 것일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만찬이 끝나고 제남에서의 첫날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공원에 산책을 나갔다. 보이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나이가 많은 분들이다. 중국도 이젠 노령화사회에 진입한 것 같다. 특이한 것은 아침 운동 중 태극권과 댄스형식의 체조를 하는데 가르치는 선생님이 일흔살은 훨씬 넘은 것 같이 보이는 노인이었다. 백색 긴바지를 입고 나름대로 멋을 부리면서 재미 있게 가르치고 있었다. 인간의 육체를 단련하기에 따라서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한 번 더 느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는 오전에는 산동대학교에서 중국 문화체험을 하는 시간이다. 중국화와 태극권이다. 산동대학교 교수님에게 중국화와 태극권을 직접 배웠다.

 

 중국화(中國畵)의 특징은 시(詩) 중에 화(畵)가 있고, 화(畵) 중에 시(詩)가 있다. 그리고 시(詩) 화(畵) 서(書) 인(印)의 균형과 조화가 제일 중요하다고 한다.

 

 

 

태극권은 동물의 동작에서 따온 것들이다. 동물들의 몸동작을 연구하여 인체에 적용을 한 것이 특징이다. 문화의 차이가 있지만 그 기본적인 맥은 비슷하다고 느꼈다.  

오후에는 제남시가 자랑하는 표돌천과 대명호 관광에 나섰다. 제남은 남경, 무한, 중경과 더불어 중국의 4대 화로(火爐)  라고 불리울 정도로 후덥지근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대구처럼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라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어제 비가 많이 온 관계로 견딜 만하였다. 공원에 들어서자 맑은 샘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솟아나는 샘물에 어린이들이 부모와 같이 발을 담그고 물놀이를 하고 있다.

 

 

 

 

 

 

 

 물속에는 형형색색의 많은 물고기들이 놀고 있다. 땅속에서 이렇게 맑은 물이 솟아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특히 표돌천은 대단하다.

 

 

 

 

 

 

 

세 갈래로 높은 물줄기가 뿜어져 나온다. 매초 1600리터의 샘물을 뿜어내어, 1초에 1.6 리터 생수 1000병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표돌천도 난개발 때문에 한동안 끊겼다가 2003년 9월 6일부터 다시 샘솟기 시작해 지금까지 분출하고 있다. 건륭제가 강남에 왔을 때도 이곳의 물을 즐겨 마셨고 북경의 옥천수를 이곳의 샘물로 바꿔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제남은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폴로가 '샘물의 도시'로 명명할 정도로 샘물이 많은 도시다. 이 샘물은 제남의 지질구조가 카르스트 지형이라서 지하 종유동에서 솟아오르는 용출수라고 한다. 제남시 경내에는 샘이 총 733개 있다. 도심에만 표돌천, 오룡담, 진주천 등 유명한 샘들이 약 136군데나 있다. 이 많은 샘물 중에서도 표돌천은 '천하제일의 샘물'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유명한 5대 명천으로 1) 표돌천(趵突泉) 2) 무석혜산혜천 3)항주호포천 4) 상요광교사육유천 5) 양주평산당대명사천을 들고 있다.

 

그리고 고대(古代)에는 진강의 중령천이 제일천, 무석의 혜천이 제이천, 소주 호구산의 관음천이 제삼천, 절강성 항주의 호포천이 제사천,제남의 포돌천이 제오천으로 꼽히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제일천, 고대에는 제오천인 셈이다.

 

 

 

 

공원 내에는 ‘이청조(李淸照) 기념관’이 있어 관람을 했다. 이청조는 중국 송대(宋代)때 이곳 제남 출신의 여류시인이다.

 그녀는 금석학자로 유명한 조명성(趙明誠)과 혼인하였다. 북송 말 금(金)의 침입을 받아 강남으로 피난했으며 그 뒤 남편과 사별하고, 재혼과 이혼을 경험하면서 말년에는 절강성(浙江省)에서 불우하게 지냈다.

 

그녀는 송대에 크게 유행했던 서정적인 운문으로 음률에 맞추어 노래로 불리는 사(詞)를 주로 지었다.

 

 

 

중국에서 문학 장르에 대한 평가를 ‘앉아서는 경전·역사서를 읽고, 누워서는 소설을 읽으며, 뒷간에서는 사를 읽는다’고 한다.

이처럼 경시되었던 문학 장르가 사(詞)다. 그러나 이청조는 독특하고 새로운 단어와 구어를 대담하게 삽입하여 재기 넘치는 새로운 단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여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이안체(易安體)’로 불리는 그녀만의 독특한 스타일이라고 한다.

 

 

 

이청조기념관에는 곽말약(郭沫若)이 쓴 一代詞人(일대사인)이란 글귀와 ‘전무고인(前無古人) 후무래인(後無來人),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 새로 나올 사람 중에서도 없을’, 이란 글귀로 이청조를 극찬하는 현판을 써 놓았다. 곽말약의 이 글귀로 인해 이청조가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기념관에는 그녀의 전신 조각상이 있고, 그 뒤쪽 벽에는 성성만(聲聲慢)이 적혀 있었다.

 

聲聲慢(성성만) - 李淸照(이청조)

 

尋尋覓覓(심심멱멱) : 찾고 또 찾아봐도

冷冷淸淸(냉랭청청) :냉랭함과 스산함뿐

凄凄慘慘戚戚(처처참참척척) : 처량하고 비참하고 외로워라

乍暖還寒時候(사난환한시후) : 잠깐 따뜻하다 금세 추워지니

最難將息(최난장식) : 몸조리하기 정말 어려워라

三盃兩盞潭酒(삼배량잔담주) : 두세 잔 맑은 술 마셔봐도

怎敵他(즘적타) : 슬픔 어찌 감당하랴

晩來風急(만래풍급) : 저녁에 부는 세찬 바람

雁過也(안과야) : 기러기 지나가니

正傷心(정상심) : 이 내 마음 정말 아파라

却是舊時相識(각시구시상식) : 그래도 옛 시절 서로 알았었지

滿地黃花堆積(만지황화퇴적) : 온 땅에 국화 꽃잎 쌓이더니

憔悴損(초췌손) : 너무도 초췌히 변했구나

如今有誰堪摘(여금유수감적) : 이제 어느 뉘가 너를 딸까

守着窓兒(수착창아) : 창가를 지켜 앉아

獨自怎生得黑(독자즘생득흑) : 홀로 어이 저문 날을 보낼까

梧桐更兼細雨(오동갱겸세우) : 오동잎엔 가랑비까지 내려

到黃昏點點滴滴(도황혼점점적적) : 황혼녘까지 뚝뚝 떨어지는구나

這次第(저차제) : 지금의 이 처지

怎一個愁字了得(즘일개수자료득) : 근심 “愁”자 하나로 어찌 알겠는가

 

성성만은 이청조가 말년에 지은 대표작이다. 인생의 말년이란 쓸쓸하다.

 

 

 

표돌천을 나와 대명호로 갔다. 표돌천은 입장료를 받았지만 대명호는 입장료가 없다. 우리 일행은 산책길을 따라 걸어갔다. 도심 한가운데에 이렇게 큰 호수가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대명호의 물은 진주천(珍珠泉), 왕부지(王府池), 부용천(芙蓉泉)을 비롯한 여러 샘들이 합류되어 이루어진 곳이다. 호수 둘레는 약 5km이고, 호수의 평균 깊이는 약 2m이며 제일 깊은 곳은 약 4m까지 이른다. 장마철에도 수위가 높아지지 않고 가뭄에도 줄지 않는 것(恒雨不涨 久旱不涸, 항우불창 구한불학)이 그 특징이라고 한다.

 

 

 

 

 

 

 

대명호 안에는 6개의 섬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역하정이 있는 섬이다. 이 섬에서 이백, 두보가 술을 나누며 시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청나라 문인들은 대명호를 보고 '사면에 연꽃이고 삼면이 수양버들이 흐느적거리며 푸른 산, 넓은 호수가 도시 풍경을 이루네.'라고 찬탄하였다고 한다. 마르코폴로도 '원림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즐겁고 산과 호수의 경치에 눈 쉴 여유가 없다.' 라고 극찬한 곳이라고 한다.

 

유람선이 한가롭게 오가고 있다. 평일 오후인데도 어린이를 대동한 사람들이 호수에 발을 담그고 놀고 있다. 참 한가한 모습들이 여기저기에 보인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호수가를 산책하는 연인들이 많다. 배를 타기 위해 기다리면서 대명호를 무념무상으로 바라보았다. 늘어진 수양버들과 높은 탑, 떠가는 배가 어우러져 살아 숨 쉬는 한 폭의 그림 같다. 이백과 두보가 만나서 술을 마시면서 시를 읊을 만한 곳이라고 생각되었다.

 

 

 

 

 

마침내 배에 올랐다. 배는 전기배로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이 나아갔다. 배 안에서 바라다보는 주변 경관은 또 다른 모습이다. 물 위에 떠있는 누각과 수양버들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경관을 자아낸다.

 

 

 

섬 가장자리에 피어있는 꽃 중에 부처꽃도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꽃을 이곳에서 보니 더욱 정겹다. 바람이 거의 없어 배를 타고 있는데도 그리 시원하지는 않다. 시원한 맥주를 한 잔 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유람선은 호수를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원래 자리에 되돌아 왔다.

 

배에서 내려서 반가운 지인들을 만났다. 동서대학교에서 실시하는 3주간 어학연수에 참여한 분들이다. 지금이 2주차인데 제법 입이 열리고 귀가 뚫린다고 말한다. 어학은 역시 현지에서 집중적으로 받는 것이 최고일 게다.

 

 

 

저녁식사 프로그램은 ‘중국음식문화체험’이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었다. 알고 보니 산동대학교에 연수 온 외국인들이 직접 요리를 하는 요리경연대회다. 우리 교장단도 참여하게 되어 있었다. 다행인 것은 우리 일행 10명 중 5명만이 경연에 참가하도록 되어 있다. 5명의 지원자가 근방 채워졌다. 속으로 은근히 기뻤다. 나는 요리하는 것을 싫어한다.

 

 

 

우리 할머니 교육 때문일 것이다. 손자들에게 ‘사대부는 손톱 밑에 흙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어떤 일도 못하게 했다.

 농사일은 물론이며, 심지어 온 동네 아이들이 다하고 노는 자치기, 연조차도 만들지 못하게 했다. 더더구나 남자들에게는 절대로 부엌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 영향으로 지금도 라면을 직접 끓여먹는 것을 싫어한다. 어쩔 수 없어 라면을 끓여먹고 나면 기분이 좋지 않고 소화도 잘 안 되는 것 같다.

 

 이러한 나의 사고는 미래의 생존능력을 떨어뜨리니 고쳐야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어릴 적 교육이 아주 중요한 것 같다. 

호텔로 돌아가서 제남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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