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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중국여행

공자아카데미 5일차-백두산 정계비

by 황교장 2010. 9. 27.

공자아카데미 5일차-백두산 정계비


어제 강행군으로 인해 몸이 피곤할 줄 알았는데도 자연스레 4시 반에 일어났다. 옆사람이 깰까봐 조심조심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날씨가 너무 좋다. 처음 계획대로 오늘 백두산에 갔으면 천지를 볼 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송강하진은 곳곳에 대대적으로 개발을 하고 있다. 장백산이 관광특구로 지정되어 이곳을  크게 발전 시킨다는 벽보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이는 백두산 주변을  본격적으로 개발하여 관광명소로 만들어서 전 중국인들에게 홍보하여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자기들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느껴지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마을의 중심지로 보이는 ‘林海雪原演艺广场(임해설원연예광장)까지 왔다.

이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배드민턴, 재기차기, 태극권 등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재기차기를 여자들이 하고 있었다. 내가 어릴 적에는 재기차기는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는데 여기서는 여자들의 전유물처럼 여자 다섯 명이 남자 한 명과 같이 하고 있었다. 노인들은 태극권을 하고 배드민턴은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 표정이 아주 밝고 낙천적이다.

 

다시 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차 한 대 지나가다가 멈추더니 남의 집 앞에다가 쓰레기를 버리고 가 버렸다. 주인이 버젓이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더러운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도 희한한 것은 그 집의 주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같으면 남의 집 앞에 쓰레기를 버렸다고 야단치고 신고하여 벌금까지 물려야 될 사안이었다. 그런데 주인의 표정을 보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도리어 내가 참지를 못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중국어 실력을 총 동원해서 자기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는 데도 왜 가만 있는지 흥분을 해서 물어 보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아직 중국어 왕초보임을 절감했다.

 

나중에 가이드에게 물어서 안 사실이지만 길거리에 버려놓으면 청소만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 그 사람들이 쓰레기를 가지고 간다고 한다.

이유인즉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란다. 사회주의 국가는 가능하면 노는 사람 없이 모든 사람이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를 한다는 것이었다.

 

2년 전에 황산에 갔을 때 케이블카로 짐을 옮기면 될 텐데도 짐꾼들이 지게에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산길을 오른 것과 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심지가 아닌 변두리마을까지 걸어 들어가 보았다. 타임머신을 타고 50년 전으로 되돌아온 느낌이 드는 오래된 마을이었다.

시간이 정지된 느낌이었다. 마당에는 개, 돼지, 소, 닭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심지어 낯선 사람이 왔는데도 짖지 않는 개도 있었다. 마당에 핀 꽃도 참나리, 해바라기, 접시꽃 등 우리와 다를바가 없었다. 이러한 광경을 카메라에 담아야하는데 카메라 배터리가 다 나가서 담을 수가 없었다. 아쉬움을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마침 그 곳에서 이번 연수의 단장님이신 동아대학교의 김성연 교수님을 만났다. 단장님을 모시고 다시 그 마을로 들어가서 카메라에 사진 몇 장을 담았다.

 

이분 역시 사진 찍는 솜씨가 작가수준이다. 명(命)하고 복(福)은 누가 뺐어가지 못한다고 하더니 내 카메라 배터리는 떨어져도 꼭 찍어야 될 장면들은 전문가가 찍게 된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숙소에 돌아왔다. 숙소 앞에 도착을 하니 임시 시장이 열리고 있다. 이 지역의 특산물을 관광객들에게 팔고 있었다.

가장 많은 것이 장뇌삼이었다. 어제 백두산 정상에서 산 것보다도 뇌두가 훨씬 더 길고 뿌리도 통통하다. 그런데도 15뿌리에 만 원이다.

 

 

어제의 반값도 아닌 삼분의 일 값이다. 주변에서 뇌두를 풀로 붙여놓았다느니 어쩌니 말들이 많다.

그런데 나는 산삼을 직접 캔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장뇌삼임을 확신했다. 그래서 만 원 주고 또 장뇌삼을 샀다. 이 장뇌삼들은 중국에서 마지막밤의 훌륭한 술안주가 되어 주었다.

 

 

송강하진에 있는 한식당에서 아침을 먹고는 장춘으로 출발을 했다. 가이드는 송강하진 앞을 흐르는 강이 송화강이라고 하였다.

송화강이란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백두산정계비와 간도 협약이었다. 가이드에게 백두산정계비가 있었던 장소와 간도의 구체적인 위치를 물으니 잘 모른다고 했다.

 

백두산정계비 내용 중 영토 분쟁의 문제가 된 대목은 ‘西爲鴨綠東爲土門(서위압록동위토문)’이다.

국경의 서쪽이 압록강이라는 데에는 청나라와 조선정부 사이에 시비가 없는데 동위 토문이 문제가 되었다. 중국 측은 토문강이 두만강이라고 주장을 하고 우리 측은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이 글자 그대로 토문강이라고 주장한 것이 분쟁의 시발점이었다.

이곳 송강하진 앞을 흐르는 이 물이 토문강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역사적인 사건을 생각하고 있는데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다.

장춘에서 우리나라 유학생이 가장 인기가 있다고 한다. 남자는 키 크고 잘 생겼고, 여자는 예쁘고 날씬하고 똑똑하다. 그리고 돈을 잘 쓴다고 한다. 그만큼 대한민국이 잘 산다는 뜻이다.

 

가이드 역시 아직 미혼인 조선족 처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현재 조선족은 그 숫자가 자꾸 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조선족이 한족과 결혼하여 한족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족 여자가 한족과 결혼하면 자식은 반드시 한족인데 조선족 남자와 한족 여자가 결혼하면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다고 한다.

이곳 한족 남자는 조선족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이유는 마음씨 착하고, 살림 잘하고, 일 잘 하고, 시부모 잘 모시고, 남편에게 순종적이고 등등으로 인하여 복이 터졌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족 남자는 밥 빨래 등 집안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반면에 한족남자들은 밥하고 빨래하고를 잘 한다고 한다.

따라서 한족 남자를 좋아하는 조선족 처녀들이 많다고 한다.

 

가이드 자신은 할머니의 유언 때문에 조선족하고 결혼할 생각이라고 한다. 할머니는 늘 조선족과 결혼해라 그렇지 않으면 민족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늘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조선족들이 기숙사가 있는 한족 학교에 다닌다고 한다. 부모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한국에 살고 남은 자식들은 자연스럽게 한족하고 어울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 어울리다 보면 결혼하는 것이라고 한다.

 

경치는 갈 때와 올 때가 다르다. 어떤 경우는 아주 생소하게 느껴진다. 차창에 비치는 풍광을 즐기면서 마침내 장춘에 도착을 했다.

 

그 동안 다른 분의 휴대전화로 나의 휴대전화 번호를 몇 번이나 걸어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장춘에 돌아오는 즉시 나의 전화번호에 전화를 하니 응답이 있었다. 첫 마디가 중국말이 아닌 우리말로 ‘거기 어디요’였다.

그 다음 상대방이 중국말로 뭐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때 내가 대뜸 한 말이 ‘발맛사지’라고 했다.

상대방에서 ‘뚜에이 바맛사지’라고 하는 것이 내 귀에 뚜렷하게 들렸다. 그때서야 여유가 생겨 한 말이 ‘씨에씨에 닌’이라고 말하고는 전화기를 닫았다. 발맛사지는 이젠 중국의 통용어가 된 것 같았다.

 

밥도 먹지 않고 혼자서 찾아가려고 하니 강교장 선생님이 이젠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천천히 식사를 하고 가이드와 같이 가자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되어 가이드와 함께 갔다.

그런데 가이드와 지배인이 한참 이야기를 심각하게 나누고 있었다. 그들끼리 하는 내용들은 거의가 알아듣지를 못하였다. 이들이 이야기를 끝내고나서 가이드가 와서 한 말은 그날 8명이 왔는데 7명분밖에 돈을 내지를 않아서 68위안을 더 내어야 된다고 한다. 숙소에 가서 정확하게 알아보고 저녁에 다시 와서 해결하겠다고 이야기가 일단락되었다.

 

잃어버린 핸드폰을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쁨은 누려보지 못한 분은 아마도 모를 것이다. 나중에 돈을 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경우는 내가 대신 68위안을 줄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휴대전화를 찾고나니 장춘에서 마지막으로 할 일이 하나 남았다. 서점에 들러서 명리학 책을 사는 일이다. 장춘에서 가장 큰 서점이 어느 정도 거리에 있는지를 물었다. 발맛사지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라고 한다.

가이드는 그곳까지 데려다 주고는 숙소로 되돌아가고 나는 그곳에서 명리학책 5권과 관상학책 2권을 사가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 책들을 독파할 작정이다. 책을 산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보기만 해도 뿌듯했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이라 동북사범대학에서 준비한 만찬이 5시부터 있었다. 장소는 동북사범대학에서 운영하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음식점이었다. 국립대학이 이러한 수익사업도 하고 있었다.

 

같이 간 분들과는 5일간 같이 생활을 하다보니 정이 많이 들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노래방 기기가 있어 노래를 해도 되는지 물으니 한국노래는 없고 중국노래만 된다고 한다.

내가 어설프게 아는 중국노래가 두 곡이 있다. 鄧麗君(등려군)의 月亮代表我的心(월량대표아적심, yuèliangdàibiǎowǒdexīn)과 甛蜜蜜(첨밀밀, tian mi mi )이다. 첨밀밀을 하려다가 월량대표아적심을 시켰다.

어설픈 노래지만 중국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자체가 중국사람들에게는 즐거움을 주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중국분들은 다 한 곡씩 했다. 다 함께 좋은 분위기에서 중국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잘 마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삼삼오오로 흩어져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나는 몇 분들과 같이 발맛사지를 마지막으로 받으러 갔다. 계산 착오가 있었던 것은 그날 늦게 온 분이 한 분 있었는데 그분은 돈을 지불하였다고 했다.

서로간의 계산 착오인 듯하여 휴대전화를 무사히 찾은 내가 그 돈을 계산해 주었다.

맛사지로 피곤을 잘 풀고는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아름답게 보내고는 다음날 무사히 부산으로 돌아왔다.

 

끝으로 이렇게 좋은 연수를 주관한 동아대학교 공자아카데미 관계자 분들과 알찬 연수를 위해 정성을 다하신 동북사범대학의 관계자 분들, 함께한 우리 부산의 교장선생님들과 이글에 사진을 제공한 분들과 모든 것을 끝까지 챙겨준 박현경 실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여기서 백두산정계비와 간도협약 간도문제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백두산정계비 

백두산은 고구려나 발해의 시기에는 우리나라 땅이었으나, 그후 우리나라의 판도가 반도로 위축되었다. 그러다가 1437년(세종 19)에 설치했던 6진(六鎭)으로 백두산과 그 동서의 두만강·압록강이 우리나라의 국경선이 되었다. 그때 두만강 상류의 무산지방(茂山地方)은 미개척지역으로 남아 있었는데, 1674년(현종 15)에 이곳에 무산진을 설치하여 두만강 내 지역 전부를 조선의 영역으로 확정했다. 이리하여 조선과 청과의 국경은 압록·두만의 두 강으로써 이루어졌으나, 그 원류인 백두산 근처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았고 두 강 상류의 북안은 일종의 공백 완충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만주에서도 특히 동부의 장백산(長白山:백두산) 일대 삼림지대는 인삼·모피·진주 등 특산의 보고(寶庫)였으며 지린[吉林]의 영고탑(寧古塔)은 이러한 특산물 집산지의 하나였다. 이에 날로 융성해지는 청나라는 이 지역을 한인(漢人)·몽골인 등 주변 민족의 침범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제방을 만들고 그위에 양유를 심어놓았으며 요소마다 변문(邊門)을 만들어 출입자를 감시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조선과의 접경에도 해당되었다. 그러는 사이 조선인은 국경을 넘어 산삼을 채취하거나 토지를 개간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월경사건(越境事件)은 자주 발생하여 문제시되었고, 청이 칙사(勅使)를 보내어 국왕과 동석하여 죄인을 심리한 일도 3번이나 있었다. 한편 청나라도 우리나라의 국경을 넘는 월경침입이 자주 있었으며, 때로는 수십 명이 작당하여 우리측의 관원과 군병을 납치한 일도 있었다.


1677년(숙종 3)에는 청 강희제(康熙帝)가 장백산, 즉 백두산을 그 조상의 발상지로서 관심을 갖고, 내대신(內大臣) 무묵납(武默納)에게 명하여 장백산 지방을 답사시키고 다음해에 신하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6년 후에 다시 치제했다.


1691년 조선의 조정은 청대신 5명이 영고탑을 경유하여 장백산에 가서 그곳을 관찰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놀랐다. 그뒤 1710년에는 위원(渭原)의 이만기(李萬技)가 국경을 넘어 삼을 캐며 그 도중에 만주인 5명을 타살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백두산을 귀속하려는 청에게 좋은 구실을 주었다. 따라서 2년 후인 1712년에 청은 오랄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해 국경을 실지 답사시켰는데, 조선은 그 소식을 그해 2월 24일 청 예부(禮部)에게서 통고받았다. 이에 조선에서는 청의 요구에 불응하자는 측도 있었으나, 결국 응하기로 하고 접반사를 임명해 파견했다. 목극등은 싱징[興京] 방면으로부터 압록강에 이르러 10일간 강을 따라 올라가 후주(厚州)에서 조선의 사신과 만났고, 다시 4일 후 혜산진에 이르러 여기서부터 육로를 택했다. 이때 목극등은 조선의 접반사인 박권(朴權)과 함경감사 이선부(李善傅)는 늙고 허약해 험한 길을 갈 수 없다며 무산에 가 있게 했다. 그리고 조선접반사군관·차사관(差使官)·통관(通官) 등과 더불어 백두산의 꼭대기에 이르러 그해 5월 15일에 정계비를 세운 후에 무산으로 갔다. 그리하여 조선의 접반사는 산정에 오르지도 못하고 목극등의 일방적 조처로 정계비가 세워졌다. 따라서 백두산 정상을 경계로 세우기로 했던 정계비를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4㎞ 와서 압록강과 토문강의 두물이 강원(江源)에서 '人'자 모양으로 흐르는 곳의 바위를 비석의 귀부(龜趺)로 삼고 세웠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2.55척, 너비 1.83척이며 비면에 '大淸'이라 행서하고, 그 아래에 "烏喇摠官穆克登奉旨査邊至比審視西爲鴨綠東爲土門故於分水嶺上勒石爲記"라고 종서(縱書)하고 청의 필첩식(筆帖式), 조선의 군관·차사관·통관의 성명을 각서(刻書)했다.


이와 같이 정계비는 청의 일방적 건립이었으므로, 조선 말기에는 청이 토문강과 두만강을 임의로 유리하게 해석함으로써 경계문제가 양국 간의 문제로 재연되어 간도(間島)의 귀속문제에 연결되었다. 1881년(고종 18) 청나라가 간도를 개척하려 하자 1883년 조선은 어윤중(魚允中) 등으로 하여금 정계비를 조사케 하여, 정계비문 가운데 "서쪽은 압록으로, 동쪽은 토문으로"(西爲鴨綠東爲土門)를 근거로 해서 간도는 조선의 땅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청측은 토문을 두만강이라 하며 간도일대를 청나라의 땅이라 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두만강은 정계비에서 수십 리 밖의 지점에서 발원한 것이므로 비에 표시되기에는 너무 먼 강이며, 정계비 근처의 물 한 줄기가 토문강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토문강이 확실하다고 했다. 이러한 분쟁은 해결되지 않았고, 청일전쟁 후 일본이 남만주철도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에 넘겨버렸다. 백두산정계비는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없어졌다.

-출처: 브리태니커백과사전-


▶간도협약

1909년 9월 일제가 불법적으로 간도지방의 영유권을 중국에 할양한 협약.

1712년(숙종 38)에 백두산정계비가 건립된 이래 160여 년 간 간도의 귀속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그러나 1881년 청나라가 봉금(封禁)을 해제하고 청국인의 간도이주와 개간을 장려하면서 간도의 정치적 영유권 문제가 발생되었다. 그후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으로부터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1907년 간도에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간도는 한국의 영토이고, 간도 거주 한국인은 청나라 정부에 대한 납세의무가 없음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대륙침략의 발판을 얻기 위해 1909년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무순(撫順) 탄광 개발권을 얻는 대신에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고, 간도의 한민족은 청나라의 법률 관할 하에 두어 납세와 행정상의 처분도 청국인과 같이 취급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간도협약을 맺고 간도지방의 영유권을 청국에 넘겨버렸다. 당사자인 우리 정부는 협약에 간여하지도 못한 채 불법적으로 영토를 빼앗겼으며, 1881년부터 야기되었던 간도문제는 이로써 끝나게 되었다.

-출처: 브리태니커백과사전-


▶간도문제 

1881-1909년에 걸쳐 만주의 지린 성[吉林省] 동남부지역 땅인 간도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전개된 청나라와 조선정부 간의 분쟁.

이 지역은 땅이 기름지고 산림이 무성하여 각종 자원도 풍부하였으나 청나라 정부에서는 이곳을 봉금지역(封禁地域)으로 선포하여 입주를 엄금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간도를 개척하여 농경지를 만든 것은 철종 말에서 고종 초 사이에 이주하기 시작한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 간도문제에 대한 양국 간의 최초의 교섭은 1712년(숙종 38)에 있었으며, 이때 양국의 대표들은 백두산에 올라 현지조사를 통해 양국의 국경을 확정하는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했다. 비문에는 동으로 압록강, 서로는 토문강(土門江)의 분수령에 세운 것으로 명기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뒷날 간도귀속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었다. 양국 대표가 합의한 토문강이 실상 두만강의 상류가 아니라 만주 내륙의 쑹화 강[松花江] 상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계비는 두만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비석이었으며, 토문강과 쑹화 강의 동쪽지역인 간도지방은 이미 우리 영토로 확정되었던 것이다. 정계비가 건립된 뒤 160여 년 간은 간도귀속문제가 논의된 바 없이 지내왔으나, 19세기 중엽 이후 조선 농민의 두만강 월경농사가 시작되고 또 1881년부터 청나라가 봉금을 해제하여 청나라 사람의 간도 이주와 개간·농경을 장려하면서 간도의 정치적 영유권문제가 발생했다. 1882년 초 청나라는 우리 정부에 대하여 월경을 엄금하도록 요구해왔고, 1883년에는 간도의 조선 농민을 모두 소환하도록 요구하며 정치적 압력을 가해왔다. 이에 조선정부는 답사 결과와 여러 가지 자료를 제시하면서 토문강은 쑹화 강 상류이며, 간도지방은 우리 영토임을 주장하고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에 대한 공동조사를 통해 국경을 확정할 것을 제기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조선의 제의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1885년 간도 일부지방의 조선주민을 강제로 추방하자, 우리 정부는 다시금 토문감계(土門勘界)를 요청함으로써 간도귀속문제는 양국간의 새로운 외교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간도문제 해결을 위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제1차 회담인 을유감계회담은 우리측의 제안으로 1885년 11월 회령에서 개최되었다. 이후 1888년까지 3차례의 회담이 있었으나 아무런 합의를 보지 못했다. 청나라는 두만강 상류를 투먼 강[圖們江]으로 보고 정계비의 토문강이 곧 투먼 강을 가리킨다고 강변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후 대한제국은 청나라와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함에 따라 간도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1897년 이후 2차례의 상세한 현지답사를 통해 간도뿐만 아니라 연해주까지 우리 국토임을 확신한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에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로 임명하여 간도 주민에 대한 직접적인 관할권을 행사토록 조처하였다. 이에 따라 청나라 측과 잦은 충돌이 일어나게 되자 조선정부는 분쟁의 확대를 꺼려 1904년에 이범윤을 소환했다. 그러면서 양국은 선후장정이라는 잠정적 문서를 통해 정확한 감계가 있을 때까지 종래와 같이 투먼 강을 경계로 각자의 영지로 삼고 불법 월경하지 않을 것을 약정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이 청나라에 대하여 전쟁기간에 감계문제의 재개중지를 종용하였으므로 감계문제는 중단되었다. 이후 을사조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불법적으로 청나라와 간도협약(1909. 9. 7)을 맺음으로써 간도의 영유권을 청국 측에 양도하고 말았다.

-출처: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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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甛 蜜 蜜 - 鄧麗君

甛  蜜  蜜 祢  祢  笑   的 甛   蜜 蜜      ( 달콤해요, 당신의 미소는 달콤해요 )

tian mi mi ni  ni  xiao de tian mi mi

好   像    花 人 開   在   春   風   里     (마치 꽃바람 속에 꽃이 피는 것 같아요 )

hao xiang hu ar kai  zai  chun feng li

芥   在   春    風   里                          ( 봄바람 속에 있어요 )

kai  zai  chun  feng li

在   那  里 在   那  里 見  過   祢        ( 그 곳에서 당신을 봐요 )

zai  na  li  zai  na  li  jian guo ni

祢 的 笑   蓉     這   樣   想   熟  悉    ( 당신의 미소는 그렇게 익숙해요 )

ni de xiao ryung zhe yang shu  ruo xi

我  一 時  想   不  起                        ( 나는 잠시 아무 생각도 못해요 )

wo yi shi xiang bu qi

阿  在  夢   里                                  ( 아..... 꿈 속에 있어요 )

a.....zai meng li

夢    里 夢   里 見  過  伊                  ( 꿈 속에서, 꿈 속에서 당신을 봐요 )

meng li meng li jian guo ni

 蜜  笑   得 多   甛  蜜                      (달콤해요, 미소는 너무 달콤해요 )

tian mi xiao de duo tian mi

是祢是祢夢見的就是 祢 (당신이예요, 당신이예요, 꿈 속에서 본 건 바로

shi ni shi  ni meng zian de jiu  shi ni   당신이예요 )

在   那  里 在   那  里 見   過  祢      ( 그 곳에서 당신을 봐요 )

zai  na  li  zai  na  li  jian guo ni

祢 的 笑   蓉     這   樣   想   熟  悉  ( 당신의 미소는 그렇게 익숙해요 )

ni de xiao ryung zhe yang shu  ruo xi

我  一 時  想   不  起                       ( 나는 잠시 아무 생각도 못해요 )

wo yi shi xiang bu qi

阿  在  夢   里                                 ( 아..... 꿈 속에 있어요 )

a.....zai meng 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