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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재송여중 부장연수 -오키나와블루 2

by 황교장 2014. 1. 18.

재송여중 부장연수 -오키나와블루 2

 

아침 6시에 일어났다. 목욕을 하고는 창문을 열자 푸른 바다와 수영장이 주변 경치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7시에 호텔 조식뷔페로 아침식사를 하고는 8시에 출발하였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리성(首里城)이다. 수리성은 유구국의 왕성이었다. 오키나와(冲繩)는 원래 류큐 왕국(琉球王國)의 독립국이었다.

수리성은 나하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버스는 천천히 산등성이로 올라간다. 한창을 올라가자 지하주차장이 나왔다. 지하주차장에서 수리성 입구로 바로 연결이 되었다.

 

 

가장 먼저 우리들을 맞이하는 문이 수례문(슈레이문)이다. 편액에 수례지방(守禮之邦)이라고 새겨져 있다. 예절을 중시하는 나라라는 의미다. 이 문은 쇼신왕 시대(1527-1555)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오백 년의 세월을 견딘 문이다.

 

수례문을 지나자 길가에는 꽃이 피어 있다. 아는 꽃이 있어 반가웠다. 이파리가 머위와 닮은 털머위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늦가을에 피는데 이곳에는 한겨울에 피어 있다.

 

 

꽃이 있어 정겨운 길을 조금 걷다보니 오래된 문이 하나 나타났다. ‘소노한우타키시몬(園比屋武御嶽石門,원비옥무어악석문)’이라 불리는 문으로 국왕이 외출할 때 무사평안을 이 돌문에 빌었다고 한다. 이 문이 바로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류큐의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이 문은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석문이 있는 주변의 숲을 ‘소노한우타키’라고 한다. ‘우타키’는 ‘선조의 영혼이 머물고 있는 성역’을 의미하는데 오키나와 곳곳에 ‘우타키’가 있다.

 

 

이 문을 지나면 歡會門(환회문,칸카이몬)이 나온다. 수리성의 정문이다. 중국황제의 사자 등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환영한다는 의미다. 환회문을 지나면 서천문(瑞泉門, 즈이센몬)이 나온다. 서천은 상서로운 샘을 뜻한다.

 

 

 이는 서천문 바로 앞에 있는 용수(솟아나는 물)에서 연유한다. 이 물은 국왕일족의 중요한 식수로 사용되었고 또한 중국의 책봉사가 방문했을 때에는 숙소인 천사관까지 배달되었다고 한다.

 

 

용수의 용 조각은 1523년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용수 바로 위에 비석이 두 개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중산제일이다.

 

 

그런데 청나라의 강희제(康熙帝)와 가경제(嘉慶帝)의 연호가 새겨져 있다. 이는 일본보다는 청나라의 지배를 더 많이 받았다는 의미로 보인다.

 

 

다음 문은 누각(漏刻)문이다. 누각문의 누자가 샐 루(漏)이고 각은 새길 각(刻)자를 사용했는데 이해가 잘 되지를 않아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가이드는 못 들은 척하면서 누각문 밑에 있는 나무로 된 문지방을 가리키면서 이 나무가 무슨 용도로 쓰였는지를 질문을 한다.

 

 

우리 중 한 분이 답을 맞추었다. 이렇게 큰 문지방을 넘어가려면 저절로 고개를 숙여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나무 문지방을 넘으면 고개가 저절로 숙여져 누가 보아도 국왕에게 자연스럽게 경의를 표시하는 자세가 나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누각문의 한자 뜻을 알지 못하고 나중에 오부장이 팸플릿에 나와 있는 설명서를 보여주어서 이해가 되었다. 누각문(로코쿠몬)은 성루 안의 물시계로 시각을 잰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되어 있었다. 각(刻)은 중국의 책력인 시헌력(時憲曆)에서 하루의 12분의 1인 1시간을 8로 나눈 것, 곧 15분 동안을 말한다.

 

 

누각문을 지나면 매표소가 있다. 한자로 발매소라고 적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우리 일행은 그냥 지나쳤다. 그러면서 가이드가 하는 말이 걸작이다. 이 정전에 들어가려면 매표를 해야 하는데 800엔이라고 한다. 볼 것도 없는데 돈이 너무 아깝다고 하였다. 이유인즉 오키나와 전투 때 모두 소실되고 지금의 건물들은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조선 태조 때 지은 경복궁이 임진왜란 때 불타고 없어져서 지금의 경복궁은 대원군이 다시 복원한 것이니 볼 필요가 없다는 논리와 똑 같다.

 

오키나와에 오기 전에는 이 정전이 가장 보고 싶었다. 수리성의 정전이야말로 수리성을 대표하는 문화유적지이다. 수리성 정전은 약 500년에 걸쳐 류큐 국왕의 왕궁으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문화를 융합한 독특한 건축양식과 정원석의 배치 기술에는 높은 문화적,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수리성은 1427년 이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크기는 동서 400m, 남북 200m에 이르며 류큐왕국의 전통양식으로 지어졌다. 개인적으로는 수리성의 정전에 걸려 있다는 명문이 보고 싶었다. 이 명문에는 “유구는 삼한의 빼어남을 모아 대명을 보차로 삼고 일성(일본)을 순치로 삼는다”라고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삼한, 곧 한반도를 앞세우고 중국과 일본을 본받는 문화수용을 내세운 것이라고 주장을 했다. 이처럼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 바로 이 수리성이다.

 

 

우리 일행은 시내의 경관이 가장 잘 보이는 전망대로 갔다. 수리성의 정전을 들어가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전망대에서 수리성 뒷모습만이라도 잘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단체 관광의 한계는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정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나하시 일대가 훤히 다 보였다. 이곳은 외적의 침입이 한 눈으로 관찰을 할 수 있는 군사적인 요충지이다.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성씨」(박기현, 역사의 아침, 2007)에 의하면 오키나와 각지에서 상감청자가 출토되었을 뿐 아니라, 고려 광종 대에 제작된 동종이 현존하며, ‘우라소에’ 성터에서 계유년고려와장조(癸酉年高麗瓦匠造)라는 명문기와장들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는 1392년부터 1840년까지 총 437건의 유구국 관련 사료가 실려 있다. 이중 특징적인 것은

 

‘태조 1권 1(1392)년 8월 18일 유구국 중산왕이 사신을 보내 조회하다’

‘태조 3년(1394) 9월 11일에 유구국 중산왕 찰도가 사신을 보내 문서와 예물을 바치고, 피랍된 남녀 12명을 돌려보내는 한편, 망명한 산남왕의 아들 승찰도를 돌려보내달라고 청하였다.’

‘태조 7년(1398) 2월 16일에 유구국(琉球國) 산남왕(山南王) 온사도(溫沙道)가 그 소속 15인을 거느리고 왔다. 사도(沙道)가 그 나라의 중산왕에게 축출당하여 우리나라 진양에 와서 우거하고 있으므로, 국가에서 해마다 의식을 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나라를 잃고 유리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어 의복과 쌀, 콩을 주어 존휼(存恤)하였다.’

‘태조15권7년10월 15일 산남왕 온사도가 죽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유구국의 국왕인 산남왕 온사도가 조선에 망명을 올 정도로 오키나와는 우리나라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수리성을 뒤로 하고 버스는 교외로 달리고 있다. 길가 곳곳에 무덤들이 많다. 이 무덤들은 일본 본토의 무덤과는 양식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과거 유구국에서는 우리의 섬지방인 청산도 등지에 남아 있는 초분(草墳)과 매우 비슷한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초분은 죽은 사람을 땅에 바로 묻지 않고 이엉으로 덮어 두었다가 몇 년 뒤 남은 뼈를 추려 땅에 묻는 매장법이다.

 

그러나 일본에 병합됨으로써 화장을 해서 다시 무덤을 만든다. 이는 과거와 현재가 절충된 형태다. 본토에는 동네 한가운데에도 무덤들이 많이 있는데 이곳은 비교적 쓸모 없어 보이는 모퉁이에 무덤들이 많이 있다.

우리의 풍수이론으로 보면 아주 흉지로 보이는 곳에 무덤을 조성한 것이다. 흉지에 분묘를 해서 아직도 독립을 하지 못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차는 만좌모(万座毛) 입구에 도착을 했다. 만좌모는 오키나와 중부 관광지 중 가장 유명한 곳이다. 만좌모는 18세기 초 이곳에 들른 류큐왕 쇼케이가 ‘만 명이 앉기에 충분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공기가 다르다. 차 안에는 에어컨을 너무 많이 틀어놓아서 추웠는데 내리자 훈훈한 바람이 볼에 살짝 와 닿아 몸과 마음이 쾌적하다.

 

 

처음 보는 열매가 나무에 달려 있다. 먹지 못하는 파인애플 종류의 열매라고 한다. 유유자적하게 경관을 즐기면서 걸어가자 바닷가 절벽에 코끼리 한 마리가 바로 앞에 턱 버티고 있다. 기이하게 형성된 절벽이다. 영락없이 코끼리의 두상을 닮았다.

 

 

 

 

코끼리바위 앞에 펼쳐진 에메랄드 물빛, 끝없는 수평선, 푸른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우리 일행들의 표정도 한없이 맑고 밝다. 만좌모를 한 바퀴 돌고는 아쉬움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다음 목적지인 나고 파인애플 공원으로 향했다.

 

 

 

 

만좌모에서 이어지는 해안 풍광은 눈을 잠시도 뗄 수가 없을 정도다. 한 참을 무념무상으로 해안선을 감상하자 나고시가 나왔다. 이곳에는 학교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건물들이 많이 낡았다. 도색이 제대로 잘 되어 있지 않아 우중충하다. 외관상으로는 우리나라의 학교보다 못해 보였다.

 

 

시내를 조금 벗어나 파인애플 공원에 도착을 했다.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과일인 파인애플을 주제로 한 테마파크이다. 파인애플 모양의 전기차인 파인애플호를 10여 분 동안 타고 파인애플과 다양한 아열대식물이 자라고 있는 농장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올라간다.

 

 

차를 타자마자 마음이 동심으로 돌아갔다. 흘러나오는 음악도 동요다. 운전을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차가 나아갔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오부장이 자기가 운전을 하는 것처럼 한껏 폼을 잡아본다. 주변의 경관도 동화 속의 풍경 그 자체다. 각종의 파인애플 나무들과 열대수림으로 된 정원은 정신 연령을 50년이나 후퇴시켜 놓았다.

 

 

 

전기차에서 내리자 파인애플을 먹기 좋게 깎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다른 사람들은 맛있다고 먹고 있는데 신 것을 안 좋아하는 나는 두 개를 먹고는 그만두었다. 한껏 먹고는 다양한 상품들이 전시된 공간을 통해 내려갔다.

 

이곳에는 파인애플로 만든 와인, 과자, 빵 등 100여 가지에 가까운 다양한 제품을 팔고 있다. 특히 발을 잡은 곳은 파인애플로 만드는 와인공장이다. 맛보기로 먹어보니 향기가 일품이다. 파인애플 와인을 종류별로 한 병씩 구매했다. 이들의 상술은 참으로 대단하다. 특산품을 팔면서도 입장료는 별도로 받는다. 이중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본받을 점이 많다고 생각된다.

나고파인애플공원을 나와 점심식사를 했다. 두부로 된 정식이다.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점심을 먹고는 일본 최대 규모의 수족관인 츄라우미 수족관이 있는 오키나와 국영기념공원으로 향했다.

 

차창에 기대어 스쳐 지나가는 새로운 풍광들을  감상하면서 눈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데 누군가가 큰소리로 ‘벚꽃이다’라고 외쳤다. 대구에서 왔다는 두 분 중 한 분이다. 1월 초인데도 길가에 벚꽃이 피어 있다. 우리나라의 벚꽃과는 조금 다른 진한 핑크색을 띠고 있다.

오키나와는 1월부터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일본 본토와는 다른 ‘하칸자쿠라’ 라는 종류의 벚꽃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벚꽃은 남쪽에서 피기 시작하여 북쪽으로 올라오는데 이곳의 벚꽃은 북쪽에서 처음 피기 시작하여 남쪽으로 내려온다. 이는 기온 저하와 함께 개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해발이 높은 곳이 먼저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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