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송여중 부장연수-오키나와블루4
여행기를 마치면서 오키나와에 대해 정리하고자 한다.
류쿠는 면적 2,265㎢이고 동서 약 1,000㎞, 남북 약 400㎞의 해역에 분포된 크고 작은 섬들로 형성되어 있다. 온난한 아열대 기후로 드맑은 바다는 산호로 덮여 있다.
이곳 사람들은 느긋한 성격으로 약속시간에 늦는 것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탕수수, 양식해초, 파인애플, 담배, 류우큐우 가스리(琉球絣), 도자기 등이 특산품이다. 오키나와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장수지역이다. 오키나와 사람들의 장수 비결은 이들의 식탁, 즉 음식에 있다고 말한다.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식재료인 고야는 홍두깨 크기에 도깨비 방망이처럼 울퉁불퉁한 돌기로 덮여 있다. 우리말로는 ‘여주’라고 하는 오이의 일종이다. ‘쓴맛 나는 오이’라고 보면 된다. 입에는 쓰지만 건강에는 아주 좋다. 특히 당뇨에 좋다고 한다. 비타민C 함량은 레몬의 5배인데다 가열해도 손상이 거의 없다고 한다.
또한 오키나와에선 ‘돼지가 없으면 음식이 안 된다’고 할 정도로 돼지고기를 많이 먹는다. 고기 섭취량이 상당한데도 건강할 수 있는 건 요리법 덕분이다. 전통적인 돼지고기 요리법은 물에 오래 삶아서 지방을 제거한 다음 조리거나 볶아 먹는 것이다. 즉 간장과 흑설탕, 전통 소주 ‘아와모리(泡盛)’에 조린 돼지삼겹살이다.
오키나와는 사탕수수가 많이 나는데, 이 사탕수수 즙을 짜내 끓여 졸이면 흑설탕이 된다. 흰설탕은 흑설탕을 정제해 만든다. 흑설탕은 흰설탕보다 영양성분은 많고 열량은 적다.
오키나와 특산품 중에 고구마로 만든 고구마 타르트가 있다. 이 고구마는 우리나라에 전래된 원조 고구마다. 고구마는 멕시코와 남미 지역이 원산지다. 약 이천 년 전부터 남미에서 재배되었다고 한다. 필리핀을 거쳐 중국에 전해졌다. 중국에서 다시 유구국으로 전해져 가고시마의 사쓰마번으로 자연스럽게 전해졌다.
1715년에 쓰시마에서 사쓰마번에 잠입해 종자를 밀반출하여 대마도에서 재배되기 시작했다. 쓰시마에서는 부모를 굶주림에서 구한다는 의미로 고구마를 코코이모(孝行芋)로 발음 된다. 즉 코코이모가 한국에 들어와 고구마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은 1763년 통신정사 조엄이 대마도 사스나에서 처음 보고 가져왔다. 부산의 절영도에서 처음으로 재배하였다고 한다.
오키나와의 역사를 살펴보면
12세기부터 오키나와섬을 포함한 류큐제도에서는 몇 개의 집단이 세력을 다투다 1429년 통일국가인 유구(류쿠)왕국이 건설된다. 류큐왕국은 일본, 조선, 중국, 대만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밀접한 중계무역을 통해 번성했다.
도쿠가와 시대인 1609년에 사츠마번의 침략을 받고 조공국이 된다. 곧 이어 청나라에도 굴복하여 조공을 계속하게 되지만 사츠마번과 청나라 양쪽에 예속된 체제를 이어가면서도 독자적인 국가와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힘썼다. 그러다가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79년에 일본이 다시 침략하여 일본 본토에 귀속시켰다.
일본이 류큐를 침략하는 과정은 조선 침탈과정과 비슷했다. 1879년 완전 합병에 앞서 1872년에 메이지 정부가 류큐를 번(藩)으로 바꿔 버렸다. 이듬해에는 외교권, 사법권을 빼앗고 고유언어를 금지시키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였다.
세월이 흘러 1945년 3월 26일 새벽, 미군은 오키나와 본섬 동쪽에 있는 게라마에서 미일 간 최대 지상전을 치렀다. 4월 1일에는 오키나와 본섬 동해안에 상륙했다. 그로부터 약 3개월간 54만 명의 미군이 류큐의 왕성옛터에 투입되었다. 이에 비해 일본 병력은 겨우 6만여 명, 일본은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하여 만 14세에서 70세까지의 오키나와 주민들을 전쟁에 강제 동원했다.
세계역사 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고 비참했던 오키나와 전투는 희생자 총 30여 만 명 중 류큐 주민이 22여 만 명, 미군이 약 1만 2천명, 일본군이 약 5만 5천명, 징용이나 종군위안부로 끌려온 한국인 약 1만 명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였다. 미군은 오키나와 본도뿐만 아니라 류큐군도 남부의 미야코, 아에야마, 북부인 아마미와 오시마 제도에 진주했다. 점령군으로서 류큐군도를 일본 본토에서 분리시키고 이곳을 차지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오키나와 내 미군기지가 전후 처음으로 다른 나라 공격의 출격기지로 사용되었다. 이후 류큐는 태평양의 요석(keystone of Pacific)으로 불리며 전략의 요충지로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전후 처리를 두고 미국과 일본이 강화조약을 맺었는데, 그 안에는 류큐를 미국에게 주고 일본은 독립국으로서 지위를 회복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결국 일본은 도마뱀의 꼬리인 류큐군도를 잘라서 미국에 내어 준 덕분에 몸체를 온전히 보전하게 되었다. 일본을 추방하고 류큐의 새 주인이 된 미국은 류큐인에게 많은 자치권을 주었다.
미군정은 의식적으로 ‘오키나와’란 일본식 용어 대신에 원래의 ‘류큐’를 쓰길 장려했으며 일왕의 연호 사용을 금지했다. 류큐인은 일정기간의 자치 뒤에는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1962년 사모아 독립에 이어, 1970년 피지와 통가 등 류큐보다 면적이 작고 인구도 적고 역사도 일천한 태평양의 여러 군도들이 속속 독립국이 되어 갔다. 이에 자극을 받은 류큐의 독립지사들은 일본제국에 무력으로 점령되었던 옛 류큐 왕국을 류큐 공화국(琉球共和國, Republic of the Ryukyus)으로 되살려 명실상부한 독립국 수립을 최고강령으로 하는 ‘류큐독립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1972년 5월 15일, 미국은 일본에게 오키나와를 반환했다. 이는 류큐인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그 후 류큐는 다시 ‘오키나와’로 불리게 되었고, 미국식으로 우측에서 달리던 차들은 하루 아침에 일본식으로 좌측으로 달리게 되어 혼란이 극심했다고 한다.
아름답고 평화롭게만 보이는 오키나와가 이처럼 아프고 슬픈 역사가 숨겨져 있다. 이승신 시인의 ‘그 외침’이라는 시가 이런 아픔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 외침 / 이승신
내가 오키나와에 대해 아는 거라곤
미군 기지가 있다는 것
세계 제일의 장수국
그리고 따뜻할 것이라는 정도였다
그 추운 날
오로지 따뜻하다는 것 하나 때문에 왔는데
이런 기막힌 역사가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으리라곤 상상을 못했다
미국의 삶 20여 년에
그리워했던 고국이 진력이 나려 할 무렵
거기서 되도록 멀리 달아나려는 음모를 몰래 세웠다
아직 24시간이 채 되지 않았는데
힘이 없어 일본에 망해 버린
류큐 왕국의 그 소리 없는 외침에
수 없이 외침을 당했던 내 조국을
떠올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 넓은 세계 어디로 달아나도
꼭 따라 다니는 조국
그리고 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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