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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재송여중 하계 직원연수 2-녹우당

by 황교장 2014. 8. 23.

녹우당

2014 재송여중 하계 직원연수 2

 

두륜중학교를 탐방하고는 고산 윤선도 선생의 생가인 녹우당으로 향했다. 녹우당은 전라남도에 남아 있는 민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집이다. 녹우당은 우리나라 시가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고산 윤선도선생(1587-1671)의 고택이자 공재(恭齋) 윤두서(1668-1715) 선생의 고택이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가 공재 윤두서이다. 공재선생은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의 삼재(三齋)로 불린다.

고산은 봉림대군(효종)과 인평대군의 사부였다. 봉림대군인 효종은 즉위 후 선생에게 수원에 집을 지어 주었다. 효종이 죽자 수원집의 일부를 뜯어 옮겨 온 것이 지금의 사랑채다. 이 사랑채의 이름이 녹우당(綠雨堂)이다. 그러나 지금은 해남 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녹우당이라 부른다. 집 뒤 비자나무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푸른 비가 내리는 듯한 소리를 낸다고 하여 녹우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동하는 차안에서 우리 선생님들에게 녹우당에서 꼭 보아야 할 세 가지 있다고 강조를 했다. 동국진체의 창시자인 옥동 이서가 쓴 녹우당 현판 글씨와 국보 제240호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그리고 공재의 손자인 청고 윤용(靑皐 尹溶, 1708-1740)의 작품인 것으로 추정되는 미인도는 꼭 보아야만 녹우당에 온 보람이 있다.

 

녹우당은 집터만 만 평에 이르고 주변까지 다 합치면 백만 평은 될 정도다. 풍수를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아늑함과 호방함을 동시에 주는 곳이다. 이집 풍수를 설명하면서 앞에 안산에 있는 작은 봉우리를 문필봉으로 설명을하자 지나가는 분이 수정을 해준다. 앞에 있는 안산은 연적봉이고, 문필봉은 백호맥에 있는 저 봉우리가 문필봉이라고 한다. 과연 그랬다.

이분의 풍수 실력이 보통이 아니어서 이 동네에 사는가를 물어 보았더니 녹우당 차종손이라고 말한다. 눈여겨 관상을 보니 범상한 상이 아니다. 이분의 관상이 전형적인 양반의 관상이다. 이마, , 전체적인 윤곽이 하회탈 중 양반탈의 관상과 많이 닮았다고 우리 선생님들에게 설명을 했다.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다고 인사를 했다.

 

이 동네 풍수를 개괄적으로 보면

 

 

첫째, 뒷산인 덕음산(德陰山)이 북현무이다. 덕음산은 높지도 낮지도 않고 적당하다. 오행의 분류 상 토의 형상을 하고 있다. 산의 정상 부분이 한 일 자처럼 평평한 산을 풍수에서는 토체라고 한다. 사주에서 토는 믿음을 뜻한다. 또한 믿음은 덕으로도 표현된다. 덕음산은 덕의 그늘이 있는 산, 믿음의 그늘이 있는 산이 되는 셈이다.

둘째, 남주작을 살펴보자. 남주작은 집 앞에 있는 산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안산(安山)이라고 한다. 안산은 너무 높아도 안 되고 너무 낮아도 안 된다. 또한 너무 멀어도 안 되고 너무 가까워도 안 된다. 중용지도다. 이 중용이야말로 덕이다. 녹우당의 안산이 바로 중용지도의 산이다. 생긴 모습도 볏단을 쌓아 올린 노적봉을 닮았다. 또한 보는 관점에 따라서 벼루인 연적을 닮았다. 이는 재산도 풍족하고 문장도 뛰어나다는 의미다.

 

셋째, 좌청룡과 우백호를 살펴보자. 좌청룡은 집을 등지고 보았을 때 왼쪽 방향이고, 우백호는 오른쪽 방향이다. 풍수에서는 남향집을 최고로 친다. 따라서 왼쪽은 동쪽을 뜻하고, 오른쪽은 서쪽을 뜻한다. 동쪽은 오행에서 푸른색을 의미한다. 따라서 동쪽에 있는 산세가 좌청룡이다. 서쪽은 오행에서 흰색을 의미한다. 따라서 서쪽의 산세는 우백호이다.

일반적으로 풍수에서 좌청룡은 청룡이 꿈틀거리는 형상이 좋고, 우백호는 백호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형상이 좋다고 한다. 녹우당의 좌청룡, 우백호는 이 이론에 적합하다. 좌청룡과 우백호의 실질적인 기능은 바람을 막아주는 데 있다. 장풍득수(藏風得水, 바람을 감추고 물을 얻음)를 줄여서 풍수(風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녹우당은 좌청룡과 우백호가 세 겹으로 둘러싸여 있어 바람을 잘 막아준다.

이곳 박물관에는 4,6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전에 있던 박물관을 헐고 새롭게 잘 조성하였다. 대부분 고산과 그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와 관련된 유물이 많다. 그 중에는 초상화 중에서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국보 제240호 윤두서 자화상이 있다. 또한 지정14년 노비문서(보물 제483)는 고려시대 개인의 노비문서로는 유일한 것이다. 이는 이 집의 내력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말해 준다. 해남 윤씨 가전고화첩(보물 제481), 윤고산 수적관계문서(보물 제482) 등 가치 있는 문화재가 많이 있다.

 

박물관에 들어가자 해남군청에서 파견된 해남 윤씨 출신인 문화유산해설사가 반갑게 맞이해준다. 해설사를 따라 전시된 작품들의 해설을 들으면서 간간히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 중 이곳에 전시된 녹우당 현판이 옥동 이서가 쓴 진본이라고 내가 말하자, 녹우당에 걸려 있는 것이 진본이고 이곳 박물관에 보관된 현판은 모조품이라고 한다.

 

 

미인도 앞에 이르렀다. 내가 이곳에 올 때마다 가장 오랜 시간동안 머물러 있는 곳이 바로 미인도 앞이다. 미인도 앞에서 해설사가 질문을 한다. 우리나라에서 미인도로 유명한 그림이 무엇인지?

내가 신윤복의 미인도라고 대답하자 역시 교장선생님이 많이 아신다고 하면서 또 다른 질문을 한다. 이 미인도는 신윤복의 미인도와 비교하면 값이 아주 싸다고 한다.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내가 작자 미상이라고 하자. 해설사 왈 낙관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낙관은 누구의 그림인지를 명확히 해주는데 이 미인도는 낙관이 없기 때문에 작자가 정확히 누구인지를 알 수 가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공재의 손자인 윤용의 작품으로 추증되고 있다.

해설사가 또 다른 질문을 한다. 이 미인도의 주인공은 부인, , 기생 중 누구인지? 내가 첩이라고 대답하면서 절대로 부인은 아니라고 했다. 정답은 해설사도 모른다고 했다. 이 미인도의 특징 중 하나는 머리채이다. 지금 이처럼 만들려고 하면 억대의 돈이 들어간다고 한다.

내가 왜 첩인가를 미인도의 관상으로 풀이하고자 한다. 미인도의 관상을 보면 반달 같은 눈썹에 쌍꺼풀이 없는 보통 크기의 눈, 도톰한 볼과 순한 귀, 꼭 다문 아주 작은 입술, 통통한 손에 가는 손가락, 가는 허리에 부풀려진 엉덩이, 가슴은 천으로 바짝 조여 볼륨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저고리는 너무 짧아 겨드랑이 밑 살결은 살짝 보이도록 했다.

관상학에서 볼 때 이 미인도의 첫 번째 특징은 입술이다. 실제보다도 아주 작게 그리고 입술 색은 아주 붉게 표현한 것이다. 동양 관상에서 입은 생식기와 동일시하여 입이 너무 크면 천하게 본다. 입이 큰 여자는 오히려 남자를 먹여 살린다고 한다. 따라서 이 당시의 미인은 입이 작아야 한다.

두 번째 특징은 눈에 쌍꺼풀이 없다는 것이다. 눈이 크고 쌍꺼풀이 있는 관상은 지조가 없다고 보았다. 눈이 크면 유혹에 약해 헤프게 보았다.

세 번째 특징은 가는 허리에 큰 엉덩이이다. 이것은 현대 미인의 조건과 마찬가지다. 건강미와 선정미를 동시에 나타내기 때문이다.

네 번째 특징은 손과 손가락이다. 손은 통통해야 남편복이 있고, 손가락은 가늘어야 섬세하고 여성다워 예로부터 귀한 상으로 여겼다.

다섯 번째로 가슴은 작아 보이도록 조아 매었다. 가슴이 너무 크면 무지해 보여 꺼렸다. 미인도의 여인이 입고 있는 옷을 보면, 한복이 그러하듯이 다른 부분은 다 가렸는데,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겨드랑이 부분을 살짝 드러내어 보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것을 종합해 볼 때 부인과 기생으로는 부적합하다. 이유인즉 입이 이처럼 작으면 재산이 붙지 않고 자식이 어렵다. 그래서 부인으로는 부적합하다. 입과 눈을 보면 기생으로도 비교적 부적합하다. 기생은 많은 남자를 상대해야 되는데 이러한 눈과 입으로는 기생으로는 부적합하다. 따라서 정답은 첩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박물관을 나와 녹우당으로 갔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 수리중이어서 관람이 불가하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마을 뒤에 있는 비자림으로 갔다. 풍수 상 이 덕음산은 산 가운데 바위가 많은 것이 결점이다. 뒷산의 바위가 드러나면 가난해진다 하여 이 집의 시조인 어초언의 유언에 따라 바위가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비자나무를 심고 관리했다고 한다. 이 비자림의 수령이 오백년 전후이고, 면적은 구천 평에 달한다. 또한 천연기념물 제2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집 선조들의 예지와 노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비자림을 보고는 우리나라에서 백련이 가장 먼저 심어졌다는 백련지로 향했다. 백련이 한창이다. 백련지에서 바라보는 이 마을의 경관 또한 일품이었다.

 

이 집이 배출한 인물 중 우리나라 시가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고산 윤선도선생(1587-1671)과 공재(恭齋) 윤두서(1668-1715) 선생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시조시인인 고산에 대해 우리가 잘 모르는 부분이 있다. 바로 풍수실력이다. 고산을 풍수의 최고 단계인 신안(神眼)’이라고 극찬한 사람은 당대 최고의 풍수학자이기도 한 정조대왕이다.

풍수지리에 정통한 고산은 효종이 승하하자 좌의정 심지원의 추천으로 왕릉 선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여러 곳을 답사하고 난 뒤 수원 땅을 최고의 길지로 추천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송시열, 송준길 등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훗날 정조는 고산이 추천한 곳의 진가를 알아보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는데 그곳이 바로 수원 화성의 융릉(隆陵)이다.(주간동아 353호와 448호 참조)

 

선생의 풍수실력은 이처럼 대단했다. 또한 고산의 묘는 해남 윤씨의 부귀를 가져다주고, 18천 가구의 후손으로 번창하게 한 명당으로도 유명하다. 이의신과 고산 사이의 명당 빼앗기전설은 이 고장뿐만 아니라 풍수가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래 고산의 묘 자리는 고모부라고 알려진 명풍(名風) 이의신이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잡아놓은 자리였다고 한다. 고산과 이의신이 연동에서 같이 지낼 때 이의신이 밤중이면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가 한식경이 지나면 들어오기를 자주 했다. 이를 의아하게 생각했던 고산은 필시 이의신이 자기가 죽은 뒤 쓸 묘 자리를 구하러 나가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하루는 술을 취하게 권한 뒤 곯아떨어지게 하였다. 이의신이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한 고산은 이의신이 항상 타고 다니는 나귀를 타고 채찍을 휘둘렀다.

 

나귀는 밤이면 그 주인이 매일처럼 다녀오는 길을 따라 내달렸다. 나귀는 깊은 산으로 들어가더니만 어느 산중턱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고산이 주위를 살펴보니 나귀 똥이 많이 널려 있고 담배를 피운 흔적이 있어 이의신이 이곳에 온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주변 지세를 살펴보니 천하의 명당이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가묘를 해놓은 후 집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잠을 잤다.

다음날 이의신에게

"제가 신후지지를 하나 잡아 놓았는데 좀 보아 주십시오."

라고 능청을 떨며 말하였다. 이의신이 고산이 인도하는 곳으로 가보니 자기가 잡아 놓은 바로 그 자리였다. 그는 알았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역시 명당은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로구나!"

하면서 좌향을 바로 잡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산이 이의신의 자리를 빼앗았다기보다는 이의신에게 풍수를 배우는 과정에서 좋은 자리를 추천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유인즉 선생의 묘소가 있는 금쇄동은 면적이 120여 만 평으로 지금까지도 종가 소유로 전해온 고산의 땅이기 때문이다.

 

녹우당이 배출한 인재들 중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분은 윤두서(1668~1715) 선생이다. 선생의 호는 공재(恭齋). 공재선생은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의 삼재(三齋)로 불린다.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당쟁이 심해져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화로 생애를 보냈다. 경제·병법·천문·지리·산학·의학·음악 등 각 방면에 능통했다. 특히 화가로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자화상’, ‘노승도(老僧圖)’ 등 불멸의 명작을 많이 남겼다.

당시에 일국의 재상이 되고도 남을 높은 지식과 도덕을 갖춘 인물로 평가될 만큼 개인적인 자질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대대로 남인 계열이었던 집안의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노론 세력이 집권하면서 벼슬에 대한 꿈은 접어야 했다. 또한 가족과 친구들의 죽음을 계속 겪으면서 괴로운 날의 연속이었다. 결국 해남 녹우당에 내려와서 48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조선후기에 대두된 실학은 공재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실학은 전통 유학의 관념적 태도를 극복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 및 경세치용(經世致用) 등을 구현하고자 했다. 실학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을 시작으로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거쳐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체계화되어 다산 정약용이 집대성하게 된다. 실학을 말할 때 공재를 제외하면 이야기가 안 될 정도로 실학의 한 가운데에 공재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해답은 다음과 같다.

 

공재는 당대 최고의 명문인 해남 윤씨의 종손이다. 고산 윤선도가 그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약용은 공재 친손녀의 아들인 외증손자다. 또한 공재의 첫째 부인은 지봉 이수광(1563~1628)의 증손녀다. 그리고 공재의 친한 벗은 녹우당 현판을 쓴 동국진체의 창시자 옥동 이서(1662~1723)와 그의 동생인 성호 이익(1681~1763)이다.

반계 유형원(16221673)과의 관계는 반계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 금쇄동에 대한 기록으로 알 수 있다. 금쇄동은 동국지리지에서 최초로 언급한 곳으로 반계가 공재와의 교유를 통해 정보를 얻었거나, 공재가 살고 있는 녹우당에 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이수광-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실학의 계보가 모두 공재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공재 윤두서의 삶과 학문과 예술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배경이다.

 

특히 공재와 가장 가까운 친구는 옥동 이서다. 옥동은 대사헌 이하진의 아들이며 이익의 셋째 형이다. 옥동과 공재는 학문과 예술의 평생 동반자였다. 옥동의 문집이 녹우당에 보관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공재와 옥동은 또 집안 형제끼리도 매우 가까웠다.

성호 이익은 공재가 세상을 떠났을 때 통곡의 제문에 "우리 형제는 자신이 없었지만 공의 칭찬을 듣고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라고 회상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나니 모르는 것을 들을 곳이 없게 되었다"라고 아쉬워했다.

천하의 이익선생도 공재를 이렇게까지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보아 공재가 당대 최고의 지식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제 공재가 남겨 놓은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공재의 최고 작품으로 불리는 것은 국보 240호인 자화상이다.

 

 

 

이 자화상은 숱한 의문으로 이름 높다. 초상화에 목과 상체는 물론 귀도 없이 머리통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대부 지식인인 공재가 유교적 미의식을 정면으로 벗어나면서까지 엽기적인 자화상을 그린 까닭은 무엇일까? 왜 최고의 걸작인 자화상을 미완성 그림처럼 그린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논란거리인 공재의 머리통 자화상에 얽힌 비밀이 최근 상당 부분 풀렸다. 적외선 투시 분석 결과 눈으로 보기 힘든 상체의 옷깃과 도포의 옷 주름 선의 표현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현미경으로 자화상 얼굴을 확대해 본 결과 화가가 생략한 것으로 알려져 온 양쪽 귀 또한 왜소하지만 붉은 선으로 그린 사실도 밝혀져 정교한 인물상이었음이 드러난 셈이다.

 

공재의 벗이었던 이하곤(1677~1724)자화상에 부친 시를 소개하면

“6척도 안 되는 몸으로 사해를 초월하려는 뜻이 있네. 긴 수염 길게 나부끼고 얼굴은 기름지고 붉으니 바라보는 자는 우인(羽人)이나 검객이 아닌가를 의심하지만 저 진실로 자신을 낮추고 양보하는 기품은 대개 또한 돈독한 군자로서 부끄러움이 없구나.”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우인(羽人)"전설에 나오는 날개가 있는 신선"은 우객(羽客)인데 아마 같이 의미라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자화상에 대해 평론가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그 풍모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풍만한 얼굴에 반듯한 눈썹, 정면을 응시하는 눈, 그리고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긴 수염 등은 선비의 굳건한 의지를 담고 있고, 마치 살아있는 얼굴을 보는 듯하다. 특히 정면을 응시하는 눈에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힘이 있고, 선비다운 기개에 충만해 있다. 이 자화상을 통해 학문과 삶을 일치시키고자 그 자신에게 다그쳤을 철저한 엄격성과 불운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삶을 꼿꼿하게 지켜 나간 선비의 옹골찬 지조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내면을 투시하는 듯한 형형한 눈매, 불꽃처럼 꿈틀거리는 수염, 그의 눈빛에는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 속에서 느꼈던 온갖 고뇌가 서려 있는 듯하다.”

 

평론가들은 각기 다양한 평가를 내렸지만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다. 바로 눈이다. 관상학에서 관상을 볼 때 얼굴을 10이라 보면 그 중 눈이 9를 차지한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눈은 중요하다. 선생을 오래하면 학생들의 눈빛만 보아도 모든 것을 알 수 있듯이, 관상가도 경지에 오르면 그 사람의 눈빛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자화상은 정말 강렬한 눈빛을 표현하고 있다.

 

관상에서 눈은 지혜, 의지력, 추진력, 선함과 사악함 등을 나타내는데 공재는 일국의 재상으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눈과 법령을 가지고 있다. 공재의 눈은 지혜와 의지력 추진력이 있는 눈이다. 즉 사욕이 없고 국리민복을 위한 대의를 품은 눈이다. 법령은 관상용어로 콧방울에서 입 주위로 퍼져 나가는 주름을 말한다. 법령은 지도력과 의지와 신념 등을 나타내는데 공재는 훌륭한 재상의 법령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는 리더의 법령을 가졌다.

 

그러나 자화상으로 공재의 관상을 볼 때 건강상의 결함이 보인다. 누당이다. 누당은 웃으면 눈 밑에 볼록하게 나오는 곳이다. 누에꼬치를 닮았다고 해서 누당이라고 부른다. 누당은 주로 자식복과 정력을 나타내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 부분이 처지고 힘이 없어진다. 내가 볼 때 공재의 관상에는 누당에 문제가 있다. 자화상은 공재가 45세에 그린 것이다. 45세의 나이에 이 정도로 누당이 처져 있으면 에너지가 거의 고갈이 된 셈이다. 눈의 정기는 아직도 살아 있으나, 자신의 신체적인 에너지는 다해가는 안타까운 관상이다. 이럴 때는 세상사 모든 일에서 한 발 물러나 관조의 경지로 가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체력을 서서히 다시 만들어야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체력이 바닥났는데도, 의욕과 이상이 너무 많은 눈빛이다. 그동안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쓴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이 가진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쓰면 에너지는 고갈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자신의 능력보다 벼슬이 높거나, 자신의 능력보다 역할이 많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자신의 생명이 단축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명심해야 한다. 이점은 나 자신도 자주 반성하는 대목이다.

 

녹우당을 떠나 해남읍으로 향했다. 이곳의 명물인 천일식당에서 떡갈비 정식을 먹기 위해서다. 유홍준 교수가 강진의 해태식당, 서울인사동 영희네집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한정식 집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는 식당이다. 이 집은 3대째 이어져 오고 있는 90년이 넘은 식당이다. 우리 선생님 대부분 이집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름만큼 맛있게 잘 먹고는 숙소가 있는 유선여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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