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둔사
2014 재송여중 하계 직원연수 3
차는 어느 새 대둔사 입구에 도착했다. 차는 매표소를 지나 위에 있는 주차장까지 갔다. 시간만 허락을 하면 이 길은 걸어서 가야 한다. 이 길은 아름드리나무들로 숲 터널을 이루고 있다.
갈참나무, 졸참나무, 단풍나무, 산벗나무, 동백나무, 느티나무, 삼나무, 편백나무, 후박나무, 비자나무, 물푸레나무, 박달나무 등 다양한 수종들이 어울려 울창한 숲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숲길에는 피톤치드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피톤치드는 식물이 병원균·해충·곰팡이에 저항하려고 내뿜거나 분비하는 물질로, 삼림욕을 통해 피톤치드를 마시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장과 심폐기능이 강화되며 살균작용도 이루어진다고 하는 물질이다.
오늘의 숙소인 유선여관은 영화 ‘천년학’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숙소에서의 뒤풀이는 직원연수의 백미다. 처음부터 끝까지 호호호호, 깔깔깔깔로 이어졌다. 많은 분들이 지금까지 가장 많이 웃어봤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대흥사로 향했다. 일반적으로 대둔사라면 잘 모르고 대흥사라고 해야만 사람들이 안다. 이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대둔사를 예전에 이곳에서는 한듬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은 우리말로 ‘크다’는 뜻이고, ‘듬’은 ‘둥글다’ 또는‘덩어리’라는 뜻이다. 즉 ‘큰 덩어리’라는 뜻이다. 이것을 다시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 ‘대둔’이다. 따라서 대둔사가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한듬은 한자와 섞여 대듬이 되었다가 다시 대둔(大芚)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대둔사(大芚寺)’였다. 그러나 일제 때 지명을 새로 표기하면서 頭輪山大興寺(두륜산대흥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일제 때 바뀐 이름을 바로잡은 것이 1993년이다. 그러나 아직도 절에서 붙이는 광고문 등을 보아도 여전히 대흥사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점이 아쉽다.
유선관을 나오면 바로 피안교(彼岸橋)다. 차안(此岸)의 세계에서 피안(彼岸)의 세계로 넘어온 것이다. 옛날 매표소가 있던 입구를 지나면 시원한 샘물이 나온다.
샘물을 한 잔하니 간밤에 고생한 위를 청소하는 것 같다. 조금만 더 가면 부도밭으로 이어진다.
서산대사 부도를 비롯하여 13대 종사, 13대 강사의 부도밭이다. 부도의 수는 총 56기다. 아마 우리나라 부도밭 중에서 가장 클 것이다.
담장을 따라 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것은 초의선사탑비이다. 이 탑비에 예서체로 ‘초의대종사탑명’이라는 글자가 뚜렷하게 보인다. 이 비석 뒤에 있는 것이 추사 김정희와 동갑이면서 절친한 친구인, 동다송의 저자이자 마지막인 13대 대종사이며 다성인 초의선사의 부도이다. 서산대사 부도에 새겨진 청허당 글씨도 선명하다. 대둔사는 서산대사 때문에 유명해진 절이다.
서산대사가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을 앞두고 마지막 설법을 했다. 청허당 서산대사는 제자인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처영에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해남 두륜산에 두라고 부탁했다.
불가에서 가사와 발우를 전하는 것은 자신의 법을 전하는 것을 뜻한다. 두륜산에 두어야 될 세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첫째, 三災不入之處(삼재불입지처)다. 즉 전쟁과, 기근, 전염병이 없는 땅이다.
둘째, 萬歲不毁之處(만세불훼지처)다. 대둔산은 기화이초가 항상 아름답고 옷과 먹을 것이 항상 끊이지 않아 만세토록 이어지는 땅이다.
셋째, 宗統所歸之處(종통소귀지처) 여러 제자들이 남쪽에 있고 내가 머리 깎은 곳도 지리산이니 남쪽은 종통이 돌아갈 곳이다.
그리고 임종시로 읊은 게송은
生從何處來(생종하처래) 인생은 어디로부터 오며
死向何處去(사향하처거) 죽어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오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없어지는 것일 뿐
浮雲自體本無實(부운자체본무실) 뜬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으니
生死去來亦如是(생사거래역여시) 삶과 죽음 역시 그와 같다
그리고 자신의 영정 뒷면에다 마지막 법어를 적었다. 법어의 내용은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팔십년전 거시아, 팔십년후 아시거)’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이더니, 팔십 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구나” 라고 써 놓고 결가부좌한 자세로 입적했다고 한다.
대둔사는 구역을 네 곳으로 나누어서 보아야 한다. 대웅전이 있는 북원과, 천불전과 요사체가 있는 남원, 그리고 나라에서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표충사 영역, 마지막으로 표충사에서 북암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대광명전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대웅전으로 향했다. 대웅전 가는 길에는 연리근 나무가 있다. 안내판의 내용을 보면 “햇빛을 향해, 바람을 따라 서로 부대끼고 겹쳐져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뿌리가 만나면 연리근, 줄기가 겹치면 연리목, 가지가 하나가 되면 연리지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두 몸이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각각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연인의 사랑에 비유되어 일명 사랑나무로 불립니다.”로 되어 있다.
여기까지 읽어보다가 모 선생님 왈 ‘몇 백 년을 이렇게 붙어 있다면 돌아뿌겠다’고 한다. 좋아하는 사람끼리도 몇 십 년만 살면 사랑이 희미해지는 데 싫은 사람끼리 이렇게 몇 백 년을 붙어 있다면 생불여사(生不如死)일 것이라는 뜻이다. 모든 것은 이렇게 관점에 따라 정 반대로 해석되기도 한다.
대웅전은 대둔사에서 제일 낮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절을 처음 지을 때는 아담하게 남향으로 지은 것이다. 풍수상으로도 배산임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뒤쪽은 산으로 둘러져 있고 앞에는 내가 흐르고 있다.
입구에 침계루라는 누각이 있다. 침계루의 현판의 글씨는 원교 이광사의 행서체 글씨다. 침계루를 들어서면 대웅전이 나온다.
대웅전의 대웅보전 현판도 이광사의 글씨다. 원교 이광사는 동국진체를 완성한 분이다. 동국진체는 녹우당 현판을 쓴 옥동 이서를 시작으로 공제 윤두서, 백하 윤순을 거쳐 이광사가 완성했다고 한다.
그 옆 무량수각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대웅보전 현판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추사선생이 제주도로 유배를 가면서 대둔사에 들렀다. 현판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인 초의선사에게 촌스러운 이광사의 글을 떼어 내고 자신이 직접 쓴 ‘대웅보전’ 현판을 걸게 하였다. 이때 ‘무량수각’ 현판도 하나 더 써 주었다. 9년 후 유배에서 풀려 대둔사에 다시 들렀다. 이때 초의선사에게 이전에 떼어낸 이광사의 현판을 도로 걸게 하고는 자신의 글씨를 떼어내게 했다고 한다.
대웅전 좌우에 명부전과 범종각, 응진전이 나란히 있다. 응진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이 보물 제320호다. 이 탑의 높이는 4.3m로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형태를 따라 만들어졌다. 단아하면서도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신라 석탑의 영향이 한반도 서남해안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도 그 의미가 크다고 한다.
북원에서 대웅전을 본 후 천불전을 보기 위해서는 남원으로 다시 나와야 한다. 천불전에 들어가는 입구가 가허루다.
가허루의 현판글씨는 전주에서만 활약했다는 창암 이삼만의 글씨이고, 천불전 현판 글씨는 이광사 글씨다.
다음은 서산대사를 모신 표충사로 향한다. 표충사는 절집 같지 않고 서원에 온 느낌을 주는 곳이다.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사명대사와 뇌묵당 처영스님을 함께 봉안하고 있다.
표충사 현판의 글씨는 금물로 쓴 정조대왕의 친필이고 어서각의 현판 글씨는 추사의 제자인 신관호의 글씨다. 이처럼 당대 명필의 글씨는 이 곳 대둔사에 다 모여 있는 셈이다.
마지막 구간은 대명광전이다. 대명광전은 초의스님과 소치 허련, 위당 신관호가 추사 김정희의 유배가 풀리기를 기원하면서 지었다는 곳이다. 대명광전의 편액은 추사의 제자인 신관호 글씨고, 단청은 초의선사가 직접 했다고 한다. 지금은 선원으로 사용하므로 일반인들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유물전시관에는 서산대사의 가사와 발우, 친필선시, 신발, 선조가 내린 교지 등 유물과 정조가 내려준 금병풍 등과 고려시대 동종인 탑산사 동종(보물 88호)도 함께 보관되어 있다. 오늘은 볼 수가 없어 아쉽다.
다음에 오면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유물전시관도 보고 북암에 있는 국보 제308호인 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 보물 제301호인 북미륵암 삼층석탑, 천년수 그리고 초의선사가 만년을 보낸 일지암도 꼭 볼 수 있기를 권하면서 대둔사를 내려왔다.
유선여관에서의 아침식사 또한 일품이다. 겨울에는 놋그릇에 담아서 밥을 해주고 여름에는 사기 그릇에 식사를 제공해 주는데 방마다 상으로 나오는 것이 옛날 방식 그대로라고 한다. 음식에 들어간 간장, 된장도 모두 전통방식으로 만들어서 쓴다고 하였다. 모두들 만족해 하며 아침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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