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사와 다산초당 그리고 영랑생가
2014 재송여중 하계 직원연수 4
유선여관을 나와 강진으로 향한다. 강진은 우리나라에서 일조량이 가장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날씨가 맑고 농사도 잘된다는 의미일 게다. 강진은 또한 남도답사 일번지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다.
다산초당, 백련사, 고려청자도요지, 무위사, 월남사지, 영랑생가 등 많은 문화유적지를 갖고 있는 곳이다.
나의 지인 중에 강진이 고향인 분이 있다. 이분의 말을 빌리면 강진사람들은 예의가 바르고 자존심이 아주 강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강진 출신의 많은 인물들이 이순신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선생이 강진에 귀양을 와 18년을 지낼 때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많다. 또한 3·1운동 때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그리고 시인 김영랑의 고향이다. 이러한 자부심이 강진사람들의 의식 무의식에는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차는 이윽고 백련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백련사는 구산선문 중 보령 성주산문을 연 무염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본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이다. 조선 후기에 만덕사로 불리다가 현재는 백련사로 부르고 있다. 1216년(고종 3년)에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백련결사가 이루어진 곳이다.
계단을 오르면 바로 대웅전이 나온다. 백련사 대웅전보다 현판글씨가 더 유명하다. 동국진체의 완성자인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이기 때문이다. 백련사에는 이광사의 글씨가 세 점이나 있다. 대웅보전, 만경루, 명부전이 그 주인공이다.
우리가 잘 아는 연려실기술의 저자인 이긍익이 이광사의 장남이다. 동국진체는 중국의 서체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추사체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독특한 필법이라고 한다. 동국진체 역시 추사체처럼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글씨다. 대가들의 글씨는 역시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 미술이 전공인 오부장에게 동국진체를 본 느낌을 말해보라고 하니, 글씨에 깔롱을 지어서 썼다고 평을하고 있다.
백련사에서 바라보는 구강포의 경치 또한 일품이다. 만경루의 이름도 이곳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는 경치가 너무 좋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백련사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만경루 앞에 있는 배롱나무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생긴 배롱나무가 아닌가 생각된다.
유서 깊은 곳에는 배롱나무가 많다. 경주의 서출지와 안압지에는 오래된 배롱나무가 운치를 더해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롱나무는 부산 양정의 정묘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된 배롱나무로 무려 800년이나 된 나무이다. 정묘사에 있는 세 그루의 배롱나무는 묘역에 있어 접근하기가 쉽지 않지만 백련사의 배롱나무는 만져 볼 수도 있고 손으로 간지럼을 태워볼 수도 있다.
여름방학의 끝날 즈음에 이곳에 오면 배롱나무 꽃이 절정이었는데 올해는 꽃들이 한 열흘 정도 빨리 피었지만 이곳의 배롱나무는 고목이어서 그런지 이제 피려고 한다.
배롱나무만큼 다양한 이름을 가진 나무도 없을 것이다. 목백일홍, 간지럼나무, 파양수(怕揚樹), 자미(紫薇), 원숭이가 떨어지는 나무, 피나무, 쌀밥나무, 바람나무, 선비나무 등으로 불린다.
배롱나무는 부처꽃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이다. 키가 5m 정도 자란다. 수피(樹皮)는 홍자색을 띠고 매끄럽다. 잎은 마주 나고 잎가장자리가 밋밋하며 잎자루가 없다. 붉은색의 꽃이 7-9월에 핀다. 배롱나무는 대갓집 안채에는 절대 심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나무줄기의 매끄러움 때문에 여인의 나신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다. 즉 여인들이 벗고 있는 형상이어서 바람이 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절 마당이나 선비들이 기거하는 앞마당에는 많이 심었다. 절 마당에 많이 심는 것은 배롱나무가 껍질을 다 벗어 버리듯 스님들 또한 세상의 번뇌를 벗어버리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라는 의미이다.
선비들이 생활하는 서원이나 향교에 심는 것은 배롱나무가 껍질 없이 벗고 있는 것처럼 선비들도 엉큼하게 감추지 말고 모든 생각과 행동을 청렴결백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라 한다. 오래된 서원이나 절집 또는 정자에 배롱나무가 많은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내가 가본 곳 중 반야사, 선국사, 병산서원, 도동서원, 명옥헌에 있는 배롱나무는 인상적이었다.
배롱나무 꽃은 ‘못난이꽃’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속설이 있다. 평생 바람만 피우던 미운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남편의 묘 옆에 배롱나무를 심어준다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여름 한 철은 ‘첩을 팔아서 부채를 산다’라는 말이 있다. 더운 여름에 사랑하는 첩도 싫어서 이를 팔아 시원한 부채를 산다는 의미다. 그런데 바람둥이 남편이 죽어서도 향기도 없는 여자와 한여름 백일 동안 묘 옆에서 같이 질리게 피어 괴로움을 당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백련사를 나와 숲길로 들어가면 백련사에서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동백숲이다. 이는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될 정도로 대단하다. 동백군락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은 많이 있지만 그 중 백련사 동백과 선운사 동백이 대한민국 동백 숲의 대표 브랜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선운사 동백은 뒷산의 경사가 많이 져서 접근성이 불편하지만 백련사의 동백은 접근성이 뛰어나다. 이곳의 동백나무는 1,500여 그루가 집단으로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고 있다. 나무의 높이는 7m쯤 되고 줄기 아래부터 가지가 갈라져 관상목으로 된 것이 많으며 주위에는 비자나무, 후박나무, 왕대나무, 차나무 등이 자생하고 있다. 특히 이곳의 후박나무는 지금껏 내가 본 후박나무들 중에서는 가장 크다고 느껴진다.
숲길을 따라 삼삼오오로 내려오는 중 갈림길의 왼편에 ‘다산초당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가 나왔다. 이 길은 다산 정약용선생과 백련사의 혜장선사가 우정을 나누며 소요했던 길이다.
길도 뒷동산 가는 것과 같이 평탄하고 운치가 있다. 그리고 구강포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아름다운 길이다. 이 길은 좋은 사람과 같이 손잡고 알콩달콩 사랑을 나누면서 걸어야 제 맛이 난다. 따뜻한 봄날 붉은 동백꽃이 지천으로 피고 질 때 이곳에 오면 영원히 잊어지지 않을 사랑의 추억이 만들어지게 된다.
고개를 하나 넘으면 다산초당의 천일각이 나온다. 천일각에서 바라다보는 구강포의 경관은 일품이다. 다산선생 당시에는 이 누각은 없었다고 한다.
다산선생 당시에 있었던 것은 1821년에 지은 자찬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를 하고 있다.
“무진년(1808) 봄에 다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축대를 쌓고 연못을 파기도 하고 꽃나무를 벌여 심고 물을 끌어다 폭포를 만들기도 했다. 동서로 두 암을 마련하고 장서 천여 권을 쌓아두고 즐겼다. 다산은 만덕사의 서쪽에 위치한 곳인데 처사 윤단의 산정이다. 석벽에 ‘정석(丁石)’ 두 자를 새겼다.”-나의문화유산답사기1/유홍준(창작과 비평사)-
따라서 당시에 있었던 건물은 다산동암과 보정산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기와집으로 잘 지어져 있지만 아마 초가였을 것이다. 다산동암의 글자는 다산선생의 글자를 모아서 쓴 집자이고, 보정산방은 추사 김정희가 쓴 글자라고 한다. 이곳에서 위대한 저서들이 집필되었던 곳이기에 많은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감옥이나 유배생활이 목민심서와 같은 거작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인생의 진정한 삶의 향기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개울물이 졸졸 흐르는 비탈길을 따라서 내려와 차에 탔다.
강진읍에 있는 영랑생가로 향하였다. 영랑생가는 강진군청 뒤편에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이 나오고 안채가 있고 제법 떨어져서 사랑채가 있다. 부잣집이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집이 크고 마당도 넓다.
그런데 이렇게 큰 집이 기와집이 아닌 초가집이다. 경상도 부잣집은 반드시 고랫등 같은 기와집인데 영랑생가는 지주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초가집이어서 인상적이다. 영랑생가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많다. 그 중 은행나무, 살구나무. 동백나무는 이집의 대표선수로서 어디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다.
몇 년 전에 생가의 은행나무는 충북 영동에 있는 영국사 앞 은행나무만큼이나 은행이 많이 달렸지만 올해는 해거리를 한다. 살구나무 또한 명품이다. 살구나무가 이렇게까지 키가 크게 자라는 줄은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십 수 년 전 이 나무에서 딴 살구를 먹어보았는데 맛이 일품이었다고 기억된다.
본채 뒤편 언덕 위에 있는 동백나무는 선운사나 백련사에 갖다놓아도 전혀 꿇릴 게 없을 정도로 당당하고 굵은 둥치를 자랑하고 있다. 동백나무숲은 집 뒤로 돌아 들어가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숨겨진 곳이다. 이집의 계집종과 총각 머슴이 사랑을 나눈 곳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우리 선생님들 또한 이곳이 가장 마음에 든다면서 동백꽃이 절정일 때 이곳 툇마루에 앉으면 첫사랑이 절로 되살아날 것 같다고 한다.
선생의 생애 중에서 눈길이 제일 먼저 가는 것은 첫 번째의 결혼이다. 1903년생인 시인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다음해에 결혼을 했다. 만 13세의 나이에 결혼을 한 것이다. 그리고 결혼 1년 반 후에 아내를 잃었다. 어린 나이에 아내를 잃은 슬픔을 노래한 ‘쓸쓸한 뫼 앞에’를 ‘시문학’에 발표를 했다.
쓸쓸한 뫼 앞에 -김영랑(金永郞)
쓸쓸한 뫼 앞에 호젓이 앉으면
마음은 갈앉은 양금줄 같이
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비비면
넋이는 향맑은 구슬손 같이
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
무덤이 그리워 산골로 가노라
‘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비비면’이란 구절이 가슴에 짠하게 닿아온다.
김영랑 시인은 ‘북도의 소월, 남도의 영랑’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영랑의 시는 향토적 서정과 민족적 운율을 노래한 영롱한 서정시로 평가를 받는다. 김영랑의 시는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카프를 중심으로 쓰인 경향시는 사상성과 경직된 목적의식을 주로 드러냈기 때문에 당시의 시단은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 주는 김영랑의 시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이로써 시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변화하였고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방법적 자각을 가지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김영랑의 시는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자연의 정경을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순결한 마음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김영랑 서정시의 출발은 바로 이 순결성에 있었다고 한다.
영랑생가를 나와 해태식당으로 향했다. 해태식당 역시 우리나라 3대 한정식 중 하나다. 많은 분들이 최고라고 창찬을 한다. 특히 술꾼들은 너무 억울하다고 한다. 이곳의 반찬은 모두 아주 멋진 안주라고 하면서 다음에 꼭 한번 좋은 사람과 같이 와야겠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는. 곧장 부산으로 달려와서 학교에 무사히 도착을 하였다.
삶이 힘들고 고달플 때는 여행이 최고라고 생각된다. 그동안 사주팔자를 고칠 수 있는 개운(改運)법 중에서 여행이 으뜸이라고 여겨왔다. 우리 인간은 한편으로는 외롭고 쓸쓸한 존재이다. 이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 중 가까이에 있는 분들과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같이 하는 여행이 좋은 대안이 된다.
여행은 일상의 고민이나 고통에서 벗어나 이를 극복하는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는 계기가 된다. 특히 문화유적지가 있는 곳으로의 여행은 더욱더 좋다. 문화유적은 나보다 먼저 살다가 간 선현들의 자취가 배어 있고, 선현들의 아름다운 삶은 시공을 넘어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번 연수는 늘 같이 생활을 하는 동료들과 함께 하였기에 여행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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