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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2014 재송여중 하계 직원연수 1-장흥 보림사

by 황교장 2014. 8. 23.

장흥 보림사

2014 재송여중 하계 직원연수 1

 

722일 방학식을 마치고 여름방학 직원연수를 떠났다. 연수 여정은 부산-남해안고속도로-사천 냉면-장흥 보림사-두륜중학교-녹우당-해남 천일식당-유선관-대흥사-강진백련사-다산초당-영랑생가-해태식당-부산으로 정하고 떠났다.

이번 연수의 주제를 학교 공동체의 효율적인 목표 달성을 위한 좋은 인간관계 형성과 자유학기제 희망학교 운영을 위한 협의에 두었다.

 

여행은 언제나 기대와 설렘이다. 모두들 들뜬 기분으로 옆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서로가 소통하는 이러한 모습 또한 직원연수의 꽃이다.

여행의 진수 중 하나는 소문난 맛집의 음식을 먹어보는 것이다. 우리가 찾아간 첫 집은 사천에 있는 재건냉면집이다. 이 집은 예약이 안 된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오기 때문이다. 겨우 1시간 전에 예약을 했다. 냉면 한 가지의 단일 메뉴로 이렇게 큰 식당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일반냉면과는 달리 면의 색깔이 초콜릿색이었고 양도 너무 많았다. 저녁메뉴인 해남 천일식당의 떡갈비가 일품이니 너무 많이 먹지 말라고 당부했는데도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냉면그릇을 다 비웠다. 모선생님은 살짝 다가와서 맛있는 냉면을 맛보게 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 사천을 출발하여 순천-목포 간 고속도로를 타고 첫 목적지인 장흥 보림사에 도착했다. 장흥은 광화문에서 정남쪽에 있다 하여 정남진(正南津)으로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중강진과 일직선상에 놓여 가장 따뜻한 남쪽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또한 장흥은 작가 이청준의 고향이기도 하다.

보림사로 들어가는 입구는 아름답다. 전라남도의 3대 강은 섬진강, 영산강, 탐진강이다. 장흥댐은 탐진강 상류에 건설한 것이다. 탐진강은 가지산에서 시작되어 장흥읍을 거쳐 강진으로 흘러 구강포로 들어간다.

보림사(寶林寺)는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보림사는 원표대덕이 당나라와 인도를 두루 순례한 후 신라로 돌아와 759년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후 당나라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 선종의 법통을 전수받은 도의선사가 821년에 귀국하여 염거(廉居)선사에게 법을 전하고, 염거선사에게 법을 전수받은 보조선사 체징(804-880)이 헌안왕 4(860)에 가지산문을 열어 큰 절이 되었다.

보림사는 중국 남종선의 초조인 육조 혜능이 살았던 소주 조계산 보림사와 같은 이름이다. 이는 우리나라 선종의 본산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도, 중국의 보림사와 더불어 삼보림이라 일컬어진다고 한다.

 

 

보림사에는 국보가 2, 보물이 8, 전라남도 문화재가 15점이나 된다. 아마 우리나라 절집 중 문화재가 많기로는 불국사, 화엄사, 부석사 다음으로 많지 않을까 생각된다.

보림사 국가 지정문화재를 보면 다음과 같다.

 

국보 2

1. 보림사 3층석탑 및 석등(국보 제44),

2. 대적광전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

 

보물 8

1.동부도(보물 제155)

2.서부도(보물 제156)

3.보조선사창성탑(보물 제157)

4.보조선사창성탑비(보물 제158)

5.목조사천왕상(보물 제1254)

6.월인석보 권25(보물 제745-9)

7.금강반야바라밀경 권 제1(보물 제1251)

8.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권 제9-10(보물 제1543)

 

보림사는 한국전쟁 때 불이 났다. 이때 불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일주문과 천왕문이라고 한다. 보림사에 닿으면 일주문이 제일 먼저 반긴다. 앞에는 '가지산 보림사'라는 현판을 달고 있고 안쪽은 '선종대가람'이라 적혀 있다.

이는 구산선문의 으뜸이라는 뜻일 게다. 현판 왼쪽 한 모퉁이에 '옹정 4'이라 적혀 있어 일주문은 영조 2(1726)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이 나온다. 이 천왕문 안에는 보림사 목조사천왕상(보물 제1254)이 있다. 사천왕상은 1515(중종 10)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최고의 사천왕상이라고 한다. 일주문이 사찰로 들어가는 불법세계의 입구라면, 사찰을 수호하는 문지기가 바로 사천왕이다. 이 사천왕상 안에서 유물이 수두룩하게 나왔다.

 

 

 

1995년 이 사천왕상의 무릎과 발 등에서 희귀본인 월인석보 제25권을 비롯해 보물급 고서적 250여 권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이 고서적들은 임진왜란 이전의 인쇄문화와 언어,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천왕문을 지나면 바로 대적광전 앞마당이다. 앞마당에는 삼층석탑 두 기가 동서로 마주 서 있고 그 사이에 석등이 있다. 국보 제44호인 보림사삼층석탑 및 석등이다.

통일신라 경문왕 10(870)에 선왕인 헌안왕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건조 연대가 확실하다고 한다. 2층으로 쌓은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하나의 돌로 쌓았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중에서 상륜부가 완전하게 남아 있는 탑은 실상사 삼층석탑과 보림사 삼층석탑뿐이다. 상륜부의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와 보주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상륜부의 찰주는 주로 쇠로 되어 있는데 이 탑에는 화강암으로 찰주를 삼았다.

 

 

삼층석탑 뒤에는 대적광전이 있다. 대적광전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불인 국보 제117호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다. 불상의 왼팔 뒷면에 신라 헌안왕 2(858)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김수종이 시주하여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다는데 내 눈으로 한 번 더 보려고 했어나 실내전체가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다. 손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신라말부터 고려초에 걸쳐 유행한 철로 만든 불상의 첫 번째 예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고 한다.

이 철불에게 기도하면 기도발이 잘 받는다고 했더니 불자들이 너도나도 절을 하였다. 의외로 불자들이 많았다.

이십 수 년 전에 보림사에 처음으로 왔을 때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는 대적광전이 건립되기 전이어서 지금의 대웅전 한쪽 곁에 철불이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저녁 무렵이었다.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날이었다. 대웅전 안은 어둠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한 쪽 옆에 검은 불상이 있었다. 바로 이 철불이었다. 보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놀란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런데 지금은 보수와 수리를 하면서 채색을 하여 그때의 그 느낌이 전해지지 않는다.

 

 

보림사에서 자랑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보림약수다. 절 마당 한가운데 동백나무 그늘 아래 보림약수가 있다. 우리나라 100대 명수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런데 눈으로 보기에는 도랑물 그 자체이다. 물맛도 조금 이상하고 탁도가 심하다. 그런데도 100대 명수에 들어가는 것은 대웅보전 뒤편에 있는 울창한 비자나무숲과 대나무숲, 그리고 야생차밭의 영향이라고 한다. 따라서 뒷맛은 약간 쌉쌀하다.

 

 

다시 일주문을 나오면 동부도가 있는 부도밭과 보림사 뒤쪽의 가지산 등산로가 있다. 가지산의 비자나무숲은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됐다. 절집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비자림 삼림욕 산책로가 가지산 등산로와 연결돼 있다.

 

참고로 통일신라 구산선문의 전래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구산선문이란 선종의 9산을 말한다. 선종의 출발은 석가모니 부처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마하가섭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처님이 설법을 하면서 연꽃 한 송이를 들자 가섭 혼자 빙그레 웃었다. 이것이 바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이다. 그래서 염화시중의 미소를 선의 시작으로 본다. 스승인 석가모니와 제자인 가섭 사이에 마음과 마음으로, 이심전심의 방법으로 전한 것이 선이다.

인도의 스물여덟 번째 존자인 보리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그는 중국선의 첫 번째 조사가 된다. 달마에서 혜가(慧可)-승찬(僧璨)-도신(道信)-홍인(弘忍)-혜능(慧能)으로 계승된다. 이를 일러 ‘33 조사라 한다.

 

육조 혜능부터 본격적인 중국선종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강조한다. 불립문자란 문자에 입각하지 않고, 경전의 가르침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켜, 본연의 품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고 주장한다.

육조 혜능(638-713)은 선종의 법통을 단순히 이어받는 데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의 혁신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중국 선종의 진정한 창립자로 불린다. 그와 그의 제자들에 이르러서야 중국불교는 인도적인 것에서 벗어나 중국의 성격에 맞게 독자적인 영역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7조가 회양(懷讓, 677-744), 8조가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마조의 뒤를 이은 9대 조사가 서당 지장이다. 이 지장의 제자가 통일신라의 도의선사-홍척국사-적인선사이다.

이중 가장 먼저 서당지장의 제자가 된 이는 도의(道儀)선사다. 도의선사는 784(선덕왕 5)에 당나라에 유학해 서당 지장(西堂 智藏)에게 깨침을 받은 승려로 821년에 귀국해 선종을 전파했다. 그렇지만 기존의 승려와 귀족들로 이루어진 왕권 불교의 질서에서 그의 교리는 대접받지 못했다. 선종의 특성인 개인주의적이고 개혁적 성향을 지녀 반체제적, 반권위적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결국 도의선사는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함을 깨닫고 서라벌을 떠나 설악산 기슭에 진전사를 짓고 40년 동안 선정을 닦고 제자를 가르치다 열반했다. 그의 의발을 전수 받은 염거화상 역시 설악산 억성사에서 주석하며 선지를 폈으나 선문을 세우지는 못했다.

 

이후 도의의 사상은 염거(廉居)를 거쳐 염거의 제자인 체징으로 전해지면서 체징이 가지산파를 형성하여 구산선문의 제일 윗자리에 두게 되었다.

구산산문은 9개의 선종 사원이다. 당나라 유학파 승려들이 들여온 선종이 호족세력과 결합하여 각 지방에 근거지를 두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9개의 선종사원을 구산산문 또는 구산선문이라고 한다. 최초의 본산은 도의가 개창한 가지산문이고 마지막 본산은 왕건의 스승인 이엄의 수미산문이다. 선종의 개조자들은 대개 지방호족이나 6두품 출신이다. 특히 범일, 무염의 경우는 진골출신이었으나 6두품으로 강등된 경우이다. 구산산문은 다음과 같다.

 

1. 가지산문: 염거화상의 제자인 보조선사가 가지산에 머물러 보림사를 개창하면서 도의의 사상은 비로소 꽃을 피우게 되어 가지산문을 이루었다.

 

2. 실상산문: 홍척스님이 지리산에 실상사를 창건하여 실상산문을 형성했다.

 

3. 동리산문: 839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혜철 스님이 곡성 태안사를 중심으로 동리산문을 이루었다.

 

4. 사굴산문: 범일스님이 강릉 굴산사에서 사굴산문을 이루었다. 사굴산문은 강릉의 지방호족으로서 진골이었던 김주원의 후손인 명주도독의 후원을 받았다.

 

5. 봉림산문: 당나라에서 귀국한 현욱 스님으로부터 선풍을 이어받은 심희 스님은 창원에 봉림사를 창건하고 봉림산문을 이루었다.

 

6. 사자산문: 중국 보원 스님의 선풍을 이어받고 귀국한 도윤의 제자 절중 스님이 스승을 계승하여 영월에 법흥사를 창건하고 사자산문을 이루었다.

 

7. 희양산문: 830년에 귀국한 혜소의 법을 이어받은 도헌 스님이 문경에 봉암사를 창건하고 희양산문을 개창했다.

 

8. 성주산문: 호서지방에서는 보철 스님의 선을 이어받은 무염 스님이 보령의 성주산문을 열었다. 성주산문은 보령지방에 대규모 장원을 가지고 있던 김흔의 후원을 받아 개창되었다.

 

9. 수미산문: 911(효공왕15)에 중국에서 귀국한 이엄스님은 해주의 수미산에서 광조사를 지어 수미산문을 열었다.

 

보림사를 나와 해남군에 있는 두륜중학교로 향했다. 차는 강진을 거쳐 해남으로 향한다. 해남군은 한반도의 최남단 땅 끝에 자리 잡은 전라남도 최대의 군이다. 동쪽에는 강진군, 서쪽에는 진도군, 남쪽에는 완도군, 북쪽에는 영암군, 북서쪽으로는 목포시와 접해 있다. 또한 3면이 바다인 해남반도로 되어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해남군에는 13개의 면이 있는데 이 중 옥천면만 빼고는 모두 바다와 닿아 있다. 해남은 옛날부터 중국-한반도-일본을 연결한 문화이동로였다는 점에서 다양한 문화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자유학기제를 운영하고 있는 두륜중학교는 해남군 북일면에 있는 학교로 전교 학생 수 65명에 교직원 15명인 미니학교다. 이 학교는 특색사업으로 무인판매대 운영을 통한 인성함양을 실시하고 있다. 일반학교에서 잘 할 수 없는 차문화 체험, 도예체험, 목공, 생태감수성 및 환경보존활동 등을 실시하고 있다.

 

두륜중학교에서 가장 탐이 나는 것은 자연환경이었다. 학교 바로 앞이 두륜산이다.

 

 

 중국의 곤륜산(崑崙山) 줄기가 한반도로 흘러 백두산(白頭山)을 이룬다. 백두대간을 타고 마지막으로 맥을 맺은 곳이 바로 이곳이라 하여 백두산의 두()자와 곤륜산의 륜()자를 따서 두륜산이라 불렀다. 빼어난 두륜산을 배경으로 뛰어난 경관을 갖고 있다. 운동장은 우리 학교의 3배는 넘어 보인다. 뒤뜰에는 각종의 나무들과 채소들이 심겨 있다. 우리가 가는 날 교장선생님이 채소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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