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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중국여행

재송여중 부장연수4-중국계림4

by 황교장 2014. 8. 30.

재송여중 부장연수4-중국계림4

 

아침에 한 시간 먼저 일어나 아침식사를 하고는 세외도원(世外桃源)으로 갔다. 오후에 상해로 가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비교적 이른 시간인데도 줄을 많이 서 있다. 내가 제일 선두에 섰다. 순진하게 차례를 지키다가는 오늘 상해에 못갈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다. 기지를 발휘했다. 빈자리만 골라서 중간 중간 새치기를 한 것이다. 며칠 사이에 배운 학습이다.

가이드가 입장권을 사러가는 사이에 거의 배를 탈 수 있는 제일 앞줄까지 진출했다. 가이드가 우리 일행을 저 뒷줄에서 한참을 찾고 있었다. 미처 여기까지 줄을 설 줄은 몰랐다고 한다. 무려 한 시간 이상을 벌었다. 중국 사람이 다 된 기분이다. 배도 우리 앞사람들이 타야하는데 내가 먼저 올랐다. 결국을 같이 배를 탔지만 빨리빨리 정신이 이곳에서도 발휘가 된 셈이다.

배가 서서히 출발을 했다. 이 호수는 연자호(燕子湖)라고 불리는 자연 그대로의 호수라고 한다. 물이 참 맑다. 호수가에는 어리연꽃, 부레옥잠, 백련, 다양한 종류의 대나무, 평화롭게 축 늘어진 수양버들, 수초에 붙어 있는 우렁이 알도 붉은 꽃처럼 보인다. 도화원기에 나올 법한 동굴을 지나자 복숭아 꽃이 피어 있는 곳이 나온다.

 

 

 

깜짝 놀라 가서 보니 조화였다. 도화원기의 내용을 재현한 것이다.

 

 

조금 더 가자 소수민족인 와족(佤族)들이 민속춤을 추고 있다. 옆에 있는 문부장이 춤 추는 사람들이 왜 저렇게 안 기쁘고 우울하게 보여요?” 한다.

 

 

산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데려와서 관광 상품으로 이용하여 계속 같은 춤을 반복해서 추게 하니 어느 누가 표정이 좋겠는가. 인간에게는 자율과 자유가 소중하다. 비록 무릉도원에 살지라도 자유가 없으면 지옥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와족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와족은 약 오만 명 정도의 소수민족이라고 한다. 와족은 아직까지 모계사회를 이루며 살고 있다. 즉 여자 1명이 남자 7명까지 같이 살 수 있다. 부족장도 여자라고 한다. 모 여성부장 왈 와족으로 태어날껄하면서 아쉬워한다.

아름다운 세외도원을 배로 한 바퀴 돌았는데 약 20분이 조금 더 걸린 것 같다. 처음 계획은 배를 타고 무릉도원을 구경하면서 주님과 같이 보내려고 했지만 시간이 너무 짧았다. 아쉬움을 남기고 배에서 내렸다. 이곳은 대만의 한 사업가가 일종의 민속촌으로 꾸민 곳이라 한다. 현지의 전원 풍경과 조화를 이루어 만든 일종의 민속촌 또는 테마공원 같은 곳이다. 이곳은 동족, 와족, 장족, 요족, 묘족 등 소수민족이 많은데 중국 소수민족의 생활과 풍습, 수공예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아 상품화했다.

 

 

 

 

소수민족들이 무용과 악기연주를 하고 있다. 동족(侗族)이라고 한다. 어젯밤 공연 때 노래를 부른 어린소녀가 바로 동족이라고 한다. 동족은 귀주성에 주로 많이 사는데 중국에 한 이백만 명 정도라고 한다. 동족은 노래를 즐기는 민족으로 자기들끼리 화음을 아주 잘 맞춘다고 한다. 일종의 아카펠라인 셈이다. 여러 가지의 상품도 팔고 아리랑도 불러주었다. 이처럼 소수민족도 돈벌이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이곳은 한국인 관광객이 중국 자국민 다음으로 많이 온다고 한다. 한국과 중국의 인적, 물적 교류가 얼마나 활발한지를 보여준다. 중국은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다. 조선족도 10대 소수민족에 든다고 한다. 그런데도 조선족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이곳에서는 공무원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시험 칠 자격은 있지만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불합격된다고 한다. 한족이 중국 전체 인구(20117월 기준 134324만 명) 가운데 약 91.5%를 구성하고 있고 나머지 55개 소수민족이 약 8.5%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로는 10%가 채 안되지만 소수민족이 자치하는 면적은 중국 전체 영토의 64%에 달한다고 한다.

 

세외도원을 떠나 다시 계림으로 향했다. 중국사람들에게 배운 새치기를 활용하여 줄을 잘 선 덕분에 한 시간을 벌었다고 한다. 그런데 차가 더 이상 나아가지를 않고 꽉 막혔다. 이유인즉 한 길에서 나무를 베는 작업 때문에 막힌 것이다. 길가의 나무를 베는데 도로 반대편으로 넘겨도 충분한 공간이 있는데도 작업의 편의성 때문에 길을 막고는 나무를 도로 위에 쓰려뜨렸다. 나무 가지 작업까지 완료한 다음에야 통행을 허용하였다. 이것도 이해가 안 되는 데 더더욱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운전자 어느 누구도 항의를 하지 않았다. 관에서 하는 일이라서 항의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직도 관(官)이 최고 이고, 민(民)은 밥인 것이다.

계림시내로 들어가서 차 파는 다원(茶院)에 들렀다. 이곳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차를 파는 사람이 교포 3세로 할아버지 고향이 창녕군 장마면이라고 한다. 박원순 서울시장 고향이 창녕 장마라고 하자 처음 알았다고 한다. 창녕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데 이분의 말투가 어찌나 창녕사람과 비슷한지 놀랐다. 언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이드는 할아버지의 고향이 함경북도라서 북한말 그 자체였다. 똑같이 연길에서 태어났지만 조상의 고향이 어디냐에 따라서 말씨가 이처럼 차이가 많이 났다.

다원을 나와 계림 첫날 먹었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는 계림공항에 도착했다. 계림에서의 34일을 마감한 것이다. 비행기는 연착 없이 계림을 떠나 상해로 날아갔다.

 

참고로 도연명(365-427)의 도화원기의 해설과 원문은 아래와 같다.

동진(東晉) 태원(太元) 연간, 무릉(武陵) 사람이 물고기 잡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었다. 시내를 따라서 가다가 길을 잃었는데 갑자기 복숭아꽃 나무의 숲을 만났다. 양안의 강기슭 수백 보에 하나도 없고 향기로운 풀들만이 곱고 아름다우며 떨어진 꽃잎들이 어지러이 흩날렸다. 어부는 매우 이상히 여기고 다시 전진하여 그 숲이 끝나는 곳까지 가보려 했는데, 숲이 끝나는 수원지에서 문득 한 개의 산을 만났고, 산에는 조그마한 동굴이 있어 마치 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곧 배를 버려두고는 동굴로 들어가는데 처음엔 겨우 사람하나 통할 수 있는 정도였다.

수십 걸음을 더 가니까 갑자기 눈앞이 탁 트이면서 확 넓어졌다. 땅은 평탄하고 넓었으며, 가옥들은 가지런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비옥한 밭과 아름다운 연못 및 뽕나무, 대나무 등도 있었다. 밭 위에 가로 세로로 난 작은 길들은 서로 교차하며 연결되어 있었고,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도 서로 들렸다. 그 안에서 왔다갔다하면서 농사를 짓는데, 남자 여자가 몸에 입은 옷이나 착용한 것들은 모두 외부 사람과 같았다. 노인과 어린아이가 서로 정답게, 즐겁게 유유자적하며 지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어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부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고, 어부는 상세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집으로 초대하여, 술을 차리고, 닭을 잡고,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 마을에 낯선 사람이 왔다는 얘길 듣자, 모두 몰려와 바깥소식을 물었다. 자신들은 조상이 진()나라 때의 혼란을 피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세상과 격리된 이곳으로 왔는데, 다시는 밖으로 나가질 않아서 결국 외부 세계와 단절되었다고 했다. 지금이 어느 시대냐고 묻는데, (), ()은커녕 한()나라가 있었다는 것도 모르는 게 아닌가. 어부는 아는 것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모두들 감탄과 탄식을 금치 못했다. 여타 마을 사람들도 어부를 자기 집에 초대하여 술과 음식을 내왔다. 어부는 며칠 간 머물다가 작별을 고하고 떠났다. 마을 사람 중 누군가가 말했다. “외부 사람들에게 얘기하지 마시게.”

 

어부는 그 마을을 나와서 자기 배를 발견했다. 길을 따라 곳곳에 표시를 해 두었다. 어부는 자기 마을에 도착해서 태수를 찾아가 알현하여,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태수는 곧장 사람을 파견하여 그 어부를 따라 가서 표시해 둔 곳을 찾게 했으나, 길을 잃어 찾지 못했다.

남양의 류자기는 고매한 은사였다. 이 얘기를 듣자, 기꺼이 찾아가 볼 계획을 세웠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후 병들어 죽었다. 그 뒤엔 길을 묻는 자가 없었다 한다.

 

作者陶淵明()

晉太元中武陵人捕魚為業緣溪行忘路之遠近忽逢桃花林夾岸數百步中無雜樹芳草鮮美落英繽紛漁人甚異之復前行欲窮其林

(진태원중무릉인포어위업연계행망로지원근홀봉도화림협안수백보중무잡수방초선미락영빈분어인심이지복전행욕궁기림)

林盡水源便得一山山有小口彷彿若有光便舍船從口入初極狹纔通人復行數十步豁然開朗土地平曠屋舍儼然有良田美池桑竹之屬阡陌交通雞犬相聞其中往來種作男女衣著悉如外人黃髮垂髫並怡然自樂(림진수원편득일산산유소구방불약유광편사선종구입초극협재통인복행수십보활연개랑토지평광옥사엄연유량전미지상죽지속천맥교통계견상문기중왕래종작남녀의저실여외인황발수초병이연자악)

見漁人乃大驚問所從來具答之便要還家設酒殺雞作食村中聞有此人咸來問訊自云先世避秦時亂率妻子邑人來此絕境不復出焉遂與外人間隔問今是何世乃不知有漢無論魏晉此人一一為具言所聞皆嘆惋餘人各復延至其家皆出酒食停數日辭去此中人語雲:「不足為外人道也。」

(견어인내대경문소종래구답지편요환가설주살계작식촌중문유차인함래문신자운선세피진시란솔처자읍인래차절경부복출언수여외인간격문금시하세내부지유한무론위진차인일일위구언소문개탄완여인각복연지기가개출주식정수일사거차중인어운:「부족위외인도야)

既出得其船便扶向路處處誌之及郡下詣太守說如此太守即遣人隨其往尋向所誌遂迷不復得路

(기출득기선편부향로처처지지급군하예태수설여차태수즉견인수기왕심향소지수미부복득로)

南陽劉子驥高尚士也聞之欣然規往未果尋病終後遂無問津者

(남양류자기고상사야문지흔연규왕미과심병종후수무문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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