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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중국여행

중국 서안 화청지

by 황교장 2016. 5. 8.

중국 서안 화청지


신도중 부장연수로 중국 섬서성의 서안과 운남성의 차마고도, 옥룡설산 여강고성을 다녀왔다.

2016년 4월 30일 저녁 22:05분에 김해국제공항을 이륙하여 중국 서안 국제공항에 예정된 시간인 00:35분에 무사히 도착했다. 3시간 30분이 걸렸다. 중국은 우리나라보다 1시간이 늦다. 서안공항에 도착하자 공기가 매캐하다. 속이 거북스러울 정도다. 서안이 내륙이고 분지여서 공해가 심하다고 알고 왔지만 실상은 더 심하다.



서안은 주나라를 위시하여 중국 최초로 통일왕국을 이룩한 진나라를 필두로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등 1,180여 년 동안 13개 왕조의 수도였다. 

 
곧장 숙소로 향하여 첫날을 보내고 다음날 9시 반에 화청지(華淸池)로 향했다. 서안의 날씨는 한여름 날씨다. 어제는 34도였고 오늘도 최고 기온이 33도라고 한다.



숙소에서 30여 분을 달려 화청지에 도착했다. 화청지는 섬서성 서안시의 동쪽 35km 떨어진 '여산(驪山,1302m)' 아래에 위치한 곳으로, 북으로는 위수를 마주하고 있다.


화청지는 3000년 전인 주나라 때부터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주나라 때 유왕이 려궁을 지었고, 진시왕이 려산탕, 한나라 때는 이궁으로 불리다가 당나라 때는 '화청궁'으로 불렸다고 한다. 즉 화청지는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당나라 왕실 원림이다.




 5월 1일 노동절이라 중국 자국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아침부터 사람들이 매우 많다. 그러나 날씨는 너무 좋다. 남방계에 가까운 체질을 가진 나로서는 최적의 날씨다. 화청지는 여산을 배경으로 비교적 최근에 실제보다 작게 복원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중국의 다른 건물 즉 자금성, 공묘, 피서산장 등에 비하면 왜소하여 실망이 앞섰다.
화청지 안으로 들어가면 '영원히 사랑하자'라는 의미로 지었다는 장생전이 연못을 배경으로 나온다. 장생전은 현종과 양귀비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라고 한다. 두 사람이 이곳에서 결혼하면서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자'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장생전 옆에는 현종과 양귀비가 거처하던 집인 비상전과 의춘전 두 채가 있다. 화청지를 복원하면서 각 목욕탕에 각각의 건물들을 지었는데, 해당탕과 연화탕 등 여러 채의 집들이 줄지어 있다.




목욕탕에 들어가는 길목에 희한하게 생긴 나무가 있다. 대추나무 밑둥에다 감나무를 접붙여 놓았다. 그리고 400년 된 석류나무가 인상적이다. 서안에는 대추와 화정감이라는 감과 석류가 많이 재배되고 있는데, 현종은 아이를 갖지 못한 양귀비를 위해 씨가 많은 과수를 심으라고 하여 지금도 감과 석류가 많이 재배되고 있다고 한다.


귀비지라는 건물에 해당탕이란 양귀비의 목욕탕이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물은 차 있지 않지만 바닥에 아담한 해당화 모양의 욕실이 만들어져 있다.



욕실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2개가 있는데, 이곳은 양귀비 말고도 현종이 들어 올 수 있는 곳으로 두 사람만의 목욕탕이라고 한다. 기대만큼 목욕탕이 화려하지가 않다. 대리석이나 옥으로 탕이 장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했지만 그저 평범한 화강암으로 보인다.




욕탕을 나오니 지금도 온천수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이곳에 손을 담그면 행운이 온다고 하여 담궈 보았다. 미지근한 물이다. 생각보다 실망이다. 주변에는 쓰레기들도 많다. 중국의 문화재는 뛰어나지만 청결이 엉망이다. 10여 년 전에 비하면 많은 변화가 있지만 선진국으로 진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화청지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이야기뿐만 아니라 서안사변이 일어난 곳이다. 연화탕 담 너머를 보면 또 하나 아주 잘 꾸며놓은 집이 있는데 바로 서안사변 때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개석이 머물던 곳이다. 오간청이라는 건물로 5개의 방으로 만들어져 있다. 장개석이 고위급 간부들과 회의를 하던 곳으로 여기가 바로 서안사변의 역사적 현장이다.


장개석은 공산당이 계속 세력을 확장하고 있어 공산당 토벌에 나선다. 이 당시 일본이 만주 지역을 계속 침범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일본보다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6년 공산당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장개석은 직접 서안에 와서 이곳 화청지에 머물게 된다.


그런데 장개석의 부하인 장학량이 1936년 12월 12일 반란을 일으켜 여기 화청지에서 장개석을 구금하게 된다. 일본군의 중국 침범을 막기 위해 공산당 토벌보다 항일전쟁이 먼저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장학량은 장개석이 실각되면  또 다른 내전의 빌미가 되어 일본군에 더 유리하게 돌아갈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공산당과 손잡고 일본군을 물리치겠다는 8개의 요구사항을 조건으로 장개석의 승인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장개석은 어쩔 수 없이 공산당과 손을 잡게 되고 거의 다 섬멸되어가던 중국 공산당은 다시 살아나는 계기가 된다. 결국 공산당이 중국 대륙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장개석이 대만으로 물러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이 화청지에서 역사무용극 장한가를 공연한다. 장한가를 보기 위해서 저녁 식사 후 이곳으로 다시 왔다. 장한가는 대형 실경(實景) 역사 무용극이다. 당 현종과 양귀비와의 사랑의 실제 배경인 화청지에서 밤에 공연된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공연이 시작된다.


시작부터가 거창하다. 장예모 감독의 작품이라고 한다. 장예모 감독의 작품 중 계림 양삭에서 인상유삼저(印象劉三姐)라고 하는 수상쇼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감동이 다시 한 번 더 밀려 왔다. 당시에도 주변의 산과 강을 무대 배경으로 활용하더니 지금도 여산 전체를 배경으로 하고 구룡지에 수상무대를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


특히 수상무대에서 펼쳐지는 무용극은 화려하게 구룡지에 반영되어 더욱더 장엄하게 보인다.






옆에 있는 모 부장이 왜 무대를 물 위에 설치하는지를 알 것만 같다고 한다. 하나의 극이 물 속에도 똑 같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배경으로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 자욱하게 피어나는 안개, 산에서 거세게 내려오는 폭포수, 활활 타오르는 불바다 등 화려한 특수효과가 더해져 장관을 이룬다. 장한가의 내용을 몰라도 화려하고 큰 구성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감동을 주었다. 등장하는 배우만 300여 명이다. ‘과연 장예모 감독이구나’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장한가의 내용은 당현종과 양귀비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하여 두 사람의 애정이야기, 안사의 난, 생사이별, 양귀비를 잃고 난 후 현종의 쓸쓸한 생활, 죽어서 선경에서 선녀가 된 양귀비와 만나는 장면으로 되어 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은 백낙천의 천재적인 상상력이 더욱더 발휘되어 사랑의 애절함을 최고조로 고조시킨다.


詞中有誓兩心知(사중유서양심지) 두 마음만이 아는 맹세의 말이 있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칠월 칠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야반무인사어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속삭이던 말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였다.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하늘과 땅이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 이 슬픈 사랑의 한은 끝이 없어라...


 비익조는 남녀 간의 지극한 사랑을 의미한다. 비익조(比翼鳥)는 중국 숭오산(崇吾山)에 산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새로 날개와 눈이 하나뿐이어서 암수가 몸을 합쳐야만 날아갈 수 있다고 한다. 연리지(連理枝)는 뿌리가 다른 나무 두 그루가 가지가 합쳐지면서 한 그루로 자라는 나무를 말한다.


이처럼 백거이(白居易:AD 772~846)의 작품인 장한가 한 편이 중국 서안을 대표하는 관광 상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뛰어난 예술 작품 하나가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하다. 사실 양귀비는 나라를 망친 경국지색이다. 그런데 백낙천(낙천은 백거이의 호)이라는 당대 최고 시인은 이를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장한가 창작 배경은 다음과 같다.

당 현종(712-756)이 죽은 지 50년 후 백거이 나이 35세 때에 친구 왕질부와 진홍이 그를 찾아와 선유사(仙遊寺)에 묵으면서 근처인 마외파(馬嵬坡)언덕에서 50년 전에 원통하게 죽어간 양귀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왕질부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오던 양귀비의 일화를 듣고 나서, 애달픈 사연이 세월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릴 것을 애석해하였다. 그래서 백거이에게 시를 지어 세상 사람들이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고 한다.


백거이(白居易)가 이에 감동하여 밤을 새워가며 쓴 칠언고시(七言古詩) 120구 840자에 달하는 대서사시(大敍事詩)가 중국 최고의 사랑 이야기인 장한가(長恨歌)로 탄생된 것이다.


여기서 당현종과 양귀비에 대하여 알아보자
당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685-762)는 당의 6대 황제다. 중종의 황후인 위후의 세력을 물리치고 예종을 복위시킨 후 다시 양위를 받아 황제로 등극했다(711년). 29년간 '개원(開元)의 치(治)'로 칭송받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정권 말년 정치에 뜻을 잃고 양귀비에게 빠져 방탕한 생활을 했다. 안녹산의 난을 계기로 왕권을 아들 숙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


중종(中宗) 이현은 중국 천하를 호령하던 측천무후로부터 간신히 정권을 넘겨받은 황제였지만, 그의 시련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제2의 측천무후를 꿈꾼 그의 황후 위씨가 딸인 안락공주(安樂公主)와 함께 그를 독살한 것이다. 중국 천하는 두 번째 여제(女帝)를 맞이하기 직전이었다.


이런 당 왕조의 위기를 평정한 것은 5대 황제 예종(睿宗)의 셋째 아들 이융기였다. 그는 재빨리 우림군 병사를 소집하여 궁중으로 들어가 위씨와 안락공주를 죽이고, 이어 위씨 가문과 할머니인 성신황제 무씨의 일가까지 모두 몰살시켰다.


그 덕택에 예종은 다시 황제의 자리에 앉았고, 이융기는 평왕(平王)에 책봉되었다가 큰형인 이헌의 양보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예종은 복위 2년 만인 711년에 이융기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그가 바로 당현종이다.


현종은 제위에 오른 후 연호를 '개원'이라 정하였으며, 재상이었던 요숭(姚崇), 송경(宋璟) 등의 보좌를 받아 측천무후 사후 어지러웠던 정치를 바로잡아 나갔다.

사회가 안정되면서 인구도 급속하게 늘어났다. 태종 시절 300만 호였던 호(戶) 수가 개원 연간에는 760만 호를 넘어섰고, 인구 수만 해도 4,100만 명에 달했다. 외국인과의 교역도 활발해져 교역의 중심지였던 장안은 인구 100만 명을 수용하는 명실공히 국제도시로 장족의 발전을 이뤄나갔다. 이러한 그의 선정은 '개원의 치'라고 일컬어지며 널리 칭송받았다.


그러나 현군이었던 현종도 점차 정치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개원 30년, 연호를 '천보(天寶)'로 고친 현종은 재상이던 이임보(李林甫)에게 모든 정치를 맡겨놓고 주색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의 타락은 아들 이모(李瑁)의 비였던 양옥환(楊玉環)을 만나면서 그 도를 더해갔는데 양옥환이 바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요부로 일컬어지는 양귀비다.


정치는 이임보의 농간에 놀아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무력 기반인 부병제(府兵制)도 무너지고 모병제(募兵制)를 채택하게 되었다. 게다가 국경 주변에 설치된 10절도사(節度使)가 징병권을 행사함으로써 그 권력이 점차 강대해져 중앙을 위협하는 요소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양귀비의 양자가 되면서 현종의 사랑을 받았던 절도사 안녹산이 군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안녹산의 난을 일으키고 순식간에 장안에 입성하니 현종은 서둘러 마외로 몽진하기에 이르렀다.

신하들은 현종에게 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양귀비와 그녀의 오라버니인 양국충 때문이라며 그들을 참할 것을 거듭 간하였고, 현종은 신하들의 등쌀에 떠밀려 결국은 양귀비와 양국충을 주살하고 말았다.


 양귀비의 죽음을 본 현종은 정치에 뜻을 완전히 잃고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말았으며, 그의 뒤를 이어 등극한 사람이 바로 숙종이다.


태상황이 된 현종은 그의 나이 78세 되던 해인 762년, 병으로 파란만장한 생을 끝마쳤다.


양귀비의 본명은 양옥환(楊玉環, 719-756)이다. 귀비(貴妃)는 벼슬이름이다. 옛 촉(蜀)나라 땅 사천(四川) 출신이다. 양귀비는 현종 이융기(李隆基, 685-762)의 열여덟 번째 아들 이모(李瑁)의 비(妃)였다.
당시 현종은 인자하고 현명한 후궁 무혜비(武惠妃)를 사랑했다. 그런데 무혜비가 갑작스럽게 병사하자 실의에 빠진 현종은 어느 날 화청지(華淸池) 온천으로 행행(行幸)을 나갔다. 이때 현종은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양옥환을 우연히 처음 보게 된다.
황제는 그녀의 백옥 같은 살결과 일찍이 보지 못했던 천하일색의 눈부신 미모에 넋을 잃었다. 그녀가 며느리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미 사랑에 빠져 헤어날 수가 없었다. 황제는 양옥환을 자신의 후궁으로 들일 작정을 했다.


현종은 왕자 이모를 다른 여자와 재혼시켜 먼 변방으로 내보내고 며느리인 양옥환을 마침내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 이때 현종의 나이 오십 일곱, 양옥환은 스물 셋이었다.


현종의 치세 전반기는 '개원(開元)의 치(治)'라 하여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태평성세를 구가했다. 그러나 양귀비를 맞아들인 후 현종은 이성적 판단력을 잃고 말았다. 양귀비는 우선 자신을 비방하는 신하들을 제거하고 대신 친인척들을 황제에게 천거하여 대거 요직에 등용했다.


그녀의 세 자매들도 모두 국부인으로 책봉되었고 사촌 오라비이자 건달 출신인 양소(陽釗)는 황제를 최측근에서 보필하는 시어사(侍御史) 겸 감찰어사의 자리에 천거되어 현종으로부터 국충(國忠)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았다.

승상(丞相)의 자리에까지 오른 양국충은 부패하여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다. 양귀비를 등에 업은 '친양(親楊⋅친 양귀비 파)'의 환관과 탐관오리, 간신배들이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백성들의 삶은 급속히 몰락해 민심은 흉흉해져갔다.


현종은 변방의 젊은 절도사 안록산(安祿山)을 궁으로 불러 연회를 베풀었을 때 안록산을 처음 만난 양귀비는 그에게 호감을 느껴 그를 측근으로 삼았고, 급기야 양귀비는 자신보다 십여 년이나 나이 많은 무장(武將) 안록산을 양자로 삼아 그에게 20만의 병권을 쥐어주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양귀비의 총애와 신임을 두고 사촌 오라비 양국충과 안록산 사이에 치열한 충성경쟁과 갈등이 시작된다. 


 20만 병권을 쥐고 있는 안록산은 라이벌인 양국충을 제거하기 위하여 부하 사사명(史思明)과 공모하여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 잡는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이 '안사(安史)의 난'이다.
반란군이 장안을 향해 노도처럼 쳐들어오자 현종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양귀비와 함께 그녀의 고향인 옛 촉(蜀)나라 땅 사천(四川)을 향해 황급히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황제 일행이 마외파(馬嵬坡)에 이르렀을 때 호위하던 황제의 근위병들이 소동을 일으켰다.


근위병들이 나라를 이 꼴로 만든 양귀비와 그 일파들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며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뒤에선 반란군이 쫓아오고 근위병들은 꿈쩍도 하지 않자 현종은 어쩔 수 없이 병사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황제를 따라 피난길에 올랐던 양국충 등 일당이 근위병들에게 넘겨져 처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고, 양귀비는 현종에게 눈물로 하직인사를 한 후 나무에 비단천으로 목을 매었다. 이 때 현종의 나이 일흔 하나, 양귀비는 서른여덟이었다.


난이 평정된 후 현종은 다른 여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통한의 세월을 살다가 일흔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3살의 나이 차이에도 이러한 순애보가 가능한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기에 더욱 애절한 것일게다. 아무런 장애 없이 끝까지 살았다면 과연 이런 슬픈 사랑의 한이 영원하겠는가를...


長恨歌(장한가) 白居易(백거이)


漢皇重色思傾國 (한황중색사경국)
御宇多年求不得 (어우다년구부득)
楊家有女初長成 (양가유녀초장성)
養在深閨人未識 (양재심규인미식)

天生麗質難自棄 (천생려질난자기)
一朝選在君王側 (일조선재군왕측)
回眸一笑百媚生 (회모일소백미생)
六宮粉黛無顔色 (육궁분대무안색)

春寒賜浴華淸池 (춘한사욕화청지)
溫泉水滑洗凝脂 (온천수골세응지)
侍兒扶起嬌無力 (시아부기교무력)
始是新承恩澤時 (시시신승은택시)

雲鬢花顔金步搖 (운빈화안금보요)
芙蓉帳暖度春宵 (부용장난도춘소)
春宵苦短日高起 (춘소고단일고기)
從此君王不早朝 (종차군왕부조조)

承歡侍宴無閑暇 (승환시연무한가)
春從春游夜專夜 (춘종춘유야전야)
後宮佳麗三千人 (후궁가려삼천인)
三千寵愛在一身 (삼천총애재일신)

金屋粧成嬌侍夜 (금옥장성교시야)
玉樓宴罷醉和春 (옥누연파취화춘)
姊妹弟兄皆列土 (자매제형개렬토)
可憐光彩生門戶 (가련광채생문호)

遂令天下父母心 (수령천하부모심)
不重生男重生女 (부중생남중생녀)
驪宮高處入靑雲 (려궁고처입청운)
仙樂風飄處處聞 (선낙풍표처처문)

緩歌慢舞凝絲竹 (완가만무응사죽)
盡日君王看不足 (진일군왕간부족)
漁陽鼙鼓動地來 (어양비고동지내)
驚破霓裳羽衣曲 (경파예상우의곡)

九重城闕煙塵生 (구중성궐연진생)
千乘萬騎西南行 (천승만기서남항)
翠華搖搖行復止 (취화요요항복지)
西出都門百餘里 (서출도문백여리)

六軍不發無奈何 (육군부발무나하)
宛轉蛾眉馬前死 (완전아미마전사)
花鈿委地無人收 (화전위지무인수)
翠翹金雀玉搔頭 (취교금작옥소두)

君王掩面救不得 (군왕엄면구부득)
回看血淚相和流 (회간혈누상화류)
黃埃散漫風蕭索 (황애산만풍소삭)
雲棧縈紆登劍閣 (운잔영우등검각)

峨嵋山下少人行 (아미산하소인항)
旌旗無光日色薄 (정기무광일색박)
蜀江水碧蜀山靑 (촉강수벽촉산청)
聖主朝朝暮暮情 (성주조조모모정)

行宮見月傷心色 (항궁견월상심색)
夜雨聞鈴腸斷聲 (야우문령장단성)
天旋地轉廻龍馭 (천선지전회용어)
到此躊躇不能去 (도차주저부능거)

馬嵬坡下泥土中 (마외파하니토중)
不見玉顔空死處 (부견옥안공사처)
君臣相顧盡沾衣 (군신상고진첨의)
東望都門信馬歸 (동망도문신마귀)

歸來池苑皆依舊 (귀내지원개의구)
太液芙蓉未央柳 (태액부용미앙류)
芙蓉如面柳如眉 (부용여면류여미)
對此如何不淚垂 (대차여하부누수)

春風桃李花開日 (춘풍도리화개일)
秋雨梧桐葉落時 (추우오동섭낙시)
西宮南內多秋草 (서궁남내다추초)
落葉滿階紅不掃 (낙섭만계홍부소)

梨園子弟白發新 (이원자제백발신)
椒房阿監靑娥老 (초방아감청아노)
夕殿螢飛思悄然 (석전형비사초연)
孤燈挑盡未成眠 (고등도진미성면)

遲遲鐘鼓初長夜 (지지종고초장야)
耿耿星河欲曙天 (경경성하욕서천)
鴛鴦瓦冷霜華重 (원앙와냉상화중)
翡翠衾寒誰與共 (비취금한수여공)

悠悠生死別經年 (유유생사별경년)
魂魄不曾來入夢 (혼백부증내입몽)
臨邛道士鴻都客 (임공도사홍도객)
能以精誠致魂魄 (능이정성치혼백)

爲感君王展轉思 (위감군왕전전사)
遂敎方士慇懃覓 (수교방사은근멱)
排空馭氣奔如電 (배공어기분여전)
升天入地求之遍 (승천입지구지편)

上窮碧落下黃泉 (상궁벽낙하황천)
兩處茫茫皆不見 (양처망망개부견)
忽聞海上有仙山 (홀문해상유선산)
山在虛無縹緲間 (산재허무표묘간)

樓閣玲瓏五雲起 (누각령롱오운기)
其中綽約多仙子 (기중작약다선자)
中有一人字太眞 (중유일인자태진)
雪膚花貌參差是 (설부화모삼차시)

金闕西廂叩玉扃 (금궐서상고옥경)
轉敎小玉報雙成 (전교소옥보쌍성)
聞道漢家天子使 (문도한가천자사)
九華帳裏夢魂驚 (구화장리몽혼경)

攬衣推枕起徘徊 (남의추침기배회)
珠箔銀屛迤邐開 (주박은병이리개)
雲鬢半偏新睡覺 (운빈반편신수교)
花冠不整下堂來 (화관부정하당내)

風吹仙袂飄飄擧 (풍취선몌표표거)
猶似霓裳羽衣舞 (유사예상우의무)
玉容寂寞淚闌干 (옥용적막누란간)
梨花一枝春帶雨 (이화일지춘대우)

含情凝睇謝君王 (함정응제사군왕)
一別音容兩渺茫 (일별음용량묘망)
昭陽殿裏恩愛絶 (소양전리은애절)
蓬萊宮中日月長 (봉래궁중일월장)

回頭下望人寰處 (회두하망인환처)
不見長安見塵霧 (부견장안견진무)
唯將舊物表深情 (유장구물표심정)
鈿合金釵寄將去 (전합금채기장거)

釵留一股合一扇 (채류일고합일선)
釵擘黃金合分鈿 (채벽황금합분전)
但敎心似金鈿堅 (단교심사금전견)
天上人間會相見 (천상인간회상견)

臨別殷勤重寄詞 (림별은근중기사)
詞中有誓兩心知 (사중유서량심지)
七月七日長生殿 (칠월칠일장생전)
夜半無人私語時 (야반무인사어시)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련리지)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此恨綿綿無絶期 (차한면면무절기)


황제 미색을 귀히 여겨 미인을 생각했으나
천하를 다스린 지 몇 년 지나도 찾지 못했다.
양씨 집안에 딸이 있어, 이제 막 성숙하여
깊숙한 안방에 있어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다.

타고난 아름다운 본능을 스스로 어쩌지 못해
하루아침에 뽑히어 임금 곁에 있게 되었다.
눈동자 굴리며 한번 웃으면 온갖 교태 생겨
육궁의 화장한 미녀들이 얼굴빛을 잃었다.

봄 날씨 쌀쌀하여 화청지에서 목욕하는데
온천물이 미끄러워 살에 낀 기름을 씻는다.
예쁘고 가련하여 무력하여 시녀들이 부축하여
이때에 바로 새로 임금님 은혜를 받게 된다네.

구름머리, 꽃 얼굴, 걸으면 흔들리는 금장식물
연꽃 장식 휘장 속에서 따뜻한 봄밤을 보낸다.
봄밤은 너무 짧아 해가 이미 높이 솟으니
이때부터 임금님은 아침 조회에 가지 않았다.

기뻐 잔치를 벌임에 한가한 시간이 없었다.
봄에는 봄 따라 놀고 밤에는 새도록 놀았다.
후궁에 미녀가 삼천 명이나 되지만
삼천 미녀의 총애가 오직 한 몸에 머물렀다.

금빛 궁궐에서 화장하고 교태로 황제 모시는 밤
옥루의 연회가 마치자 취하여 봄날처럼 따뜻했다.
형제자매가 모두 봉토를 나누어 받았으니
부러워라, 광채가 가문에 생생하였다.

마침내 세상의 부모 된 사람들 마음이
아들 낳는 일보다 딸 낳은 일을 귀하게 여겼다.
여궁의 높은 곳으로 푸른 구름 모여들고
신선의 음악이 바람에 날려 곳곳에서 들려온다.

느린 노래, 느린 춤이 악기에 어울려 행해지니
종일토록 보아도 황제는 다시 보고 싶어 했다.
어양 땅에서는 전쟁의 북소리가 땅을 울리니
그 놀라움에 예상우의곡도 소리가 끊기었다.

구궁궁궐에서 전쟁의 연기와 먼지 일어나
수천수만 수레와 말들이 서남으로 피해 갔다.
화려한 깃발 흔들거리며 가다가 다시 서며
서쪽으로 대궐문을 나와 백여 리를 나갔다.

모든 군대가 움직이지 않으니 이를 어찌하나
아름다운 양귀비가 임금 말 앞에 죽는데
꽃비녀가 땅에 떨어져도 줍는 사람 없었다.
취교와 금작과 옥소두 같은 장신구도 버려졌도다.

임금은 얼굴을 가리려 했으나 어쩔 수가 없어
돌아보니, 피눈물이 서로 엉기어 흘러내렸다.
누런 흙먼지 흩어져 자욱하고 바람은 스산한데
구불구불한 잔도를 지나가서 등검각에 올랐다.

아미산 아래에는 다니는 사람 드물고
깃발들은 빛을 잃고 햇빛도 엷어졌다.
촉 땅의 물빛은 보석 같고 산은 푸른데
임금에게는 아침마다 저무는 마음이었다.

행궁에서 보는 달도 상처받은 양귀비 얼굴빛
밤비에 들리는 방울소리도 애간장 끊는 소리였다.
난리가 평정되어 임금님 수레 돌아오는데
여기에 이르러서는 머뭇머뭇 차마 떠나지 못한다.

마외역 언덕 아래 진흙 땅 속에서도
옥 같은 얼굴은 보이지 않고, 죽은 곳만 쓸쓸하다
임금과 신하 서로 돌아보니 눈물이 옷을 적시고
동쪽으로 여러 대궐문 바라보며 말 가는 대로 돌아간다.

돌아오니 연못과 동산은 옛날과 같고
태액의 부용, 미앙궁의 버드나무도 그대로였다.
연꽃을 봐도 양귀비 얼굴, 버들을 봐도 양귀비 눈썹
이런 정경보고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오.

봄바람에 복숭아꽃, 오얏꽃 피는 날이요
가을비에 오동나무 잎 떨어지는 때이로다.
서궁 남쪽 안에는 가을 풀이 무성하고
낙엽이 계단에 붉게 가득 쌓여도 쓸지 않는다.

이원의 자제들 이미 늙어 백발이 새롭고
초방의 태감도 젊은 궁녀도 모두가 늙었구나.
저녁 궁궐에 반딧불 나니 양귀비 생각 처량하고
외로운 등불 돋운 심지가 타버려도 잠이 오지 않는다.

느리고 느린 종소리를 처음으로 길게 느낀 밤
밝고 밝은 별과 은하수, 하늘이 밝아오는구나.
원앙새 장식 기와가 차가워 서리꽃은 더욱 짙고
비취(翡翠)빛 찬 이불을 누구와 함께 하나

아득한 생사(生死)의 이별은 해가 지나가도
그 혼백(魂魄)은 아직 돌아와서 꿈에도 들지 않는다.
임공(臨邛)의 도사(道士)로서 도성에 머무는 길손 있어
정성으로 혼백(魂魄)을 불러들일 수 있다고 하는구나.

황제의 잠 못 드는 처지가 가련하여
마침내 방사(方士)를 시켜서 은근히 찾아보게 하였다.
구름에 올라 공기를 타니 빠르기가 번개 같아
하늘에 오르고 땅을 들며 두루 찾아보았다.

위로는 하늘 끝까지 아래로는 황천까지 찾았으나
두 곳이 너무 넓어 어디서도 찾아보지 못했다.
바다 위에 신선이 사는 산이 있다는 말 들었으나
아득한 사이에 산은 텅 비어 있었다.

영롱(玲瓏)한 누각(樓閣)에 오색구름 피어나고
그 안은 아름다운데 선녀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 있었으니 이름은 태진(太眞)인데
눈 같이 흰 피부, 꽃 같이 고운 얼굴이 양귀비 같았다.

황금 대궐 서쪽 행랑에서 옥대문을 두드려
여종인 소옥(小玉)에게 전하여 쌍성에게 알려주었다.
한나라 황제의 사신이 왔다는 말 전해 듣고
아홉 겹의 깊은 휘장 속에서 잠자던 혼이 놀랐다.

옷을 잡고 베개 밀어 제치고 일어나 배회(徘徊)하다가
주렴과 은병풍이 스르르 열리더니
구름 같은 머리 반쯤 기운채로 막 잠이 깨어
화관(花冠)도 정제하지 못한 채로 방에서 내려온다.

바람이 부니 신녀의 소맷자락이 날리어
예상우의(霓裳羽衣)곡으로 춤추는 듯하였다.
옥 같은 얼굴에 고독이 깃들고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배꽃 한 가지가 봄비에 젖은 듯이

정을 품고 눈물을 머금고 황제께 감사하였다.
한번 이별 뒤에 아련해진 황제의 음성과 얼굴
소양(昭陽)전각 안에서의 임금의 은혜 끊어진 뒤로
봉래(蓬萊)궁전 안에서의 세월은 길기만 하였습니다.

고개 돌려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니
장안(長安)은 보이지 않고 티끌과 안개만 자욱합니다.
오직 지난날 쓰던 물건 가져다 나의 깊은 정 보이려
자개함과 금비녀를 부쳐 보내려 합니다.

비녀 한 개와 함 한 쪽을 증거로 남기려
비녀는 황금을 쪼개고 상자는 자개를 나누었다.
우리의 마음을 금비녀와 금상 자처럼 굳게 가져서
천상(天上)과 인간세상에서 서로 만나보려 합니다.

떠나려 함에 은근히 거듭 부탁의 말을 하니
말 가운에 서약함이 있으니 마음으로 알리라.
어느 칠월 칠석 날 장생전(長生殿)에서
사람 아무도 없는 깊은 밤에 사사로이 나눈 말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기를 원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었기를 원하였다.
높은 하늘도 장구한 땅도 다할 때가 있지만
이들의 한은 이어져서 끊어질 때가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