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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중국여행

진시황 병마용갱과 진시황릉

by 황교장 2016. 5. 14.


진시황 병마용갱과 진시황릉

 

화청지를 나와 점심식사를 하고는 여산 기슭에 있는 진시황의 병마용갱으로 향했다. 그동안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병마용갱을 직접 볼 수 있다는 데 대하여 가슴이 설렜다.

병마용갱으로 가는 길은 잘 닦여 있어 차가 시원하게 달린다. 주변의 산세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제법 높이가 있어 보인다. 길가에는 석류나무 농장들이 많이 보인다. 30여 분을 달리자 병마용갱 입구에 도착했다.



주차장에는 차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매표하는 데 시간이 제법 많이 걸린다. 기다리면서도 다들 즐거운 듯 사진을 찍으면서 호호깔깔이다.


1호갱 입구가 저 멀리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줄을 서 있다. 가이드가 기지를 발휘하여 우리를 다른 길로 인도를 한다. 그런데 오늘은 통하지 않는다.



그 길은 중간에 끼어들어가는 문이었는데 일절 들어가지 못하게 공안경찰들이 지키고 있다. 평소에는 이곳으로 통과시켜 주었지만 오늘은 노동절이어서 너무 사람들이 많아 절대 못 들어가게 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나와서 줄을 정상적으로 섰다. 잔재주 부리다가 나무에 떨어진 격이다.


한참을 기다리다 드디어 1호갱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사진에서만 보아왔던 광경이 펼쳐졌다.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힐 만큼 대단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아서 제대로 살펴볼 수가 없다. 그나마 수백 미터를 지나오자 사진 촬영을 할 여유도 생기고 가이드의 설명도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병마용갱은 1974년에 처음 발견되었다.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이다. 농부가 우물을 파기 위해 땅을 파다가 도기로 된 사람의 얼굴과 목과 팔다리가 나왔다. 이 사실을 신화사통신 기자에게 알렸다. 이후 인민일보을 통해 보도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병마용갱의 용()자가 허수아비용 또는 나무로 만든 사람형상의 목우를 말한다. 그런데 가이드는 인형용이라고 설명을 한다. 따라서 병마용갱(兵馬俑坑)이란 흙으로 구워 만든 병사와 말이 묻힌 구덩이라는 뜻이다. 즉 진시황이 죽은 후 대군의 일부를 순장시키는 대신 이렇게 인형을 무덤에 묻은 것이다.



진시황이 사후에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하려는 목적으로 병사와 말의 모형을 흙으로 빚어 실물 크기로 제작했다고 한다. 1호갱은 길이 210m와 너비 60m에 깊이 4.56.5m의 총면적 12면적으로 축구장 2개의 넓이다. 병마용은 모두 6천 개 가량으로 당시 진나라 군대 1개 군진 규모다.


하나하나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머리 모양을 하고 있으며 섬뜩하리만큼 섬세하고 정교하다. 실물 크기로 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은 당시 군사들의 열병과 사열을 하는 대열처럼 보인다.


갱내에 있는 토병과 말은 가운데를 중심으로 동쪽을 바라보며 정렬해 있다 동쪽에 있는 가로 3열의 토병들은 손에는 궁수병기를 쥐고 있고, 그 뒤로 6,000여 명의 갑옷 입은 병사들이 역시 창과 같은 긴 병기를 들고 서 있다.



그런데 뒤쪽으로 가면 지금도 조각들을 찾아서 맞추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는 아직도 발굴이 한창임을 나타내어 준다. 이 갱 위에 같은 길이의 회랑식 건축이 있었다고 하는데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한다. 이는 항우가 불태워 파괴했다고 한다.


사마천 사기의 항우본기에 항우는 군대를 이끌고 서쪽 함양을 도륙하고 항복한 진의 왕자 영을 죽였다. 진의 궁실을 불태웠는데 불은 석 달 동안 꺼지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함양의 아방궁전뿐만 아니라 이곳도 함께 파괴되었다고 추정된다.


사람들에 떠밀리어 1호갱을 나와 2호갱으로 가지 않고 3호갱으로 갔다.


3호갱은 구조가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깊은 구덩이 속에 무슨 회의를 하는 모습이다. 3호갱은 1976511일에 1호갱 서북쪽 25m 떨어진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3호갱은 군사 지휘부로 추정된다. 장군의 것으로 보이는 채색된 전차 1량과 갑옷 입은 보병용 64, 마용 4건이 출토되었다.



3호갱을 나와 2호갱으로 갔다. 2호갱은 아직도 한창 발굴 중에 있다. 2호갱은 면적이 약 6,000이며 갱내에는 기마병, 보병, 궁병과 전차들이 혼합된 대형 군대가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원래 병사들은 나무로 만든 무기를 지니고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썩어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청동 화살촉, 단도의 날, 신호를 알리는 종 따위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2호갱은 아직도 많은 부분들이 지하에 그대로 묻혀 있다. 몇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발굴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처럼 발굴을 조심스럽게 천천히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원형을 완벽하게 보존할 수 있는 기술이 갖춰지지 않은 만큼 급하게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첫 황릉 발굴 당시 병마용이 화려한 색상이었으나 공기에 노출되자마자 염료 산화로 색을 잃어간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병마용갱 병사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엇갈린다고 한다. 어떤 학자들은 황제의 실제 수비대였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학자들은 황제의 죽음으로 산사람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막기 위해 대리로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두 주장 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바쁘게 서둘렀지만 그래도 볼 것은 다본 셈이다.


이젠 진시황제가 묻혀 있다는 진시황릉을 향했다. 그 중간에 기념품을 사려고 가게에 들어갔다. 한 분이 병마용갱을 집의 장식품으로 쓸려고 하는데 어떤지를 질문을 한다. 가능하면 사지 말라고 했다.


이유인즉 집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웃음 뛴 얼굴이 있어야 하는데 병마용갱의 인물들 중에서 웃는 얼굴은 단 한 분밖에는 없다. 모두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당시의 진나라 병사들은 많은 전투를 치렀다. 그야말로 전국시대를 마지막 겪은 병사들이다. 따라서 많은 인명을 살상한 살기가 느껴지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래서 집의 장식품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관상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웃지 않는 사람들은 마음이 좋지 않는 사람으로 분류한다. 뭔가 마음에 근심이 있거나 사악한 경우에 관상이 맑지가 않고, 어둡고 웃지를 않는다.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특별한 선물이 두 가지가 있다. 이는 웃음과 울음이다. 웃을 때에는 목젖이 보일정도로 웃어야 하고 울 때는 눈물이 펑펑 쏟아지도록 울어야 마음의 정화가 된다. 이것이 카타르시스다.


 잘 웃고 잘 우는 사람들이 장수인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한다. 그러므로 행복하게 살기 위한 조건으로 웃음은 필수다.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해진다는 말은 운명을 고치는 개운법에 필수 요건이다.

 

버스를 타고 1.5km를 가서 진시황릉에 도착했다. 진시황릉 앞에 내려 주변의 산세를 보니 너무 좋다. 이곳 역시 여산 자락이다. 오늘 따라 맑은 날씨와 적당한 온도로 가시거리가 아주 좋다. 참 좋은 명당자리에 진시황이 묻혀 있다.



 어제 공항에 내릴 때의 숨이 막히는 답답한 공기와는 비교가 된다. 이처럼 맑고 가시거리가 좋은 날은 일 년 중 그리 많지가 않다고 가이드는 설명을 한다. 우리들에게 참 좋은 계절에 와서 복이 많은 분들이라고 부연설명을 한다.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바로 저 위에 보이는 산이 진시황릉이라고 한다. 저 안에 들어가 보았자 아무것도 없고 입장료만 또 다시 내어야 한다고 한다.




그만 여기서 단체사진만 한 장 찍고는 가자고 한다. 아직 아무것도 발굴이 된 것이 없다고 한다. 그때서야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구절이 떠올랐다.


사마천 사기의 진시황본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산(酈山)에 진시황을 안장했다. 옛날 진시황이 처음 즉위해 여산에 치산(治山) 공사를 벌였는데, 천하를 통일한 후에는 전국에서 이송되어 온 죄인 70만여 명을 시켜서 깊이 파게 하고 구리물을 부어 틈새를 메워 외관을 설치했다. 모형으로 만든 궁관(宮觀), 백관(百官), 기기(奇器), 진괴(珍怪)들을 운반해 그 안에 가득 보관했다. 장인(匠人)에게 명령해 자동으로 발사되는 궁전(弓箭)을 만들어 놓고 그곳을 파내어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쏘게 했으며, 수은(水銀)으로 백천(百川), 강하(江河), 대해(大海)를 만들고, 기계로 수은을 주입해 흘러가도록 했다. 위에는 천문(天文)의 도형을 장식하고 아래에는 지리(地理)의 모형을 설치했으며, 도롱뇽의 기름으로 양초를 만들어 오랫동안 꺼지지 않게 했다. 2세 황제가 말하기를 선제의 후궁들 가운데 자식이 없는 자를 궁궐 밖으로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며 명령을 내려서 모두 순장시켜 버리니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매장이 끝나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장인(匠人)이 기계를 만들었고, 그 일에 참여한 노예들도 모두 그것을 알고 있는데 그들의 숫자가 많아서 누설될 것이라 했다. 장중한 상례가 끝나고 보물들도 이미 다 매장되자 묘도(墓道)의 가운데 문을 폐쇄하고, 또 묘도의 바깥문을 내려서 장인과 노예들이 모두 나오지 못하게 폐쇄하니 다시는 빠져나오는 자가 없었다. 묘지 바깥에 풀과 나무를 심어서 묘지가 마치 산과 같았다.”







 

저 멀리 산처럼 보이는 것이 진시황릉이다. 진시황릉은 높이 76m, 동서 485m, 남북 515m나 된다. 

 내가 죽기 전에 발굴이 완전히 되어 내부를 한번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보면서 진시황릉을 떠났다.


   시황제에 대하여 알아보자

 

진시황제(秦始皇帝, BC 259- BC 210)는 전국 칠웅 진나라의 제31대 왕이자, 중국 최초의 황제이다. 성은 영(), 이름은 정() 혹 조정(趙政)이다. , 씨는 진(), ().

이처럼 사료마다 다르다. 사마천 사기에는 진시황제는 진() 장양왕(莊襄王)의 아들이다. 장양왕이 진()나라의 질자(質子)로서 조()나라에 있을 때 여불위(呂不韋)의 첩을 보고 반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해 시황(始皇)을 낳았다.”라고 되어 있다.

13세 때 장양왕이 죽자 정이 왕위를 계승해 진왕(秦王)이 되었다. 성명은 영정이고, 혹 씨명은 진정(秦政), 조정이며,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대로 여정(呂政)이라고도 한다. 진 장양왕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당시 세도가 대단하던 조나라의 상인 출신의 승상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이라는 주장도 있다.


BC 246년부터 BC 210년까지 36년간 재위했다. BC 246년부터 BC 241년까지 6년은 여불위(呂不韋)가 섭정을 하였고 BC 241년부터 BC 210년 붕어할 때까지 30년은 친정을 하였다.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 탄압 사건인 분서갱유를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완성했으며, 최초로 분열된 중국을 통일했다.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실시하여 이후 2천 년 중국 황조들의 기본 틀을 만들었다. 그리고 중국을 영어로 China라는 명칭이 진(秦)에서 따 와 오늘날 까지 살이 있다.

 

전근대의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진시황은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온 진나라 공자 영자초와 그 부인 조희의 아들이다. 그러나 원래 조희는 조나라 수도 한단의 기생 출신으로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의 애첩이었다. 여불위는 조희를 영자초에게 바쳤고, 영자초는 조희를 아내로 삼았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조희는 여불위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으나, 여불위가 이를 숨기고 정치적 목적에서 진시황제를 숨겨 주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러나 사마천사기의 여불위열전의 기록이 사실인지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다.


새로 진나라 왕이 된 시황제 영정은 친정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기에, 아버지 때에 승상이 된 여불위가 섭정이 되어 국사를 돌보았다. 여불위는 마음대로 국사를 휘둘렀다. 시황제의 모친 조태후는 음기가 너무 많아서 여불위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를 않았다. 따라서 정력이 초절륜한 노애라는 자신의 수하를 환관처럼 꾸며 조씨의 처소로 보냈다. 조씨는 노애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낳았다. 조씨는 노애와 함께 수도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거처하였다.


그런데 BC 238년에 시황제 영정이 성인식으로 잠시 함양을 비우자,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시황제은 곧바로 군사를 파견하여 노애를 능지처참하고 어머니 조씨를 감금하였다. 노애와 조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2명도 살해하였다. 시황제은 여불위에게 자결을 강요하였다. 이듬해인 BC 237년에 여불위는 결국 자결하였으며 시황제은 비로소 친정을 시작하였다.


진나라의 통일 과정은 이미 시황제가 즉위하기 이전인 장양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 장양왕이 BC 250년 주나라를 정벌했다. 시황제은 중국 통일을 위한 통일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여기서 그 유명한 합종연횡이 나온다. 진시황의 진나라가 최강국으로 등장하여 진의 국위가 열국(列國)을 위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6국은 종적으로 연합하여 진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이를 합종이라 한다. 합종책을 주도한 사람이 소진(蘇秦)이다.

 그 후에 진나라는 6국이 합종한 대진동맹(對秦同盟)을 깨는 데 성공한다. 그 주인공은 장의(張儀). 장의는 6국을 설득하여 진과 6국이 개별적으로 횡적인 평화조약을 맺도록 했다. 이것을 연횡이라고 한다.


연횡을 한 후에 진시황은 BC 230년에 제일 먼저 가장 세가 약했던 한()부터 멸망시켰다. 다음으로 BC 228년에는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나라, ()나라,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드디어 BC 221년에 마지막 남은 제()나라까지 멸망시켜 시황제의 나이 40세에 전 중국 땅을 통일하였다.

   


시황제는 국왕(國王)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는다며, 새로운 칭호를 원하였다. 그리고 이사와 왕관 등의 요청에 따라 새로운 칭호를 정하게 된다. 사마천사기에 의하면


옛날 오제(五帝) 때에는 땅이 사방 천 리에 지나지 않았고, 그 바깥에는 후복(侯服), 이복(夷服) 등의 제후가 있었는데 그들이 어떤 때에는 조현하고 어떤 때에는 조현하지 않아 천자는 그들을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잔적(殘敵)을 토벌하시고 천하를 평정해 전국에 군현을 설치하고 법령을 하나로 통일시켰습니다.


이는 상고(上古) 이래 일찍이 없었던 일로 오제(五帝)라고 할지라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박사(博士)들과 함께 논의하기를 고대에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태황이 가장 존귀했다라고 했습니다. 신들이 황공하게도 존호(尊號)를 올리나니, 왕을 태황(泰皇)’이라고 하고, ()()’라고 하고, ()()’라고 하며, 천자가 스스로를 칭할 때는()’이라고 하십시오.”

 그러자 진왕은 ()자를 없애고 황()자를 취하고, 상고시대의 제()라는 호칭을 채택해 황제(皇帝)’라고 칭할 것이며, 다른 것은 그대들이 논의한 대로 하라.”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장양왕을 태상황(太上皇)이라고 추존하고, 또 이렇게 분부했다.


짐이 듣건대 태고(太古)에는 호()는 있었으나 시호는 없었으며, 중고(中古)에는 호가 있었고 죽은 후에 생전 사적에 따라서 시호를 정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식이 아비를 논의하고, 신하가 군주를 논의하는 것과 같은데 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니, 짐은 이러한 제도를 채택하지 않겠노라. 그래서 지금부터는 시호를 추서하는 법을 폐지하노라.


 짐은 최초로 황제가 되었기에 시황제(始皇帝)라고 칭하고, 후세에는 수를 세어서 2(二世), 3(三世)라고 해 만세(萬世)에 이르기까지 길이 전해지도록 하라.”


   


중국 최초로 황제라는 호칭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진시황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자신의 자손이 만세에 이르도록 황제를 하기를 바라는 욕심이다. 욕심이 인간을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뜨린다.

결국 진시황의 자손은 2세 호해황제로 끝이 난다. 호해황제는 5년밖에 못하고 진시황이 아끼고 좋아했던 환관인 조고에게 죽임을 당한다.

 

시황제는 승상 이사의 의견을 따라 군현제로 나라를 다스렸고,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군마다 수(행정 장관), (사령 장관), (감찰관)을 두었다. 또한, 천하의 부호 12만 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켜 그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리고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함양궁을 제2궁전, 3궁전으로 이어 웅대한 궁전으로 바꾸고, 전국의 농민을 사역에 동원하여 인해전술로 폭 50m의 황제 전용 도로를 만들었다. 시황제는 자기를 역사상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천재라고 생각하여, 고관에게 정무를 맡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법은 시황제가 모두 정하고, 결재도 혼자서 했다. 그래서 상소는 함양궁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상소는 저울로 달아졌고, 결재량은 하루에 1(30kg)으로 정해졌다. 도량형과 화폐, 문자 등을 통일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려 하였고, 도로 역시 정비하여 각지의 교통 체계를 강화하였다.


시황제는 남쪽으로도 군사를 파견하여 4개 군을 신설하였으며, 북방의 흉노족이 중국을 위협하자, 대장군 몽염을 변방으로 보내어, 그들을 정벌, 내몽고의 땅 일부도 편입시켰다.

 

BC 213, 함양궁에서 큰 연회를 베풀었다. 그때 시황제의 나이는 46세로 절정기였다. 연회 도중 박사 순우월이 봉건제와 군현제를 놓고 복야 주청신과 언쟁을 벌였다. 이때, 순우월이 봉건제로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승상 이사는 30일 내에 진나라의 역사와 의술, 농경 등에 관한 책 이외의 모든 책들을 태워버리라는 주청을 올렸다. 시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실행시켰다.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이다.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승상 이사는 한비자를 죽인 사람이다. 한비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법가사상의 대표자다. 한비자와 이사는 순자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친한 친구 사이다. 한비자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책 한비자의 저자이다. 진시황이 우연히 이 책을 읽고 감동하여 아아! 과인이 이 사람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구나!”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진시황은 이토록 한비자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나 이사는 친구 한비자가 진시황의 총애를 받는 것을 꺼려 질투심에서 그를 모함했다. 이사는 한비자가 한나라의 공자이기 때문에 진나라를 위해서 일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를 등용하지 않고 억류했다가 돌려보낸다면 후환이 될 것이니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시황은 이사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 한비를 가두고 사약을 보내 자살하도록 했다. 진시황은 뒤늦게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했지만, 이미 한비가 죽은 뒤였다. 한비는 본래 신하가 군주에게 유세하기 어렵다는 점을 터득하고 난언세난등 여러 편에서 진언의 방법을 자세하게 말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은 죽음을 당하는 화를 피하지 못했다.


한비는 비록 진나라에서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법가사상은 진시황의 통치원칙이 되어 천하통일에 기여했다. 친구 한비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사도 결국 환관인 조고에게 죽임을 당한다.


갱유(坑儒)는 평생 입만 살아있는 유학자를 싫어해 유학자 460여 명을 생매장시킨 일이다. 이를 합쳐 분서갱유(焚書坑儒)라 불린다.


 그런데 분서갱유는 원래 단지 책을 압수하거나 학자들을 단속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한제국 성립 후 유학자들이 한제국의 건국의 명분을 위해서 확대했다는 설이 있다.

 

시황제는 북방에 흉노의 침입을 염려하여 대장군 몽염에게 서쪽으로 임도로부터 동쪽으로 요동까지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도록 명했다. 이 만리장성에 동원된 인부가 150만여 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서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하였다.

또한, 시황제는 함양 근교에 아방궁을 쌓도록 하였고, 나아가서는 70만 명의 인부를 동원, 함양 근교의 여산 전체에 자신의 능묘를 건설토록 했다. 이런 대토목공사를 하는 동안, 국가의 재정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법을 매우 엄히 하여 백성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게 하였으며, 한 사람이 죄에 연루되면 그 삼족을 몰살시켰고, 나아가 한 집이 법을 어기면 그 마을의 모든 가구들도 그에 똑같은 형벌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관청으로 가는 길에는 항상 죄인들의 행렬이 즐비했다 전해진다.

 

어느 날 시황제의 행차는 낭아산에 도착했다. 시황제는 그 풍경이 맘에 들어 3개월 정도 머물렀는데 갑자기 그곳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는데 한 섬이 갑자기 나타나자마자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서복이라는 방사가 시황제가 보았던 섬은 전설상의 봉래산이었다고 주장하고는 봉래산에서 불로불사약을 구해오겠다고 했다. 서복이 갈 배에는 수많은 보물과 소년소녀 3000명이 실렸다. 그리고 서복은 떠났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서복이 탄 배가 지금의 일본으로 가서 그곳에서 정착했다는 설도 있고, 우리나라 전라남도 고흥군의 고흥반도의 끝에 있는 봉래면에 정착했다는 설도 있다. 지금 우주센터가 설립되어 있는 외나로도가 바로 봉래면이다. 이곳 봉래산(410m)에는 불로초가 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시황제가 불로불사약인 줄 알고 먹은 것이 수은이라고 한다. 결국 시황제는 불로불사를 꿈꾸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생명까지 줄어든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

시황제는 BC 210년에 마지막 순행을 하였다. 여기에는 승상 이사와 중거부령인 환관 조고, 그리고 자신의 26번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인 호해가 자신을 뒤따랐다. 사마천사기에 따르면 황제는 돌아오는 도중 평원진에서 유성이 떨어졌는데 그 운석에 누군가가 始皇帝死而地分(시황제사이지분)’ ,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갈라진다고 써놓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시황제는 병으로 쓰러졌다고 한다. 그리고 시황제는 사구 지방에 이르자, 병이 매우 위독해졌으며 유언장을 조고에게 쓰라 하고, 그 내용은 옥새를 적장자인 황태자 부소에게 전달케 하고, 부소에게 함양에서 자신의 장례를 주관하라 명하였다.


 마침내 BC 210년 음력 722, 진시황제는 50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사와 조고, 호해는 시황제의 죽음을 숨겼다. 조고는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하여 황태자 부소와 대장군 몽염에게 자결을 하도록 명하였다. 부소는 자결하였으나 몽염은 이 명에 대해 의심을 품어 자결하지 않자 조고는 몽염을 감옥에 가두었다. 결국 시황제의 26남 호해가 황제에 오르니 그가 진나라 이세황제이다. 이세황제는 몽염을 살려주려고 했으나 조고의 말을 듣고는 반역 혐의로 몰아 죽였다.


결국 이사와 이세황제 호해는 조고에게 죽임을 당하고, 조고는 이세황제 호혜의 장남인 왕자 영에게 죽임을 당한다. 영은 한고조 유방에게 항복한다. 한고조는 영을 살려주었으나 항우가 영을 죽인다. 이것으로 진나라는 완전히 멸망을 한다.


천하를 호령한 진시황도 50년밖에 못살고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났다. 그의 후손들이 만세(萬世)에 이르기까지 길이 전해지도록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은 이처럼 비극으로 끝이 났다.

그런데 진시황의 유물은 2천수백 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어 서안사람들을 다 먹여 살린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엄청난 관광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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