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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중국여행

여강고성

by 황교장 2016. 5. 22.

여강고성

 

여강 시내에 도착하자 저녁식사를 하러 바로 식당에 갔다. 그런데 한 쪽에는 신랑 신부가 가족들과 피로연을 하고, 다른 쪽에는 그림들을 펼쳐놓고 손님들에게 그림경매를 하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나이 지긋한 분은 앉아 있다. 이 지방에서 제법 명성이 알려진 화가라고 한다. 이분의 작품을 팔고 있었다. 음식점에서 그림을 경매하는 모습은 어느 나라에서도 보지 못한 독특한 풍경이었다. 경매를 해서 팔리지 않으면 다음에 오는 새 손님에게 다시 경매를 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여강 고성 안에 있는 숙소로 갔다. 여강고성은 산서성의 평요고성(平遙古城,) 운남성의 대리(大理)고성과 더불어 중국 3대 고성으로, 이중 최고로 꼽힌다.

중국의 오래된 성은 반드시 높은 성문을 통과하여 들어가야 한다. 외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곳은 성문이 없이 바로 성 안으로 들어간다. 이곳을 지배한 성씨가 목씨인데 에다 성을 쌓으면 곤란할 ()’자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성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숙소가 나왔다. 고풍스러운 객잔이다. 이 객잔은 800년 전 차마고도를 통해 건너온 무역상들이 머물었던 숙소다. 겉모습은 옛날식 그대로인데 내부는 현대식으로 보수한 숙박시설이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마음에 들었다. 짐만 객잔에 두고 고성 투어에 나섰다.



가이드가 이곳은 미로처럼 얽혀 있어 돌아올 때 길을 잃을 수 있다면서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자세히 알려준다.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마음에 드는 가게를 기웃거리면서 물건들도 구경하고 그 중에 마음에 드는 물건들은 흥정도 하면서 계속 걸어갔다.



리장 고성의 중심인 사방가(四方街)까지 갔다. 여기서 각자 흩어져서 구경하기로 했다. 가이드가 좋은 곳을 보여주겠다면서 자기를 따라 오라고 한다. 사람들이 붐비는 곳을 벗어나 호젓한 길로 간다. 길 옆으로 개울물이 흐르고 있다.


다리를 건너니 음악이 흐르는 주점이 쭉 늘어서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거의 없다. 한 곳은 노천 카페인데 그곳에서는 와인만 팔고 있었다. 청춘남녀가 한 팀 앉아 있고 나이가 제법 든 서양인들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면서 와인을 즐기고 있다. 가이드에게 이곳에서 한 잔 하고 가자고 제안하니 자기는 술을 못한다고 하면서 이곳의 술값이 상당히 비싸다고 한다.


다음에 개인적으로 이곳에 올 기회가 생기면 품격 있게 와인 한 잔 즐기는 여유를 상상하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와 내 방에 모두 모여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면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는 9시에 고성 투어에 나섰다. 풍경이 어젯밤과는 또 다르다.





화려했던 어젯밤과는 달리 타임머신을 타고 수 백 년 되돌아간 느낌이다. 건물의 기본틀이 옛 모습 그대로다. 몇 년 전에 본 산동성 태아장의 고성과는 다르다. 태아장은 모두 다 새롭게 지었지만 이곳은 기본 골격을 옛날 그대로 둔 채 수리를 한 흔적이 보인다.



그동안 여강고성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신문에 난 기사 때문이다. 여강은 19962월에 리히터 규모 7이 넘는 강진이 도시를 강타했다. 이 지진으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하고 16000여 명이 부상했다. 이 강진으로 신시가지의 건물은 크게 파괴되어 초토화가 되었지만 나시족이 지은 고성에 있는 800년 된 기와집은 끄떡없이 잘 견디어내고 있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옥룡설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성으로 끌어들여 지진의 충격을 완화시킨 덕분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건축물에 쇠못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시족은 쇠못 대신 기둥머리를 요철[凹凸]형식으로 끼워서 집을 지었다. 지붕은 나무판으로 덮고, 그 위를 돌덩이로 누른다. 나시족의 이러한 건축방식이 지진의 충격을 잘 흡수했기 때문에 리히터 규모 7도를 넘는 강진에도 무너지지 않고 견디어낼 수 있었다. 유엔은 여강이 강진에도 불구하고 건재함을 높이 평가하여 199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큰 도로를 따라가자 고성의 옛 관아인 목부(木府)가 나왔다. 목부에 들어서자 관아의 풍수가 한 눈에 들어왔다.

뒷산을 배경으로 관아의 주 건물인 의사청이 의젓하게 앉아 있다. 의사청 안은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지방을 다스리는 선위사가 앉는 호피를 덮은 의자가 있고, 그 의자에 앉아 천정을 올려보면 발톱이 5개인 용이 그려져 있다. 용의 발톱이 5개인 것은 황제를 상징한다. 중국에서 황제 이외의 인물에게 발톱 5개인 사당을 짓도록 한 곳은 공자를 모신 대성당밖에는 없다.




그런데 이곳에도 발톱 5개인 용이 그려져 있다. 황제를 늘 우러러보면서 정무를 보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황제를 절대 배반하지 않고 이곳을 다스리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황제에 대한 절대충성을 맹세하고 있기에 30만밖에 안 되는 나시족이 수백 만의 소수민족들을 거느리면서 운남성 최고의 부족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나시족이 이 지방에서 최고의 부족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대리국을 세웠던 백족을 배반하고 원나라를 도왔기 때문이다.

원나라 쿠빌라이는 송나라를 멸하기 위해 먼저 송의 측면에 있는 대리국을 침공했다. 그러나 대리국도 만만하지가 않았다.

대리국은 험난한 산맥과 협곡이 많아서 건너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특히 호도협과 금사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이때 나시족이 묘책을 가르쳐 주었다.


양을 죽여 껍질을 벗기되 한 곳에만 구멍을 낸 뒤 그곳을 통하여 바람을 넣고 이들을 묶어 뗏목처럼 만들어 그 위로 건너는 방법이다.

이 방법으로 원나라 대군이 금사강을 무사히 건너 1253년에 대리국을 멸망시켰다.


이 때문에 대리백족은 지금도 나시족과는 절대로 혼인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시족은 원명 교체기에는 또 다시 원을 배반하고 명군을 도왔다. 명나라 주원장은 1371년 명나라군이 원나라를 물리치고 이곳을 점령했다. 이곳의 다른 부족들은 전부 원나라 편이었지만 나시족은 명나라 편을 들어 명이 원나라를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에 감동을 받은 명나라 주원장은 나시족 족장에게 목씨 성을 하사하고 리장 선위사에 임명하였다. 이것이 麗江(여강, 리장)’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선위사는 중국 주변의 여러 민족이 통일국가를 수립하지 않고, 그 민족 내의 유력자들이 개별적으로 중국 왕조에 조공을 바치면 그들에게 수여하는 관직명이다. 이후 리장에서는 나시족의 목씨가 선위사를 세습하게 되었다. 주원장은 자신의 성인 ()씨에서 2획만을 빼고 ()씨 성을 하사한 것이다. 이로써 고성 안의 목부(木府)가 건립되었다.



나씨족의 처세는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공산당과 국민당이 싸울 때 국민당 군에 쫓기던 공산당의 모택동이 여강 석고진(石鼓鎭)에 도착했으나 진사강(金沙江)의 거친 물살에 길이 막혔다. 이때 나시족이 모택동을 도와 인민해방군을 도강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나시족이 희생당했다. 모택동은 고마운 마음에 나시족의 전통 모자를 인민해방군의 모자로 삼았다. 통상 인민모라고 부르는 바로 그 모자다.



또 특이한 것은 만권루(萬卷樓)라는 사액 현판을 걸고 있는 건물이다. 이는 많은 책을 소장하고 학문을 숭상했다는 의미일 게다. 나시족은 소수민족 중에서 역대 과거시험에서 급제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민족이라고 한다. 나시족은 학문을 숭상하고 교육을 중시하며, 독창적인 고유 문화를 창조해 온 지혜로운 민족이다.



지금도 자기들끼리는 동파문(東巴文)이라는 상형문자를 쓰고 있다. 7세기께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동파문은 주로 동파교 경전을 기록하는 데 쓰였으나 지금도 주위에서 흔히 찾을 수 있다. 리장 고성 내 점포 간판엔 한자·동파문이 나란히 적혀 있다. 동파문에서 학습(學習)을 뜻하는 글자를 보면 눈을 부릅뜨고 책을 읽는 모습이다. 사랑 애()자는 남녀가 나란히 앉은 모습이다.



목부에서 사자산으로 길이 이어졌다. 이 길을 오르면 여강고성이 한 눈에 다 들어온다. 사자산 정상 바로 밑에는 휴게소가 있다. 이곳에서 주스 한 잔하면서 고성을 바라보니 옛날에 이곳이 얼마나 번창한 곳이었는지 알 것 같다. 이곳이 번창하게 된 기반은 중계무역이다. 중국대륙과 티베트, 인도로 연결되는 차마고도 중간 지점이어서 상권을 나시족들이 독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민족의 정확하고 현명한 정치적 판단력 또한 주요한 요인이다.




중국에 도착하여 며칠 간 아주 바쁘게 움직였다. 오늘은 오랜만에 여유가 있다. 천천히 걸으니 주변을 잘 살펴 볼 수 있다. 오래된 고장은 여유를 가지고 볼수록 더 정이 간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온 여행객들도 모두 천천히 움직인다. 그 여유가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사자산을 내려오니 설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고성 안의 모든 길을 따라 흘러내린다. 고풍스러운 집들과 가게들도 그러한 맑은 물길이 있어 더욱 멋스럽다. 이 수로 덕분에 여강고성은 동양의 베니스로 불린다. 수로를 따라 내려오니 여강고성이 세계문화유산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이곳에서 한참 여유있게 즐겼다.

여강고성을 나와 인상여강쇼를 보기 위해 옥룡설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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