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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중국여행

서안 섬서역사박물관 대안탑 회족거리

by 황교장 2016. 5. 29.


서안 섬서역사박물관 대안탑 회족거리

 

54일 아침 8시에 여강고성 객잔을 나섰다. 여강공항으로 가는 길은 어제와 또 다른 풍경이다. 날은 맑고 좋으나 옥룡설산이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우리가 가는 것이 싫어서 배웅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한 번 더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다음에 꼭 다시 오라는 의미 같았다.



여강공항은 탑승 수속이 아주 빠르게 진행이 된다. 비행기는 1030분에 정확하게 이륙했다. 이틀 전 9시 반에 도착하여 만 49시간 동안 여강에 머문 셈이다. 날은 맑으나 옥룡설산 주변에 구름이 끼어 있어 설산은 보이지 않았다. 기내식을 먹고 밖을 바라보자 산세가 선명하게 보였다.


서안에서 여강으로 출발할 때와는 반대다. 출발할 때 구름이 끼어 못 본 곳을 이제는 다 볼 수 있었다. 혹시나 한 군데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풍광을 살피고 있는데 굉장한 산세가 나타났다. 흰 바위산에 봉우리들이 뽀족뽀족 솟아 있다.


무협지의 한 장면이다. 오악 중 하나인 화산 같았다. 화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도시가 나타났다. 곧 서안공항에 착륙한다는 기내방송이 나왔다. 무사히 서안에 도착했다. 갈 때보다 무려 30분이나 비행시간이 단축되었다. 아마도 기류의 영향인 것 같다.


공항을 나와 점심을 먹고는 섬서역사박물관으로 향했다. 길이 잘 닦여 있어 시원하게 달린다. 경치가 좋은 곳이 나타났다.

강물이 많이 흘러간다. 비행기에서 본 그 강이다. 이 강이 위수다. 강태공이 7년 동안 빈 낚싯대를 강물에 드리우고 세월을 기다린 그 위수라고 했다.

가이드가 강태공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다. 내용은 복수불반분에 대한 내용이다. 가이드는 복수불반분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는 줄 모르고 있었다.


覆水不返盆(복수불반분)은 엎질러진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다는 뜻이다. 복수불반분이 나오게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나라 문왕(文王)이 사냥을 나갔다가 위수(渭水)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는 한 노인을 만났다. 비록 노인의 형색은 남루하나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직감했다. 노인과 대화를 나누고 노인의 탁월한 식견과 인품에 감탄하였다. 이 노인이 바로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이다.


그날부터 문왕은 여상을 스승으로 모셨다. 주나라에는 나라가 성인을 맞아 크게 번성할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문왕은 이 전설을 믿었다. 태공(太公, 문왕의 아버지)이 오래도록 기다렸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뜻으로 호칭을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렀다. 태공망 여상은 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번성시켰고 문왕의 아들인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켰다.



여상은 문왕을 만나기 전까지는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로 궁색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을 돌볼 생각은 않고 책과 낚시질만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보다 못한 그의 아내 마()씨는 궁핍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보따리를 싸서 친정으로 떠나 버렸다.

 여상이 태공망이 되었다는 소문이 마씨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마씨는 여상을 찿아 와서 이렇게 말했다.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떠났지만, 이제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서 돌아왔어요.”


그러자 여상은 옆에 놓여 있던 그릇의 물을 마당에 쏟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 물을 그릇에 다시 담아 보시오.”


한번 쏟아진 물은 이미 땅 속으로 스며 들어가 다시 그릇에 담을 수가 없듯이 한번 떠난 아내를 다시 받아주지를 않았다고 하는 내용이다.


覆水不返盆(복수불반분)을 다시 생각해 보면 강태공도 그리 그릇이 크지 않다고 느껴진다. 그동안 고생한 아내를 헤아려 받아줄 것이지......



강태공 이야기를 하다보니 차가 멈추어 섰다. 시내에 가까워지자 교통체증이 심하다. 서안은 중국의 6대 도시에 속하는 대도시다.

 때마침 앞에 오는 차가 역주행을 하면서 돌진한다. 그런데 역주행을 할 수 있도록 다른 차들이 비켜주고 있다. 신기한 현상이다.


 가이드가 서안에서 운전면허증을 따려면 무려 대학을 세 곳을 나와야 한다고 했다. 들이, 빵빵대, 추월대학교의 졸업장이 있어야만 서안에서는 제대로 운전을 할 수 있다고 농을 했다.



공항에서 한 시간 반 만에 섬서역사박물관에 도착을 했다. 섬서역사박물관(陕西历史博物馆)1983년 시공하여, 1991620일 개관한 중국 제일의 현대식 대형 국가급 박물관이다.


중국의 역사는 삼황오제부터 시작된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으로 나누었지만 황보밀이 찬한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는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를 삼황이라고 했다.

오제(五帝)는 여러 문헌에서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데 대체로 소호(少昊), 전욱(顓頊), 제곡(帝嚳), ()임금, ()임금으로 전해진다.


순임금도 아들인 상균에게 나라를 물러준 게 아니라 신하 가운데 가장 어질고 현명한 우()에게 나라를 물러 주었다. 이 우()임금이 바로 중국 최초의 고대왕조인 하()나라의 시조가 된다.

 


하나라는 17대 걸왕(桀王) 때 은나라를 세운 탕()왕에게 멸망된다. 고사성어에 나오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이 바로 이때의 이야기다.

 걸왕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 하고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놀이를 즐기는 등 악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탕왕은 주지육림의 걸왕을 물리치고 은(, BC 1751-BC1111, 초기 국명은 )나라를 세웠다. 이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이다.


역성혁명의 명분은 천명과 민심이었다. 하늘의 뜻과 백성의 마음을 좆아 폭군 걸왕을 주살했다고 정당화한 것이다. 탕왕이 세운 은()나라 때에 갑골문자가 만들어졌다. 또한 1년을 12달로 나누고 60갑자를 사용했다.



은나라는 제30대 임금인 주()왕 때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된다. ()왕은 바른말을 하는 숙부인 비간의 심장을 꺼내는 등 만행을 일삼은 폭군의 대명사이다. ()나라를 멸하고 주(, BC1111- BC221)나라를 세운 것이 중국 왕조 역사상 두 번째 역성혁명이다.


주나라의 초대왕인 무왕의 아버지인 문왕(文王)이 후천팔괘(後天八卦)를 만들었다는 설이 지금까지는 가장 유력한 설이다.


즉 선천팔괘(先天八卦)는 복희씨가 만들고 후천팔괘는 문왕의 작품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주역은 무왕의 아들인 주공이 384()에 사()를 붙여서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 주나라도 초기 성왕과 강왕 때는 태평성대인 성강지치(成康之治)를 이루다가, 10대 여왕(厲王)이 즉위하면서 포악한 정치를 하여 반란이 일어난다. 이에 여왕은 난리를 피해 체()라는 지방으로 도망을 가게 된다.


천자가 사라져 버리자 분란과 혼란 끝에 제후들 중 소공(召公)과 주공(周公)이 천자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이것이 중국사에 나타나는 최초의 공화정인 셈이다. 마침내 여왕이 죽고 여왕의 아들 11대 선왕이 즉위하지만 이미 왕권을 회복하기는 너무 늦었다.


점점 국력이 약해지면서 주변의 유목민들에게 침입을 받게 된다. 하는 수 없이 수도를 동쪽인 낙읍으로 옮기게 된다. 이때부터 동경과 서경이 생긴 것이다.



서경은 처음부터 주나라의 수도가 있던 곳인 호경(鎬京)이다. 장안(長安)이라고도 불린 지금의 서안(西安)이다. 이곳 서안은 주(), (), 위진남북조 시대의 후진(後秦), 서위(西魏), 후주(後周), (), ()의 수도이기도 하다.


동경은 유목민인 견융족에게 호경이 함락됨으로 동쪽으로 옮긴 곳이다. 동경은 낙읍 또는 낙양으로 불린다. 동경은 동주시대, 후한, 위진남북조 시대의 위, , 후조, 후위 등의 수도다.


기원 전 770, ()나라 13대 천자인 평왕(平王)이 유목민인 견융족에 의해 쫓겨나 낙읍(洛邑)으로 천도하면서 동주(東周) 시대가 시작되었다.


동주는 춘추(春秋)와 전국(戰國) 두 시기로 나뉜다. 동주의 전기를 춘추시대라 칭하고, 후기를 전국시대라 칭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BC770-BC403)라는 명칭은 공자(孔子)의 저서 춘추(春秋)에서 유래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BC403-BC221)의 명칭은 劉向(유향)의 전국책이라는 저서에서 유래되었다.


춘추시대에는 초기에 1백여 국이나 되던 제후의 수가 마침내 10여 개국으로 압축되었다. 이 가운데 패권을 잡은 제후를 춘추오패(春秋五覇)라 한다.


 오패는 제의 환공(. 桓公), 진의 문공(, 文公), 초의 장왕(, 莊王), 오왕 합려, 월왕 구천이라는 설과 오왕 합려, 월왕 구천 대신 송의 양공(, 襄公)과 진의 목공(, 穆公)이라는 설이 있다.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 제후국 중에서 가장 넓은 영토와 강한 국력을 가진 진()나라 최대 가문인 지씨가문의 수장인 지백이 살해되어 이때 반란을 일으킨 진()나라의 대부 조(), (), ()의 세 가문이 주()나라 왕실로부터 정식 제후로 공인받으면서 시작된다.

반란을 일으킨 대부들을 주 왕실에서 제후로 공인함으로써 봉건제도의 명분과 의리가 사라졌다.

이때부터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시대가 된 것이 전국시대다. 전국시대에는 전국칠웅이 있다.

()이 분리되면서 생긴 한(), (), ()의 세 나라와 진(), (), (), ()7국이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이들 나라의 군주들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사상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그 결과 중국 사상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대를 열었다.


일반적으로 춘추전국 시대를 사상의 황금시대인 제자백가시대로 부른다. 이때 공자를 중심으로 한 유가사상과 묵자를 중심으로 한 묵가사상, 노자 장자를 중심으로 한 노장사상, 한비자와 이사를 중심으로 한 법가사상 등이 형성되었다.



결국 전국시대도 BC 221년에 진()의 시황제(始皇帝)가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를 이루게 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된다.


전국시대가 진(, BC 221-BC 207)나라로 통일된 후 다시 한(, BC 206-220) 삼국시대(三國時代, 220-265, , 촉한, ) (, 265-420) 516(五胡十六國, 304-439) 남북조(南北朝, 439-589) (, 581-618) (, 618-907)나라로 이어진다.


907년 주전충은 당을 멸망시키고 후량을 세웠다. 주전충은 수도를 장안에서 변경(개봉)으로 옮겼다. 주전충이 새 수도로 옮기면서 장안의 대저택이나 궁궐 등 큰 건물들을 새 수도로 옮기거나 아니면 방화 약탈하였다. 장안성의 위용은 이때 모두 파괴되어 버렸다.


907년 당나라가 망한 후에는 두 번 다시 서안은 중국의 수도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당나라 때까지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곳이 이곳 서안이다. 그래서 유적과 유물도 가장 많이 있다.


그 많은 유물과 유적을 보관하고 있는 곳 중 하나가 섬서역사박물관이다. 섬서역사박물관은 중국의 전총리였던 저우언라이(주은래)의 마지막 소망에 의해 지어진 박물관이라고 한다. 37만 점의 유물을 가지고 있다.



박물관은 시대에 따라 분류하여 전시를 한다. 1전시관, 2전시관, 3전시관으로 나뉘어, 주나라에서,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 네 개 왕조를 중점으로 섬서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4, 5전시관과 동전시관은 부정기적으로 주제를 바꿔서 전시를 한다.



우리들은 제1전시관부터 차례대로 관람을 했다. 그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순금으로 된 금병이다.

금으로 만든 떡인 셈이다. 지금도 상당한 가격이 될 것 같다.




 당나라관에는 당시의 미인도가 전시되어 있다. 지금의 미인과는 상당한 차이가 난다. 그러나 관상학적으로 보면 볼이 볼록하게 그려져 있다. 이는 재복을 뜻한다. 호의호식하고 돈 많은 여인의 상이다.




 한정된 시간이라 주마간산으로 보았다. 퇴직 후에 다시 와 여유를 가지고 이곳에 머물면서 천천히 구경하고 싶었다.



다음 여정지인 대안탑으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하자 멀리 대안탑이 보인다. 굉장한 탑이다. 높이와 크기가 생각한 것 이상이다. 높이가 64m나 된다.


대안탑은 현장법사가 번역한 불경을 보관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조정에 탑의 건립을 청원하여 652년에 푸른 벽돌로 세워진 7층 전탑이다.



날이 너무 덥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남방계 체질이지만 오늘 더위는 더 이상 참지를 못하겠다. 더군다나 안에 겨울 내의를 입고 있었다. 차 안의 에어컨 바람이 싫어서 입은 것이 화근이다.

 염치불구하고 겨울내의를 벗을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부끄럼이 없는지라 나는 괜찮은데 우리 부장들이 안 괜찮은지 둘러서서 가려주었다.



대안탑을 바라보면서 가까이 갔다. 가까이에서 보는 대안탑은 정말 크다. 1400년 전에 지어졌다는 것이 경이롭다.


이곳은 대자은사(大慈恩寺)로 불린다. 당 태종의 태자 이치(李治)가 모후인 문덕황후의 명복을 위해 처음 절을 세웠다. 자은(慈恩)이라는 이름은 자애로우신 어머님의 은혜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대자은사는 모란의 명소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모란은 다 지고 작약이 만발하였다.



대안탑을 보고는 삼장법사 현장(602-664)의 동상이 서 있는 곳으로 왔다. 현장을 대자은사 삼장 법사라고도 부른다.

불교 성전의 (), (), ()을 삼장(三藏)이라고 한다. 삼장에 달통해야만 삼장법사다.





삼장법사 현장의 동상을 보고 나와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서안의 주민들과 같이 먹는 이 맛 또한 즐거움이다. 잠시나마 내가 서안 시민이라고 착각을 할 정도로 친숙하고 익숙하다.



다음 여정은 회족거리이다. 회족의 유래는 서기 7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아랍인과 페르시아 상인들이 장안에 와서 이곳에 거주 한 것이 첫 효시다.


9세기 초 당나라와 토번(吐藩) 간의 전쟁 시 토번에 의해 동원된 아랍 및 페르시아 출신 용병들이 전쟁에 패하여 당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이들은 처벌 대신 토지와 한족 부인을 얻게 되었다. 이들이 중국에 정착을 하면서 오늘날 회족 선조의 한 갈래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중국에 거주하는 회족의 직접적인 조상은 13세기 초반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족 군대와 함께 중원 지역으로 이주하였던 중앙아시아의 여러 종족이다.


당시 이들은 모두 이슬람교도였으며 원()대의 공식문서에 회회(回回)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으로 이주한 이들 대다수가 군인, 농민 및 수공업자로 생업을 가졌고 일부는 관리, 상인, 성직자와 학자가 되었다.


이들이 한족, 위구르족, 몽골족 등과 장기간 섞여 살면서 결혼 등을 통하여 오늘날의 회족을 형성하였다. 이들의 겉모습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종교는 회교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에는 양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거리가 굉장히 번잡하다. 음식점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냄새가 싫다. 숨쉬기도 힘들 만큼 냄새가 고약하다. 회족거리가 끝나는 지점에 오래된 건물이 웅장하게 버티고 있다. 고루.


고루는 1272년에 창건된 이래 여러 번 개보수를 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높이는 33m로 종루보다는 4년 먼저 세워진 누각이다.종루( 鐘樓)는 종을 쳐서 아침을 알리지만 고루(鼓樓)는 북을 쳐서 저녁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서안이 성곽도시여서 시간을 알리는 종이나 북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고루와 종루는 직선거리로 260m 떨어져 있다. 그 사이에 종고루 광장이 있다. 종고루 광장이 서안시의 중심지이다. 종루는 시 중심의 십자거리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높이는 36m이다. 대안탑과 종루와 고루가 서안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광장에는 아마추어가수가 공연을 하고 있다. 이 공연을 보고 있는데 가이드에게 본사에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부산에 폭풍이 불어서 비행기가 뜰 수가 없다고 한다. 저녁 8시에 최종적인 판단을 한다.

만약에 비행기가 못 뜰 경우에는 무엇을 할지 의논을 해 보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곳에서 가장 좋은 곳으로 화산을 추천한다.


삼대적선을 한 분이 우리 일행 중에 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은 했지만 불안하여 스마트폰으로 부산의 날씨를 계속 검색하였다.

다행히 밤 10시부터 폭풍주의보가 해제된다고 예고하고 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화산 정상을 갈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광장 앞에는 유명한 만두집들이 있는데 예약을 하지 않으면 절대로 먹을 수 없을 정도라 한다. 오늘 저녁식사는 만두다. 12가지 종류의 만두가 나오는데 각각의 맛과 향이 다르다.

 어떤 것은 그런대로 먹을 수 있지만 반 이상이 향신료 때문에 먹기에 좀 거북스럽다. 그런데 만두 모양과 색깔은 먹음직스럽고 앙증맞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마사지만 남았다. 조선족이 운영하는 마사지집이다. 국가대표들이 훈련하는 체육장도 겸하고 있는 곳인데 서안에서도 알아주는 곳이라고 한다.

 마사지사는 한족 아가씨인데 우리말도 조금 할 줄 안다. 특히 우리나라 아이돌 이름을 15명 정도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아는 이름은 송중기뿐이다. 이곳 서안에서도 우리나라 아이돌들의 인기는 대단하다고 한다.


이 아가씨가 내 나이를 묻는다. 몇 살이나 되는지를 알아 맞추어보라고 하자. 36살이라고 한다. 그래서 내 아들이 34살이라고 했다. 정말이냐고 묻는다. 자기는 마사지를 많이 해 봐서 근육량을 보면 대충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데 근육이 아직 젊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 말 한마디가 마사지보다 더 기분을 상큼하게 만들어 준다. 역시 칭찬과 장점을 말해야지 비난과 단점은 가능하면 안해야 된다는 것을 한 번 더 실감하였다.



못 올 수도 있다고 했던 비행기도 부산에서 조금 늦게 출발을 했다고 한다. 우리가 타고 갈 비행기는 부산에서 출발하여 서안에 승객들을 내려주고 그 비행기로 다시 부산으로 가는 시스템이다. 출발은 30분 정도 늦어졌지만 예정된 시간에 무사히 도착했다.


46일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중국견문여행이 끝났다. 우리가 떠나 있었던 그 시간 동안 부산은 봄답지 않게 덥고, 미세먼지도 많았고, 비바람이 몰아쳐 비행기가 줄줄이 결항되었다 한다.


여행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자료를 뒤지고,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다시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여행은 기록을 남기면서 더 깊어지는 것 같다. 특히 이번 여행은, 중국의 수준높은 문화유산, 광활한 자연유산을 두루 체험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감동호르몬인 다이돌핀은 이러한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체험하면 많이 분비된다고 한다.


인간은 한편으론 늘 외롭고 쓸쓸한 존재다. 이러한 허무감을 극복하는 데는 여행만한 것이 없다고 나는 늘 강조하고 있다. 여행을 통하여 허무감을 극복하고 감동에너지를 최고치로 체험할 수 있도록 이번 여행에 동참해 주신 동료 여러분들께 인연의 고마움을 느낀다. 시간이 흘러 삶이 고달파져 에너지가 부족해지거든 이 글을 다시 들쳐내 읽음으로써 그 외로움을 극복할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를 고대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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