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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중국여행

중국의 3대 고건축과 태안대묘

by 황교장 2019. 7. 8.

중국의 3대 고건축과 태안대묘

 

중국의 3대 고건축으로는 일반적으로 북경 자금성의 태화전, 산동성 곡부에 있는 대성전, 산동성 태안에 있는 태안대묘를 들고 있다. 4대 고건축을 말할 때는 여기에 승덕의 피서산장을 더한다.

 

1.자금성 태화전

자금성은 2018년 5월에 친구와 같이 다녀왔다. 자금성에 가려면 천안문 광장을 지나야 된다. 북경을 몇 번을 왔는데도 천안문광장만 보고 되돌아 간 적이 있었다.

 

 

천안문광장

 

자금성은 명나라 영락제가 세웠다. 영락제는 북방의 몽고족 기습에 대응하기 위해서 남경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북경 자금성은 1407년부터 1420년까지 14년에에 걸쳐 궁전을 축조했다. 그리고 명나라를 멸한 청나라도 선양에 고궁을 지었으나 명나라를 정복하자 1644년에 북경을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전 왕조의 자취가 남아 있는 궁전을 파괴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명나라가 세운 궁전을 없애지 않고 복구하여 자신들의 색을 덧입혀 사용했다.

1421년 명나라의 영락제가 처음 거주하기 시작해 1924년 청나라 선통제가 여기서 쫓겨날 때까지 5백년 동안 명나라·청나라 두 왕조의  24명의 황제가 이 곳에서 중국을 통치했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천자의 거처가 우주의 중심인 자미원(紫微垣)에 있어 그곳을 기점으로 우주가 움직인다고 믿었기에 이를 상징하는 뜻에서 '()'황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뜻에서 '()'을 사용해 자금성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고궁박물원에 있던 수백만 점의 소장품 중 중요 유물을 상하이로 옮겨졌다. 그리고 국공내전에서 1948년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에 패퇴해 대만으로 쫓겨갈 때 함께 가지고 가 1965년 대만에 새로운 고궁박물원을 만들었다. 이때 대륙에서 가져온 유물들은 고궁박물원 소장품 가운데서도 가장 가치있고 엄선된 것이라고 한다. 현재 대만 고궁박물원의 소장품은  682,061점이라고 한다.

    

천안문을 통과하면 제일먼저 만나는 문이 오문이다. 오문은 정남쪽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규모에 압도된다. 황제의 권위가 느껴진다.

 

午문을 보자 가장 먼저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은 암요제궐(暗邀帝闕)이다. 이는 사주명리를 보는데 있어 아주 고난도의 사주다. 암요제궐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철학관은 어느정도 신뢰를 해도 될 정도로 고급사주 풀이다.

암요제궐의 사주를 가진 사람으로는 강희제와 원세계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즉 암요제궐은 암암리에 제궐을 맞이하였다는 뜻이다. 제궐은 궁궐의 정문을 뜻한다. 이는 제좌와 대칭되는 말이다. 제좌(帝座)는 임금이 앉아 있는 자리로 용상(龍床)을 뜻한다임금의 용상인북쪽의 제좌에서 남쪽 제궐인 오문을 향하고 있다. 이 오(午)문이 자금성의 정문이다.

 

 

 

 午문

 

 

 자금성은 동서 길이 760m, 남북 길이가 960m에 달한다 높이 11m의 성벽과 너비 52m, 깊이 6m의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면적 720,000m², 건물 980채다. 자금성의 방 수는 9,999칸이라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8,886칸이었다고 한다. 1924년 이래 궁전의 기능을 상실한 뒤 1925년부터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 Palace Museum)이다. 198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태화전

 

주요 궁전을 받치고 있는 흰 대리석 기단,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두툼한 목재 기둥, 땅과 최고 통치자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된 노란색 유리기와, 이 모든 건축 자재를 전국 각지에서 준비하고 운반하는 데만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태화전

 

고궁 안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건물이 태화전이다. 높이 35m, 길이 64m, 37m, 면적 2,368로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목조건물이라고 한다.

원래의 명칭은 봉천전(奉天殿)으로 길이 95m, 48m, 면적 4,522이었으나, 영락 19년인 1421년 벼락으로 소실되어 1436~1441년에 중건하였다. 또한 가정(嘉靖) 36(1557) 벼락으로 소실되어 가정 41(1562)에 중건되면서 황극전(皇极殿)으로 개명하였다가 청나라 순치(顺治) 2(1645)에 태화전으로 개칭하였다. 강희 18(1679)에도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1695~1697 기간 중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곡부 대성전(大成殿)

2019년 6월 4일 부터 6월 9일 까지 중국 곡부와 태산과 청도를 다녀왔다. 곡부는 2013년 7월에 다녀가고 난 후 6년만에 다시 왔다. 당시에 너무 많은 감동을 받아 단짝친구와 같이 왔다. 그런데 다시 왔는데도 여전히 감동적이다. 6년 전에 쓴 글이 블로그에 있어 그 때 쓰지 못한 글을 쓰고자 한다.

공자의 이름은 구요 자는 중니이다. 기원전 551년 춘추시대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 35세 때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에서 활동하다가 43세 때 노나라로 돌아와 학문에 몰두하고 제자들 가르치는 한편 정공을 도와 대사구의 직책을 맡기도 했다. 공자는 노나라가 혼란해지자 50대 후반의 나이에 노나라를 떠나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도 쓰이지 못하고 68세 무렵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육경을 산정하고 제자를 교육하는데 전념하다가 애공 16(기원전479)73세로 일생을 마쳤다.

 

 

 

 

대성전

대성전은 높이 24.8m, 길이 45.7m, 폭 24.9m이다.

 

노나라의 역사는 주 무왕의 동생인 주공과 관련이 있다. 주공의 장남인 백금(伯禽)이 노나라 시조이다. 주공은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 무왕의 동생이다. 무왕은 은나라를 세우고 난 후 6년 만에 죽었다. 이어 아들인 성왕이 13세의 어린나이에 즉위를 하자 무왕의 동생인 주공이 7년간 섭정을 하면서 주나라의 모든 문물들을 정비를 해 놓고는 조카인 성왕에게 친정을 하도록 한 현인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공자가 가장 존경한 인물로는 주공을 꼽고 있다. 주공은 공자보다도 600년 전의 인물이다.

 

논어 술이편에 보면 甚矣 吾衰也 久矣 吾不復夢見周公(심의 오쇠야 구의 오불부몽견주공)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 되었도다 내가 다시는 꿈에서 주공을 뵙지 못하였다.”

 

이 부분을 주자는 논어집주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공자가 젊었을 때에는 주공의 도를 행하려는 뜻을 두었기 때문에 꿈속에서 혹 주공을 뵈었는데, 늙어서 도를 행할 수 없음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마음이 없어져 꿈속에서도 다시 주공을 뵙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로 인하여 자신의 쇠함이 심함을 못내 지탄하신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범인들뿐만 아니라 성인들조차도 슬픈 것이다.

 

대성전이 있는 공묘는 기원전 478년 노()나라의 애공(哀公)이 공자 사후 1년에 공자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처음에는 공자가 제자들에게 강의하던 행단에 대성전(大成殿)을 세운 것으로 시작해 그 후 역대의 황제들이 계속하여 증개축하여 현재의 규모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방 3칸에 불과했지만, 황제들이 공자의 제를 성대하게 올리면서 공묘의 규모가 점점 커져 지금의 규모가 되었다. 기원전 195년 한나라 유방이 최초로 공자에게 제를 올린 이래로, 12명의 황제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이곳을 친히 방문했다. 그밖에 100여 명의 황제가 196회에 걸쳐 대리인을 파견하여 제례를 지냈다. 15차례 이상 보수와 중축을 거쳐 지금의 규모를 갖춘 것은 청나라 옹정제 때다.

16,000부지에 9개의 정원과 부속 건물 100여 동, 460여 칸의 방이 있다. 남북 방향으로 630m에 걸쳐 여러 개의 문과 건물이 길게 이어진다. 중국 전역에 건축된 문묘(文廟)는 이 공묘를 모방해 건축한 것이다.

 

이곳 곡부에는 삼공이 있다. 삼공이란 공묘(孔廟), 공부(孔俯), 공림(孔林)을 말한다.

먼저 공묘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을 뜻한다. 중국 무협소설을 보면 관묘, 악묘 등이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중국을 직접 가보기 전에는 중국 사람들은 숙박할 장소를 찾지 못하면 묘지 속에서 잠을 자나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서호에 있는 악왕묘(岳王廟)를 보고서는 악왕묘가 금나라와 맞서 싸운 남송의 애국 명장 악비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라는 것을 알았다. 안동에 있는 삼태사묘도 같은 의미다. 묘지 묘()자가 아니라 사당 묘()인 것이다.

 

공묘의 본전인 대성전(大成殿)의 건물을 받치는 외부 기둥은 모두 28개로 돌기둥으로 되어있다. 이중 정면의 10개 기둥은 2마리의 용이 휘감는 조각으로 되어 있다. 이 기둥은 한구산에서 생산되는 청석 중에서 가장 귀한 어자석이라고 전해진다.

 

 

 대성전 돌기둥

 

고대부터 중국에서 용은 하늘과 황제를 상징했다. 따라서 황궁에서만 용을 새길 수 있었고 다른 건축물에는 용의 도안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으나 공묘만 예외라고 한다. 황제의 대우를 받은 셈이다. 용은 발톱이 다섯 개인데 간혹 부잣집 정원에 용을 새긴 곳이 있다 하더라도 발톱은 3개만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용의 발톱이 다섯 개가 그대로 새겨져 있다. 건륭제가 이곳을 방문할 때에는 기둥의 용을 천으로 가렸다고 한다.

 

 

 용발톱

 

대성전 안을 들여다보면 공자의 초상과 그 위에 쓰인 글자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만세사표

 

萬世師表(만세사표)斯文在慈(사문재자). 만세사표는 '영원한 세월 동안 학식과 인격의 모범'을 뜻한다. 사문재자의 사문(斯文)이란 유학자(儒學者)의 높임말로서 즉 공자님을 뜻하고, 재자(在慈)는 공자님의 '인자하심과 자비로움이 여기에 있도다'라는 의미이다.

만세사표의 글씨는 강희제의 글씨고 사문재자는 옹정제의 글씨라고 알려져 있다.

 

청나라 시대에도 건륭제의 공주가 72대 연성공인 공헌배와 결혼을 하여 황제의 부마가 되었다. 이처럼 이곳에는 역대의 황제들에게 많은 혜택을 받으면서 현재와 같이 되었다고 한다. 공부는 중국 역사상에서 가장 넓은 농지를 소유하며 관리하는 대지주이기도 했다.

   

 이 글을 쓰는 기회에 논어를 다시 읽어 보았다. 역시 논어는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 중에서 마음에 드는 글귀를 옮겨 보고자한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자왈 학이시습지 부역열호 유붕 자원방래 불역낙호 인불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배우고 때에 맞게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不患人知不己知  患不知人也(부환인지부기지 환부지인야)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한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배우기만 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혼자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울 것이다.

 

學而不厭  誨人不倦(학이불염 회인불권)

배움에 있어 싫증 내지 않고,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다.

 

飯疏食飮水,(반소사음수)

초라한 밥과, 물을 마시고

曲肱而枕之,(곡괭이침지)

 팔을 베고 누웠으니

樂亦在其中矣,(낙역재기중의)

 즐거움은 이 가운데에도 있다.

不義而富且貴,(불의이부차귀)

 의롭지 않게 부귀를 누리는 것은

於我如浮雲,(어아여부운)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

 

子曰 女奚不曰 基爲人也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자왈 여해부왈 기위인야발분망식 낙이망우 부지노지장지운이)

공자가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그 사람됨이 분발하면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워 근심을 잊어 늙음이 장차 이르는 것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子曰 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子不語愧力亂神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자왈 아비생이지지자 호고민이구지자야 자불어괴력난신 자왈 삼인행 필유아사언 택기선자이종지 기불선자이개지)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나면서부터 안자가 아니다. 옛것을 좋아하여 민첩하게 그것을 구하는 사람이다.

공자께서는 괴이함과 폭력과 난동과 귀신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세 사람이 길을 감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그 선한 자를 택하여 따르고, 그 선하지 않은 자를 가려서 고친다.

 

공자의 五德(오덕)

     ()순하고, ()어질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손하다.

 

過則勿憚改(과즉물탄개)

잘못이 있다면 고치기를 두려워 하지마라. 잘못을 인정하라.

攻乎異端斯害也已(공호이단사해야이)

 남을 공격하면 이것은 나에게 해가 될 뿐이다.

克己復禮爲仁(극기복례위인)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

 

仁者愛人也(인자애인야)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증자왈 부자지도 충서이이의)

 증자가 말하기를 공자의 도는 충서일 뿐이다.

 

 

子曰 知之者 不如 好之者 好之者 不如 樂之者(자왈 지지자 불여 호지자 호지자 불여 요지자)

공자가 말하기를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3. 태안대묘

곡부의 삼공을 보고는 태산에 오르기 위해 태안으로 갔다. 泰安(태안)泰山安則四海皆安, 國泰民安(태산안즉사해개안, 국태민안) ‘태산이 안녕하면 천하가 안녕하고 나라가 번영하고 국민이 안녕하다라는 글에서 따왔다고 한다.

 

 

동어좌와 태산

 

태산을 등산하기 위해 태안에서 잠을 자면서도 태안대묘는 가지 않는다. 가이드에게 태안대묘에 가려면 어떻게 하는지를 묻자 택시를 타고 숙소에서 10분 정도만 가면 된다고 했다. 그러자 가이드가 제안하기를 50위안만 내면 우리차로 대묘를 갈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들과 의논을 하자 전원이 다 좋다고 한다.

 

 

태산과 태안시

 

태안대묘는 중국의 역대황제들이 봉선의식을 하는 곳이다. 봉선(封禪)은 제왕이 하늘과 땅에 왕의 즉위를 고하고, 천하의 태평함에 감사하는 의식이다. ()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하고 선()은 땅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의식이다.

 

 

대묘전경

 

대산(岱山)은 태산(泰山)의 다른 이름이다. 대묘(垈廟)는 태산 남쪽 기슭에 있으며 진한시대 초기에 세운 곳으로 고대 제왕들이 태산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당이다.

봉선 의식의 기원은 춘추 전국 시대부터라고 한다. ()나라와 노()나라의 유사(儒士)들은 제와 노 양국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던 태산(泰山)을 천하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 생각했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인 제왕이 천하에서 가장 높은 태산 꼭대기에 올라 하늘의 신령께 제사를 올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 노에서 태산에 제사하던 의식이 진의 통일 이후 제국의 망제(望祭)로까지 확대되어 봉선(封禅)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봉선 의식에 대한 기록으로 사마천 사기에는 72명이 있었는데 관중 노인은 12명만을 기록하였다고 적고 있다.

 

진의 시황제는 통일 제국의 황제가 된 이후 기원전 219년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지낸 후 한무제(武帝), 동한의 광무제(光武帝), () 고종(高宗), 당 현종, () 진종(眞宗), ()의 강희제(康熙帝)와 건륭제(乾隆帝) 등이 모두 봉선의식을 행하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당 고종 때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자 황제인 측천무후가 황후의 신분으로 봉선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당 고종 사후 측천무후 자신이 황제로 즉위한 뒤에는 숭산(嵩山)에서 봉선을 행했다고 한다.

당 태종(唐太宗)의 경우 정관(貞觀) 6(631) 스스로 공적이 높고 덕행이 두터워 나라가 잘 다스려져서 오곡도 풍성하게 잘 익고 있다고 자평하며 봉선을 행하려 했으나, 명신인 위징(魏徵)"백성들 사이에 아직 폐하의 은혜와 은택이 구석구석 퍼지지도 못했고, 지금 봉선 의식을 행하기에 국고의 재정이 그렇게 풍족한 것도 아니다"라는 간언을 하자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처럼 봉선의식은 황제라고 다 하는 것이 아니다. 황제 중에서도 대내외적으로 뚜렷한 업적을 남긴 황제만이 하는 의식이 봉선의식이다.

 

 

  정양문

 

대묘 입구에 내리자 웅장한 성벽과 정양문이 위엄을 나타낸다. 대묘의 정문인 정양문(正陽門)의 정양(正陽)은 깨끗한 곳에서 마음을 안정시킨다는 의미와 양의 중앙을 표시한다고 한다. 현판은 대묘(垈廟).

정양문은 출입구가 세 곳인데 가운데 문은 옛날에는 황제들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누구나 다 가운데 문으로 들어간다.

 

 

대묘방

 

정양문을 지나면 돌로 만들어진 석조건물이 대묘방(垈廟坊)이다. 대묘방은 3칸 석조 기둥 위에 석조 지붕을 올렸고, 앞쪽에 사자석상 3개가 있다. 지금까지 보아온 석조패방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게 느껴진다.

 

 

한백

 

경내에는 한 무제(재위, BC141- 87)가 심었다는 한백이 있다. 최소한 2,100년이 넘었다. 측백나무의 생명력은 대단하다. 예전에 산동성 지역은 측백나무가 없었는데 한 무제가 이곳에 측백나무를 심은 이후로 많이 퍼졌다고 한다. 곡부에 있는 측백나무들은 대부분 수령이 500년 전후라고 하는데 이곳의 측백나무와는 비교불가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한백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한백

 

이곳에 특이한 건물이 있다. 동어좌(東御座)다 역대 황제들의 숙소로 쓰였다고 하는데 지금 남아 있는 유물은 건륭제의 유물이라고 한다.

 

 

동어좌

 

동어좌 내부

 

황제의 침실

 

황제의 유품

 

 곡부 공부의 72대 연성공이 건륭제의 부마이다. 따라서 공주를 보러 곡부에 왔다가 태산에 들리면서 이곳 동어좌에서 정무와 숙식을 하는 곳이다. 건륭제는 무려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했다고 한다.

건륭제(乾隆帝,1711-1799)는 청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1735-1796)이다.

어릴 때부터 제왕의 자질이 보여 할아버지 강희제와 아버지 옹정제에게 인정을 받았다. 1735(옹정 13) 옹정제가 급사하자 황위에 올라 먼저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갈등을 조정했다. 내치를 다진 후 대규모 정복 사업과 문화 사업을 펼쳤다. 10년 동안 고금의 도서를 수집하여 중국 역사상 최대의 편찬 사업인 사고전서를 완성했다. 또한, 10차례에 걸친 정복 사업을 펼쳐 중가르와 위구르를 복속시키고, 티베트, 미얀마, 베트남, 네팔까지 진출하는 등 현재 중국 영토의 기틀을 만들었다.

 

 1795(건륭 60) 감히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재위 기간을 넘을 수 없다며 재위 60년째에 태상황제로 물러났지만, 막후에서 정책 최고 결정권을 행사하여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다. 재위 기간 60년에 태상황제로서 4년까지 합쳐 총 64년 동안 실권을 장악한 황제다. 이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한 황제였다.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 열 번의 원정을 모두 승리로 이끈 노인)이라 칭했다. 중국 최후의 태평성세인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장수한 황제이기도 하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열하일기에서 건륭제를 황제의 네모난 얼굴은 하얗고 조금 누런 빚을 띠었으며, 수염은 절반쯤 하얗게 세었고 나이는 60세 가량으로 봄날의 화창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열하일기는 건륭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1780년 진하사절을 따라 연경(북경), 열하 등지를 여행한 것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천하의 황제인 건륭제의 침실로는 조금 초라하기까지 하다.

이곳 대묘가 자랑하는 것 중 하나는 현존하는 중국의 비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비석이 있다. 바로 진시황 때 승상을 지낸 이사가 쓴 비석이다. 현제 판독 가능한 글자는 10자뿐이라고 한다.

 

 

이사의 비문

 

길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 웅장하고 위엄을 느끼게 하는 전각이 나온다. 바로 중국 3대 고건축 중 하나인 천황전이다. 멀리서 보아도 2중 팔작지붕에 붉은 현판에 금색으로 쓴 宋天貺殿(송천황전)이 보인다.

 

 

 

천황전

 

일반적으로 천황전의 황자는 황제 ()으로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줄 황()자 이다. 송나라 때 하늘에서 하사한 전각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천황전 감실에 모신 신은 동악태산지신(東嶽泰山之神)이다.

 

중국에는 예로부터 산악신앙이 있었는데 전국시대 이후 오행사상(五行思想)의 영향을 받아 5악의 관념도 생겼다. 한대(漢代)5악은 동쪽의 태산[泰山:山東省], 서쪽의 화산[華山:陝西省], 남쪽의 형산[衡山:湖南省], 북쪽의 항산[恒山:河北省], 중부의 숭산[嵩山:河南省]이다.

그 중에서 동악(東嶽)을 최고로 친다. 동악은 태산이다. 태산에 있는 신이 최고의 권위로 하늘로부터 신권을 부여 받게 된다. 이런 이유로 동악태산신에게 제례를 올리는 것이 중요했다. 가이드의 설명은 태산신의 이름이 황비호(黃飛虎)라고 한다. 나와 같은 씨 성을 가지고 날비()에 호랑이 호()자다. 옛날에 실존했던 황장군의 이름이라고 한다.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동악태산지신

 

태산은 황제가 제사지내는 곳이지만 지금은 도교의 성지가 되었다고 한다. 많은 도교인들이 이곳 대묘에서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다.

천황전은 1009년 창건했다. 올해로 1010년이 되었다.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제의 건물을 17세기에 재건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대묘전경

 

천황전을 보고 성곽에 오르니 태산의 산세가 웅장하게 다가왔다. 이곳 대묘가 풍수상 태산의 정기가 응축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명당의 기운을 몸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태안대묘를 보고는 숙소로 향했다. 내일은 태산 등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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