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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중국여행

가을에 떠난 타이완 여행 3

by 황교장 2019. 10. 26.

 

 

가을에 떠난 타이완 여행 3

-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

 

연휴 마지막 일요일 호텔에서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고궁박물원으로 향했다. 대만에서 가장 보고 싶은 것은 국립고궁박물원에 있는 유물들이었다. 중국 본토에 있는 유명박물관은 거의 다 보았지만 정작 중국 최고의 보물을 모아 놓은 국립고궁박물원의 보물들은 보지 못하여 늘 궁금하였다.

 

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은 중화민국 타이베이 시에 위치해 있는 중화민국 행정원 소속 국립박물관이다. 국립고궁박물원의 전시품은 중국 국민당이 국공 내전에서 패배하여 타이완으로 이동할 때에 대륙에서 가져온 문화재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소장품이 697,490개나 되어 세계 4대 박물관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유물이 많기 때문에 박물원에서는 3개월에 1번씩 전시하는 소장품을 전부 교환하고 있다. 이 모든 소장품을 관람하려면 8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고궁박물원이 이곳에 있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51010일 베이징에서 고궁박물원(자금성) 개관.

1933년 일본군에 의해 산해관이 함락되자, 박물원 소장품을 상하이로 옮김.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고궁박물원 베이징으로 복귀.

1948년 국공 내전이 국민당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유물들을 타이완으로 옮김.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현재 이곳에 있게 된 것이다. 결국 이곳에 있는 유물들은 중국 오천 년 역사에서 가장 귀중하다고 인정된 것들을 모은 것이다.

 

 

 

고궁박물원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풍수가 눈에 들어왔다. 풍수는 중국인들이 아주 중시하는 생활의 지혜에 속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풍수는 도선의 도참비기가 있지만 이중환선생의 택리지역시 인문지리지이자 훌륭한 풍수의 교과서이다.

 택리지의 복거총론에는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을 정하는 데에는 네 가지의 기본 조건이 있다고 주장한다.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이 네 가지 중에서 한 가지라도 모자라면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지리(地理)가 아무리 좋아도 생리(生利)가 부족하면 오래 살 만한 곳이 못 되고, 생리(生利)가 아무리 좋아도 지리(地理)가 나쁘면 또한 오래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또 지리(地理)와 생리(生利)가 모두 좋아도, 인심(人心)이 좋지 못하면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고, 가까운 곳에 경치 좋은 산수(山水)가 없으면 정서를 키우지 못한다고 주장을 한다.

 

 

 

 

여기서 첫째인 지리는 풍수를 말한다. 지리는 먼저 수구(水口, 집 앞에 물이 드나드는 입구를 말하는데 입구가 좁아야 좋다.)를 보고, 그 다음은 들의 모양을 본다. 다음으로 산의 모양을 보고, 그 다음으로 흙의 빛깔을 보고, 그 다음은 조산(朝山, 멀리 앞으로 보이는 산)과 조수(朝水, 앞으로 흘러드는 강)를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궁박물원의 풍수를 살펴보니 최고의 명당으로서의 요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첫째가 풍수다. 이곳 풍수는 사신사 즉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뚜렷하다. 그리고 수구 즉 물이 흘러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육안으로는 찾을 수가 없다. 뒷산에 올라가 보아야 보일 것 같다. 이처럼 수구가 좁은 것은 대명당의 조건이다.

두 번째가 생리다. 생리는 그 땅에서 얻어지는 생산품이다. 즉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자다. 따라서 비옥한 땅이어야 한다. 고궁박물원이 이곳에 들어오면서 벌어들이는 수입은 아마 상상 밖일 것이다.

셋째가 인심이다. 이는 마을 사람들의 성품이 착하고 인심이 좋은 곳을 말한다. 이곳 고궁박물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다. 이들의 관상을 보니 성품이 착하고 온화한 상을 갖고 있다. 고궁박물원을 관람하러오는 사람들의 표정들까지도 다 좋아 보인다. 아마 명당의 기운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넷째가 산수다. 즉 경치가 아름다워야 한다. 고궁박물원 주위가 완전히 완만한 산으로 둘러 쌓여있어 풍수를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아늑함을 주는 아름다운 곳이다.

   

 

대만국립고궁박물원은 세계 4대 박물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설도 있다.

세계 4대 박물관은 일반적으로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Louvre Museum),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 in New York)과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을 들고 있다.

그러나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국립박물관을 세계 4대 박물관으로 부르기도 한다.

또한 대만의 국립고궁박물관은 대영박물관, 루브르박물관, 바티칸박물관,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함께 세계 5대 박물관에 속한다고도 한다.  

 

고궁박물원의 3대 보물은 모공정(毛公鼎), 취옥백채(翠玉白菜), 육형석(肉形石)이라고 한다.

 

모공정

 

 

1. 모공정(毛公鼑)

3대 보물 중 제일 먼저 만난 것은 모공정이다. ‘()’은 세발솥을 뜻하는데, 원래 고대에 고기를 삶는 냄비였던 것이 후대에 와서는 권력과 신분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기물이 되었다. 높이 53.8cm, 상부의 구경 47.9cm, 내부 깊이 27.2cm, 무게 34.7kg이다. 모공정(毛公鼑)은 청() 도광 말년 기산에서 출토된 서주 후기의 대표적 기물이다. 명문이 32행으로 모두 497자가 수록되어 있다. 모공정이 만들어진 시대는 서주(西周)의 후기 선왕(宣王: 재위 B.C 827~B.C 782) 무렵이라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당시 꽤 혼란한 상태였던 정치를 부흥하고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주왕(周王)이 모공(毛公)이란 사람에게 정치를 전면적으로 맡기고, 수레, , 옷가지 등을 고마움에 대한 상으로 내린 기념으로 이 정()을 만들었다고 한다.

 글자체는 주대(周代) 금문(金文)의 최고 걸작이라고 한다. 모공정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중요한 역사적 사료이다. 모공정은 중국 청동기 명문 중 가장 긴 문장이자 서체가 힘 있고 장중하다. 청말 유명한 서예가였던 李端淸(이단청)모공정을 배우지 않는 것은 마치 유생이 상서를 읽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여 그 가치를 한껏 높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고대역사는 삼황오제부터 시작한다.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를 삼황이라고 했다. 중국 사람들은 삼황 중 황제가 중국 한족의 조상으로 생각한다. 즉 우리나라의 단군과 같은 인물이 바로 황제이다.

 

오제(五帝)는 대체로 소호(少昊), 전욱(顓頊), 제곡(帝嚳), ()임금, ()임금으로 전해진다. 순임금도 아들인 상균에게 나라를 물러준 게 아니라 신하 가운데 가장 어질고 현명한 우()에게 나라를 물러 주었다. 이 우()임금이 바로 중국 최초의 고대왕조인 하()나라의 시조가 된다.

 

하나라는 17대 걸왕(桀王) 때 은나라를 세운 탕()왕에게 멸망된다. 고사성어에 나오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이 바로 이때의 이야기다. 걸왕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 하고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놀이를 즐기는 등 악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탕왕은 주지육림의 걸왕을 물리치고 은(, BC 1751-BC1111, 초기 국명은 )나라를 세웠다. 이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이다.

 

역성혁명의 명분은 천명과 민심이었다. 하늘의 뜻과 백성의 마음을 좆아 폭군 걸왕을 주살했다고 정당화한 것이다. 탕왕이 세운 은()나라 때에 갑골문자가 만들어졌다.

은나라는 제30대 임금인 주()왕 때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된다. ()왕은 바른말을 하는 숙부인 비간의 심장을 꺼내는 등 만행을 일삼은 폭군의 대명사이다. ()나라를 멸하고 주(, BC1111- BC221)나라를 세운 것이 중국 왕조 역사상 두 번째 역성혁명이다.

 

 

 

주나라의 초대왕은 문왕이고 은나라를 멸한 왕이 무왕이다. 공자가 가장 존경한 인물이 무왕의 동생인 주공이다. 무왕의 아들이 성왕이다. 성왕과 강왕 때는 태평성대인 성강지치(成康之治)를 이루다가, 10대 여왕(厲王)이 즉위하면서 포악한 정치를 하여 반란이 일어난다. 이에 여왕은 난리를 피해 체()라는 지방으로 도망을 가게 된다.

천자가 사라져 버리자 분란과 혼란 끝에 제후들 중 소공(召公)과 주공(周公)이 천자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이것이 중국사에 나타나는 최초의 공화정인 셈이다. 마침내 여왕이 죽고 여왕의 아들 11대 선왕이 즉위했다. 선왕이 모공에게 준 것이 바로 모공정이다.

 

하지만 이미 왕권을 회복하기는 너무 늦었다. 점점 국력이 약해지면서 주변의 유목민들에게 침입을 받게 된다. 하는 수 없이 수도를 동쪽인 낙읍으로 옮기게 된다. 이때부터 서주와 동주가 생긴 것이다.

 

 

 

서주의 수도는 호경(鎬京)이다. 장안(長安)이라고도 불린 지금의 서안(西安)이다. 동주는 유목민인 견융족에게 호경이 함락되어 동쪽에 있는 낙읍으로 옮긴 곳이다. 기원 전 770, ()나라 13대 천자인 평왕(平王)이 유목민인 견융족에 의해 쫓겨나 낙읍(洛邑)으로 천도하면서 동주(東周) 시대가 시작되었다. 낙읍은 지금의 낙양이다.

중국 역사를 쭉 살펴보면 모공정이 선왕 말년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무려 2,800년 전의 유물이다.

 

 

 취옥백채

 

2. 취옥백채(翠玉白菜)

취옥백채는 옥을 이용하여 여치와 누리(메뚜기의 일종)가 숨겨진 배추를 표현한 조각 작품이다. 흰색과 녹색을 띤 옥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배추라는 친근한 소재를 표현하였다. 배추 잎에는 여치와 누리가 앉아 있는데, 둘 다 번식력이 뛰어난 곤충이다. 신부의 순결함을 상징하는 동시에 황비에게 자손이 많아 대대손손 황실의 혈통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취옥백채는 옥으로서의 가치는 그리 높지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 속에 숨겨진 여치와 누리의 조각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걸작품의 작가가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다음과 같다.

 

청의 태조 누루하치가 명나라 최고의 장인에게 부탁하여 만든 것인데 안 만들면 구족을 멸한다고 했다. 만들면 매국노가 될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배추 아랫부분은 하얀색의 옥으로 명나라를 상징했고, 푸른 잎은 청나라를 상징했다. 두 마리의 메뚜기와 여치가 푸른 잎사귀를 갉아 먹어 청이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다고 한다.

 

 

육형석

 

3.육형석(肉形石)

육형석(肉形石)은 벽옥으로 동파육(東坡肉)을 묘사한 작품이다. 신선하고 육즙이 많은 동파육(삼겹살 조림)’과 너무나 똑같아서 보는 이들의 입에 침이 고이게 하는 작품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한 층 한 층 다른 색깔로 형성된 천연 마노를 재료로 삼아, 본연의 특징을 잘 살리면서 색을 입히고 정교하게 조각하여 모공과 피부결까지 표현해 낸 진귀한 작품이다.

 

동파육은 당송팔대가 중 한 사람인 소동파로부터 이름을 따왔다. 표준중국어로는 동파육(東坡肉)'둥포러우'라고 하고 소주, 향주 사투리로는 '뚱파유'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 세 작품을 고궁박물원의 3대 보물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진귀한 보물들이 많다. 청나라 고종 황제의 옥새(碧玉璽), 당나라 회소의 자서첩, 신석기 시대 룽산 문화 말기의 응문규, 신석기 시대의 채도, 청나라 진조장이 조각한 감람핵주, 청나라 중기 상아로 조각된 사층투화제식합, 상아투화운룡문투구 등이다.

 

 

 

 

 

 

 

 

 

 

 

 

 

 

 

 

 

 

 

 

 

 

 

 

상아투화운룡문투구

 

 

 

 

사람마다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3대 보물은 많이 달라질 수 있다. 고궁박물원의 보물들을 더 보기 위해서라도 다시 대만에 여행 올 이유는 충분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