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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의 사주와 생애 3

by 황교장 2020. 9. 1.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의 사주와 생애 3

 

박원순은 1967년 경남 창녕 영산중학교에 입학한다.

1966년부터 19763월까지가 병자(丙子)대운에 들어간다. 병자 대운의 병화는 정재운이고 자수는 비견운이다. 전체 운으로 보면 수()운이 들어왔지만 병화는 보통 운이다.

1967년도의 간지는 정미(丁未). 정은 편재운이고, 미는 편관운이다. 사주에서 재운은 인성을 극하기 때문에 학마(學魔)라고도 한다. 학마는 공부하는 데에 마귀가 씌었다는 의미다. 공부하는 학생에게 재운이 오면 돈도 벌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다. 남자사주에서 재성은 재물과 여자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박원순은 중학교 1학년까지는 공부를 아주 잘하지는 않았다. 반에서 5등 정도였다. 아마 학마운인 재운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미운은 시지인 축과 축미(丑未) 충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원순 사주

시 일 월 년

癸 癸 戊 乙

丑 卯 寅 未

 

대운의 흐름

 62  52   42   32   22   12    2      6768697071

 辛  壬  癸   甲    乙   丙    丁       丁    戊    己    庚    辛

 未  申  酉   戌    亥   子    丑       未    申    酉    戌    亥

 

사주에서 대운은 좋은데 연운은 안 좋으면 보통 운이다. 67년 정미운이 그렇다. 그럭저럭 무난하게 넘어가는 운이다.

당시 영산중학교는 한 학년에 5개 반 300명이 정원이었다. 시골학교치고는 아주 큰 학교다. 그런데 박원순이 졸업한 장가초등학교는 면소재지 학교도 아닌 일종의 분교처럼 된 학교다. 물론 졸업생은 80여 명이지만 여학생을 제하고 남학생은 약 40여 명이다. 그런데 이 중 영산중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불과 10명 미만이었다. 당시 영산중학교 입시 경쟁률이 약 3:1정도로 높았다. 그런데 읍내에 있는 영산초등학교 학생들은 쉽게 진학을 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박원순이 졸업한 장가초등학교는 시골학교였다. 시골학교에서는 전교어린이 회장도 했고, 전교 1등으로 졸업은 했지만 읍내 중학교에서 반에 5등 정도는 정상적인 셈이다.

그런데 해가 바뀌어 무신(戊申)년으로 가자 박원순은 놀랄 정도로 성적이 향상이 된다. 무신년을 분석해보면 무토는 정관으로 학업에 아주 좋은 운이다. 신금은 정인으로 그야말로 공부 잘하는 운인 관인상생의 해다. 즉 정관인 무토가 정인인 신금을 도와 일주인 계수를 도와 주기 때문이다. 또한 대운인 자수는 세운 신금과 신자진 삼합이 수국으로 되어 일간 계수에게 더욱더 힘이 된다. 따라서 이 해가 박원순의 삶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 해에 성취동기가 확실히 유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산중학교는 2학년으로 진급을 하면서 특별반을 한 반 편성하여 전교 1등부터 60등까지를 A, B, C, D, E반 다섯 반 중에서 C반에 모아놓았다. 그의 성적은 반에서 1학기 중간고사에서는 30등 전후였다고 기억된다.

그런데 여름방학을 지나 2학기가 되자 그의 성적은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다. 마지막 기말평가에서는 전교 4등을 했다. 갑자기 성적이 향상된 데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다음 이야기는 그의 책 희망을 심다에 나오는 내용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읍내에 있는 영산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읍내에 있는 영산초등학교를 졸업한 애들은 아주 똑똑하고 세련됐어요. 우리는 아주 시골이고, 영산읍내까지는 15리 비 포장길을 걸어가야 되는 완전시골이죠.

우리 동네를 벗어나면 동구 밖 위에 언덕길이 있는데, 거기서 보니까 부모님이 굉장히 열심히 가을걷이 하시는 장면이 보이는 겁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제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 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막 났습니다.

부모님하고 제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요. 어머님이 저를 마흔 두 살에 낳았는데 그때 이미 쉰이 넘었어요. 가슴이 울컥해지는 일이었죠. 또 동네에는 매년 홍수가 나고 방천이 터져서 매번 논에 물이 찼어요. 그래서 산언덕배기에 집이 많았는데 우리 집은 논 바로 앞에 있어서 마당까지 물이 찰랑찰랑 찼어요. 논에 물이 차면 쓰러진 볏단을 세워야 하는데요, 벼가 물에 쓸려가기 전에 그것을 세우려고 몇 포기씩 한꺼번에 묶는 일을 합니다. 하루는 아버님이 물속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시는데 제가 옆에서 도와드렸어요. 그런데 갑자기 제 쪽으로 확 쓰러졌어요. 어린 제게 아버지는 큰 존재잖아요. 어머니는 저를 무한히 받아주셨지만 아버지는 꾸지람도 하시고 매도 드셨어요. 그렇게 무섭고, 때로는 전지전능한 존재인 줄 알았는데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요. 아버지도 약한 존재구나,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부터 정말 열심히 공부 했습니다.”

 

3학년에 진급을 하자 박원순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교 1등의 성적을 낸다. 그런데 졸업할 때 전교 일등상을 받지 못한 것은 10월 달쯤 서울로 상경하여 미쳐 기말시험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경하여 열심히 공부를 했어나 서울 경복고등학교에 합격하기에는 역부족이 였다. 당시 우리나라 고등학교의 랭킹 순위는 1 경기고, 2 서울고, 3 경복고는 변치않는 순위였다. 시골 중학교 출신이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당해 연도에 서울 경복고등학교에 합격하기에는 상식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것이였다. 장벽이 너무 높았다. 

1969년 중학교 3학년 때의 운을 분석해보자. 이 해는 연운이 기유(己酉)운이다. 기토는 편관운이고, 유금은 편인운이다. 따라서 시골 중학교 출신이 천하의 명문인 경복고등학교에 진학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보아야 한다. 관인상생이라도 정관과 정인이 상생하는 것과  편관과 편인이 상생하는 것은 다르다. 물론 사주에 따라서는 달리 해석해야 되는 경우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입학시험에서는 정이 편 보다는 위력이 더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많이 볼 수 있었다. 편관 편인 운에는 자신의 욕구를 다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재수는 필수사항이 된 것이다. 

1년 재수를 하는 1970년은 경술운이다. 경금은 정인 운이고, 술토는 정관운이다. 전형적인 관인상생운 중에서 정관이 정인을 생하는 운이다. 이는 시험을 앞둔 수험생에게는 자신의 능력보다 실제 점수는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을 그동안 많은 사례에서 경험했다.

박원순은 사주에서 운이 바뀌는 것은 대운에서 23월이다. 그리고 연운은 입춘-양력으로 24일 전후가 입춘이다-그런데 입학시험은 이 무렵이라 당해년과 앞으로 오는 해의 운을 둘 다 보아야 한다. 그 중 하나가 좋지 않으면 성패는 반반으로 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따라서 재수를 하는 1970년의 운이 관인상생이라 공부가 아주 잘 되는 해이다. 그 결과물이 그 다음해인 1971년 신해(辛亥)년에 나타난다. 신해년에서 신금은 편인운이고 해수는 겁재운이다. 신약사주에 편인과 겁재는 아주 좋은 운이다. 부족한 인내와 끈기를 북돋우는 운이기도 하다. 70년과 71년이 다 좋은 운이다.

 

여기서 박원순의 말을 한번 더 들어보자.

 

저는 책상에 살짝 엎드려 조금씩 잤죠. 3개월 동안 양말을 한 번도 안 벗었어요. 그랬더니 땀이 차서 발바닥이 하얗게 뜨더라고요. 나중에는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됐죠. 영어와 국어 교과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웠습니다. 문제집도 다 외웠어요. 그래서 무슨 문제가 나올지 다 아는 경지가 됐죠.”

 

입시 마지막 3개월 동안 누워서 잠자지 않고 독서실 책상에 엎드려서 새우잠으로 3개월을 버텼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굉장한 인내심이다.

 

체력장이 10점이었는데 비중이 컸습니다. 1-2점 차이로 떨어지는데 체력장에서 기본 점수 5점밖에 못 받는 상황이었어요. 그리고도 합격했으니까 학과 점수가 엄청 좋았던 거죠. 아마 굉장히 상위권이었을 겁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자전거 사고로 인해 팔을 다쳐 체력장에서 기본점수만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학과성적에서는 전국 고입 모의고사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결국 시골 영산중학교 출신이 경기고등학교에 합격을 했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 되었다.

당시 경기고의 입학정원은 12개반 720명이었는데, 그 중 480명은 경기중학교에서 무시험으로 진학하게 된다. 실제 경기중학교 출신자를 제외한 242명만이 선발된다. 이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타고난 경우도 있지만 박원순의 경우는 열심히 노력을 해서 공부를 아주 잘한 경우이다.

 

일반적으로 성적이 좋은 학생일수록 뇌를 효율적으로 사용해 장시간 공부해도 피곤하지 않고 그만큼 성적도 높다. 반대로 공부가 서툴고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은 조금만 공부해도 뇌에 큰 부담을 주어 금세 피곤해 한다.

공부를 좋아서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처음 얼마 동안은 힘들더라도 꾸준히 반복하여 뇌에 지속적인 부담을 주는 방법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을 박원순은 잘 극복한 것이다.

운동을 하면 몸에 근육이 생기는 것처럼 학습을 반복하면 학습근육이 생긴다고 한다. 학습근육이 생길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학습근육이 생기면 공부하는 습관이 잡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부하는 습관이 생기면 그 습관이 학습의 효율성을 더 높여준다.

 

박원순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남다른 인내심으로 학습근육을 아주 튼튼하게 키운 셈이다.

 

이시영박사도 이렇게 말했다.

창조는 기억이고 기억은 암기다. 기억의 깊이와 수명은 암기를 위한 연습량과 비례한다는 사실이다. 창조적 인재도 연습이고 반복이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중에서

 

박원순의 공부 방법은

영어와 국어 교과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웠습니다. 문제집도 다 외웠어요. 그래서 무슨 문제가 나올지 다 아는 경지가 됐죠.”

 

이처럼 무조건 암기부터 시작을 하면서 반복연습을 했다. 이 방법이 훗날 사법고시 및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