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왕 단종의 영월 장릉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장 나를 즐겁게 하는 것 중 하나가 여행이다. 어릴 적부터 저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가 궁금했다. 초중학교 무렵에는 자전거를 타고 고향땅 근처 40 리를 누볐고, 고등학교, 대학을 다닐 때는 오토바이를 타고 두루 100 리를 헤매고 다녔다. 성인이 되어서는 일 년에 평균 80일을 배낭을 메고 전국 곳곳과 해외로 떠나곤 했다.
여행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중 첫째는 누구와 같이 가느냐다. 둘째는 날씨다. 셋째는 어디를 가느냐다. 넷째는 무엇을 먹느냐다. 다섯째는 어디에서 잠을 자느냐이다.
이러한 나의 기준을 볼 때 이번 여행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장 친한 친구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다 보니 첫째 조건을 만족시킨다. 두 번째 조건인 날씨 또한 삼대적선을 해야 만날 수 있다고 할 만큼 좋다. 좋은 추억이 서린 곳인 영월을 오랜만에 다시 온 것이니 세 번째 조건도 만족이다.
넷째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점심을 어디에서 먹을까를 고민해 보았다. 여러 자료를 검색해보니 ‘장릉보리밥집’과 ‘동해인’ 두 곳을 놓고 고민을 해 보았다. 잘 모를 때는 비싼 것을 택하라는 말이 있다. 지금껏 살면서 물건을 잘 모를 때는 비싼 것을 사면 별로 실패가 없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장릉보리밥’은 8,000원, ‘동해인’은 18,900원이다. 그래서 ‘동해인’을 택했다. 청령포에서 배를 기다리면서 전화로 주문을 했다. 영월읍 동해인까지는 약 7분이 걸린다. 주차장도 잘 갖추어져 있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미리 새우장, 꼴문어장, 홍게장, 전복장, 소라장을 각각 1인분씩 합이 5인분을 시켜 다양하게 맛볼 수 있도록 주문을 했다. 결론적으로 매우 성공적이었다. 모두들 대만족이다. 음식이란 개인차가 많이 나기 때문에 모두를 만족시키기는 힘이 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가 게 종류다. 삶은 게는 좋아하나 생 것을 삭힌 게장은 비린 맛 때문에 싫어한다. 그러나 이 집 장류의 특징은 비린 맛이 전혀 없고 발효가 아주 잘 되었다. 모두들 맛있다고 입을 모은다. 우리모임은 회비로 정산을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좋은 일이 있으면 밥을 낸다. 마침 한 친구가 새 차를 뽑았다. 그것도 볼보를, 아직도 현역이다. 그래서 이 맛있는 점심을 쏘았다.
여기서 차로 5분만 가면 단종의 무덤인 장릉이다. 삼십 년 전에 와 본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장릉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일반적인 왕릉과는 달리 아기자기한 유원지 같은 느낌을 준다. 마침 일요일이라 음악축제도 하고 있다. 축제소리를 뒤로 하고 장릉 표지판을 따라 오른다. 제법 오르막이다.
주변의 단풍나무에 물이 들었다. 일주일만 더 있으면 절정이 될 것 같다. 장릉 단풍은 단풍 명소에 들어갈 정도로 곱고 예쁘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맑은 가을 하늘과 단풍을 만난 것은 우리 일행 중 삼대적선을 한 친구가 분명히 있다고 다시 한 번 강조를 했다.
장릉은 비운의 왕으로 알려진 제6대 단종(1441~1457)의 능이다. 단종은 문종과 현덕왕후 사이에 태어났다. 10세 때인 1450년에 문종의 즉위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문종이 왕이 된 지 2년 3개월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일반적으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 대왕대비나 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지만 불행하게 단종에게는 수렴청정을 할 할머니 소헌왕후도 단종이 6세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 현덕왕후도 단종을 낳고 3일만에 돌아가셨다. 문종은 현덕왕후가 돌아가신 후에 후처를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수렴청정할 왕실의 여인도 없었다. 따라서 문종은 고명대신으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에게 세자를 부탁하고 돌아가신다.
고명대신(顧命大臣)이란 임금의 유언을 받든 대신을 말한다. 여기에 황표정사(黃標政事)가 나온다. 고명대신 김종서가 추천하는 사람의 명단 위에 노란색 표시점을 찍어 왕이 그 사람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단종실록에는 “고을의 장수와 수령은 반드시 3인의 성명을 썼으나, 그 중에 쓸 만한 자 1인을 취하여 황표를 붙여서 아뢰면 노산군이 다만 붓으로 낙점할 뿐이었다.”
이는 당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서 측에서 시행한 변칙적인 인사행정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수양대군이 계유정란(癸酉靖難)을 일으킨다. 정란이란 靖(편안할 정)과 難(어려울 난)이다. 즉 나라의 위난을 평정(平定)함을 뜻한다.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김종서·황보인 등이 반역을 모의한 것을 평정했다는 명목으로 정난이라는 말을 붙였으나, 실상은 수양대군이 왕이 되려는 야심에서 이들을 제거한 정변이었다.
계유정란 후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었다. 그 후 사육신 사건으로 인해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었다. 이 때문에 단종은 노산군에서 다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세조의 신하들은 단종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면 차후에도 사육신, 금성대군과 같은 복위 사건이 계속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금부도사 왕방연은 사약을 가지고 단종이 있는 영월로 갔다. 하지만 왕방연은 차마 말을 하지 못했고 단종을 항상 곁에서 모시던 공생(貢生: 관가나 향교에서 심부름하던 통인과 같은 사람) 복득이가 단종의 뒤에서 활시위로 목을 졸라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당시 왕방연이 괴로운 심정을 토로한 시가 전한다.
千里遠遠道 / 천리원원도
美人離別秋 / 미인이별추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흔 님 여의옵고
此心無所着 / 차심무소착
下馬臨川流 / 하마임천류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川流亦如我 / 천류역여아
鳴咽去不休 / 명열거불휴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놓다
그러나 세조 사후에 기록된 실록에 따르면 왕방연이 영월에 도착하자 단종은 목을 매 자진(自盡)했다고 되어 있다. 시신 수습에 있어서 약간 다른 이야기도 전해진다. 죽은 후 시신이 청령포 물속에 떠 있는 것을 평소부터 충성심이 강했던 영월호장 엄홍도가 몰래 수습해 장릉 자리에 안장했다고 한다.
그가 장사 지내려 할 때 주위 사람들은 후환이 두렵다며 말렸다. 하지만 그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라며 단종의 시신을 홀로 밤에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엄홍도의 충절은 높이 인정되어 그의 자손에게 벼슬자리는 물론 추후에 공조참판이라는 벼슬도 내려졌다. 이런 예를 근거로 영월 사람들은 영월이 '충절의 고장'이라는 데 대단한 긍지를 갖고 있다. 또한 장릉은 향토 문화재가 거행되는 유일한 왕릉이다.
단종이 명예를 회복하는 데는 200년이 넘게 걸렸다. 숙종은 숙종 7년(1681)에 노산대군으로 추봉한 뒤 숙종 24년(1698)에 정식으로 복위했다. 묘호를 단종으로 능호를 장릉이라 했다.
장릉은 양지바른 곳에 있어 눈이 와도 쉽게 녹으며 따뜻하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능침을 둘러싼 소나무가 모두 봉분을 항해 절을 하듯 묘하게 틀어졌다는 점이다. 풍수가들은 장릉 터를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러 내려오는 형국인 갈룡음수형(渴龍飮水形)으로도 보고, 용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형국인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라고도 본다. 풍수의 형국론은 이처럼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달리 보이는 것이다.
장릉은 난간석, 병풍석, 문인석은 있지만 무인석은 없다. 이는 왕이 아닌 세자 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한식날을 전후해 영월에서 가장 큰 문화 행사가 거행된다. 1967년부터 단종제로 이름이 바뀌었고 단종 복위에 가담한 사육신 등 충신들의 제사도 함께 지낸다.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의 삶을 알아보면 인간의 운명이란 참 묘하다. 정순왕후는 단종보다 한 살 위로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의덕왕대비가 되었다. 1457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그녀도 부인으로 강등되었다. 단종 사후에는 신분이 노비로 떨어지고 말았다.
염색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세조의 도움은 끝까지 거부했다. 세조는 그녀를 노비로 전락시켜 버렸지만 노역은 시키지 말라고 지시했다. 세조의 아내 정희왕후가 성종 즉위 후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순왕후에게 의식을 공급해주도록 명했고,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을 복권시켜 줬다.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에 초가집을 짓고 살다가 경혜공주의 아들인 정미수를 수양아들로 삼고 정미수의 집에서 살았다. 그녀에게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죽기 얼마 전, 중종이 노산군의 묘지를 찾아 봉분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라는 명이 내려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편 단종과 함께 묻히지는 못했다. 그녀의 장례는 나라에서 대군 부인의 예로 치렀다. 16세에 세상을 뜬 남편보다 64년을 더 살다가 중종 16년(1521)에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순왕후 묘소는 경혜공주의 시댁인 해주 정씨 선산에 조성하여 복위 전까지는 해주 정씨 집안에서 제사를 지내주었다.
단종이 정식으로 복원될 때 정순왕후도 복원 되었다. 능호는 사릉(思陵)이다. 사릉은 평생 남편을 생각하고 그리워(思)한 그녀의 일생에 걸맞는 능호이다. 사릉이 복위되면서 인근의 민묘들은 왕릉 권역 바깥으로 이장하였으나 해주 정씨 묘역은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아마도 해주 정씨들이 성심성의 껏 제사를 지내준 때문일 것이다.
사릉은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다. 경춘선의 사릉역은 정순왕후의 능호에서 유래한다. 사릉은 그동안 비공개였는데 2013년 1월부터 공개하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 "단종과 정순왕후를 합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때 제기되기도 했다. 사릉에 심어진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가지를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이는 왕후가 남편이 있는 영월 쪽을 바라보기 때문이라 하여 1999년 4월 9일 사릉에 심어져 있던 소나무 하나를 장릉에 옮겨 심고 '정령송(精靈松)'이라 명명했다. 사후 478년만이다.
여기서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남편은 한성부윤 정충경의 아들인 정종(鄭悰)이다. 한성부윤은 오늘날의 서울시장이다. 경혜공주와 정종은 세종 32년에 결혼했다. 이때 공주는 열다섯 살이었다.
사육신 사건 이후에 남편인 정종이 강원도 영월로 귀양을 갔다. 정종이 귀양을 간 것은 단종 복위 운동을 한 숙부 금성대군과 친했기 때문이다. 정종은 단종이 죽은 4년 후에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이렇게 부모도, 동생도, 남편도 모두 잃은 공주의 나이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공주는 남편이 죽은 뒤 전라도 순천부의 노비가 되었다. 한 나라의 공주가 하루 아침에 관노비로 전락한 것이다. 당시 그녀에게는 여섯 살짜리 아들 정미수(鄭眉壽)와 배 속의 딸이 있었다. 만삭의 몸으로 아들의 손을 잡고 순천으로 떠났다.
순천부사 여자신이 진짜로 노동을 시키려 하자, 공주가 수령 집무실인 동헌에 들어가 의자에 앉으면서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을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내게 노비의 일을 시킨단 말이냐?”며 호통을 친 일화가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임신하고 애 딸린 공주에게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여론을 우려한 세조는 공주를 사면했다. 한성으로 돌아온 공주는 두 아이를 왕궁에 맡기고, 자신은 비구니가 되었다. 성종 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 살이었다고 한다.
장릉을 한 바퀴 돌고 나오니 '2020 신나는 예술여행'을 주제로 국악 한마당이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청중 들이 많이 없다. 아직도 국악은 크게 인기를 모으지 못하고 있다. 몇 곡을 멀리서 듣다가 별 흥이 없어 옆에 있는 박물관을 관람했다.
박물관 입구에 조선왕조 역대 왕들을 기록해 놓았다. 한 친구가 조선왕조의 왕들 중 ‘조’와 ‘종’이 어떻게 다른지를 질문을 해 왔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다시 참고 문헌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다.
기본적으로 왕의 호칭은 사후에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과정에서 왕의 업적을 한 글자로 표현하고, '조'와 '종'을 붙이고 묘호(廟號)라 하였다. 즉 왕이 죽고 난 뒤 왕실 사당인 종묘에 모셔진 이름이다. 왕에게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이름이 우리가 알고 있는 왕들의 이름이다. 예를 들어 학문에 뛰어났다는 뜻의 문종(文宗), 어질었다는 뜻의 인종(仁宗), 효성이 지극했다는 뜻의 효종(孝宗)을 꼽을 수 있다.
원칙적으로 '조'는 창업한 왕에 대해서만 쓰는 호칭이었다. "왕업(王業)을 창시한 임금을 '조'라 일컫고 계통(系統)을 이은 왕을 '종'이라 일컬었음은 고금(古今)의 떳떳한 법식이었다"는 실록의 기록은 이러한 원칙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려의 경우 첫 왕인 태조 왕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종의 호칭이 부여되었다. 몽골 간섭 시기에는 왕의 호칭이 강등되어 '충'(忠)을 앞에 붙이고, '종' 대신에 '왕'의 호칭을 사용했다. 태조 이후 '조'를 붙인 왕은 없었다.
원나라의 경우 세조 '쿠빌라이'이다. 쿠빌라이 이후에 조를 붙인 이는 없다. 명나라의 경우 명태조 주원장 외에 제3대 황제 성조다. 성조 외는 명나라에서도 없다.
조선에서는 업적이 많은가, 덕이 많은가를 따져서 묘호를 붙인다. 즉, 업적이 높은 경우에는 조를 붙이고, 덕이 많은 경우는 종을 붙인다. 여기서 업적이란 그야말로 개국에 버금가는 성과를 의미한다. 조선이 건국된 후 창업 군주 이성계에게도 '태조'의 호칭이 부여되었다. 그런데 조선의 왕은 이후에도 '조'를 붙인 사례가 많다. 왜 이런 상황이 일어났을까? '종'보다는 창업한 왕에 부여하는 '조'의 호칭을 쓰는 것이 왕을 보다 높이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태조 이후 '조'의 호칭을 처음 받은 왕은 세조다. 왕의 호칭은 사후에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물론 세조는 자신의 호칭을 알지 못한 채 승하했다. 세조의 다음 왕인 예종과 신하들은 세조의 묘호를 정하는 과정에서 '조'를 쓰기로 정했다. 세조가 창업한 왕에 버금가는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한 까닭에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목적도 담겨 있었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역시 반정 주체 세력들이 인조의 위상을 높여야 자신들의 입지도 커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인진왜란 이후, 조와 종은 변칙적으로 사용된다. 조가 종보다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조의 처음 묘호는 '선종'(宣宗)이었다. 그러다가 광해군은 1616년 선조가 임진왜란을 극복하여 나라를 재건한 공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묘호를 선조로 바꾸었다. 영조, 정조, 순조 또한 승하 직후의 묘호는 영종, 정종, 순종이었으나 후대의 왕들이 추숭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묘호가 바뀐 사례다.
세 명의 왕 중에서는 순조가 가장 먼저 '조'의 호칭을 받았다. 철종 때인 1857년 순종에서 순조로 묘호가 바뀌게 되는데, 순종이 순조로 될 수 있었던 데는 철종을 왕으로 만들어 준 순조의 부인 순원왕후의 영향력이 컸다. 대비로 있으면서 철종을 움직여 남편의 위상을 높인 것이다.
고종 대에 들어와서는 1890년 영종(英宗)이 영조로, 1899년 정종(正宗)이 정조로 묘호가 바뀌었다. 순조도 '조'가 된 마당에 영종, 정종처럼 훌륭한 군주에게 '조'의 호칭을 부여하는 것이 왕의 도리라고 고종은 판단한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조'의 호칭은 정변에 대한 합리화 작업이나 후대의 추숭 작업 과정에서 부여한 것이었다.
역사와 상식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음여정인 연하폭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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