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유배지 영월 청령포(寧越 淸泠浦)
매년 봄가을 두 번 오랜 친구들과 함께 전국 자연휴양림에서 1박 2일을 보낸다. 올 가을에는 영월에 있는 망경대산자연휴양림에 숙소를 정하고 그 주변을 둘러보는 여정으로 잡고 떠났다. 친구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어 늘 중간 정도에 있는 휴양림을 택했는데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국립자연휴양림은 숙박을 하지 않아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공립 영월 망경대산자연휴양림에 마침 예약이 가능하여 이곳으로 정했다. 탐방순서는 영월 청령포→점심→장릉→연하폭포→망경대산자연휴양림→김삿갓유적지→영주부석사로 정하였다.
10월 18일 오전 11시까지 영월 청령포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안양에 사는 친구를 필두로 11시가 되기 전에 모두 무사히 잘 도착했다. 다들 반 년만에 만나니 더 반가운 얼굴이다.
청령포에 들어가는 데 입장료를 받는다. 그런데 국가유공자와 경로자는 우대를 받는다. 벌써 경로우대 대접을 받아 입장료를 아낄 수 있었다. 입장료는 아꼈지만 세월이 이렇게 빨리 갔다는 점에서는 별로 기분이 좋지가 않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건강한 몸으로 매년 두 번씩 몇 년을 더 만날 수 있을까를 절로 생각하게 된다.
청령포에 처음 온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인 것 같다. 근 30년 전에 온 것이다. 30년 동안 내 모습은 많이도 변했는데 이곳은 별로 변한 것이 없다. 아마 단종이 유배된 후부터 지금까지도 거의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영월(寧越)은 편안히 넘어가는 곳이라는 뜻이다. 영월땅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삼국시대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하게 전투를 벌린 접경지였다. 고려 때에야 영월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본래는 충청도 땅이었으나 조선 정종 1년(1399)에 강원도에 속하게 되었다.
이곳 청령포(淸泠浦)라는 지명은 물 맑은 청(淸)과 깨우칠 령, 맑을 령(泠)과 개 포(浦)를 쓴다. ‘물이 맑은 포구’라는 의미일 것이다. 청령포라는 지명의 유래는 1763년(영조 39년)에 세워진 단종유지비에 영조가 직접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는 글씨를 써서 내렸고, 이것을 화강석 비좌 위의 비신에 새겼다. 비(碑)의 뒷면에는 1763년 9월에 원주감영으로 하여금 비를 세우게 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고, 지명을 청령포(淸泠浦)라고 썼다. 아마도 그 이전부터 이곳이 청령포라 불렸다고 생각된다.
매표소 앞에서 바라보는 청령포의 풍수는 특이하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이다. 뒤쪽은 산세가 빼어나고 앞은 맑은 물이 흘러 기가 빠지지 않게 지세를 감싸주고 있다. 강가의 백사장은 맑게 빛나고, 한가운데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집터를 보호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데는 이러한 명당의 덕이 아닌가 생각된다. 명당이지만 이곳의 유래를 떠올리면 쓸쓸한 기분이 더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서강은 맑디맑은 푸른 물이다. 예전에는 나룻배에 줄을 잡고 건넌 기억이 났다. 그러나 지금은 제법 큰 동력선이 다닌다. 배에 올라 강물을 바라보니 작은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까지 다 보인다. 그대로 물속으로 살며시 들어가서 물고기들과 같이 놀고 싶을 정도로 맑다. 나의 사주에는 수가 용신이다. 그래서 그런지 맑은 물만 보면 그저 좋다. 서강은 한국에서도 몇 군데 남지 않은 1급수 하천이라고 한다.
강을 건너 배에서 내려 숲 사이로 이어지는 제법 큰 길을 따라가면 단출한 기와집 한 채와 호위하던 시종들이 사용하던 초가 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유배 당시 세운 것으로 알려진 금표비(禁標碑)와 영조 때 세운 단묘유적비(端廟遺蹟碑)가 글자를 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이끼가 끼어 있다.
걷기 좋게 만들어진 길을 따라가자 잘 생기고 키 큰 소나무가 한 그루가 나타난다. 관음송(觀音松,천연기념물 349)이다. 단종은 둘로 갈라진 이 나무의 줄기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관음송’이라는 이름은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해서 ‘볼 관(觀)’자를,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하여 ‘소리 음(音)’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의 껍질이 검은색으로 변하여 나라의 변고를 알려 주었다고 한다. 나이는 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5.19m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소나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제주도 산천단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60호인 곰솔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키가 가장 큰 소나무라고 소개되어 있다. 높이 28m, 가슴높이 둘레 5.8m다. 또한 천연기념물 제354호인 고창선운사 도솔암 장사송은 높이 23m이며, 가슴높이둘레가 2.95m다. 따라서 지금까지 본 천연기념물 소나무 중 가장 큰 소나무다.
관음송을 지나면 제법 가파른 길이 나온다. 숨이 제법 찰 정도로 힘이 든다. 그곳에는 노산대와 망향탑이 있다. 단종이 이곳에서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와 한양에 남겨진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쌓은 돌탑이 망향탑이다. 이렇게 슬픈 사연이 없었더라면 정말 경관이 빼어난 명승지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강의 곡선미는 주변 산세가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이룬다. 서강은 오대산 남쪽에서 발원한 평창강과 태기산에서 발원한 주천강이 영월군 한반도면에서 합류해 영월읍 서쪽으로 흐르는데, 이 합류 지점부터 영월읍 하송리를 거쳐 영월읍 남쪽에서 다시 동강과 만나는 지점까지가 바로 서강이다. 흔히 평창강의 하류로 보기도 한다. 이후는 남한강의 상류로서 단양·제천·충주호로 이어진다.
동강과 서강은 영월군을 동서로 가르며 흐른다 하여 동쪽을 동강, 서쪽을 서강으로 부른다. 서강은 생태계의 보고로서 백로·비오리·원앙·수달, 어름치·참게·쉬리·쏘가리·꺽지 등이 서식한다. 동강은 오대산에서 발원하는 오대천과 정선군 북부를 흐르는 조양강 그리고 어천이 정선읍 일대에서 합류하면서 동강이 시작된다. 동강의 길이는 약 65㎞이다. 동강은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에서 서강을 만나 남한강의 상류로서 단양·제천·충주호로 이어진다. 동강은 20여 년 전 여름에 하루 종일 걸어간 기억이 가물가물 떠오르는 곳이다. 동강과 서강은 영월의 영원한 젖줄이자 보배이다. 이곳은 자연 그대로 보전을 해야 되지 난개발을 막아야 한다.
청령포에 왔으니 단종의 죽음에 대한 여러 설들을 정리하고자 한다.
1457년(세조 3) 세조(世祖)에 의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단종은 청령포로 유배를 와서 2달만에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처소를 영월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겼다. 그러나 세조의 동생인 금성대군이 단종복위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세조는 단종과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려 그해 10월 단종은 관풍헌 앞뜰에서 사약을 받고 쓸쓸히 눈을 감았다는 설이 일반적으로 정설로 알려져 있다.
실록에는 단종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지 않지만, 구전이나 야사 등을 통해 다양한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한국구비문학대계’에 나오는 내용이다.
“세조가 단종을 죽이려고 사약을 내리자 그것을 운반하는 사절이 자결하였다. 단종이 이들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 하인을 불러 개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였다. 줄을 방문 밖으로 내고 안에서 스스로 목을 걸고 하인에게 당기라 하니, 하인은 개를 묶은 줄 알고 당기다가 한참 후에 방안을 보니 이미 단종이 승하한 뒤였다.”
장릉 설화에는 “아무도 거두어줄 이 없는 단종의 시신이 강물을 떠내려가는 것을 영월 호장이었던 엄홍도가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곳에서 건져 지금의 장릉자리에 암장하고는 세조의 보복이 두려워 종적을 감춰버렸다고 한다.”
특히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세조가 욕을 많이 먹는 것 중 하나가 적장자를 죽였다는 것이다. 단종은 적장자의 적장자다. 이는 조선왕 중 유일하다. 세종대왕의 적장자는 문종이다. 문종의 적장자는 단종이다. 조선의 왕 27명 중 적장자로 왕위를 계승한 사람이 몇 명인가? 답은 7명이다.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이 모두다. 이 중 훌륭한 업적을 남긴 왕은 거의 없는 셈이다.
역사의 현장에 가면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 의문에 대해서 오래된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다보니 어느 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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