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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그래도 여행은 꽃 핀다

by 황교장 2021. 8. 1.

그래도 여행은 꽃 핀다

 

여행을 좋아하는 내게 그래도 여행은 꽃핀다는 책제목이 먼저 눈길을 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같이 여행하고 아름다운 인연을 이어가면서 결성된 지구별여행조합이라는 동호회에서 만든 이 책은 지구별 여행자 열세 명이 공동저자이다. 지구촌 여러 곳을 열세 명이 사부작사부작 마실 다닌 인생발자국의 여행기다. 코로나로 인한 여행 상실 시대에 발로 가는 여행 대신 그동안 경험했던 인생여행을 글로 나타낸 책이다.

이 동호회를 주도하는 지구별촌장 최기의와 길따라 삶도 흘러가네의 제목으로 글을 쓴 유인재가 나의 고등학교 동기이다. 여행기 책을 출판했다기에 교보문고에 주문을 바로 해 단숨에 읽고 지금 독후감을 쓰고 있다.

 

길 따라 삶도 흘러가네의 내용은 아들과 함께 제주도 올레길을 같이 걷는 여행이야기다.

 

건너편으로 내려다보이는 이름 모를 오름의 순한 오르막 사이로 길이 이어진다. 그 주변으로 무밭과 무덤이 올망졸망하다. 우리네 삶인 듯 질척이는 길과, 우리 삶이 노동으로 밥을 벌어야 함을 보여주는 무밭과 이웃한 무덤들. 도처에 우리 삶을 닮은 풍경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런 거라고, 문득 돌아보면 사방 어디든 볼 수 있는 게 우리네 사는 모습이라고, 다만 눈 밝지 못한 그대가 못 볼뿐, 아니 보고 싶지 않을 뿐.”

 

제주도의 오름을 오르면서 볼 수 있는 풍경을 참 멋지게 표현을 했다. 특히 제주의 오름들은 무덤과 밭과 말이 함께 한다. 육십대 후반으로 삶을 정리하는 입장에서 인생의 내면을 바라보는 표현이다.

 

아들, 뭐 묵고 싶은 거 없나?”

아무거나 묵으면 되지요, 특별히 묵고 싶은 건 없어요

우리 회하고 소주 한잔 안 할래?”

괜히 내가 먹고 싶어 꼬드긴다.

아부지 좋으실 대로

히히, Let’s 가자.”

 

끄응, 일어나보니 아침이다. 간밤에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아들과 횟집총각에게 노래방 가자고 떼를 썼다. 술을 더 마시려고 슈퍼에서 술을 사던 기억과 울긋불긋 간판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어쨌거니 창밖에는 제주의 아침이 보인다. 조그만 포구의 아침이다. 남원 포구다."

 

다 큰 아들과 아버지가 이렇게 사이좋게 둘이서 올레길도 걷고 횟집에서 맛있는 고등어회와 한라산 소주를 취할 때까지 마실 수 있는 인생은 아름답고 부럽다. 성장한 아들과 함께 올레길을 걷는 것은 아들이 있는 남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일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여행기라기보다는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유인재는 문재가 뛰어나다. 소설을 쓰면 아주 잘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미르에는 눈표범이 살고 있을까-

이 글은 지구별 촌장인 최기의가 쓴 글이다. 그의 글에서 내 마음을 끈 구절을 옮겨본다.

 

퇴직이 가져다준 허전함과 심란함의 똬리는 쉽게 거둘 수가 없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온 대한민국 은퇴자라면 누구나 겪는 몸살이 아니던가? 하지만 여행지에 내려놓고 온 줄 알았던 마음속의 똬리는 늘 내 배낭 한쪽에 숨어 함께 귀가하곤 했다. 어느 순간 쾌도난마로 그것을 오지에 던져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평생 다닌 직장을 떠날 때는 저마다 남다른 소회가 많겠지만 나 역시 비우고 내려놓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눈표범이 산다는 파미르에 가겠다니까 가족과 지인들이 우려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오로지 싸워 이긴 자들의 역사만 수록된 수천 년 문명도시를 벗어나고 싶었다. 낮엔 바람소리, 밤엔 별들의 소곤거림이 계곡을 가득 채우는 정적인 곳이 그리웠다. 동시에 한밤중에 눈표범이나 늑대가 양을 잡아채가는 동적인 스릴이 공존하는 곳이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적어도 그때의 내 심정은 그러했다. 눈표범을 볼 수 있는 행운을 기대하며 배낭을 친구 삼아 머나먼 길, 파미르로 나섰다.”

 

최기의는 국민은행 수석부행장을 거쳐 초대 국민카드사 사장을 지낸 친구다. 국민은행장이 바뀔 때 후임으로 유력한 인물로 신문에 예견된 후보였다. 아마도 위의 심정은 국민은행장이 되지 못하고 국민카드사 사장으로 퇴직하고서 웬만한 곳의 여행으로는 떨쳐버리지 못한 심정을 노래한 것 같다.

 

해발 6,000미터 내외의 고봉들에 둘러싸인 훈자밸리는 바깥세상과는 오랫동안 단절의 시간을 보낸 곳이다. 기후는 비교적 온화하고 건조하며 세계적인 장수 마을로 손꼽힌다. 평평한 지붕을 뜻하는 파미르는 세계의 지붕으로 일컬어지는 해발 4,000미터 이상의 고원지대이다. 척박한 환경을 탓하거나 피하지 않고 순응과 적응으로 살아가는 파미르인들의 서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아침이면 이슬 머금은 접시꽃의 인사가 정겹게 다가오고 여름 한낮이면 뙤약볕 아래 사과와 살구가 빨갛고 노랗게 익어간다. 밤이 찾아오고 간간이 정전이라도 될라치면 밤하늘의 무수한 별과 은하수는 태양계의 숱한 이야기를 훈자계곡으로 쏟아 놓는다. 훈자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는 있으되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는 주어지지 않는다. 경쟁사회를 살아오면서 지치다 못한 황폐해진 우리의 삶을 치유와 위안의 공간으로 훈자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밀밭사이로 난 소로를 따라 살랑거리는 미풍을 마주하면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을 정리하기에 더없이 좋은 길이 된다. 사색은 혼자로 족하지만 그 끝에 정돈된 생각을 함께 나눌 길동무가 없으니 외로운 길이기도 하다.

여정 내내 내가 먼저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마음을 가질 때 스스로 가벼워지고 편안해질 수 있음을 배웠다. 직장생활에서 누구나 힘든 순간을 맞닥뜨리지만 평생을 보낸 직장 생활의 마지막 시기는 내게 참으로 힘든 시기였다. 내 외부 출신간의 경영진 자리다툼과 조직통합에 따른 소모적인 경쟁이 유난히 심하던 때였다. 그렇다고 누구를 원망할 일도 아니다. 각자의 이익을 좇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일진대, 내가 볼 때 배신이 그가 볼 때는 정당한 처신이었을 뿐이다. 여태까지 내 좁은 시야와 생각의 틀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니 상처는 남이 준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 스스로 만들고 아파했던 것이다.

 

달포의 오지여행 중 때로는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고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퇴직 이후 줄곧 마음속을 짓누르던 억한 심정과 원망을 이해와 포용의 마음으로 바꿀 수 있었다. 여행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하더라도 찾아 나설 가치는 충분하다.

아쉽게도 파미르에 살고 있는 눈표범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빈한한 삶 속에서도 따뜻한 마음과 밝은 표정을 잃지 않은 파미르인 들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었다. 카라코람 훈자와 파미르 고원으로 가는 험한 길은 욕심을 내려놓고 나의 참모습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훈자 그리고 파미르는 치유를 넘어 내세로 가는 길목삼아 다시 한 번 더 머물고 싶은 내 인생의 여행지이다.“

 

나 역시 2018년 퇴직하고 실크로드를 답사했다. 내가 간 곳은 돈황에서 우루무치까지였다. 파미르고원은 평균 높이 5,500미터 이상의 산봉우리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원인데, 그 길이는 약 260킬로미터, 폭은 50-100킬로미터나 된다. 파미르란 페르시아어로 평평한 지붕이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蔥嶺(총령)이라고 부른다. ()은 마늘이라는 뜻으로 파미르고원의 야생 마늘이 유명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파미르고원은 천산산맥, 카라코롬산맥, 곤륜산맥, 힌두쿠시산맥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중국을 비롯하여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 5개국에 걸쳐 있다. 파미르 고원의 대부분은 타지키스탄에 속해 있지만 파미르고원을 넘어가는 길은 그 옛날 서역에서 간다라로 가는 고갯길이며 현대에 와서는 1978년에 개통된, 중국의 카슈가르에서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를 연결하는 총 길이 1,032킬로미터의 카라코롬 고속도로가 있다. 지금도 국경을 넘어가는 버스가 하루 1편 다닌다고 한다. 이 내용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국편3' 마지막에 나온다.

 

유홍준 교수는 위의 책에서 여행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경험을 확대시켜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외여행에서 크게 세 가지를 보고 배운다고 주장을 한다. ‘문화유산 답사는 인류의 역사와 인문정신을 가르쳐주고, 도시여행은 인간의 삶의 다양한 면모를 엿보게 하며, 자연관광은 대자연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 준다.’ 라고 강조하고 있다. 아주 설득력 있고 간결하게 핵심을 잘 정리한 것 같다.

최기의의 여행기를 보면 여행에서 유교수가 강조한 세 가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정신적인 상처의 치유다. 나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신경전달물질 중 다이돌핀(Didorphin)이라는 물질이 있다. 이는 위대한 자연을 맞이하는 경이가 감동을 받아 분비된다고 한다. 그래서 감동호르몬이라고도 불린다. 다이돌핀은 뇌에서 고통을 완화하는 작용을 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엔도르핀(Endorphin)보다 4000배나 강한 호르몬이라고 한다. 아마 최기의도 파미르의 대자연을 보고 감동받아 다이돌핀 효과를 톡톡히 본 것처럼 보인다. 언젠가 그를 가이드 삼아 파미르고원을 답사하고 싶다.

 

이 책에는 위의 두 사람 이외 열한 분의 여행기가 더 있다. 여기에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이들 모두가 여행의 대단한 고수들이고 나름의 진솔한 인생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코로나 시대에 일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