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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스페인 여행2-몬세라트

by 황교장 2022. 7. 24.

스페인 여행2-몬세라트

 

전날 오랜 시간 비행으로 인해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 것 같았는데 의외로 눈을 뜨니 상큼하다. 기본 체조와 요가를 한 후 스쿼트 200회와 팔굽혀펴기 30회를 하고 정리운동을 마치자 한 시간 반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침식사를 하고는 스페인의 3대 순례지인 몬세라트 수도원으로 향했다.

맑고 쾌청한 날씨다. 기온도 적당하여 선선하기까지 하다. 시골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를 하는 초가을 날씨 느낌이다.

 

30여 분을 달리자 저 멀리 눈에 확 띄는 산이 나타났다. 직감적으로 몬세라트라는 느낌이 들었다. 점점 산이 가까이 다가온다. 차에서 내리자 곧바로 산악열차을 탔다. 산악열차를 타고 바라보는 주변의 경관들은 경이롭다.

넋을 잃고 바라보다 보니 몬세라트 수도원에 도착했다. 20여 분이 걸렸다.

 

아침 첫차를 탄 덕분에 관광객이 거의 없다. 산악열차에 내려 수도원 입구에 들어서자 기둥처럼 솟아오른 바위들을 배경으로 수도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암괴석이 요새처럼 수도원을 감싸고 있다. 명당자리다.

이렇게 험준한 산에 제법 넓은 공터가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풍수에서 바위가 많은 산에는 흙이 있는 곳이 명당이고, 흙이 많은 산에는 바위가 있는 곳이 명당이다. 이곳이야말로 풍수의 교과서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는 명당인 셈이다.

 

'몬세라트'톱니 모양의 산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곳 바위들의 생긴 모양이 톱니 모양으로 생겼다. 멀리서 볼 때는 화강암으로 보였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 우리나라 청송 주왕산의 바위와 이미지가 비슷하다.

 

바위 속에 굵은 자갈이 응축되어 있다. 주왕산은 화산 폭발로 분출한 화산재가 용암처럼 흘러 멈춰서 굳은 회류응회암으로 된 봉우리라고 하는데, 이곳의 6만여 개의 바위는 해저 융기로 인해 생긴 바위라고 한다.

몬세라트산은 해발 고도 1,236m이고 수도원이 있는 이곳은 725m. 사람 몸에 가장 적당한 해발고도가 700m라고 한다.

 

몬세라트 수도원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라 모레네타(La Moreneta)’라 불리는 검은 얼굴의 성모상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성모상은 사도 루카가 조각한 것으로, 베드로 사도가 스페인으로 들여왔다고 한다.

그 후 8세기경 아랍인의 지배를 받을 때 누군가 이 성모상을 동굴 깊이 감추었는데, 880년경 목동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빛을 따라 들어간 동굴 속에서 우연히 다시 발견했다.

 

당시 이 지방의 대주교는 자신의 대성당에 모시려고 했다. 그런데 조각상은 이곳에서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검은 성모 마리아가 이곳에 남고 싶은 뜻으로 받아들여 그때부터 지금까지 몬세라트 수도원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수도원 앞 광장은 카탈루냐 출신 작가들의 다양한 조각 작품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음각으로 조각된 성 조르디의 조각상이다. 이 조각상은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수난의 문'을 만든 스페인의 세계적인 현대 조각가인 주제프 마리아 수비라치의 작품이다.

특히 이 음각 조각상은 어느 각도에서 바라보든 성 조르디의 눈이 보는 이를 항상 따라다니는 것처럼 보이도록 조각됐다.

 

성조르디의 조각상

수도원 입구에는 예수의 12제자가 내려다보는 문이 보이고 이곳을 들어서면 두 개의 문이 나타난다. 중앙의 문은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오른쪽은 검은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 문이다.

 

시간이 조금만 늦었다면 이곳은 혼잡 그 자체였지만 지금은 너무 한산하다. 대성당을 둘러보고는 검은 성모 마리아상 앞에 왔다. 정말로 검다. 성모 마리아상이 검은 이유는 촛불에 그을러 검어졌다는 설과 나무에 바른 니스가 세월이 지나 검게 변했다는 설이 있다.

 

검은 성모상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오른손에 둥근 보주를 들고 있는 형상을 취한다. 그런데 이 보주를 만지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전설 때문에 유일하게 유리관 밖으로 나와 있다.

보주의 반쪽은 사람들의 손길로 색이 바랬을 정도로 반질거린다. 종교에서 기복(祈福)을 바라는 마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쩔 수 없나 보다.

 

교황 레오 13세는 이 검은 성모상을 카탈루냐의 수호 성물로 지정했다. 몬세라트 수도원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성당으로도 유명하다. 산티아고 성당, 사라고사의 필라르 대성당과 함께 스페인의 3대 순례지라고 한다.

 

산티아고 성당
필라르 대성당

또한 몬세라트는 바위산과 수도원이 마치 한 몸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어 안토니오 가우디가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건축하기에 앞서 영감을 받은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몬세라트 수도원에는 현재도 수십 명의 수도사가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멀리 피레네 산맥

또한 몬세라트 수도원은 에스콜라니아 합창단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빈 소년 합창단, 파리 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과 함께 항상 '세계 3대 소년합창단' 안에 꼽힌다. 시간을 잘 맞춰 오면 성당에서 에스콜라니아 합창단의 성가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토요일과 7월달은 들을 수 없다고 한다. 오늘이 바로 77일이라 아쉽다.

몬세라트 수도원은 프란체스코 교황이 방문할 만큼 유명하다. 역사적으로도 역대 스페인의 국왕들은 물론 프랑스의 루이 14,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를 비롯하여, 괴테와 바그너도 다녀갔다고 한다.

 

수도원을 나와 수도원 일대를 둘러보았다. 보면 볼수록 명당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수도원 오른쪽 끝으로 가자 주변의 풍광이 다 들어왔다. 멀리 피레네산맥도 뚜렷하게 보인다.

 

피레네 산맥

프랑스와의 국경이 여기에서 차로 한 시간 반이면 갈 수 있다고 한다. 아마도 오후에 이곳에 왔다면 아침처럼 그리 멋지지는 않을 것이다. 경관은 그날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가슴 벅찬 마음을 추스르면서 내려올 때는 케이블카로 5분 만에 내려왔다. 아쉬웠다. 다음 여행지는 다시 바르셀로나로 향하여 가우디의 작품들을 보려고 한다.

 

 

유럽 여행에서 유럽의 역사를 알면 여행에 흥미를 더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유럽의 역사에 대하여 간략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유럽의 역사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나와 나를 누르는 힘 즉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끝없는 싸움과 공존으로 이해할 수 있다. 헬레니즘은 그리스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인간 중심적 사고다. 즉 나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다. 헤브라이즘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신 중심의 사고다.

이 두 가지 사고가 서양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왔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 로마신화는 헬레니즘이고 성경은 헤브라이즘으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불안, 자연에 대한 신비감에서 해방될 수 없다. 따라서 위대한 힘, 절대적인 존재에 의존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마음이 곧 절대자, 위대한 힘에 대한 믿음, 즉 신앙으로 나타난다.

신앙이 체계화되고, 의식화되어, 제도화되면 이를 종교라고 한다. 종교는 믿음을 담는 그릇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종교는 지역과 민족, 환경에 따라 다르고, 시대와 필요에 따라 변화하고 분열한다. 그리스도교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그리스도교는 인간 중심적인 헬레니즘 문화와 유일신 사상의 유대 종교인 헤브라이즘이 결합해 만들어진 종교다. 세계제국이 된 로마는 과거의 그리스, 로마의 종교로는 더 이상 대제국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로마제국 내의 모든 민족이 믿을 수 있고, 누구에게나 열린, 누구라도 믿을 수 있는, 전체제국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것이다.

 

초기에 로마제국 안에 다섯 개의 교구가 설치되었다.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디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다. 313년 그리스도가 공인되면서 제국의 수도인 로마교구가 그리스도교의 총본산이 되었다. 하지만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그리스도교의 중심은 로마교구에서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교구로 옮겨졌다.

 

교회의 수장이 새 수도로 옮겨가 로마교구의 최고 지도자 자리가 비게 되자 황제를 대신해 교회를 이끌 교황을 선출하여 동로마제국의 교황(황제)과 서로마 교황 즉 두 사람의 교황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로마교황과 동로마제국의 황제 사이에 갈등이 수백 년 지속되다가 11세기 초 로마교구가 동로마제국의 그리스도권에서 탈퇴함으로써 가톨릭 교회는 동, 서로 분열된다.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로 나뉘었다. 정확히 말하면 동방정교에서 로마교구가 분리 독립해 로마가톨릭이 되었다.

 

동방정교는 동로마제국 전역에 널리 퍼져 발전했으나 1453년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 세력에 정복되어 동로마제국이 멸망하자 러시아가 그 정통성을 인수해 러시아 정교가 동방정교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를 제외한 옛 동로마제국의 영토는 거의 모두 이슬람에 정복되어 이슬람 통치 아래 교구 간, 지역 간의 교류가 어려워 로마가톨릭처럼 세계를 하나로 묶지 못하고 그리스 정교, 루마니아 정교, 불가리아 정교 등 지역별로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다.

 

로마가톨릭의 교황은 왕 위에 군림하는 절대 권력자가 되어 유럽을 지배했고 꾸준한 포교 활동으로 10-11세기에 이르러 전 서유럽, 북유럽이 그리스도교, 즉 로마가톨릭교를 믿게 되었다. 하지만 막강한 권력을 거머쥔 교황과 교회 세력은 차츰 부패하고 오만해져 점차 강력해지는 세속 왕들과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급기야는 교황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모순은 결국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에 더해 영국의 성공회가 따로 독립해 나왔다. 이유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헨리 8세가 시녀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왕비 캐서린과 이혼을 요청했으나 교황 클레멘스 7(재위:1523-1534, 본명은 줄리오 디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거부했다.

이를 빌미로 헨리 8세는 성공회를 세웠다. 왕이 교회의 수장이 되어 교황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독자적인 교회가 되었다.

 

로마가톨릭, 루터교, 영국성공회는 교리상 큰 차이가 없는 농경 시대적 종교였다. 이는 새롭게 성장하는 상인, 공장주, 지식인 등 중산층 부르주아계급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맞춰 나타난 것이 장 칼뱅(1509-1564)이 주도한 청교도 운동이다.

 

이전에는 부자가 천국을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가기보다 어렵다!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곧 그대 것이니라!’ 등 시대에 맞지 않는 내용들이 많았다. 이에 칼뱅은 가난한 자뿐만 아니라 부자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단 깨끗하게 돈을 번 자들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어떻게 돈을 깨끗하게 벌 수 있느냐다.

돈이란 깨끗하게만 벌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돈을 벌려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짓도 해야 하는 경우가 너무 많이 생긴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언제나 참회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용서를 비는 태도를 지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돈과 이익을 위해 비양심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이중성을 가진다. 또 약탈과 착취를 일삼으면서도 기부를 아끼지 않는 이중성을 띠게 된다. 이러한 이중성이 미국이나 영국에 특히 널리 퍼져 있는 청교도들의 특징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스스로 변화하면서 유럽인들의 정신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제부터 그리스도교와 유럽의 정치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펴보자.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자 가장 시급한 것은 새로운 국교인 그리스도의 교리를 정비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근교에 있는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열었다. 이를 제1차 공의회라고도 한다. 교리 확정을 위한 전체 성직자 회의가 무제한 난상토론으로 시작되었다.

 

저멀리 피래내산맥

3255.20-7.25일까지 두 달 이상 토론해도 결론이 나지 않다가 알렉산드리아 총주교인 아타나시우스 주교가 아주 근사한 이론을 내놓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내려오신 하느님 아버지, 바로 그분이시며, 이 지구상에 내려진 하늘의 성스러운 영혼, 즉 성령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즉 성부, 성자, 성령 세 가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서 합쳐지는 삼위일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받아들여 그리스도교의 첫 통일 교회인 가톨릭교회가 출발하였다. 이 이론의 가장 핵심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격과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인격을 동시에 가진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의 신들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신이라는 신격과 인간의 모습을 지닌 인격을 동시에 가지는 있는 그리스, 로마 정신인 헬레니즘의 계승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라비아 지방을 비롯한 동로마제국의 영토인 오리엔트 지방에서는 그리스적인 사고인 인간 중심 사상, 헬레니즘을 전혀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사람인 예수가 신이기도 하고 인간이기도 하다는 삼위일체 사상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에 예수의 신격, 즉 삼위일체론을 부정하고 나타난 종교가 이슬람교다.

 

이슬람교의 핵심 교리는 유대교,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유일신 사상이지만 그리스도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삼위일체의 부정이다. 이슬람교도들은 하루 다섯 번 성지인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데 반드시 다음과 같은 구절로 기도를 시작하고 끝을 낸다. 알라 이외의 신은 없다! 무함마드는 신의 사도이니라!

 

이 구절이야말로 이슬람 핵심 교리의 압축으로 모든 기도의 시작과 끝이 될 만큼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알라 이외의 신은 없다는 것은 예수는 신이 아니고 인간이다. 무함마드는 신의 사도이니라. 무함마드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고로 예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는 뜻이다. 이슬람의 핵심은 예수의 신격을 부정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자신들 종교의 생명인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이슬람교를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불구대천지원수가 되어 1,400년 동안 끊임없이 싸우고 또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 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