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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스페인 여행4-가우디 투어2 -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by 황교장 2022. 7. 29.

스페인 여행4-가우디 투어2 -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앞에는 차를 세울 수가 없어서 10분 정도의 거리를 걸어갔다. 36도의 높은 기온에도 나무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분다. 습도가 낮기 때문일 것이다.

스페인에서는 여름의 이 시간대에는 낮잠을 자야 할 시간이다. 스페인에는 '낮잠'이라는 의미의 시에스타(Siesta) 문화가 있다. 대개 오후 1시부터 5시 사이에 문을 닫고 낮잠을 즐긴다. 그러나 관광객이 많은 곳은 시에스타 없이 영업하기도 하고 문을 닫는 시간도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시에스타(Siesta)' 문화는 한낮의 뜨거운 햇빛과 여름철 무더위를 피하기 위한 스페인의 오래된 풍습이다. 일반 상점은 물론 관공서도 문을 닫는다고 한다.

 

파밀리아 성당

점점 파밀리아 성당이 가까이 다가온다. 겉모습만으로도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우리말로 성가족성당으로 알려져 있다. 사그라다는 성스러운이라는 뜻이고, 파밀리아는 가족이란 뜻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성(聖) 가족'이라는 뜻으로,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요셉을 뜻한다. 1882년에 짓기 시작하여, 1891년부터 가우디가 이어받았다. 수석 건축가가 가우디로 교체되면서 전통적인 고딕 양식에서 고딕 양식과 아르누보 양식을 결합한 특유의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변모했다.

 

동쪽 파사드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카탈루냐 현대 건축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가우디가 사망했을 당시에는 동쪽 파사드(Facade·건물의 전면) 등 전체 계획의 4분의 1 정도만 완성된 상태였다. 나머지 부분은 가우디의 제자들이 프로젝트를 이어받아 진행 중이었는데 그마저도 1936년 스페인 내전 중 일부가 파괴됐다. 이때 현장에 있던 설계안과 사진, 석고 모형도 함께 불타버렸다.

이 때문에 가우디가 직접 완성한 '탄생의 파사드(Nativity Facade)'를 제외한 나머지 외관은 후대 건축가들이 가우디가 남긴 자료를 복원·재해석해 현대적으로 설계한 것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는 총 세 개의 파사드가 있는데 이 중 유일하게 가우디가 직접 완성한 것은 동쪽에 있는 탄생의 파사드이다. 예수의 탄생과 유년기를 묘사한 조각상들로 꾸며져 있다. 탄생의 파사드에서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세 개의 청동문은 왼쪽부터 희망의 문’ ‘자비의 문’ ‘믿음의 문으로 불린다.

중앙의 자비의 문 위에는 말 구유에서 성모 마리아의 손에 일어나 세상을 바라보는 아기 예수와 그 둘을 감싸고 있는 성 요셉을 나타낸 조각상이 자리하고 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가우디가 직접 조각했다고 알려져 있다.

 

 

탄생의 파사드를 보고는 성당 내부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우선 사람을 압도한다. 일반적으로 밖에서는 높은 건물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층층으로 되어 있어 이 건물들이 크고 거대한 줄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이곳은 전혀 다르다. 내부 공간에 끝없는 높이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저절로 올려다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인간의 세계가 아닌 천상의 세계를 구현한 것 같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압도감은 이곳이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임을 강조하고 있다. 연약하고 무기력한 인간들에게 여기는 하나님의 영역으로 엄숙하고 경견한 자세로 하나님을 믿고 복종할 것을 강요하는 느낌이다.

 

 

성당 기둥 사이를 메운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햇빛이 쏟아졌다. 그 은은한 빛은 내부 조명과 함께 더욱더 장엄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내부의 장식은 모두 자연에서 따왔다고 한다. 가우디는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다. 기둥은 나무줄기나 그루터기와 같고, 지붕은 산등성이와 산비탈이 있는 산과 같으며, 둥근 천장은 포물선 모양의 동굴이고, 튼튼한 테라스는 산의 절벽 모양이다.”라고 주장했다. 건축에 대한 가우디의 철학이 이곳에 실현된 것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마치 숲속에 들어선 느낌이 드는 것은 천장은 나무들이 모여 있는 형상으로 나무들이 가지를 쳐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것을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이는 신비한 숲속을 걷는 느낌을 주고자 했다고 한다. 또한 아침에 동쪽에서 해가 떠서 서쪽으로 질 때까지 성당 내부의 조명이 달라진다.

 

 

성당 내부가 자연의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하여 동쪽은 일출과 탄생과 희망을 상징하는 푸른색으로, 서쪽은 일몰과 수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나타내었다. 이는 주역의 기본 원리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성당 안에서 나와 반대편인 서쪽 수난의 파사드(Passion Facade)’로 갔다. 이곳은 십자가를 진 예수 조각상 등 예수의 수난기를 묘사한 것으로 1954년 착공해 1976년에 완성됐다. 수난의 파사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중 최후의 만찬과 제자들의 배신, 십자가 죽음, 부활 사이의 시기를 표현하고자 했다. 곳곳엔 성서의 장면과 구절이 새겨져 있다.

 

수비라치 음각 예수상

수난의 파사드 중앙의 수난의 문은 스페인의 현대 조각가인 주제프 마리아 수비라치가 음각으로 조각한 예수상이다. 수비라치의 음각 조각은 오전에 보았던 몬세라트 수도원 앞 광장에 있는 성 조르디의 조각상에서 이미 만나 친숙하기까지 하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부활을 표현한 남쪽 '영광의 파사드(Glory Facade)'2002년 착공해 현재도 공사 중이다.

 

 

현재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목표 완공 시점은 가우디 사망 100주기인 2026년이다. 가우디는 건축 시작 후 완공까지 200년을 잡았다. 그러면 2082년에 완공되어야 하지만 그동안 건축 기술이 발전되어 2026년이면 완공될 것으로 보고 있다.

 

 

완공되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첨탑은 총 18개가 된다. 2015년에는 성당의 12개 첨탑 가운데 가장 높은 예수 그리스도의 탑(172.5m)이 완공됐다.

두 번째로 높은 성모 마리아 탑(140m)도 이미 완성이 되어 마지막 공정만 남은 셈이라고 한다. 나머지 각 파사드에 4개씩 있는 12개의 첨탑은 12사도들을 상징하고, 다른 4개의 첨탑은 전도자들을 상징한다고 한다.

 

 

가우디는 자연의 구조와 형태를 모방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설계하면서 비정형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균형 잡힌 구조, 내부와 외부의 완벽한 조화, 기능적 건축 요소와 장식이 어우러진 조형미를 추구했다고 한다.

특히 가우디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된 것은 현수선의 발견이다. 현수선은 중력을 이기는 방법으로 고딕건축의 단점을 일시에 해결했다고 한다.

 

 

건축가들은 이런 가우디의 건축 철학을 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해나가고 있다. 성당 건설이 더뎠던 것은 시공 난도가 높은 가우디의 비정형적인 구조와 자금 조달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

이곳에 내는 입장료도 성당 건축의 일부분이니 나도 성당 건축에 동참한 셈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보고는 정말로 웅장하고 섬세하고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종교라는 게 이처럼 대단한 것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종교는 일종의 아편이라고 본다. 그러나 아편을 맞고 이러한 위대한 건축물을 만드는 사람들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세속의 쾌락과 즐거움을 뿌리치고 오직 하느님 절대자를 향한 그 믿음과 마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가 잠시나마 나의 마음에 혼란을 가져왔다.

 

 

그동안 사주상담을 하면서 내담자들을 절, 교회, 성당에 가도록 많이 권했다. 사주와 운이 나빠 개운할 수 없는 사주들이 있다. 즉 운이 다한 사주를 보면 해 줄 말이 별로 없다.

그러면 각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고, 거부반응이 적은 종교에 귀의하도록 권하였다. 특히 개신교를 믿게 된 사람들을 만나면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믿게 해 주어서!” 그런데 반드시 뒤따라오는 말이 하나 더 있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까? 꼭 교회에 오십시오. 이 다음부터 이어지는 대화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리고 불교를 믿게 된 분들은 선생님 덕분에 몸이 건강해져 마음이 평안해졌다고 한다. 불교를 믿게 한 분들에게는 반드시 하루에 아침, 저녁 두 번씩 108배를 하게끔 권한다. 믿음도 믿음이지만 운동의 효과도 있고, 우울증에는 운동하여 낸 땀이 최고의 보약이다.

 

 

여기서 가우디의 일생을 간략하게 알아보자.

가우디는 1852625일 에스파냐 북동부 카탈루냐의 레우스에서 출생하였다. 가우디는 자신의 재능을 타고난 유전자 덕분이라고 밝힌다. “나의 타고난 공간 감각은 내가 솥 전문 대장장이의 아들이자, 손자이자, 증손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가우디는 어릴 적에 관절염으로 뛰고 달리지를 못했다. 항상 독서를 하고 자연과 함께 놀았다. 그래서 늘 꽃, 포도나무, 올리브, 닭 울음소리, 새들의 소리, 곤충들을 관찰하여 훗날 건축에 반영시켰다. 그는 바르셀로나 대학 이공학부를 거쳐 바르셀로나 시립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가우디가 졸업할 때, 건축학교 학장은 우리가 지금 건축사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 놈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가우디는 교수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리는 독창적인 학생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가우디는 독서광이었다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이집트, 그리스, 로마, 아랍 등의 모든 건축학을 깊게 파고들어 건축의 본질을 연구했고 특히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현수선 이론은 지금의 슈퍼컴퓨터로도 계산하기 힘든 것이라고 한다. 학교를 졸업하자 그는 생계를 위해 철 세공업과 같은 일을 시작했다. 물론 이 경험이 가우디 건축에 다 녹아 들어간다. 대장장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망치를 들고 쇠를 두들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의 건축은 모든 면에서 곡선이 지배적이며, 벽과 천장이 굴곡을 이루고 섬세한 장식과 색채가 넘쳐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따라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엽에 걸쳐 유럽을 풍미하였던 아르누보(art nouveau)의 에스파냐판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가우디의 건축이 빛을 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건축주를 잘 만났기 때문이다. 피렌체의 메디치가가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을 후원한 것처럼, 구엘이라는 바르셀로나 최고의 부자가 가우디의 재능을 알아보고 끝까지 후원했던 덕분이기도 하다.

가우디는 "신앙이 없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쇠약한 인간이며, 손상된 인간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신을 위해 사용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다. 말년에 가우디는 건축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을 멀리하고 수도자처럼 살았다.

 

 

1926610일 저녁 530.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코르테스 거리에서 남루한 차림의 한 70대 노인이 길을 건너다 전차에 치였다. 이 노인은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위중한 상태로 사흘 만에 결국 사망했다.

그의 초라한 행색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도 사람들은 그가 세계적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시 가우디는 그의 인생 역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현장에만 12년째 머물며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저녁 기도를 하러 가던 길에 변을 당한 것이다. 그는 로마 교황청의 특별한 배려로 성자들만 묻힐 수 있다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지하에 묻혔다.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묘석에 새겨졌다.

 

 

안토니우스 가우디

코르네트 레우스 출신

향년 74

모범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

위대한 예술가이며

경이로운 이 교회의 건축가

1926610

바르셀로나에서 세상을 떠나다

이 위대한 인간의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기대하노라

 

 

가우디의 생애를 되돌아보면 그는 자식도 없고, 재산도 전부 성당에 기부하고, 오직 신앙에만 몰두했다. 생물학적으로 게놈지도의 완성은 유전자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인간의 기본적인 행복마저 버리고 오로지 보이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신과 함께한 삶이었다.

마지막 묘비명에 이 위대한 인간의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기대하노라라고 했지만 예수 이외에는 아직 부활했다는 사람은 들어보지 못했다. 가우디는 신앙이 없는 사람은 손상된 인간이라고 했는데 자식도, 사랑도 한번 못해본 가우디야말로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손상된 인간이 아니었을까.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 종교에 헌신했던 것은 아닐지...

 

 

가우디는 '페피타'라는 여성을 사모한 적이 있는데 5년 동안 매주 일요일이면 늘 그녀의 집에서 식사를 했다고 한다. 가우디와 한참 만나던 시기 그녀는 이혼 조정 중이었는데, 이혼이 성립된 때에 가우디가 청혼했으나 페피타의 손엔 이미 다른 남자가 끼워준 약혼반지가 있었다고 한다.

실연의 충격이 상당했던 것인지 이후 가우디가 어떤 사람과도 연애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것이다. 비록 인류를 위한 위대한 문화유산은 남겼지만 과연 평범한 인간으로 사는 삶보다 행복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