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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스페인 여행6-알함브라 궁전2

by 황교장 2022. 8. 4.

스페인 여행6-알함브라 궁전2

 

저녁 식사 후에 알함브라 궁전이 가장 잘 보인다는 알바이신 지구로 향했다. 이곳은 1984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언덕이 높아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은 걸어서 갔다. 알바이신 언덕에 도착했다. 알함브라 궁전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알함브라 궁전

해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일몰의 알함브라 궁전은 알함브라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알함브라는 아랍어로 알 함라(Al Hamra)’, 빨강, 붉은이라는 뜻으로, 붉은 철이 함유된 흙으로 지은 붉은 성을 뜻한다. 해거름빛에 비친 성은 더욱 붉다.

 

알함브라궁전

붉게 물든 알함브라 궁전을 조망하고는 걸어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구불구불하면서도 아기자기한 골목길들로 연결되어 있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전통 건축에다가 외적에 대한 방어를 위한 무어인들 특유의 골목길은 골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여름 저녁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언덕이라 가파른 비탈길 옆으로 작은 창이 달린 하얀 집들이 오밀조밀 늘어서 있다. 좁은 골목길에 시장이 제법 길게 늘어서 있어 한참을 구경하며 내려왔다.

 

골목길

등이 파인 원피스 옷이 시원하게 보여 입고 싶었다. 시대는 개성을 중시하고 자유로운 세상인데도 남녀의 의상이 달라 한편으로는 불편하다고 느껴진다. ‘언젠가는 남자들도 이러한 옷들을 입을 날이 오겠지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시장 골목

좁은 공간에 참 다양한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들 상품 중에는 이슬람 상품도 눈에 띈다. 알바이신 지구는 북아프리카계 아랍인 이민자들이 많이 들어와 살고 있다. 오늘날 스페인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가 적은 이유가 이 알바이신 지구가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알바이신 지구

90년대 중후반 알바이신으로 몰려온 아랍계 이민자들 중에는 잡범이거나 스페인어를 아예 안 배우고 아랍어만 사용하여 스페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스페인 정부는 난민이나 이슬람권 이민자들을 임의로 거주지를 정해주고 스페인인과 섞여 살게 했다. 어쩔 수 없이 스페인어를 사용하도록 정책을 취했는데 이 방식이 극단주의를 예방하는데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알바이신 지구

이곳 그라나다는 분지라 여름에는 살인적인 더위로도 유명하다. 낮 최고 40~50도까지 올라간다. 7~8월에는 절대 가지 말아야 할 도시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늘 좋은 계절에만 여행을 갈 수는 없다. 오늘은 소문보다는 그리 덥지는 않다.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사막풍 덕분에 그나마 습도가 낮다.

 

알바이신 지구

그늘로 가면 서늘하고 해가 지면 많이 시원하다. 우리 나라 같은 푹푹 찌는 열대야는 없는 셈이다. 좁은 골목길을 벗어나자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 앞에 고색창연한 건물이 있다. 그라나다 대성당과 왕실 예배당이다.

 

그라나다 대성당

길가의 넓은 광장에는 술과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마음에 드는 가게에 들어가 알콜이 없는 맥주를 시켰다. 웨이터에게 올라! 씨 알콜 비어!”라고 하자 웃으면서 오케이라고 한다. 스페인어로 없다는 말이 라고 한다. 알콜이 없는 맥주를 달라는 뜻이 통했다는 의미다. 무 알콜 맥주도 일반 맥주맛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두 잔을 마셨다. 알콜은 없지만 기분은 알콜이 있는 맥주를 마신 것과 거의 같았다. 오랜만에 기분이 알딸딸하여 여행의 참맛을 느꼈다.

 

왕실 예배당

알함브라 궁전이 있는 이곳은 이미 로마시대에 조그만 요새가 있었다. 9세기에 그라나다의 에미르가 성벽과 토대를 올렸다. 1238년에 그라나다의 술탄 무함마드 1세가 나스르 왕조를 이곳에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100년에 걸쳐 점차 화려한 궁궐로 변모시켰다. 나스르 왕조는 수도가 그라나다여서 그라나다 왕국이라고도 한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내쫓으려는 그리스도교도의 국토회복운동에 의해 옴미아드 왕조의 알안달루스 왕국의 수도인 코르도바가 1236년에 점령당하자 남쪽으로 후퇴하여 이곳으로 왔다. 나스르 왕조의 영역은 북쪽은 시에라네바다산지, 남쪽은 알메리아로부터 지브롤터에 이르는 해안선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이 시기에 이미 나스르 왕조 외의 모든 이슬람 왕국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되었다. 유일하게 남은 나스르 왕조도 카스티야 왕국에 막대한 상납금을 지불하여 겨우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무어인 최고의 예술이라 불리는 알함브라 궁전은 알안달루스 왕국의 황혼기에 세워진 셈이다. 1469년 아라곤과 카스티야 두 왕국이 합병한 것은 나스르 왕조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나스르 왕조는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가톨릭 부부왕에 의하여 1492년 정복되었다. 나스르 왕조는 이베리아반도에서 250년간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으로서 번영을 누렸지만 결국은 북아프리카로 쫒겨 갔다.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에미르인 무함마드 12세 보압딜은 영토를 빼앗기는 것보다 이 궁전을 떠나는 게 슬프구나.’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패자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보고 그의 어머니는 한심하다는 듯이 남자처럼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 여자처럼 울기라도 해야지라며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결국 패자인 나스르 왕조의 보압딜은 모로코의 패스에서 귀족으로 편입되어 살다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알함브라 궁전을 정복한 이사벨 여왕은 알함브라 궁전을 보고는 너무 아름답고 황홀하여 병사들에게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라도 손대지 말게 했다. 성을 그대로 보존하여 페르난드 2세 왕과 이사벨 1세 여왕이 사용하였다. 이곳은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탐험을 떠날 때 여왕으로부터 공식허가를 받은 장소이기도 하다.

 

이사벨 1세 여왕의 외손자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스페인에선 카를로스 1)는 이 궁전에 거주하기 위해 새로운 카를로스 1세 궁전을 알함브라 한가운데에 지었다. 그러나 이 궁전은 미완성으로 끝났다. 나의 사견으로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많은 비용이 들어가 완성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카를 5세는 이교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궁궐 일부분인 모스크를 성당으로 개축하고, 성당에 딸린 수도원도 짓고, 궁궐 일부도 기독교식으로 새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공사는 알함브라의 아름다운 건물들과 장식을 훼손하였다. 그 뒤로 알함브라 궁전을 왕궁으로 쓴다던 계획도 흐지부지되었다. 18세기 초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 5(1683-1746)가 며칠 들렀던 것이 왕실의 마지막 방문이었다.

 

그 이후로도 알함브라 궁전은 계속 훼손되었다. 1812년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서 탑들이 철거되는 일이 일어났다. 연이어 1821년에는 지진 피해까지 입었다. 그 뒤로는 지역 총독마저 알함브라 맞은편의 헤네랄리페에서 거주하여 궁전을 방치하였다. 이로써 알함브라는 집시와 강도들의 무단거주지로까지 퇴락했다.

 

이 궁전이 다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미국인 작가이자 외교관인 워싱턴 어빙에 의해 1829년 알함브라의 이야기(Tales of the Alhambra)가 출판되면서부터였다. 1828년부터 호세 콘트레라스에 의해 원형을 찾기 위한 공사 및 보수 공사가 시작되었고, 1830년에 페르난도 7(1784-1833)의 기부로 지속적인 공사를 할 수 있었다.

 

1847년 호세가 사망했으나 그의 아들이 물려받아 공사를 계속하였다. 1870년에는 스페인 국보로 지정되고, 1984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21세기에도 계속해서 원형 회복을 위한 공사나 보수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는 주로 천장과 기둥 사이 레이스를 묘사한 부분들을 복원하고 있다.

내일은 스페인의 투우경기의 발상지인 론다로 떠난다.

 

 

 

알함브라 궁전의 나스르 왕조는 이사벨 1세 여왕과 페르난도 2세 왕에 의해 멸망한다. 이들은 지금도 스페인에서 가장 존경받는 왕이다. 특히 이사벨 1세 여왕은 더욱더 모든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한다. 이곳 그라나다 대성당 곁에는 왕실 예배당이 있다. 예배당에는 이사벨 1세 여왕과 페르난도 2세 왕의 무덤이 있다. 그리고 이들의 딸 후아나 1세와 사위인 미남왕으로 불린 후아나 1세의 남편 펠리페 1세의 석관도 있을 정도로 그라나다는 스페인에서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왕을 꼽으라면 이사벨 1세 여왕과 페르난도 2세 왕 그리고 카를로스 1세 왕과 펠리페 2세 왕이라고 생각된다. 먼저 이사벨1세 여왕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사벨 1세 여왕(1451-1504, 재위1474-1504)은 카스티야 왕 후안 2세의 둘째 부인의 딸로 태어났다. 3살 때 아버지 왕이 죽자, 이복 오빠인 엔리케 4세가 왕으로 즉위한다. 엔리케 4세는 새어머니와 이복동생들을 궁에서 쫓아내 군대의 감시하에 시골 생활을 하게 했다. 포르투갈 공주 출신 왕비는 갑자기 나락에 떨어져 의붓아들 엔리케 왕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 때문에 결국 정신이상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 이사벨은 공주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이상해진 어머니와 더 어린 동생을 돌보며 직접 빨래하고 밥도 짓는 강인한 생명력을 키웠다. 우울함과 절망을 꿋꿋이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가톨릭 신앙이었다. 이때부터 철저한 가톨릭의 신봉자가 되었다고 한다.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이사벨을 가까이에 두고 감시하려는 의도에서 다시 왕궁으로 불러들인다. 그런데 엔리케 4세 왕에게도 오랫동안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았다. 이사벨은 잠재적인 왕위계승자 내지는 왕녀로서 정략결혼에 쓰일 수 있는 카드가 되었다.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가 된 이사벨에게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청혼이 쇄도했다. 그 가운데서 그녀는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와의 결혼을 희망했다. 하지만 이복오빠인 엔리케 4세는 그녀를 포르투갈 왕 알폰소 5세와 결혼시키려 했다. 이사벨은 결혼을 신청하러 온 포르투갈 왕의 대리인을 쫓아버리고 아라곤 왕자와의 혼인을 독단으로 결정했다.

 

격분한 엔리케 4세는 그녀를 궁에 감금했으나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서 이사벨은 부하들을 데리고 도망쳤다. 엔리케 왕의 추격을 따돌리며 바야돌리드까지 갔다.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자에게 급사를 파견해 나와 결혼하러 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아본 아라곤 측은 매우 당황했다. 그리고 긴급회의가 열렸다. 자칫 카스티야 왕과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이때 페르난도 왕자는 큰 결심을 했다. 대담하게도 몇 사람의 부하만 데리고 상인으로 변장해 바야돌리드까지 350km나 되는 거리를 이틀 만에 맹렬히 돌파해서 이사벨을 만났다.

 

둘은 146910월 엔리케 4세의 허가도 받지 않은 채 결혼했다. 너무 서둘렀기 때문에 로마 교황의 허가를 받을 겨를도 없어서 위기를 맞았지만, 이들의 결혼을 지지한 톨레도의 대주교가 교황의 허가장을 위조해 고비를 넘겼다. 이 결혼이 바로 이베리안 웨딩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18세의 카스티아이레온 왕국의 이사벨 공주와 17세의 아라곤 왕자의 결혼은 카스티아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합치는 것이었으나 완전한 합병이 아니라 연합왕국이다.

 

결혼하고 5년 뒤 오빠인 엔히크 4세가 자식이 없이 죽자 1471년에 카스티아의 여왕으로 즉위했다. 남편이 아라곤 왕이 되자(1479) 공동 통치를 했다. 즉 이 두 사람은 각각 자기 나라의 왕이었을 뿐 두 나라는 연합왕국으로 서로 주권을 인정하고 왕위는 따로 물려주지만 오직 종교 재판소만 합동으로 운영했다. 이 두 왕국의 연합 군사들이 1492년에 마지막 남은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를 정복하여 스페인은 완전한 국토의 통일을 이룩했다. 또한 이슬람교를 몰아내고 가톨릭에 의한 종교의 통일도 함께 이루었다. 로마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이들에게 가톨릭왕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여왕은 왕 직속군을 정비하고, 세제를 개혁하여, 귀족의 약체화와 관료화를 꾀했다. 이로써 근대적 중앙집권국가의 기초를 닦았으며, 궁정학교를 설립하고 많은 문헌을 편찬하는 등 교육과 문화진흥에 힘썼다. 특히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원조한 일은 유명하다.

 

이사벨1세여왕

그녀는 정치적 재능도 뛰어나 에스파냐 발전의 기초를 닦았고, 참다운 경건함과 종교적 확신이 강하여 종교재판을 도입하였다. 그녀의 치세에서 오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개종하지 않은 이슬람 교도를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하고 1492년 알함브라 칙령을 발표하여 유대인도 추방한 일이다. 이는 이슬람 및 유대인들은 물론, 개념 있던 기독교 인사들에게도 비난을 받았는데 그라나다 왕조를 멸망시킬 당시 마지막 이슬람 왕인 보아브딜이 항복하며 물러날 때 조건으로 약속한 이슬람인과 유태인들의 종교적 자유를 반드시 허용해 줄 것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15041125일에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사벨1세여왕과 페르난도2세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