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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스페인 여행8-하얀마을 미하스와 스페인 역사1

by 황교장 2022. 8. 8.

스페인 여행8-하얀마을 미하스와 스페인 역사1

 

론다를 나와 일본 관광객에게는 필수 코스인 하얀 마을 미하스로 향했다. 주변 경치가 눈에 익숙하다. 그런데 결정적인 풍광이 나타났다. 바위가 독특한 산이다. 아침에 그라나다에서 올 때 보았던 바로 그 바위산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다.

 

바위가 독특한 산

되돌아가는 풍경은 낯설음이 아닌 정겨움이다. 30여 분을 정겨운 길을 달리자 갈림길이 나왔다. 갈림길에서 큰 고개를 넘어간다. 고갯길 근처에도 제법 큰 하얀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고개를 넘어가자 멀리 지중해가 보인다. 바닷길을 따라 1시간을 지중해와 나란히 달리다가 차는 느린 속도로 산을 오른다. 경사가 만만찮다. 산의 7부 능선에 하얀 마을이 나타났다. 직감적으로 미하스라고 느껴졌다.

 

미하스

미하스(Mijas)는 론다와 같이 스페인 안달루시아 자치지역인 남부 말라가주에 속하는 도시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해변 '코스타 델 솔'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어 '코스타 댈 솔의 보석'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 미하스는 평균고도가 425m나 된다. 차에서 내리니 지중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지중해와는 제법 먼 거리인데도 가시거리가 좋다. 반대편 산 쪽을 바라보니 파란 하늘아래  흰색 벽과 빨간 지붕이 어우러진 동화 속 마을이다.

 

길을 건너자 제법 큰 광장이 나왔다. 광장 주변에는 당나귀들이 많이 보인다. 당나귀를 타고 마을 한 바퀴를 돌아 마을을 구경할 수 있는 관광상품이다. 일명 당나귀 택시라 불린다. 옛날에는 산에서 장작을 싣고 마을로 이동할 때 당나귀를 이용했다. 우리나라의 소나 말과 같은 역할을 당나귀가 대신한 것이다. 관광 붐이 일어나서부터 당나귀를 본 관광객들은 팁을 주면서 직접 타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같이 산책도 하면서 당나귀 택시가 생겨났다고 한다.

 

당나귀 택시를 타고 마을 구경하려다가 포기하였다. 뜨거운 여름 한낮이라 당나귀 근처에만 가도 당나귀에서 나는 악취가 코를 찌른다. 당나귀를 피하여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 옆에는 가게가 있어 의자에 앉자, 웨이트가 예약석이라면서 전망이 별로인 곳으로 안내한다. 그래서 옆에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전망대 벤치에 앉았다. 멀리 지중해를 바라보면서 잠시나마 망중한을 보냈다. 시원 달콤한 아이스크림과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여행의 참맛을 느끼게 한다.

 

동굴성당

더위를 식히고나니 여유가 생겨 주변을 살펴보았다. 바위 밑에 동굴로 된 특이한 형태의 건물이 보인다. 미하스 마을의 수호 성녀인 페냐 성녀가 모셔져 있는 천연동굴 성당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성녀 페냐가 가슴에 아기 천사를 안고 있다. 이 성당이 있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1586년에 두 명의 양치기 소년이 비둘기를 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동굴 속에는 성녀의 상이 있었다.

 

성녀 페냐

그 후 이 자리에 성당을 세운 것이라 한다. 몬세라트의 검은 성모상과도 비슷한 이야기다.

미하스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고대 페니키아인,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이 광물이 풍부한 이곳에 정착했다. 로마인들에 이어 서고트인들이 이곳을 통치했다. 이어 이슬람 세력이 이 지역을 장악했다. 이슬람 통치자들은 주민들에게 재산과 종교, 관습을 허용하는 대신 생산물의 3분의 1을 세금으로 거뒀다. 1487년 미하스는 가톨릭 왕국들의 공세에 저항하다가 말라가가 함락되자 주민들도 같이 항복했다. 그러나 저항한 이들은 노예로 팔려 갔다고 한다.

 

동굴 성당

그후 미하스는 가톨릭 왕실을 지지해 매우 충성스러움이라는 명칭을 가톨릭 국왕 부부로 불리는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딸인 카스티야의 후안나 여왕에게 받았다. 이후부터 왕실 세금이 면제되었다고 한다.

 

전망대

미하스의 주 산업은 농업, 어업과 광산업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스페인 남부 태양의 해변에 속하는 관광도시가 되어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전에는 1만 명이 채 되지 않았으나, 지금은 1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인구의 36%가 외국인인데 그중 반 이상이 영국인이라고 한다. 아마 영국령인 지브롤터가 가까이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인들이 은퇴 후 살고 싶은 스페인의 도시 1위가 미하스라고 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가장 큰 골프 리조트인 라칼라 리조트가 여기에 있다.

 

미하스는 아열대 기후로 겨울에는 따뜻해 살기가 좋으나, 5월부터 10월까지는 매우 더운 편이다. 주로 10월부터 4월 사이에 비가 내린다. 이는 지중해성 기후의 특징이기도 하다. 미하스를 뒤로하고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모르코로 가려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야 한다.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기 위해 알혜시라스로 향했다.

 

스페인의 역사 1

여기에서 스페인의 역사를 4부로 나누어서 간략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1부는 고대에서 이슬람 세력에 점령당할 때까지, 2부는 이슬람으로부터 국토회복운동인 레콩키스타 완성까지, 3부는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통치한 시기, 4부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통치한 시기로 나누어서 설명하고자 한다.

 

알타미라 동굴벽화

1: 고대에서 이슬람 세력에 점령당할 때까지

스페인은 구석기 시대의 알타미라 동굴벽화가 발견된 곳이다. 대략 기원전 만 오천 년 이전부터 스페인에는 인류가 살았다는 것으로 밝혀졌다. 처음에는 아프리카 북쪽에서 건너온 이베리아인이 사는 땅이라는 뜻으로 지금도 이베리아반도라고 한다.

 

이베리아 반도

그 뒤 유럽 중앙부에 살던 켈트족이 기원전 600년경에 이베리아 반도로 옮겨와 원주민 이베로족과 피가 섞이면서 켈티베로족이 나타났다. 그러나 켈티베르족과 켈트족은 뒤늦게 흘러온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에 쫓겨 이베리아 반도의 서북쪽인 갈리시아 지방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그래서 이 지방 언어인 갈리시아어는 스페인 언어와는 전혀 다른 포르투갈어와 가깝고 켈트족의 후예가 모여 사는 프랑스의 브리타니아와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 쪽과 공통점이 많다.

 

카르타고 전성기

켈트족이 육지를 통해 이베리아반도로 옮겨 왔다면 바다 건너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종족은 페니키아인이다. 기원전 1,000년경에 페니키아인은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살았는데 지브롤터 옆에 있는 카디스를 건설해서 무역의 거점을 마련했다. 페니키아인들은 올리브와 포도나무, 향수와 보석, 철 등을 이때 전해 주었다. 카디스는 지금 스페인 최대의 군항이다. 이보다 조금 늦은 기원전 8세기경에 그리스인도 식민지를 건설함으로써 지중해 문명권이 형성되었다.

뒤늦게 지중해로 뻗어 나가려는 로마군은 BC 209년에 이베리아반도를 공격해 카르타고의 세력을 물리쳤다. 이 지역은 로마의 속주 히스파니아가 되어 스페인의 어원이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의 로마인들이 히스파니아로 많이 이주했다. 로마인들과 혼혈된 켈트족과 이베리아인들은 오늘날 스페인 사람들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오늘날 스페인 사람들은 대개 다음 족속들의 피가 골고루 섞여 있다.

 

로마제국

이베리아 켈트족, 바스크인(이베리아인), 라틴족(로마인), 게르만족(바이킹 및 서고트족), 유대인(현대의 스페인인 유전자 분석 결과에도 유대계 조상을 둔 인구가 약 20%로 아랍인이나 베르베르인 조상을 둔 경우가 11%로 나온 것에 비해 두 배 정도 많았다), 아랍인/무어인, 베르베르인, 페니키아인 등이다.

스페인인은 크게 분류하면 라틴족에 속한다. 스페인 사람은 라틴족의 이탈리아인, 남부 프랑스인, 포르투갈인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많다. 마드리드를 기점으로 북부로 갈수록 파란 눈의 비율도 올라가고 금발벽안 즉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스페인 사람도 가끔 보인다.

 

스페인 왕실가족

스페인 왕실에서도 펠리페 6세 현 스페인 국왕과 현 국왕의 장녀인 레오노르 공주, 국왕의 누나 크리스티나 공주도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스페인 왕가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에서 비롯되었고, 소피아 왕대비가 독일-덴마크 쪽 왕가에서 넘어온 게르만계 그리스인인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켈트족

특이하게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붉은 머리의 사람이 1% 정도를 차지한다. 금발도 많지도 않은데 스페인의 경우 빨간 머리나 주황색 머리의 인구가 생각보다는 많다. 이 역시 과거 켈트족의 영향이라 여겨진다. 붉은 머리가 켈트인의 주 특성이다.

 

세네카

스페인은 기원전 38년에 정식으로 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스페인의 많은 사람들이 로마 시민 자격을 얻었다. 로마 통치체제가 안정돼 번영을 누린 시기를 뜻하는 팍스로마나시기에 스페인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400년경까지 도시 곳곳에 도로와 수로, 원형경기장 등이 들어섰다. 스페인 사람들은 속주 출신이라는 차별대우도 받지 않았다. 로마의 저명한 철학자요, 정치가이자 웅변가였던 세네카(BC4-AD65)가 스페인 출신이다.

 

트라야누스 황제

여기에 더해 오현제(五賢帝) 2명인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117)와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117~138)가 에스파냐 남부 바이티카 이탈리카에서 출생하였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아버지는 에스파냐 출신으로 로마 군단장을 지냈고, 시리아 속주 총독을 역임하였다. 황제는 원로원과도 사이좋게 협조하여, 빈민 자녀의 부양정책을 추진했고, 다키아, 나바타이왕국, 아시리아 등을 속주로 만들어 로마제국을 최대의 판도로 넓혔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브리타니아에 장성을 구축(하드리아누스 방벽)하고 게르마니아 방벽을 강화하는 등 국력에 힘써 로마제국 제반 제도의 기초를 닦았다.

 

하드리아누스 방벽

여기에 더해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347-395)도 지금의 스페인 코카(Coca)에서 태어났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후 분할 통치되고 있던 제국을 재통일(394)하고, 392년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았다. 테오도시우스는 그리스어로 하느님이 준 사람, 즉 하느님이 내린 사람이라는 뜻이다.

 

테오도시우스 1 세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하고 난 후, 이교도를 탄압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스페인에서 그리스도교는 매우 이른 시기인 서기 64년경에 사도 바울에 의해 전파되었다. 스페인에 다녀갔던 성자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아그리파 1세의 박해로 순교했다. 아그리파 1세는 유대의 통치자(재위:37-44), 신약성경 사도행전에서 헤로데 왕으로 언급되는 사람이다. 야고보의 제자들이 야고보의 시신을 수습해서 스페인으로 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난파되어 시신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800년 뒤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도 간의 전쟁 중에 그리스도교도가 갈리시아 벌판을 비추는 별빛을 보았다. 별빛이 비춘 곳은 바로 성 야고보가 묻힌 자리였다. 이곳을 별이 비추는 들판이라는 뜻인 캄푸스 스텔라에라고 불렀는데,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그 자리에 세워진 대성당은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그리스도교의 3대 순례지가 되었다.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매년 수백만 명의 순례객이 찾는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372년 볼가강을 건너 훈족의 침입이 시작되자 이를 피해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훈족은 중국 한나라와 다투어 왔던 흉노족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결국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되었다.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이 지금의 프랑스인 갈리아 지방으로 내려왔다가 같은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에게 쫓겨 스페인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서고트족은 415년에 이베리아반도에 서고트 왕국을 세웠다.

 

서고트왕국

702년에 서고트 왕국은 위티사가 왕위에 올랐다. 그때까지 서고트 왕국의 왕은 선거로 뽑았다. 그런데 위티사왕은 귀족들과 의논도 없이 국왕의 선거제도를 폐지하고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는 세습제로 바꾸고, 아들 아길라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710년 위티사왕이 죽자 권력의 암투가 벌어졌다. 귀족들은 전통 방식대로 로드리고 공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아길라왕로드리고왕과의 전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길라왕의 세력이 약했다. 이에 아길라왕은 아프리카 북부에 있는 무어인 영주 무사 빈누사이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북아프리카에는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다. 이베리아를 정복한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계 부족들과 동쪽에서 이주해 온 아랍, 베두인, 흑인들을 한데 통틀어 유럽에서는 무어인이라고 불렀다. ‘무어(Moor)’어둡다라는 뜻을 지닌 말로 이들의 피부색에서 비롯되었다. 이 말은 점차 북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 지배를 받게 된 뒤에는 이슬람교도 아랍인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코르도바 메스키타사원

아길라왕의 도움을 요청받은 무어인 영주 무사 빈누사이르711년 부하 장수인 타리크 이븐 지야드장군에게 만 이천 명의 이슬람 군대를 주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로드리고왕의 군대를 물리치게 하였다. 또한 도움을 요청한 아길라 왕의 군대까지도 물리쳤다. 결국 서고트 왕국은 내부 분열로 멸망하고 말았다.

이슬람 군대는 불과 7년 만에 북서 산악지대를 제외한 이베리아반도 전체를 점령했다. 이슬람군은 기세를 이어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 남쪽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732년 프랑크 왕국의 카를 마르텔에 의해 격퇴됨으로써 이슬람 세력의 북진이 저지되어, 피레네산맥이 유럽과 이슬람 세력의 경계가 되었다.

 

옴미아드 왕조

750년경 옴미아드 왕조의 아브드 알라흐만 왕자가 다마스쿠스에서 이곳에 도망쳐 왔다. 다마스쿠스에는 정변이 일어나 옴미아드 왕가에서 아바스 왕가로 바뀌었다. 이곳에서는 옴미아드 왕가의 정통성이 인정되어 아브드 알라흐만 왕자는 756년에 알안달루스 왕국을 세우고 알라흐만 1(731-788)라고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