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행10-세우타와 스페인 역사3-1
세우타항에 내리자 해가 져 어두움이 몰려왔다. 숙소인 세우타 호텔로 택시를 타고 갔다. 세우타는 스페인의 자치 도시로 멜리야와 마찬가지로 이베리아 반도가 아닌 북아프리카 본토에 위치해 모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이다. 고대 카르타고인들이 건설한 항구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세우타 전경
이후 고대 로마, 게르만의 반달 왕국, 동로마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았고, 711년에는 아랍인들에게 정복되었다. 이후 1415년 포르투갈에게 정복되었다.
1580년부터는 포르투갈의 왕위를 스페인 국왕이 겸하게 되었는데 형식상 계속 포르투갈에 소속된 지역이었지만 사실상 스페인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1640년 브라간사 왕조가 포르투갈 왕위를 주장해 포르투갈 독립 전쟁이 터지면서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는 대부분의 지역은 브라간사 왕조를 지지해 주앙 4세와 그 뒤를 이은 알폰소 6세를 포르투갈 국왕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세우타는 포르투갈보다 스페인 사람들이 많이 넘어온 탓에 스페인의 왕 펠리페 4세(포르투갈의 왕 필리프 3세)를 포르투갈 국왕으로 간주했다. 이 전쟁은 1668년 리스본 조약을 체결하면서 끝나는데 이 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브라간사 왕조의 포르투갈 지배를 인정하고 포르투갈은 세우타를 공식적으로 스페인에 양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공식적으로도 스페인의 영토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세우타 거리
세우타의 인구 구성을 보면 스페인계와 아랍계가 절반 정도이다. 2013년 기준으로 기독교인이 68.0%, 이슬람교인도 28.3%나 된다. 그래서 이슬람 복장을 한 백인 여성들이 많이 보인 것이다. 또한 세우타를 통해 유럽으로 몰래 입국하려다 적발된 난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밀입국자들이 스페인 영토로 진입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세우타 분수
모로코는 세우타가 아프리카 대륙에 있다는 역사적, 지리적 이유를 들어 세우타의 영유권을 주장해 멜리야와 함께 영토 반환을 요구했지만, 스페인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보호령이었던 북아프리카의 영토 대부분을 되돌려주었으나, 이 지역과 멜리야, 카나리아 제도에 대한 소유권은 포기하지 않았다. 모로코는 1956년 3월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뒤 1975년 무렵부터 이 지역을 스페인이 영유하는 것은 식민시대의 유산이라는 논리로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스페인은 이 지역이 모로코가 국가를 형성하기 이전부터 스페인의 영토였다는 점을 내세워 반박하고 있다.
세우타 성곽
그런데 현 스페인 왕가인 부르봉 왕조가 처음 스페인 왕위를 차지한 것이 1700년이고 모로코 현 왕조인 알라위 왕조가 처음 모로코 왕위를 차지한 것은 1666년으로 오히려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가 모로코의 알라위 왕가보다 역사가 짧다고 주장한다. 또한 스페인에 부르봉 왕가 이전에 합스부르크 왕조나 트라스타마라 왕가가 있었듯 모로코에도 알라위 왕조 이전에 사드 왕조, 무라비트 왕조, 마린 왕조 등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모로코에서는 역사적으로 우리가 더 길다고 반론하고 있다.
헤라클레스 기둥
그러나 알라위 왕조가 성립했을 때는 이미 남의 땅이었고 스페인 부르봉 왕가는 합스부르크로부터 지배권을 승계했다. 거기에 현지에 거주하는 스페인인 시민들 대부분도 모로코가 종교, 문화적으로 로마 카톨릭교 국가인 스페인과 다른 이슬람 국가인데다 경제적으로 스페인보다 더 떨어진다는 근거를 내세우며 모로코로의 귀속을 반대, 스페인령 잔류를 주장하고 있다.
세우타
한편 스페인이 영국에게 지브롤터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 영국 측은 세우타와 멜리야를 문제 삼으며 스페인도 모로코 영내에 있는 멜리야와 세우타를 지배하는데 우리가 왜 지브롤터를 돌려줘야 하냐면서 맞서기도 한다.
세우타 장벽
2002년 7월 모로코 군인들이 불법 이민과 테러리즘을 감시한다는 명분으로 세우타 부근의 페레힐 섬(Perejil Island)을 기습적으로 점령하자 스페인이 특수부대원을 동원하여 탈환한 일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태도 근본적으로는 세우타 및 멜리야의 영유권 분쟁과 관련이 있다.
아프리카 난민
2007년 11월에는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국왕 부부가 세우타와 멜리야를 공식 방문하였는데, 이는 그동안 스페인의 지도자들이 모로코 영토 안에 있어 정치적으로 민감한 지역의 방문을 삼가온 관례를 깬 것이었고, 모로코가 이에 반발하며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이처럼 아직도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는 곳이 세우타인 셈이다.
세우타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에 이곳을 돌아보려고 했지만 피로가 누적되어 늦잠을 자고 말았다. 아침식사 후에 모로코로 향했다.
세우타 장벽
※ 스페인의 역사 3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통치한 시기 - 1
카스티아 왕국의 이사벨 1세 여왕과 페르난도 2세 아라곤 왕은 모두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 다섯 명은 갓난아이 때 죽고, 아들 하나와 딸 넷이 살아남았다. 딸 4명이 다 역사에 대단한 흔적을 남겼다. 큰딸 인판타 이사벨(1470-1498)은 포르투칼 황태자와 결혼시켰으나 다음 해인 1491년에 황태자가 죽었다. 1495년 국왕 주앙 2세가 죽자, 황태자의 4촌인 마누엘 1세(1469-1521)가 왕위에 올랐다. 스페인과 관계를 위해 사촌 형수인 이사벨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왕비가 된 이사벨은 마누엘 1세의 아들을 낳다가 죽었다. 그래서 마누엘 1세는 재혼을 했는데 그 상대가 죽은 아내 이사벨의 12살 적은 여동생이자 가톨릭 왕들의 셋째 딸 마리아(1482-1517)였다. 마누엘 1세와 처제였던 마리아 사이에서 딸 이사벨(1503-1539)이 태어났다. 딸 이사벨은 자라서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1500-1558)와 결혼하게 된다. 이 둘은 이종사촌 간이다. 카를 5세는 가톨릭 왕들의 둘째 딸 후아나(1479-1555)의 아들이다. 넷째 딸인 카타리나(1485-1536)는 숙적 프랑스를 견제할 목적으로 영국 왕실과 혼인하였다. 헨리 7세의 아들이자 황태자인 아서 튜더(1486-1502)와 결혼했다.
헨리 8세
그런데 결혼한 지 몇 달 만에 갑자기 죽어 새로이 황태자가 된 아서의 동생 헨리 8세(1491-1547)와 결혼하게 된다. 18세의 헨리는 원하지 않았지만 여섯 살 많은 형수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 왕들의 네째 딸인 카트리나의 영국식 이름은 캐서린이다. 그녀의 딸이 바로 ‘피의 메리’라는 별명을 얻은 메리 1세 여왕(1516-1558)이다.
메리1세
카트리나의 남편인 헨리 8세는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이 입에 오르는 주인공이자 영국 성공회를 일으킨 장본인이며, 엘리자베스 1세 여왕(1533-1603)의 아버지이다.
엘리자베스1세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황제가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 왕이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운명이 있었다.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장손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위스 알프스 북부 지역의 작은 봉건영주에 불과했다. 그런데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1218-1291)가 1273년에 독일 선제후들에 의해 (신성)로마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선제후(選帝侯)는 중세 독일에서 황제 선거의 자격을 가진 제후를 말한다. 유럽 여러 나라의 왕위 계승에는 혈통과 선거의 두 원리가 얽혀 있다. 황제의 경우 작센왕조 시기에 혈통에 의한 계승이 정착하는 듯하였으나 성직 서임권투쟁을 거친 후에는 선거의 원리가 강세를 보였다. 13세기에는 마인츠·쾰른·트리어의 각 대주교, 라인 궁중백·작센공·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선거의 제후회의에서 주역을 맡았다. 13세기 말부터 위의 여섯 사람과 보헤미아 왕이 참가한 7선제후가 선거권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렌스 선제후회의(1338)에서는 교황의 확인을 기다리지 않고 선거만으로 황제가 될 수 있게 되었다. 금인칙서(金印勅書:1356)는 황제 선거의 수속과 선제후의 지위를 성문화했다. 선거는 원래 전원일치제였으나 금인칙서에 의해 다수결제가 채택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
1273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선제후 회의에서 새로이 독일 국왕으로 선출된 인물은 전혀 주목받지 못하던 합스부르크 가의 루돌프 1세였다. 그가 국왕에 선출될 수 있었던 이유로는 6명의 딸을 이용한 혼인 정책이었다. 국왕 선출이 있기 전 자신의 세 딸을 각각 팔츠, 브란덴부르크, 작센 선제후와 혼인시킬 것을 약속함으로써 독일 국왕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55세의 늙은 나이에 국왕이 된 루돌프 1세는 자신의 국왕 선출에 반대한 보헤미아 왕 오토카르 2세(1230~1278)가 빼앗아 간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를 되찾아 자신의 두 아들에게 줌으로써 합스부르크 가의 영지를 넓혔다.
마리 드 부르고뉴
그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어엿한 유럽의 왕가로 급성장했다. 막시밀리안 1세(1459-1519)는 1477년에 부르고뉴 대공 샤를의 딸 마리 드 부르고뉴(1457-1482)와 결혼하여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였던 네덜란드 지방(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이 합스부르크가의 소유가 되었다.
황금지붕
막시밀리안 1세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 아내 마리를 위해 지은 것이 ‘황금지붕’이다. 황금지붕은 지금도 인스브루크의 관광명소이다. 막시밀리안 1세와 왕비 부르고뉴 상속녀 마리는 두 자녀를 두었는데 ‘미남왕’이란 별명을 지닌 황태자 필리프(1478-1506)와 ‘오스트리아 공녀’로 불리는 딸 마르가레테(1480-1530)이다
미남왕 필리프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정책은 ‘남들은 전쟁을 하더라도 너 행운의 오스트리아여, 결혼을 하라. 남들에겐 마르스(전쟁의 신)가 왕국을 주겠지만 너희에겐 비너스(사랑의 신)가 줄 터이니!’는 말로 알려져 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아들과 딸을 스페인의 가톨릭 왕들(페르난도 2세, 이사벨 1세)의 아들, 딸과 겹사돈을 맺는다. 즉 미남왕 필리프와 둘째 딸 후아나와 한 쌍, 오스트리아 공녀 마르가레테와 가톨릭 왕들의 장남인 후안과 한 쌍이다.
후아나 여왕
그러나 스페인 왕위 계승자인 후안이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죽는다. 남편을 잃은 마르가레테는 시부모의 허락을 얻어 1499년에 고향인 네덜란드로 돌아와 몇 년 뒤 재혼했다.
1500년에 미남왕 필리프와 후아나 사이에는 아들이 태어난다. 그가 바로 세계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한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이자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다.
카를5세
1504년에 이사벨 1세 여왕이 사망하자 카스티아 왕국의 왕위를 이을 사람이 필요했다. 당시는 엄연한 카스티아와 아라곤의 연합왕국이었고, 그 소유권도 각기 달랐기 때문에 카스티아 왕국의 왕위를 이을 사람을 찾아야 했다. 당연히 그 상대는 이사벨 1세 여왕의 자식 중에서 골라야 했다. 아들과 큰딸이 이미 사망하고 없어 자연 합스부르크 왕가로 시집간 둘째 딸인 후아나에게 왕관이 돌아가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으로 추대되었다.
1506년 후아나 여왕과 남편인 미남왕 펠리페1세(필리프)가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펠리페 1세가 세상을 떠났다. 후아나는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정신이상이 되었다. 그래서 아들 카를이 성인이 된 1516년에 스페인 국왕(1516-1556) 카를로스 1세가 되었다. 그리고 1519년에는 할아버지인 막시밀리안 1세가 죽자 신성로마제국 황제(1519-1556) 카를 5세가 되었다.
카를5세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오스트리아, 신성로마제국 영토 전부를 물려받았고, 할머니 마리 드 부르고뉴로부터 플랑드르와 프랑크 공국, 부르고뉴 공국을 물려받았고,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로부터 카스티아-아라곤 연합왕국, 나폴리, 시칠리아, 이탈리아영토, 사르데냐를 물려받았고, 외할머니 이사벨 1세 여왕으로부터 카스티아 왕국, 아메리카 신대륙, 아프리카 신대륙, 멕시코, 볼리비아, 페루, 필리핀을 물려받았다. 직함만 해도 신성로마제국 황제, 스페인 국왕, 도이치 국왕, 합스부르크 왕가 오스트리아 국왕, 시칠리아 군주, 나폴리 군주, 슈티리아 군주, 카린티아 군주, 브라반트 군주, 밀라노 대공, 티롤 백작, 홀란드 백작, 바르셀로나 백작, 아스투리아스 대공, 황금양모기사단장, 페루 군주, 아메리카, 아프리카 식민지 지배자 등이다.
이렇게 화려한 직책을 가진 카를 5세는 40여 년 동안을 끝없는 전쟁의 연속 속에서 보냈다. 프랑스는 스페인-오스트리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오스만제국과 동맹을 맺기도 하고 교황과도 동맹하여 카를 5세를 공격했다. 카를 5세는 오스만제국의 침략을 막았다.
프랑수아1세
또한 천적 프랑수아 1세(1494-1547)를 포로로 잡아 프랑스와의 전쟁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가톨릭의 수호자인 그가 가톨릭의 성지인 로마를 약탈한 사건이 벌어졌다.
클레멘스7세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1478-1534)는 너무 강성한 카를 5세를 견제하고자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그의 적이 되었다. 이에 약 3만 명에 이르는 카를 5세 군대는 로마를 약탈했다. 이때 교황을 지키는 스위스 근위병은 189명 뿐이었다. 147명이 장렬하게 전사하고, 살아남은 42명이 교황을 모시고 바티칸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 이후 “바티칸에서 교황을 지키는 근위대는 앞으로 영원히 스위스 병사로만 구성한다!”라고 교황이 선포하여 지금도 근위대는 스위스 병사로만 구성되어 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메디치 가문 출신이다. 여기서 메디치 가문에 대해 알고 넘어가자. 아마 유럽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부르봉 왕가 그리고 메디치 가문일 것이다. 메디치 가문은 15~17세기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가문으로, 1530년부터 1569년까지 피렌체 공작의 지위를 세습하였고, 1569년부터 1737년까지는 토스카나 대공의 지위를 세습해 통치하였다.
조반니
메디치 가문은 조반니(1360~1429) 때에 이르러 피렌체를 지배하는 가문으로 세력이 커졌다. 조반니는 메디치 은행을 설립했으며, 로마와 아비뇽에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대분열 시기에 대립교황 요하네스 23세(재위 1410~1415)를 지원해 로마 교황청의 재무 관리자가 되었다. 아울러 이를 바탕으로 피렌체의 행정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조반니의 아들인 코시모(1428~1464)는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국부 코시모
그는 1433년 피렌체에서 추방되기도 했으나, 이듬해 알비치 가문을 쫓아내고 피렌체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도시들만이 아니라 런던과 아비뇽 등 유럽의 다른 지역들로도 은행의 지점을 확대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아울러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등을 후원하고, 플라톤 아카데미를 만들어 플라톤 전집을 라틴어로 번역하게 해서 학문과 예술의 발달에 기여했다. 그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국부(國父)로 불렸다. 그의 아들인 피에로(1416~1469)도 알베르티, 도나텔로, 고촐리, 보티첼리 등의 예술가를 후원하고, 수많은 책들을 수집하고 보급해 문예 부흥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보티첼리 봄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1449~1492) 때에 이르러 메디치 가문은 황금기를 맞이했다. 그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이탈리아 여러 국가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보티첼리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같은 예술가를 후원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절정기를 이끌었다. 그 또한 당대의 시민들에게 위대한자 로렌초로 불렸다.
위대한자 로렌초
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피에로(1471~1503)는 1494년 샤를 8세가 이끈 프랑스군이 침공해 왔을 때 무능하게 대처해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다. 메디치 은행도 파산하면서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은 크게 쇠퇴하였다. 그러나 1512년 교황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가 신성로마제국・아라곤왕국・베네치아공화국 등과 신성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자, 피에로의 동생인 조반니(1475~1521)는 교황군을 이끌고 피렌체를 장악해 지배권을 다시 찾았다. 이듬해에 조반니는 율리우스 2세의 뒤를 이어 교황 레오 10세가 되었다. 재위 중에 성 베드로 대성전의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면죄부’ 판매를 승인하여 마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해 1517년에 종교개혁이 촉발되게 한 인물이다.
레오10세
그의 사촌 동생인 줄리오(1478~1534)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면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만이 아니라 교황령으로도 지배권을 넓혔다. 그러나 클레멘스 7세는 프랑스 등과 동맹을 맺어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에 맞서다가, 1527년 로마가 함락되었다. 이때 메디치 가문도 피렌체에서 추방되었으나, 클레멘스 7세와 화해 한 카를 5세의 지원을 받아서 1530년 피렌체의 지배권을 되찾았다.
코시모1세 기마상
방계의 친족인 코시모 1세(1519~1574)가 피렌체 공작의 지위를 이었다. 그는 1569년 시에나를 합병해서 세워진 토스카나 대공국의 초대 대공이 되었다. 하지만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경제적 중심지가 옮겨간 것과 맞물려서 유럽에서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은 줄어들었고, 토스카나 대공국도 프란체스코 1세(1541~1587) 이후 쇠퇴하였다. 그리고 제7대 토스카나 대공인 잔 가스토네(1671~1737)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은 뒤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란츠 1세(1708~1765)가 토스카나 대공의 지위도 겸하게 되면서, 메디치 가문은 끝이 났다. 그러나 메디치가의 많은 유산은 잔 가스토네의 누나인 ‘안나 마리아 루도비카(1667~1743)’에게 돌아갔다.
우피치 미술관
그녀는 스물네 살에 라인강 서부 팔츠의 선제후에게 시집간 뒤 남편이 죽을 때까지 살다가 과부가 되어 돌아왔다. 그녀는 메디치가의 이 귀중한 보물들을 토스카나 정부에게 기증하면서, 그중 한 점이라도 피렌체에서 옮기지 말 것, 모든 나라 민중의 유익을 위해 쓰일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녀의 놀라운 선견지명 덕분에 오늘날에도 이를 보기 위해 전 세계 여행객들이 피렌체에 몰려들고 있다.
고촐리 동방박사의 행차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카테리나 데 메디치(카트린 드 메디시스, 1519~1589)와 마리 데 메디치(1575-1642)다. 이 두 여인은 메디치가 출신으로 프랑스 왕비가 된 인물이다.
카테리나 데 메디치의 부친은 우르비노의 공작인 로렌초 데 메디치이다. 할아버지는 피에트로(1471-1503)이고, 증조 할아버지가 위대한 자 로렌초(1449-1492)이다. 교황 레오 10세(1476-1521)는 할아버지의 친 동생이고, 교황 클레멘스 7세(1478-1534)는 할아버지의 4촌 동생이다.
카테리나 데 메디치(카트린 드 메디시스)
어머니는 프랑스의 왕녀 출신인 오베르뉴이다. 그녀가 출생하자 병약했던 어머니는 2주 뒤에 사망했고, 아버지는 어머니가 사망하고 1주일 뒤 사망했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카테리나는 메디치 가문의 장자 계열인 국부 코시모(1389-1464)혈통의 마지막 인물이 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재산과 지위를 이어받을 유일한 상속녀가 된 그녀는 정략결혼의 대상이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메디치가의 이 소중한 보물인 카테리나를 데리고, 어디에 어떻게 ‘비즈니스’를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여러 후보자들 중에서 프랑스 왕인 프랑수아 1세의 둘째 아들 앙리 오를레앙(앙리2세,1519 -1559)에게 시집을 보내기로 한다.
프랑수아1세
앙리2세
하지만 이 결혼 역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권세를 누린 집안이지만 평민의 혈통이 왕족 가문에 시집온다는 건 왕실의 자존심이 구겨지는 일이었다. 그녀의 결혼은 교황과 프랑수아 1세,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의 이해타산에 의해 성사된 일종의 계약결혼인 셈이다. 1536년 왕세자인 프랑수아가 갑자기 사망하자 남편 앙리 오를레앙(앙리2세)이 왕세자가 되었다. 결혼 후 10년이 지나 첫 임신을 했다.
프랑수아2세
이후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 등을 포함하여 10명의 자녀를 두어 왕가의 적통을 이어 왕세자비로서 권위를 회복하게 되었다.
메디치라는 르네상스 최고의 명문가에서 성장하면서 익힌 이탈리아의 예술적인 감각과 에티켓, 요리 등은 당시 프랑스 궁정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프랑스 궁중문화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당시까지 프랑스는 포크를 사용하지 않았고 과자의 존재를 몰랐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요리사에 의해 프랑스인의 식탁에는 새로운 문명이 도입되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 시아버지인 프랑수아 1세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게 우호적이었는데 특히 이탈리아 예술을 흠모하여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초빙해오기도 하였고, 피렌체 출신의 여러 예술가를 데려와 대대적인 궁중건축과 장식을 의뢰했으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가 프랑스에서 다시 번성하게 되었다.
도나텔로 주코네
그녀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신-구교 갈등, 남편이 숨진 후 커진 종교전쟁의 피비린내의 현장에 있었다. 반란과 형벌, 내란의 프랑스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라는 한 여인의 인내심과 정치력에 의해 유지될 수 있었다. 프랑스의 내전 상태를 막기 위해 그녀는 온갖 애를 다 썼다. 천수를 누리면서 탁월하고도 노회하다고 할 수 있는 ‘협상’으로 때론 상대를 분통 터지게 하기도 했다. 그녀에 대한 평가 역시 입장에 따라 크게 다르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양쪽을 다 만족시킬 것이다. “그분의 삶은 인내와 끈기의 연속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다빈치
종교전쟁은 예나 지금이나 정말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가혹하다. 피렌체에서 건너온 메디치 가의 한 여인이 지켜낸 30년은 프랑스라는 나라를 버티게 한 버팀목이었다. 그 누가 나선들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까? 시대의 걸작이자 공과가 분명했던 이 여걸에 대해 묘비명과 같은 평가의 시는 다음과 같다.
미켈란젤로 피에타
“여기 누워 있는 왕비는 악마이자 천사라네
한편으론 비난받고 또 한편으로는 칭송받는
왕비는 국가를 떠받치고 국가를 쓰러뜨렸네
왕비는 수많은 협약을 맺고 수많은 토론을 벌였네
왕비는 세 명의 왕을 낳고, 다섯 번의 내전을 일으켰네
왕비는 성을 쌓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네
훌륭한 법을 제정하고 나쁜 칙령을 발표했다네
자, 그녀가 지옥과 천당에 가길 바라자.”
카테리나 데 메디치(카트린 드 메디시스)
마리 드 메디치
마리 드 메디치(Marie de Medici, 1573~1642)는 프랑스 앙리 4세의 두 번째 정부인인다. 마리는 메디치가의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스 1세(1541-1587)의 딸이다. 1600년 막대한 지참금 60만 에퀴를 가지고, 프랑스 왕가에 시집을 왔다. 이 결혼식 축하 행사에 공연된 ‘에우리디체’는 현존하는 최초의 오페라이다. 왕비의 아들은 루이 13세이고, 왕비의 손자가 태양왕 루이 14세이다. 루이 14세의 손자가 펠리페 5세(1683-1746)이다. 펠리페 5세는 스페인에 브르봉 왕조를 열었고, 왕위 계승 전쟁을 치르고 왕으로 인정 되었다. 이유는 펠리페 5세의 할머니가 스페인의 펠리페 4세의 딸이다. 즉 루이 14세는 펠리페 4세의 사위이다. 스페인의 현 후안 카를로스 국왕도 브르봉 왕조를 계승하고 있다. 아직도 메디치가의 유전자가 스페인 왕가에 대대로 이어지고 있다.
마리 드 메디치
루이13세
카를 5세를 가장 괴롭힌 것은 개신교와의 전쟁이었다. 1531년엔 개신교 세력이 담합하여 슈말칼덴 동맹을 맺자 황제가 직접 나서서 전쟁을 치루었다. 그런데 이 전쟁이 수십 년 동안 계속되어 1555년에야 마무리되는데 이것이 개신교들의 종교적 자유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휴전을 맺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다. ‘제국 내에서 영주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며 백성은 영주의 종교를 따른다’가 주 내용이다.
카를5세
이 전쟁이 얼마나 힘들고 진을 뺐던지 황제는 그 이듬해인 1556년 56세의 나이로 모든 왕관을 내려놓고 유스테 수도원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다. 왕위를 떠나면서 제국을 두 개로 쪼개어 스페인과 해외 식민지 그리고 플랑드르 지방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주고,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은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은둔생활 속에서 심한 통풍으로 고생하다가 1558년 9월 21일 58세로 숨을 거두었다.
카를5세
세계역사상 가장 방대한 영토를 다스렸던 카를 5세는 근친 사이의 결혼 등으로 선천적인 기형이 많았던 합스부르크 혈통으로 지독한 주걱턱이어서 위아래 이가 맞지 않아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했고, 입을 닫을 수가 없어 파리가 멋대로 드나드는 걸 막기 위해 수염을 길러야 했다고 한다. 카를 5세의 삶이 평범한 일반 백성의 삶보다 과연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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