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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모로코 여행2-라바트

by 황교장 2022. 12. 23.

모로코 여행2-라바트

2022 카타르 월드컵이 끝이 났다. 리오넬 메시 선수가 축구의 신으로 등극한 것과 모로코가 아랍권 및 아프리카 대륙 최초로 4강에 진출한 것이 최고의 화제를 낳은 대회로 기억될 것이다. 모로코로서는 과거 유럽 식민지배국들을 상대로 펼친 ‘복수혈전’에 아프리카 대륙 전체와 이슬람 국가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대회이기도 하다. 모로코는 식민지배국 스페인을 16강에서 침몰시킨 데 이어 8강에서도 과거의 침략국인 포르투갈을 이겨 준결승전에 진출했다.

8강 승리 후 모하메드6세 국왕과 환호하는 라바트 시민들

 

하지만 4강에서 가장 최근의 식민지배국인 프랑스에게 져 완전한 복수혈전은 실패했지만 2002 월드컵에서 대한민국과 같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이겨 4강의 신화를 이루어내었다. 모로코가 강대국에 수탈당한 약소국의 설움, 자국을 떠나 타국에서 핍박받고 살아가는 디아스포라의 눈물을 씻어주는 마지막 ‘한풀이’를 해주기를 아프리카인 모두가 염원했지만 음바페가 활약한 프랑스에게 져 아쉬움을 자아낸 대회이기도 하다. 음바페는 그의 아버지가 카메룬에서, 어머니는 나이지리아에서 프랑스로 온 아프리카이민 2세이기도 하다. 현재 모로코 축구대표팀 선수 26명 중 14명이 이민자 가정 출신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표팀이 아니고 대표 가족이라고 부른다.

준결승 진출 후 라바트 시내

모로코는 1415년에 포르투갈이 세우타를 점령하여 엔리케 왕자가 세우타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그 후 1580년부터는 포르투갈의 왕위를 스페인 국왕이 겸하게 되면서 스페인 영토가 되었다. 또한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이 한창이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1912년 이후로는 스페인과 프랑스가 협약을 맺고 모로코를 분할 통치했다. 모로코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아닌 보호령이지만 농지를 빼앗기고, 항구 관할권을 강탈당하고, 치안과 납세도 프랑스에 넘겨야 했다.

모하메드5세 거리

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는 모로코에서 4만 명을 징집해 전쟁터로 보냈다. 이런 과정은 당연히 폭력, 학살과 함께 진행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 모로코가 독립할 때 카사블랑카에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고 당시 국왕은 대륙 반대편 마다가스카르로 쫓겨났다. 이에 굴하지 않고 국왕 무하마드 5세와 백성들의 독립운동으로 1956년 프랑스령 모로코가 먼저 독립했다. 뒤이어 스페인도 모로코 점령지를 돌려주었다. 그러나 모로코 북부 도시 세우타와 멜리야는 스페인 영토로 남아 지금도 영토 반환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다.

프랑스 점령 시 다른 지역의 기득권 엘리트들과는 달리 모로코 왕실은 식민 지배에 맞서며 백성들 편에 섰다. 이 때문에 왕실이 독립의 상징이 되어 지금도 국가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 모로코인들 또한 약한 자를 억압한다. ‘서사하라’라고 불리는 지역에 사흐라위족이라는 소수민족들이 산다. 이들은 분리독립을 외치며 모로코 정부에 맞서 무장 투쟁을 한 까닭에 모로코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고 있다.

이 또한 약육강식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것은 동물의 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들에게도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가장 강한 것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고, 가장 똑똑하다고 해서 살아남는 것도 아니다.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것이 살아남는다”라고 찰스 다윈은 주장한다. 자연 선택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종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서로 돕고 단합할 줄 아는 종들이라고 한다. 협력을 잘하는 구성원들이 많은 공동체가 잘 번창하고 가장 많은 수의 자손을 부양한다고도 한다. 작금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도 약육강식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서로 돕고 반성과 화해로 전 지구 공동체의 인류애로 뭉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실라에서 라바트로 가는 길은 아름다운 해변길을 따라 광활한 평야 지대다. 이곳의 농작물 중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이 나타났다. 수박밭이다. 이미 절정의 수확기를 지나 수박 잎이 시들어 둥근 수박들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러한 모습은 낙동강 강변에서 자란 나로서는 너무나도 반가운 정경이다.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차는 드디어 모로코 수도인 라바트에 진입을 했다. 흔히 모로코의 수도를 카사블랑카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최대도시이지만 수도는 아니다. 라바트의 인구는 50만 정도로 수도로서는 적은 편이라고 느껴진다. 모로코의 수도는 1925년 프랑스 보호령 하에서 페스에서 이곳 라바트로 옮겨왔다. 정식 명칭은 라바트엘파티프(Rabat el-Fatif) 즉 ‘승리의 성채’란 뜻이라고 한다. 고대 로마의 식민도시로 건설되었으나, 현재의 시가지는 10∼11세기에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인이 이단자를 수용하기 위하여 건설한 것이라고 한다.

성벽에 의해 성 안과 성 밖으로 나누어지는데, 성내에는 마디나(이슬람 시장 거리)와 밀라(유대인 거리)가 있고, 12세기 이래의 카스바데우다이아문(門)과 하산 사원의 첨탑 등이 남아 있다. 또한 현 모하메드 6세 국왕의 조부 모하메드 5세와 선친 하산 2세의 묘가 안치되어 있는 곳이다.

이 묘는 1962년부터 7년간 400여명의 모로코 장인들이 완성한 걸작품으로 묘 속에 석관이 안치되어 있고 실내장식이 매우 뛰어나다. 이들은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하산탑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하산 탑(Tour Hassan)이다. 모로코 최초의 북(北)아프리카·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한 이슬람 왕조인 알모하드 왕조(1121∼1269)의 무와히드 칼리파국의 제3대 칼리파(재위,1184-1199) 아부 유수프 야쿱 알만수르(1160-1199)가 1184년 권력을 잡았다. 그는 스페인에서 기독교 포로들을 데려와 거대한 모스크를 건설했다. 그러나 건설 도중 1199년에 서거하면서 공사가 중단되었다. 비록 미완의 모스크로 남아 있지만 하산탑은 스페인 무어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 중 하나이다. 무어양식의 특징은 기하학에 근거한 정교한 대칭적 디자인과 풍부한 실내장식, 흰색과 푸른색 타일, 정원 중정에 분수대를 배치한다. 역사적으로 잘 보존된 세계 3대 미나렛은 윈스턴 처칠이 마라케시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 마라케시의 꾸뚜비아 모스크 미나렛과 스페인 세비아 대성당 히랄탑, 그리고 이 하산탑이다.

마라케시 꾸두비아 미나렛

세비아대성당 히랄탑

하산탑은 한 변 16m의 정사각형으로 높이 44m까지 올라가다가 중단되었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지금의 두 배의 높이가 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여섯 개의 각 층에는 방이 하나씩 있고 건물 안에는 폭넓은 경사로가 위쪽을 향해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이는 술탄이 말을 탄 채 올라갈 수 있도록 건설되었다고 한다. 탑을 미나렛이라고 한다. 미나렛은 모스크에 부설된 높은 탑으로 신도들을 예배에 참석하도록 부르기 위하여 건조된 건축물이다. 하산은 ‘아름다운’을 의미한다. 즉 아름다운 탑이다.

무함마드 5세 능묘

하산탑 반대편의 다른 한쪽 끝에는 1960년대에 지어진 무함마드 5세(1909-1961)의 능묘가 있다. 모로코의 마지막 술탄이자 초대 국왕이다. 18살이던 1927년에 술탄에 올랐다. 1950년대 들어 모로코를 통치하던 프랑스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프랑스는 1953년 그를 폐위시켜 코르시카, 마다가스카르로 귀양 보내고 그의 숙부를 괴뢰 술탄으로 앉혔다. 그러나 2년 뒤 복위하였다. 프랑스와 스페인과의 협상을 거쳐 1956년 독립을 쟁취한다. 1957년 8월 14일부로 왕호를 술탄에서 국왕(말리크)으로 바꾼 왕이다. 이곳에는 그의 아들인 하산 2세의 능묘도 같이 있다.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를 나와 다음 여정인 모로코의 최대도시 카사블랑카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