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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아프리카 모로코 여행1-아실라

by 황교장 2022. 11. 30.

아프리카 모로코 여행1-아실라

 

세우타에서 일찍 일어나 주변 관광을 즐기려고 했으나 그동안 쌓인 피로로 늦잠을 잤다. 아침식사 후에 모로코 입국장으로 가자 한산하다. 그런데 분위기는 제법 살벌하다. 코로나로 인해 한국관광객이 모로코에 입국하는 것은 2년 반 만에 우리가 처음이다. 제법 까다롭게 검사를 한다.

                                                                       모로코 입국장

가이드 말로는 이 정도는 아주 편안하게 잘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자국민이나 다른 외국인들에게는 더 엄격하게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자국민 한 사람을 별 이유도 없이 군기를 잡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모자란 인간은 조그마한 권한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그걸 꼭 이용하려고 한다. 입국 절차를 모두 마치는데 거의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이젠 본격적인 모로코 여행이다.

관광객을 실은 버스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계속 올라간다. 세우타와 모로코의 경계지역은 철조망으로 쳐져 있다. 해발이 제법 높은 산이다. 버스는 다시 산길을 내려가고 있다. 이곳의 주변은 스페인 남부와 거의 비슷한 식물군과 기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약 30여 분을 달리자 바닷가가 나왔다. 조용한 포구들이 많이 눈에 띈다. 조금 더 가자 휴게소가 나왔다. 휴게소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우리밖에 없다. 명절 연휴기간 이라고 한다.

휴게소를 나와 조금 더 가자 벽화마을로 유명한 아실라가 나왔다. 아실라(Assilah)는 탕헤르 남쪽 31㎞ 정도 떨어진 작은 포구이다. 이곳은 기원전 1500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페니키아인들의 무역 거점이었으며 15세기 포르투갈이 점령한 곳이기도 했다. 현재 아실라는 깔끔한 벽화로 단장한 성곽 마을로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성곽으로 둘러싸여 중세의 성임을 느끼게 하고 있다.

1415년 포르투갈의 엔히크(Henrique) 왕자는 최초로 북서 아프리카로 탐험대를 보냈다. 본격적인 포르투갈함대의 항해가 재개되면서, 아프리카 서해안에는 수많은 무역 요새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당시 바다 끝에는 절벽이 있다는 미신으로 선원들은 먼바다 항해를 주저했다. 탐험대 선박은 아실라를 거치면서 육지가 보이는 연안을 따라 조심스럽게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으로 향했다. 즉 아실라는 항해 선박의 중간 기착지인 셈이다. 아실라에는 아직도 성곽 전망대, 정박 시설, 화포 등 포르투갈 유적들이 일부 남아 있다.

성곽의 입구를 들어가자 가게의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고 있다. 그런데 매캐한 냄새가 골목 어귀마다 난다. 양털을 태우는 냄새라고 한다. 마침 어제부터 내일까지 우리의 설날과 같은, 일 년 중 최대의 명절이라 가족들이 함께 모여 양고기를 굽고 있는 냄새라고 한다.

모로코의 큰 명절은 이슬람력으로 12월 8~10일 행해지는 명절로 ‘대제(大祭)’ 또는 ‘희생제(犧牲祭, Aid Adha)’로 불린다. 이슬람력은 기원후 622년 7월 15일이 이슬람력 1년 1월 1일이다. 이날은 무함마드가 추종자들과 함께 메카에서 메디나로 옮겨간 날이다. 희생제는 선지자인 아브라함이 신의 뜻에 따라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목을 베려는 순간, 그 믿음을 보고 만족한 하느님이 아들 대신 양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 전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전설에 따라 축제에서는 어린 양을 제단에 바치며, 순례에 참가하지 못하는 무슬림들은 각 가정에서 잡은 양이나 낙타, 소 등으로 제를 올린 뒤 이웃 및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는다. 2022년에는 7월 9일부터 11일까지가 명절이다. 오늘이 바로 7월 10일이다. 따라서 길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고 모두 가족들과 집안에서 보낸다. 관광객이라고는 오로지 우리밖에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를 모르겠다. 다행인 것은 복잡한 교통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고, 불행한 것은 여행지의 분위기를 맛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아실라 마을은 하얀 주택 담벼락에 벽화가 가득하다. 매년 7월 국제문화축제가 열리면 새로운 그림들로 다시 채워진다. 바닷가 전망대에서는 건물 벽화, 탁 트인 대서양, 하얀 백사장을 볼 수 있고 해수욕장까지 붙어 있다. 바다 방향으로는 일자형 성벽과 사대(射臺)가 있고, 마을 건물들은 전투에 방어가 유리하도록 건축되어 있다. 아실라엔 젊은 예술가들이 만들어놓은 각양각색의 벽화가 숨어있다.

작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성벽 망루가 나온다. 망루에 오르자 푸른 대서양과 마주하게 된다. 마침 이곳 주민으로 보이는 노랑머리 백인 여인이 명절을 맞아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 주민의 대부분은 포르투갈계와 스페인계라고 한다. 골목길에서 만나는 이곳 주민들도 노랑머리의 서양인이다.

지금의 아실라는 ‘예술의 도시’로 불린다. 축제 기간에는 마을 전체가 예술 그 자체가 된다고 한다. 메디나(구시가지) 안의 집과 벽들은 모두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그 위에 그림이 그려진다. 아실라 자체가 한 장의 커다란 도화지인 셈이다.

이러한 아실라는 프랑스보다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았다. 마을을 둘러싼 성벽도 1471년 포르투갈이 침략했을 때 지어졌고, 1912년에 모로코가 프랑스의 보호령 아래 있을 때도 아실라는 탕헤르(Tanger)나 테투안(Tetouan)과 함께 스페인의 보호령 아래 있었다. 1956년 모로코의 독립과 함께 되찾은 해변 마을 아실라는 독립과 함께 급속히 쇠락했다. 스페인 사람뿐 아니라 유대인들도 그즈음 건국한 이스라엘을 찾아 일시에 아실라를 떠나버린 것이 원인이다. 이에 의식 있는 몇 명을 시작으로 1978년부터 도시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복원 사업이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이 ‘미래의 창조’는 ‘모우심(Moussem)’이라고 부르는 성인들의 축제이자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는 시기에 일어났다. 아실라의 성지 메디나와 라이술리 왕궁의 복원 작업을 하던 예술가들이 모우심에서 노닐다가 허물어진 성벽에 둘러싸인 해안 마을 아실라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예술가들은 이를 ‘문화 모우심(Cultural Moussem of Asilah)’이라 이름하며 모여들었고 서로를 불러들였다.

화가들은 이층으로 된 마을 집들을 지면에 맞닿은 아래층의 밑 부분과 문, 창과 같은 출입구는 파란색으로, 그 위는 흰색으로 채색했다. 화가들은 파란색으로 알라의 사도 무함마드에 대한 신앙(샤하다)을, 흰색으로 그 절대 신앙에 대한 순결한 숭배를 표현했다고 한다. 화가들은 흰색 바탕 위에 그림을 그렸다.

1년이 지나면 이들 벽화는 다시 흰색 바탕으로 돌아가 또 다른 예술가를 기다린다. 이것이 해마다 새로운 벽화로 이 도시를 단장하는 아실라 국제 문화 축제다.

매년 7월 열리는 이 축제는 1978년 복원사업과 함께 시작되었다. 축제는 예술가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부른다. 예술가와 일반 사람들은 그림과 낙서에 열중한다. 즉 그라피티(graffiti)다. 그라피티는 길거리 여기저기 벽면에 낙서처럼 그리거나 페인트를 분무기로 내뿜어서 그리는 그림으로 아름다운 그림이라기보다는 그림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소통이다. 그림을 통해 전 세계 여행객들과 이곳 주민들이 함께 소통하고 즐기는 것이다.

여행하는 여행자에게는 “지금”이 가장 의미 있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지금을 즐기는 사람이다. 순간순간 변화하는 아실라를 즐기고 있는 나를 느끼며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음 여정인 수도 라바트로 향했다.

 

여기서 모로코에 대한 기본적인 지리와 역사에 대하여 알아보자.

모로코의 정식명칭은 모로코왕국(Kingdom of Morocco)이다. 수도는 라바트이며, 공용어로는 아랍어와 베르베르어이며 상용어는 프랑스어로서 주민 다수가 구사한다. 면적은 446,550만㎢로 남한 면적인 100,431만㎢의 4배가 넘는다. 그러나 인구는 3332만 2699명(2015년 현재)이다.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는 카사블랑카(Casablanca)로 약 335만 명, 페즈(Fez)가 111만 명, 수도인 라바트(Rabat)가 57만 명을 기록하고 있다. 인종은 아랍인 60%, 베르베르인 36%, 유럽인·유대인·흑인 등이 4%이나,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은 실제로는 양자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혼혈이 심하다. 피부색에 따른 인종차별은 없다.

1인당 국민소득은 약 3,045달러이다. 인구의 57.3%가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생산물은 밀·보리·올리브유 등이다. 인광석·석탄·철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며 세계 제1의 인광석 수출국이다. 북부 지중해 연안과 남부 해안지방에는 에스파냐어도 사용된다. 수니파 이슬람교가 국교로 99%의 주민이 믿고 있다. 기독교도는 1%가 있다.

북동부에서 서남부로 해발 4,000m의 아틀라스 산맥이 길게 뻗쳐 있고,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이 알제리 국경에서부터 모리타니아 국경과 접한 대서양까지 연결되어 있다. 아틀라스산맥 서쪽과 모로코 북부 및 중서부 대서양 연안 지역에 전체 국민의 70%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기후는 우기와 건기로 구분되며, 지역별로 다양한 특성이 나타난다. 우기는 11월~4월로 온난다습(평균 15˚)하고, 건기는 5월~10월로 고온건조(평균 28˚)한 특징을 보인다. 가장 더운 달은 8월(18~28˚)이고, 가장 추운 달은 1월(8~17˚)이다. 가장 건조한 달은 7월(평균 강우량 1㎜)이며, 가장 습한 달은 12월(평균 강우량 86㎜)이다. 북부지역은 겨울에 온난다습하고 여름에 고온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의 특색을 보이며, 중부지역은 겨울에 한냉하고 여름에는 고온 건조한 대륙성 기후의 특색을 보이고 있다. 남부지역은 사막 기후로 고온건조하고 일교차가 심하다.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르인의 고대사는 분명하지 않다. 페니키아인과 카르타고인이 해안에 거점을 만들고 로마인도 한때 모리타니 부근의 해안지대를 지배하였다. 아라비아에서 온 이슬람교의 군대가 모로코를 정복한 685년 이후 베르베르족도 이슬람화되어 711년 에스파냐를 공격하였다. 740년경부터 소왕국으로 분열되었으나 788년 이드리스 왕조가 통일하였다. 11세기에 알모라미드왕조가 마라케시를 수도로 에스파냐에서 세네갈강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였으나 12세기에 알모하드왕조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13세기에 들어 에스파냐에서 그리스도교도에게 패배한 이 왕조는 쇠퇴하고 메리니드왕조가 뒤를 이었다가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중엽에 걸쳐 와타시드왕조가 지배하였다. 이 시대에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침략을 받았고 오스만투르크의 압력에도 저항하였다.

1830년 알제리가 프랑스령이 된 후 모로코는 서유럽 국가의 분할경쟁의 대상이 되었다. 1904년 프랑스·에스파냐의 협상을 거쳐 1912년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보호령으로 분할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반(反)프랑스 해방투쟁을 거쳐 1956년 3월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에스파냐도 모로코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또 그해 10월에는 국제지대(國際地帶) 탕헤르, 1958년 4월에는 에스파냐의 남부 모로코령도 회복하여 입헌군주국 모로코의 영토는 통일되었다. 1969년 에스파냐령 이프니가 정식으로 반환되었으며, 1976년 4월 에스파냐령 사하라(西사하라)의 북쪽 반을 병합하였다. 이후 서부 사하라 지역의 병합을 위한 국가적 노력이 진행되고 있으나 UN과 인접 관련국의 반대로 현재 답보상태에 있다. 하산 2세가 사망하자 왕세자인 모하메드 6세가 1999년 7월 즉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