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행9-지브롤터해협과 스페인 역사2
하얀마을 미하스를 나와 알헤시라스로 향했다. 알헤시라스로 가는 길은 4차선 도로로 승차감이 아주 좋다. 스페인은 도로망이 아주 잘 닦여 있다. 독일이나, 프랑스, 이탈리아에 비해 손색이 없다.
동유럽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도로망이 좋은 편이다. 로마 시대부터 이미 잘 닦여진 도로를 조금만 더 확장하면 되었을 것이다. 이슬람 군대가 불과 7년 만에 북서 산악지대를 제외한 이베리아반도 전체를 점령한 데는 로마 시대부터 잘 닦여진 도로망이 일조했다고 한다.
차는 한 시간여 만에 알헤시라스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중국 음식점으로 갔다. 우리나라의 중국요리는 아주 좋아하지만 정작 중국에 가면 제대로 먹지를 못한다. 고수의 강한 향과 기름을 너무 많이 사용해 느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의 중국 음식은 우리나라 중국집 음식과 차이가 거의 없다.
내 입맛에 딱 맞다. 김치도 내가 좋아하는 발효가 잘된 배추김치다. 새삼 중국과 우리는 같은 유전자를 많이 공유한 동양인이라는 것을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스페인 여행 중 처음으로 잘 먹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은 이러한 걸 두고 말하는 것 같다.
처음 계획은 타이파에서 FERRY 편으로 모로코의 탕헤르로 갈 계획이었으나, 계획이 알헤시라스에서 FERRY 편으로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아프리카대륙에 있는 세우타로 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타이파는 이베리아반도의 최남단으로 소위 스페인의 땅끝마을이다. 무어인이 711년에 가장 먼저 이곳을 정복한 후 에스파냐 최초의 무어인 거주지를 세웠다고 알려진 곳이다.
타이파도 보고 싶었지만 알헤시라스는 타이파보다 더 유서가 깊은 곳이다. 영국령 지브롤터와 직선거리 500m 정도 떨어져 있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알헤시라스(Algeciras)는 스페인 남부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이자, 유럽에서 화물, 환적화물 물량이 가장 많은 항구 가운데 한 곳이다.
또한 구석기 시대 네안데르탈인의 유적지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유서 깊은 도시에서 FERRY를 타고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아프리카대륙에 있는 스페인령 세우타로 가는 것이다.
페리를 타기 위해 대기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그런데 이슬람 복장을 한 백인 여성들이 노랑머리의 백인 자녀들과 함께한다. 세우타에는 백인 이슬람교도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는 그동안의 나의 상식을 뛰어넘었다. 백인들은 거의 다 기독교도들이지 백인 이슬람교도가 이렇게 많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승선 절차가 아주 까다롭다. 여권도 검사하고 수화물 검사도 공항 검색대와 같이 철저하게 한다. 같은 스페인인 땅인데도 이렇게 까다롭게 하는 것은 배를 타고 해협을 건너는 것도 있지만 모로코에서 불법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까다로운 승선 절차를 마치고 배 안에 들어가니 의자가 놀라웠다.
안락의자라 누워서 아주 편안한 자세로 잠을 잘 수 있는 형태였다. 잠시 누워서 휴식을 취했다. 배가 출항을 시작한다. 호기심 많은 나로서는 도저히 누워서 휴식을 취할 수가 없었다. 가장 높은 갑판 위로 올라갔다.
갑판에 오르자 주변의 경관이 다 들어 왔다. 영국령 지브롤터가 한눈에 보인다. 지브롤터에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비행장과 건물들은 물론이고, 산 정상에 있는 성곽까지 제법 뚜렷하게 보인다.
지브롤터는 우마이야 왕조의 왈리드 1세 때 이슬람군의 장수였던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했는데 ‘타리크의 산’을 의미하는 아랍어 ‘자발 타리크’에서 지브롤터(Gibraltar)가 되었다고 한다.
지브롤터는 레콩키스타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1492년 이후부터 스페인이 통치했다. 그러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영국은 지브롤터의 영유권을 따냈다.
위트레흐트 조약은 1713∼1715년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에스파냐계승전쟁을 종결시킨 조약으로,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허드슨만·아케디아 등 미국 식민지 일부를 할애받고, 에스파냐로부터 지브롤터·미노르카섬을 획득한다.”라고 되어 있다.
영국은 지브롤터를 점령함으로써 대서양으로 나갈 수 있는 지중해의 유일한 출구를 장악하여 지중해 해상권을 쥐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1779년에 영국이 미국 독립전쟁으로 정신이 없는 틈을 타 스페인이 다시 탈환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했다.
영국이 제2차 세계 대전 와중에도 본국함대에 버금가는 수준의 함대를 지브롤터에 배치할 정도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당시 나치 독일도 이 지브롤터의 중요성을 알고 공략했으나 실패했다.
지브롤터에는 스페인, 모로코, 이탈리아계는 물론이고 영국계와 유대인, 인도인 등 다양한 민족 33,000여 명이 살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지브롤터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스페인 고유 영토였다며, 지브롤터에 대한 영토 반환 협상을 영국 측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은 지브롤터 주민들이 영국의 속령으로 남는 것에 압도적으로 지지(주민투표 결과 98% 지지)하는 근거를 내세우며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영국은 “너희 스페인도 모로코 영내에 점유하고 있는 스페인령 도시인 세우타와 멜리야를 모로코에게 돌려줘라.”라고 맞대응하고 있다.
지브롤터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바바리원숭이의 서식지이다. ‘지브롤터에 원숭이가 있는 한 절대로 영국의 지배에서 이 땅은 벗어나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윈스턴 처칠은 한때 지브롤터에 살던 야생 원숭이 수가 줄자 특별 보호 정책을 세우도록 했다.
3마리까지 줄어서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모로코에서 같은 종의 원숭이를 수입해와 다시 수를 늘리기도 했다고 한다. 천하의 처칠이지만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미신적인 속설을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브롤터 해협은 전략적 중요성이 큰 지리적 위치로 세계사의 영욕의 부침이 많은 곳이다. 해협을 둘러싸고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로마인, 서고트족, 반달족, 이슬람,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 여러 세력들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다.
책으로만 접했던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세계사의 현장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이 뿌듯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존을 위해 유한한 인간의 몸부림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어느새 배를 탄 후 한 시간 반이 지나 건너편 아프리카대륙에 있는 세우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브롤터 해협은 대서양과 지중해 사이에 있는 해협이다. 북쪽은 유럽이고, 남쪽은 아프리카다. 길이는 58km이고 너비는 12~36km이다.
묘하게도 유럽의 스페인 땅에는 영국령 지브롤터가 있고, 아프리카대륙에는 스페인령 세우타가 있다.
지브롤터 해협을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다. 헤라클레스의 12가지 난제 중 하나가 게리온의 양떼를 가장 먼 서쪽 지역에서 데려와 에우리스테우스에게 주는 것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아틀라스산맥을 건너가야 했다. 헤라클레스는 거대한 산을 오르는 대신 괴력으로 산줄기를 없애버렸다. 바다를 막고 있던 아틀라스산맥이 갈라지면서 대서양과 지중해로 분리되어 그사이에 조그만 지브롤터 해협이 생겨났다.
부서진 산에는 양쪽으로 바위로 된 기둥이 생겼는데 이것이 헤라클레스의 기둥으로 불린다.
북쪽의 것을 ‘지브롤터 바위산(Rock of Gibraltar)’이라 부른다. 그러나 북아프리카 대륙 봉우리에 있는 남쪽 바위는 역사적 증거가 남아 있지 않아 학계에서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세우타에 있는 몬테 아초와 모로코에 있는 에벨 무사라는 곳이라고 한다.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스페인 국가 문장에도 나온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황제가 주인공이다. 그의 좌우명이었던 ‘플루스 울트라(Plus ultra)’는 라틴어로 ‘보다 더 멀리 나아가다’, ‘이상을 향해서’의 의미를 갖는 스페인어이다.
이는 신성로마제국의 군주였던 카를 5세의 좌우명으로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깨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 신세계를 발견하려는 야망으로 대변된다. 카를 5세의 스승인 루이지 마를리아노는 왕자에게 고대의 경고 따위는 버리고 위기를 무릅쓰며 도전하는 군주가 되길 바라면서 ‘플루스 울트라(Plus ultra)’를 강조했다고 한다. 위대한 인물 뒤에는 반드시 위대한 스승이 있는 셈이다.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령 세우타에 도착했다. 내일은 모로코로 떠난다.
※ 스페인 역사 2 – 이슬람 점령에서 국토회복운동인 레콩키스타 완성까지
이슬람은 7년 만인 718년에 북쪽 산악지역만 제외하고 이베리아반도 전부를 점령했다. 그러나 가톨릭교도도 이슬람 정복자에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722년 이베리아 반도 북쪽 아스투리아스 지방인 코바동가란 곳에서 펠리요란 장군이 이끄는 서고트 왕국의 가톨릭군이 처음으로 이슬람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는 코바동가의 동굴에서 벌어졌다.
성모 마리아의 보호로 이슬람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고 가톨릭교도들은 믿었다. 그래서 이 동굴은 순례자들이 찾는 성지가 되어 지금도 성모 마리아가 수호성인이다.
코바동가 전투는 가톨릭교도들의 국토 되찾기 전쟁의 시작이었다. 지금도 코바동가는 조국 해방과 국토회복 전쟁 즉 ‘레콩키스타’의 발상지로 숭상받고 있다.
이베리아반도의 거의 전체가 이슬람교도와 아랍인의 지배로 들어가면서 이 지방의 인종 구성은 더욱 복잡해졌다. 아랍인, 이베리아인, 켈트인, 이베로켈트인, 로마계, 서고트족, 유대인, 무어인, 바스크족 등이다.
가장 높은 지배 계층은 당연히 정복자인 아랍인으로 그 수는 아주 적었다. 아랍의 남성은 이베리아의 귀족 출신 여성과 결혼할 수 있었으나 아랍 여성은 이베리아 남성과 결혼할 수 없고 아랍 남성과만 결혼할 수 있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인종은 유대인이다. 이 당시 이베리아반도에는 적지 않은 수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서기 73년 끝까지 저항하다 로마군에 의해 그들이 살던 팔레스타인, 즉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서 쫓겨난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나갔다.
이들은 주로 이방인에게 관대한 편인 이베리아반도와 동부 유럽으로 흘러 들어가 살게 되었다. 따라서 이베리아반도의 민족 구성은 크게 나누면 이베리아인, 아랍인, 유대인으로 나누고, 종교는 이슬람교, 가톨릭교, 유대교로 나누어졌다.
756년에 알안달루스 왕국, 즉 옴미아드 왕조의 에리미트를 세운 아브드 알라흐만 1세는 고대 로마의 정치인 세네카를 배출한 유서 깊은 도시 코르도바에 도읍을 정했다. 10세기경에는 스스로 칼리파로 승격했다.
코르도바는 인구 50만 명의 세계 최대도시로, 당시 콘스탄티노플과 더불어 유럽 최대의 도시였다. 아브드 알라흐만 1세는 로마 신전이 있던 자리에 메스키타(이슬람 사원)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987년에 완성되었다.
200여 년 만에 완성된 이 사원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단일 회교 사원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1984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코르도바가 화려한 이슬람 중심 도시로 성장해 바그다드는 더 이상 코르도바와 비교 대상이 되지 못했다. 알안달루스 왕국은 화려하고 자유로운 개방된 나라가 되었다. 고향에서 쫓겨나 설움을 받던 유대인들이 이 나라에 많이 모여 살게 된 까닭이다.
유대인은 이슬람 세계인 코르도바 왕국에서나 가톨릭 사회에서나 크고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느 곳이든 회계, 번역, 통역, 의사, 은행가, 법률가 등 소위 지식인 계급에는 유대인이 많았다. 그런데 이베리아반도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어 서고트 왕국의 국교가 되면서 612년에는 반유대인 칙령이 내려졌다. 개종해서 세례받지 아니한 유대인은 모조리 국외로 추방하게 했다.
이런 다급한 상황이다보니 그들은 유대교를 인정하고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이슬람 군대를 크게 환영했다. 이슬람 세력에 적극 협조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코르도바 왕국에서 유대인의 활약은 눈부셨고, 왕국의 전성기를 이루는데 크게 기여했다.
한편 722년 코바동가의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그리스도교 세력은 300년 가까이 이슬람의 세력에 눌려 북서부 지방에서 미미하지만 저항은 계속했다. 그들은 자신의 본거지인 아스투리아스 지방과 이슬람 세력의 경계 지대에 수많은 작은 성을 쌓아 아랍인의 침략을 막아왔다.
아직도 수천 개의 성채가 대부분 이 지역에 몰려 있는 이유다. 이들 대부분이 아스투리아스인이다. 아스투리아스 지역은 최후까지 이슬람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은 순수한 그리스도교 청정 지역이다. 그들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아스투리아스인은 서고트족의 혈통과 전통을 이어받았고 무어인의 침략으로부터 스페인과 그리스도를 지켜야 하는 신성한 의무를 수행한 스페인의 근본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오늘날의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도 왕세자 시절에 ‘아스투리아스 왕세자’라고 불렸다.
펠리페 6세에게 아스투리아스의 유전자는 거의 없다. 프랑스 브로봉 왕조의 자손이다. 펠리페 5세는 루이 14세의 손자다.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면 루이 14세는 마리 드 메디치(Marie de Medici, 1573~1642)의 손자다.
마리는 메디치가의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스 1세(1541-1587)의 딸이다. 루이 14세의 손자가 펠리페 5세(1683-1746)이다. 이탈리아 메디치가의 마리아 데 메디치 왕후의 손자다.
왕후는 프랑스의 앙리 4세가 남편이고, 그의 아들 루이 13세의 아들이 루이 14세다. 사견으로는 태양왕 루이 14세가 절대왕정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메디치가의 유전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유럽의 왕가들은 자기들만의 유전자를 교환하여 유전자의 피해가 심했다. 메디치가의 피는 새롭고 신선한 유전자이다.
지금까지도 스페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이라고 생각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크게 분류하면 게르만족보다는 라틴족이다.
그런데도 서고트족의 자손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서고트족이 이슬람에 저항하여 가톨릭을 수호한 데 있다고 생각된다. 아스투리아스는 레콩키스타의 시발점이자 총본부였다. 그런데 아스투리아스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은 아스투리아스 지역이 험악하고 황량한 지형으로 이슬람 입장에서는 별 쓸모가 없는 땅이라 점령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살아남는 데 성공한 아스투리아스 왕국, 나바라 왕국과 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1세가 수복한 바르셀로나 백작령을 중심으로 국토회복운동이 시작되었다.
국토회복운동이 진행됨에 따라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현재 스페인 서북부의 레온 왕국, 북중부의 카스티야 왕국, 포르투갈 왕국으로 나누어졌다.
바르셀로나는 아라곤 연합왕국으로 변해 새로운 국가들이 국토 수복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이 레콩키스타를 좀 더 쉽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코르도바(알안달루스) 왕국 때문이다. 코르도바 왕국의 하샴 2세의 재상이었던 알만수르(재임 977-1002)는 오늘날의 코임브라를 불살라 7년간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로 만들고, 985년에는 바르셀로나를 몽땅 태워버렸다. 무르고스, 레온까지 침략해 주민을 모조리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성지인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타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성당을 파괴하고 대성당의 쇠문과 종을 가톨릭교도 포로에게 짊어지게 하여 코르도바까지 옮겨 이슬람 사원의 촛대와 천장을 만드는 등 수모를 주었다.
그러나 1002년 알만수르의 죽음과 함께 가톨릭교도들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어 결국 1031년에 코르도바 왕국이 멸망했다. 코르도바 왕국이 무너지면서 이슬람은 여러 개의 작은 이슬람 왕국으로 쪼개지는 타이파 시대가 열렸다. 이슬람 왕국들은 지역에 따라 성격과 지배 계층이 서로 달랐다.
세비아, 사라고사, 톨레도 같은 곳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그리스도교도인 물리다가 지배했고, 그라나다는 베르베르인이 지배했는가 하면, 무르시아, 데니아, 발렌시아 등 동쪽 지방은 무어인이 지배했다.
그래서 서로 연락도 동맹도 이루어지지 않는 허약한 작은 왕국에 지나지 않아 가톨릭 세력이 거침없이 약진했다.
1085년에 드디어 이슬람 세력의 심장과도 같은 톨레도가 가톨릭교도에 의해 점령되었다. 엘 시드(1043-1099)가 등장한 때도 이 시기였다. 엘 시드는 카스티야이레온 왕국의 비바르에서 기사 계급으로 태어나 이슬람군과의 전쟁에 평생을 바친 용감한 군인이다.
자신을 몰아낸 왕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친 만고의 충신이며 죽은 뒤에도 자신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않고 자신의 주검을 말 위에 앉혀 적군을 향해 돌진하도록 했다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처럼 스페인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엘 시드는 단결과 합심이 어렵고 지역별로 나누어진 스페인 국민을 하나로 결집하는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격렬해진 그리스도교의 레콩키스타 전쟁으로 이슬람 세력은 계속 위축되었다.
이 시기는 십자군 전쟁(1096-1270)과도 맞물려 있었다.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로마 교황은 십자군에 스페인은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스페인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교도 이슬람 침략자와 싸우고 있어, 이 또한 십자군 전쟁과 다름없다고 했다.
그래서 이베리아반도에서는 군대를 십자군에 보내지 않고 레콩키스타 전쟁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212년 라스나바스톨로사 전투에서 가톨릭군의 승리로 대세가 기울어졌다.
라스나바스톨로사 전투는 1212년 7월 12일에 크리스트교 연합군 (카스티야, 포르투갈, 아라곤, 나바라, 성전 기사단) 세력과 무함마드 앗 나시르 휘하의 무와히드 왕조 간에 벌어진 대전투로 기독교 연합군이 한 목동의 도움을 받아 고갯길을 몰래 넘어 무와히드 군대의 숙영지를 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무어인의 중심지인 코르도바, 세비야, 카디스 등이 차례대로 함락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라나다에 자리 잡은 나스르 왕조뿐이다. 그나마 카스티야의 봉신국이 되는 조건으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모로코의 무와히드 왕조 역시 옛 제후국이던 마린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그 모든 발단은 라스나바스톨로사 전투였다.
14세기 초 마린 왕조가 마지막으로 반격을 시도해 보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오히려 1410년에는 포르투갈에 아프리카 북쪽 끝인 세우타를 빼앗기며 쇠퇴했다.
1469년 10월 가장 강대한 양대 세력인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레온-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이사벨라 1세 여왕의 결혼을 통해 통일 에스파냐(스페인) 왕국이 성립되어, 1492년에는 마지막 거점인 나스르 왕조의 그라나다가 항복해 무혈 함락되면서 국토회복운동은 711년 이래 무려 782년 만에 종료되었다.
무어인들 대다수는 이슬람 세력이 수세에 몰리는 동안 원래 살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아랍인들은 아라비아나 이집트로, 베르베르인들은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에미르인 무함마드 12세 보압딜은 ‘영토를 빼앗기는 것보다 이 궁전을 떠나는 게 슬프구나.’라며 눈물을 흘렸다. 패자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보고 그의 어머니는 한심하다는 듯이 “남자처럼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 여자처럼 울기라도 해야지”라며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결국 나스르 왕조의 보압딜은 모로코의 패스에서 귀족으로 편입되어 살다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라나다가 항복한 후에도 남은 사람들은 추방되거나 이베리아인에 동화되어 현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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