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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거제 황덕도와 씨렁섬 트레킹

by 황교장 2025. 2. 23.

 

거제 황덕도와 씨렁섬 트레킹

 

수야방도를 나와 송포에서 작은 고개를 하나 넘으면 대곡마을에 닿는다. 좁은 마을 안길을 지나니 붉은 다리가 보인다. 황덕교이다.

황덕교

다리 길이는 264m로 폭이 좁아 교행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다리 중간에 교행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 기다려 주어야 한다.

황덕도는 거제시 하청면에 딸린 섬으로, 해안선 길이 3km, 인구는 30여 명이다. 황덕도(黃德島)에 사람이 살기 전에는 숲이 매우 울창하여 노루가 많이 살았다. 그래서 노루가 뛰어노는 ‘노루언덕’으로 부르다 말이 줄어 ‘노른덕’, ‘노른디기’로 불렸다고 한다. 그 후에 울창한 숲이 개간되어 섬에 나무가 없어 누런 황토 땅이었기에 ‘누런섬’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또한 100살 이상의 장수한 노인들이 많아 ‘장수섬’ 또는 ‘노인덕도(老人德島)’라고 불렸다.

황덕도

다리를 건너 길을 따라가면 제법 너른 방파제가 나온다. 이곳에 주차하고는 목이 말라 바로 앞에 있는 황덕마켓에 가보니 문이 잠겨 있다.

전화번호가 있어 전화를 걸려다가 마침 천혜향 세 개가 남아 있어 까먹으면서 황덕도 트레킹을 시작하였다. 방파제 앞에 마당이 제법 넓고 잘 꾸며놓은 집이 보인다. 황덕분교가 있던 자리로, 폐교 후 민박집으로 개축해 사용 중이다.

폐교 터 민박집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니 마을회관이 나온다. 회관에는 노인 세 분이 우리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서로 보고 있으면서 한 마디도 나누지는 못했다. 관상을 보니 우리와 동년배로 보인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되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하루 만 보 이상을 걸을 수 있어 황덕도까지 올 수 있다는 점이다.

황덕마을회관 경로당

마을회관을 지나 조금을 더 걸어가면 황덕도에서 가장 큰 마을이 나온다. 배산임수가 잘된 곳이다. 북풍을 막아주는 야트막한 언덕을 등지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친구에게 집집마다 풍수상의 장단점을 이야기하면서 걸었다.

몇 집 안 되는 마을에 펜션이 여러 곳이다. 펜션의 주된 손님은 낚시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 길 끝에는 해안도로가 막혀 있다. 아직 일주도로가 없다. 그래서 다시 주차한 곳으로 나와야 된다.

반시계 방향으로 가면 북쪽 마을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가 이어진다.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띄엄띄엄 집이 있다. 해안도로 끝에는 무인 등대로 올라가는 길이다.

이 등대는 통영에서 부산을 항해하는 배들의 길잡이 노릇을 한다. 수야방도 정자에서는 황덕도의 등대가 잘 보였다. 카페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 계획이 차질이 있어 등대길은 다음을 기약했다.

등대 올라가는 길

황덕도는 빼어난 풍광은 아니지만 때 묻지 않는 모습이 남아 있는 섬이다. 황덕도의 유일한 교육 기관으로 황덕분교(1991년 폐교)가 있었다. 분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중학교에 가려면 제일 가까운 학교가 하청면 소재지에 있는 하청중학교였다. 칠천도에는 중학교가 없기 때문이다. 황덕도에서 이른 새벽에 일어나 밥을 먹고 나룻배 타고 건너편 대곡마을에 도착하면, 대곡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칠천도 장곶마을 선착장까지 가야 한다. 선착장에서 다시 배를 타고 하청면 실전리에 내려서 3km를 걸어 하청중학교에 간다. 만약에 배나 차가 조금이라도 연착하면 뛰어서 가야 했다. 등교 시간만 두 시간 넘게 걸린다고 한다.

8년 동안 나와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던 분은 칠천초등학교와 하청중학교 출신이다. 송포에서 가는 거리나 황덕도에서 가는 거리는 거의 같다. 단지 배를 한 번 적게 탄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이러니 섬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생활력이 강할 수밖에 없다. 힘든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찍 철들어야 한다. 우리나라 지도자 중에서 섬에서 태어난 분들이 많은 이유도 아마 이런 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리가 놓인 지금은 17분이면 황덕도에서 하청중학교까지 갈 수 있다. 문명의 이기는 대단한 것이다.

황덕도를 나와 해안도로를 타고 나오면 부산대학병원 인재개발원이 나온다. 이곳은 처음 칠천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이다. 언덕길을 하나 더 넘으면 지금의 칠천초등학교가 나온다. 이곳은 연구초등학교가 있던 곳이었다. 그런데 칠천초등학교와 통합하여 교명이 칠천초등학교가 되었다. 학교를 조금 지나면 칠천량해전공원이 나온다.

정유재란 때인 1597년 음력 7월 16일, 조선의 삼군수군통제사인 원균이 일본 수군에게 처절하게 패한 곳을 기록한 전시장도 함께 있다.

칠천량해전공원전시장

그런데 월요일이라 휴관이다. 패전을 기록한 공원이지만 아주 잘 조성되어 있다.

정유재란은 임진왜란 중 강화 교섭의 결렬로 왜군이 정유년(1597)에 다시 침략한 전쟁이다. 명나라와 일본 간에 진행되던 강화 교섭인, 1596년 9월 오사카회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요구한 화평 조건 7개조에는 명 황녀를 후비(后妃)로 보낼 것, 조선 8도 중 남부 4개 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등 명나라와 조선이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교섭을 담당한 명나라 관리 심유경 등이 교섭 조건을 숨긴 채 명 황제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동시에 기만하면서 파탄에 이르렀다. 분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총 병력 141,500명으로 다시 조선을 침략했다.

이에 맞선 조선 수군이 원균의 지휘로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가 전함 180척 중 150척이 침몰하고 1만여 명의 병사가 숨진 조선 수군 최대의 패전을 기록했다. 그 역사를 잊지 말자고 만든 공원이 이곳이다

1597년 음력 7월 14일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은 가덕도와 영등도 부근에서 일본군의 습격으로 손실을 크게 입고 후퇴하여 7월 15일 밤에 이곳 칠천량에 정박하였다. 이튿날인 7월 16일 새벽, 일본 수군 600여 척의 기습 공격으로 조선 수군은 160여 척의 배를 잃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조선 장수들이 전사하였다. 원균은 고성으로 퇴각하다 육지에서 전사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31(1598)년 무술년 4월 2일 기사 중 사관의 논평은 다음과 같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자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선조신록에도 원균은 무능한 리더로서 책형(磔刑)을 가해야 된다고 했다. 책형은 사형에 포함되지만 책(磔)이라는 한자의 뜻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희생물을 찢어서 내장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책형은 사람을 찢어 죽이는 것이나 목과 사지를 밧줄에 묶어 소나 말의 힘으로 각각 반대 방향으로 당겨 찢어 죽이는 방법인 거열형(車裂刑)도 책형의 일종에 해당한다.

그런데 선조는 “증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릉군(贈 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 崇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原陵君)”으로 종1품 숭록대부의 품계를 원균에게 주었다.

당시 권율과 이순신에게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 및 부원군의 정1품 작호가 추증된 반면, 원균에게는 한 등급 낮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군의 작호가 추증되었다.

신하들이 다 반대하였기에 그나마 한 등급 낮은 종1품 숭록대부의 품계를 주었다.

선조가 원균을 추증한 이유는 본인이 직접 발탁하고, 본인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죽은 자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선조는 원균의 칠천량 대패 소식을 듣자마자 “이 패전은 원균의 잘못이 아니라, 하늘이 돕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라는 책임회피성 변명만 했다.

전후에는 원균을 집요하게 1등 공신으로 추증하여 잘못된 인선과 잘못된 작전명령의 최종책임자인 선조 본인의 과오를 희석시키려 한 것으로 역사는 해석하고 있다.

원균의 패배로 남해안의 제해권을 일본에 빼앗기자 조선 조정은 초계(현 합천군 율곡)의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던 충무공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칠천량해전에서 살아남은 12척의 판옥선과 군선들을 이끌고 명량해전에서 승리했다. 이때 장군이 한 말이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왜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 自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微臣不死 則不敢侮我矣)”

명랑해전의 승리는 정유재란의 흐름을 바꾸어 놓아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전쟁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과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부하의 몸을 자기 몸같이 아끼는 이순신 장군의 총체적 리더십이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

이순신과 원균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았다. 예부터 무능한 지도자는 그가 이끄는 집단을 망쳤다. 그 지도자가 한 나라의 수장이라면 나라의 운명은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이순신 장군 같은 지도자가 지금 이 시대에도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누가 원균이고 누가 이순신인지는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칠천량 해전과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을 생각하면서 복잡한 마음으로 바로 앞에 있는 씨릉섬으로 향했다.

씨릉섬은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칠천도 교회에서 여름 캠프를 할 때 씨릉섬이 보이는 방파제 앞에서 낚시하면서 즐겁게 보낸 적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30여 년이 훌쩍 넘긴 세월로 당시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 기억력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공원 입구에서 옥계해수욕장 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런데 길 때문에 해수욕장을 망쳐 놓은 것 같다. 씨릉섬 앞에는 공사가 한창이다.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여지도 내어주지 않고 공사를 하고 있다. 내가 불만을 토하자 그나마 죄송하다고 한다. 한 친구는 이 방면에 전문가인 건축 기술사다.

이러한 곳에 허가를 내어준 것은 반드시 비리가 있다고 잘라 말한다. 일반 행정조직의 의사결정에 있어 리더의 역할을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우울한 기분을 안고 씨릉섬을 연결하는 출렁다리에 올랐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 출렁거리는 진동으로 우울한 기분이 점차 사라지면서 동심으로 돌아갔다. 사람의 마음은 이처럼 간사하다. 이 다리는 무장애 길로 조성되어 있다. 이러한 행정은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씨릉섬’의 이름이 독특하다고 느껴져 찾아보니 여기에는 전설이 숨이 있었다. ‘거제도 설화 전집’에 의하면 “옛날 옛적, 하늘나라 옥황상제에게는 딸인 공주가 있었는데 그녀는 아주 아름답고 총명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큰 실수를 저질렀고, 공주를 너무 사랑한 옥황상제도 하늘나라의 규칙을 어길 수 없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딸을 거제 땅 칠천도로 쫓아내고 말았다.

공주는 지상으로 내려와 외로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거제도 사람들은 그녀를 ‘옥녀’라고 불렀다. 오직 하늘나라로 올라갈 날만을 기다리던 공주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지쳐버려 결국에는 산이 되고 말았다. 그 산이 바로 칠천도의 최고봉 옥녀봉이라고 한다. 칠천도에 머무르던 옥녀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매일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 아름다운 음악 소리는 바다 건너까지 울려 퍼졌다.

그 매혹적인 선율을 들은 바다의 용왕신은 그녀의 거문고 반주에 맞춰 북을 쳤다.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 광경이었던지, 옥녀의 거문고 소리에 맞춰 섬도 즐거워서 ‘씨릉씨릉’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그 섬이 바로 ‘씨릉섬’이고, 용왕신이 북으로 이용한 섬이 씨릉섬 옆에 있는 북처럼 생긴 ‘북섬’이라 한다.

북섬

지금도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이 칠 때면 씨릉섬과 북섬은 ‘씨릉씨릉 둥둥’ 소리를 낸다고 한다.”

그럴듯한 전설이다. 섬의 입구에는 정자목 쉼터가 있다. 이곳 앞에는 내가 아는 교인이 살았던 집이 아직도 폐가로 남아 있다. 집에 들어가는 입구조차 막혀 있다. 잘 만들어진 산책로를 따라가면 중간중간에 정비된 쉼터를 만난다.

쉼터 이름도 잘 지었다. 봉우리, 물빛, 너울, 초록바람 쉼터다. 초록바람 쉼터는 씨릉섬의 정상에 있다. 정상에는 푸르른 소나무 숲과 발갛게 핀 애기동백이 반겨준다. 왕복 거리는 3.6km, 산책 소요 시간은 약 40분 정도 걸린 셈이다.

이것으로 오늘 거제자연휴양림을 출발하여 물안해수욕장과 수야방도, 황덕도와 칠천량해전공원, 씨렁섬 산책을 다 마쳤다. 칠천교를 건너 굴구이를 전문으로 하는 하청굴구이마당에서 식사를 하고는 여섯 섬 트레킹을 모두 마쳤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여섯 섬을 돌아보고나니 아주 먼곳으로 다녀온 기분이 든다. 우리나라가 삼면이 바다라는 것을 새삼 실감한1박2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