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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신도중학교 직원연수1

by 황교장 2015. 7. 21.

 

 

신도중학교 직원연수1

권정생 생가 신세동칠층전탑 임청각 퇴계종택 이육사생가터 -

 

 2015717일 여름방학 직원연수는 경북 북부지방의 선비 문화와 문학기행을 체험하고자  떠났다. 답사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신도중- 신대구고속도로 - 중앙고속도로-남안동IC- 조탑리오층전탑과 권정생 생가 - 안동간고등어 및 헛제삿밥(중식) -신세동칠층전탑- 임청각- 퇴계종택 - 이육사생가터 -대자연가든(석식) - 농암종택(1, 조식) -퇴계 예던길 - 조지훈 생가와 문학관 - 서석지 달기약수(중식) - 부산

 

학교를 옮길 때마다 직원연수 장소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안동지역이다. 안동을 생각하면 가슴 한 곳을 저미는 특별한 뭔가가 있다. 그래서 매번 안동을 찾게 된다.

특별한 사정이 있는 분 몇 분 외에는 전 직원이 참여하였다. 출발부터 분위기가 좋았다.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학교를 출발하여 청도 휴게소까지 화기애애하게 갔다.

 

 휴게소를 지나 딱히 사회 볼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사회를 보기 시작하였다.

 

 

노래도 시키고 관상도 봐주면서 분위기가 서서히 무르익어 웃음꽃이 만발하였다.

 

 

차는 남안동IC로 나와 첫 답사처인 조탑리오층전탑에 도착했다. 그런데 오층전탑이 눈에 띄지 않는다. 아직도 수리 중이다. 2년 전에도 보수 중이었는데 아직까지 진행 중이다. 이번 연수에는 여러 번 온 곳이라 사전답사를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자주 왔던 곳이라도 반드시 사전 답사를 해야만 한다.

전탑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당연히 권정생 생가를 찾아 가는 데에도 차질이 생겼다. 조금 헤매다가 겨우 길을 바로 들어설 수 있었다.

 

 

 

 

 

 

 

 

 

선생이 살던 집으로 발길을 향했다. 허물어져 가고 있는 선생의 소박한 두칸집은 잡초가 무성했다. 선생은 평생을 욕심 없이 아이들과 더불어 청순하게 살다가 갔다.

 

 권정생(權正生, 1937-2007)의 대표작으로 강아지똥몽실 언니등이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게 강제로 징용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해방 후 경상북도 청송으로 귀국했다. 점원, 나무 장수, 고구마 장수 등을 하며 객지를 떠돌던 그는 1957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인 이곳에 들어왔다. 그때 그의 나이가 18세였다. 이후 22세 때에 지병인 결핵 때문에 집을 나갔다가, 1966년에 다시 정착하여 1982년까지 마을 교회 종지기로 살았다.

 

순수한 그는 마을 사람 누구나 좋아했으며,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창작동화를 구연하기도 했다. 1983년 이후 직접 지은 5평짜리 오두막집에서 강아지와 둘이서 검소한 삶을 실천하며 살다가 2007517일 지병이 악화되어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권정생은 믿음을 바탕으로 자연과 생명, 어린이, 이웃 그리고 무고하게 고난 받는 이들에 대한 사랑을 작품의 주요 주제로 다뤄왔다.

 

강아지똥은 닭과 진흙에게 무시를 당하고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던 강아지똥이 민들레의 거름이 되어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는 내용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 작품이다.

몽실언니는 전쟁과 가난에 허덕이지만 꿋꿋이 버텨내는 한 절름발이 소녀의 감동적인 이야기다.

 

선생은 삶과 문학이 한 몸을 이룬 작가로 일제 강점기, 해방 그리고 6·25전쟁 등을 두루 체험하면서도 어느 한쪽의 이념이나 사상에 치우치지 않고, 왜곡된 역사인식과 시대의식을 작품에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선생은 세상을 뜨기 전, “인세는 어린이로 인해 생긴 것이니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굶주린 북녘 어린이들을 위해 쓰고 여력이 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서도 써 달라. 남북한이 서로 미워하거나 싸우지 말고 통일을 이뤄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또한 자신의 집터를 허물어 다시 자연으로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집을 허물어 자연으로 돌려달라는 유언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집 풍수를 잘 보려면 집 뒤로 가서 살펴보아야 한다. 집 뒤에는 범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예사롭지 않은 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바로 혈처인 명당이다이 집은 천 년 이상 갈 대명당으로 여겨진다.

생가를 나와 안동댐 근처에 안동지역의 전통음식인 간고등어와 헛제삿밥을 먹었다.

 

 

 안동 음식은 나의 입맛과는 잘 맞지 않다. 전라도 음식은 거의 다 내 입맛에 맞는데 안동음식은 농암종택 음식을 제외하고는 입맛에 든 음식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 직원들은 모두들 맛있다고 한다. 여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누구랑 같이 가느냐와 잠자리, 식사, 장소이다. 이중 하나만 소홀히 해도 만족도가 떨어진다.

 

 

 

식사 후에는 조정댐에 다리를 놓아 건너갈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잠깐 강을 건넜다. 강 한가운데에는 월영정이 있어 풍광을 더하고 있다.

 

 

 

점심 먹으러 오는 도중에 임청각을 보니 신세동칠층전탑이 말끔하게 정비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2년 전에는 이 탑 역시 수리 중이었다. 조탑리오층전탑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워 신세동칠층전탑과 임청각을 보기로 하고는 신세동칠층전탑으로 향했다.

 

 

 

이 탑은 전탑으로서는 유일한 국보다. 그런데 국보로서 대접을 잘 못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중앙선 철길에 막혀서 그 위용이 반감되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시대까지의 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탑인데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석가모니가 열반하여 화장을 하니 사리가 나왔다. 이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지은 축조물이 탑의 기원이다. ()은 탑파(塔婆)의 준말로 범어인 stupa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탑의 형태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형되었다.

 

중국은 목탑과 팔각형의 전탑이 주류를 이루나, 우리나라로 넘어 오면서 풍토와 환경에 맞게 변형이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화강암이 많아 화강암을 사용한 석탑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돌을 벽돌처럼 보이도록 다듬어서 만든 모전석탑과 나무로 만든 목탑, 벽돌로 만든 전탑이 있다. 여기에 있는 신세동칠층전탑의 전탑(塼塔)은 흙을 구워서 만든 벽돌로 쌓아올린 탑이다.

 

이 탑은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다. 탑의 높이는 16.8m, 기단 폭은 7.75m이며, 단층기단에 7층의 몸돌(塔身)을 차츰 크기를 줄여가며 쌓아 올려 놓았다.

이 탑이 있는 일대가 법흥동인 점으로 미루어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되었다는 법흥사가 있었다는 것으로 추측되나, 탑 이외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 각층 지붕 윗면에는 기와를 이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는 목탑이 전탑보다 앞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안동의 역사서인 영가지에는 조선 성종(成宗) 18(1487)에 고쳐졌고, 당시까지 법흥사가 3칸 정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전탑은 모두 다섯 기가 전부다.

1. 안동 신세동 7층전탑(국보 16)

2. 안동 동부동 5층전탑(보물56)

3. 안동 조탑동 5층전탑(보물57)

4. 칠곡 송림사 5층전탑(보물189)

5.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225)

 

이처럼 안동 중심으로 전탑이 많이 세워진 데에는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대체적으로 이 지역이 퇴적암 지대라서 화강암을 구하기가 어렵고, 벽돌을 구울 수 있는 양질의 펄이 생산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비교적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처럼 현존하는 전탑은 매우 귀한 존재다.

 

전성기 때의 신세동칠층전탑을 상상해보면 탑신에 기와가 있는 것을 볼 때 목탑형식을 취한 전탑이 아닐까? 즉 기와지붕을 얹고 상륜부에는 송림사 오층전탑의 상륜보다도 훨씬 화려한 금동상륜으로 장식된 아름답고 기품이 있으면서도 당당하고 웅장한 탑이었을 것이라고 상상된다.

 

신세동칠층전탑에서 200M 정도 골목길을 따라 가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國務領)을 지낸 독립투사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선생의 생가인 임청각(臨淸閣)이 나온다. 임청각은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 집은 철길에 바로 붙어 있다. 누가 보아도 불완전해 보이는 집임을 알 수 있다. 원래 99칸의 만석군 집이었다. 그런데 일제가 당시 임시정부 국무령의 집의 혈을 끊어놓아 더 이상 독립운동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중앙선 철로를 우회하여 놓았다고 한다. 중앙선 철길과 안동댐 임하댐이 건설되기 전  본래의 임청각 풍수를 상상해 보자.

일반적으로 양택(陽宅, 집터) 풍수에서 명당의 기본 조건은 대체로 다음의 3가지다

1.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측면에서 보면 집 뒤에 있는 영남산은 백두산에서 발원한 백두대간의 맥이 중간 기착지인 태백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이곳 임청각에 혈을 이루고 있다.

집 앞의 물은 한 줄기는 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청량산을 끼고 돌고 돌아 농암종택을 지나 예던길을 따라 육사생가터가 있는 원촌마을 앞을 지나 도산서원을 감싸고 흘러, 임청각에 다다르게 된다. 또 다른 물줄기인 반변천은 조지훈 생가가 있는 영양 일월산에서 발원한 물이, 서석지가 있는 입암과 봉감모전석탑 앞을 돌아, 청송 주왕산에서 발원한 물과, 진보면에서 만나, 의성김씨 내앞종택을 거쳐 임청각 맞은편에 있는 무산에서 만난다. 즉 두 물이 만나는 합수머리다. 일반적으로 합수머리는 대개 다 명당이라고 한다.

 

2. 전저후고(前低後高) : 앞은 낮고 뒤는 높은 양택 풍수의 교과서라고 할 정도로 전형적인 지형이다. 원래는 아흔아홉 간 집으로, 남자양반들의 공간인 사랑채, 여자양반들의 공간인 안채, 여자노비들의 공간인 안행랑채, 남자노비들의 공간인 바깥 행랑채 등으로 건물을 남녀별, 계층별로 구분하고 있다.

안채와 바깥채 기단의 높이 차이가 2m나 되어 건물의 위계질서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또한 별당 형식으로 지은 멋진 건물 군자정(君子亭)은 사랑채이면서 동시에 정자이다. 군자정을 가장 높게 지어 권위와 위엄을 나타낸다.

 

3. 전착후관(前窄後寬) : 출입문은 좁고 뒤뜰 안이 넉넉한 구조를 일컫는다. 지금의 법흥교 다리 밑으로 통과해 안동댐으로 약 100m 지점에 길 가운데 아주 오래된 회화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런데 수 년 전에 누군가에 의해 밤에 몰래 베어졌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이 나무가 임청각 대문 바로 입구에 서 있었던 나무라고 한다. 이로 보아 뒤뜰 안이 얼마나 넉넉했겠는지 족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풍수를 갖춘 이 집 전체를  임청각(臨淸閣)이라 부른다.

 

임청각에는 삼정승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정승이 태어날 방은 영실(靈室)이라 불린다. 영실 앞에는 진응수(眞應水)가 솟는 영천(靈泉)이라는 샘이 있어 우물방이라고도 한다.

 

 

우물방에서 태어난 인물은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을 포함한 9명의 독립유공자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업고 피난 간 약봉(藥峯) 서성(徐渻·1558-1631), 흥선대원군 때 폐정개혁을 주창한 좌의정 매산(梅山) 류후조(柳厚祚·1798-1876)이다. 서성과 류후조는 모두 임청각의 외손들이다. 이들의 어머니는 고성 이씨의 종녀로 친정인 우물방에 와서 해산했다. 우물방 영천(靈泉)의 정기를 받은 셈이다.

이 집에 거주하는 분에게 지금도 이 물을 먹고 사는 지를 물어보니 지금은 먹지 않고 수돗물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물 뚜껑을 열어보니 아직도 물이 맑다. 물은 계속 사용을 해야만 맑아지고 좋아지는데 사용하지 않으면 탁해지기 마련이다. 아쉬움이 남는다.

 

사랑채인 군자정 안에 있는 이 집 당호 臨淸閣 현판글씨는 퇴계 선생의 친필이다. 군자정 안에는 농암 이현보 선생과 고경명 선생, 이상룡 선생 글씨의 현판도 함께 있어 감상할 수 있었다.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에서 臨淸流而賦詩()()를 취한 것이라 한다.

富貴非吾願 帝鄕不可期 懷良辰以孤往 或植杖而耘(부귀비오원 제향불가기 회양진이고왕 혹식장이운)

登東皐而舒嘯 臨淸流而賦詩 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등동고이서소 임청류이부시 요승화이귀진 낙부천명복해의)

 

부귀는 내가 원하는 바 아니며 극락왕생도 바라지 아니하네.

좋을 때 홀로 거닐다 때론 지팡이 세워두고 김도 매고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지으리.

살다 때가 되면 그 곳으로 돌아가 기꺼이 천명을 받으리라.

 

임청각 안에는 제임청각’(題臨淸閣)이라는 제목의 현판시가 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고경명선생이다. 현판시를 보면 마지막에 고태헌(高苔軒)이라는 글자가 있다. 고태헌은 고경명의 별호다.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3부자가 장렬히 전사했다.

전라도 사람 고경명선생이 경상도 안동의 임청각까지 와서 남긴 시 현판이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까닭은 두 사람이 사돈지간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같이 벼슬할 때 친교가 있었고, 그 인연으로 임청각 주인의 딸과 제봉의 큰아들이 혼인했던 것이다. 제봉이 사돈집이었던 임청각에 들른 시기는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 신묘년 늦은 봄이다. 59세였던 제봉이 동래부사를 그만두고 곧바로 고향 광주로 가지 않고 서울로 가면서 중간에 들렀다.

 

임청각 출신 중에서는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한 사람은 500년 동안 이후영(병조정랑) 한 사람뿐인데도 안동에서는 가장 알아주는 명문가로 자리매김을 한 것은 임청각을 건립한 이명부터 석주까지 종손 20명 모두가 서첩을 내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임청각 사람들은 벼슬하기보다는 학문하는 집안으로 명문가를 유지했다.

안동 양반문화의 특징은 벼슬보다는 학문을 높게 쳐 주고, 학문보다는 지조를 가장 높게 쳐준다. 안동에서는 안동유림의 최고 명예직인 유향좌수와 도산서원 전교에 뽑히는 것을 최고로 친다. 유향좌수를 이해하는데 있어 좋은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하루는 서애 류성룡 선생이 싱글벙글하며 선조 임금과 마주하자 이를 궁금하게 여긴 선조가 왜 그리도 기분이 좋은가라고 물었다.

서애 왈 내가 안동 유향좌수로 천거되어 기뻐 그런다고 대답하자,

선조 왈 유향좌수가 일국의 영의정보다 더 지위가 높으냐고 물었다.

서애가 대답하기를 유향좌수는 양반들의 대표로 안동에서는 영의정보다 더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자리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유향좌수는 유향소의 수장이다. 유향소는 토착 양반들로 구성된 자치기구로 향리의 악폐를 막고 지방의 풍기를 단속하던 곳이다. 다른 군현에서는 진짜 양반은 유향좌수에 오르는 것을 기피했으나 안동의 선비들은 이를 가장 명예롭게 여겼다고 한다. 유향좌수에 오르는 데는 학식뿐만 아니라 진정한 인품이 있어야 된다는 의미다. 이런 유향좌수와 도산서원의 원장격인 도산서원 전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집안이 바로 임청각이라고 한다.

임청각은 고성 이씨의 종택이지만 사당에는 조상들의 위패가 없다. 191150여 명의 식솔들과 함께 만주로 떠나면서 나라가 없어졌는데 종묘가 무슨 소용이냐하며 위폐를 전부 땅에 묻고 떠났기 때문이라 한다. 석주선생이 임청각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기에 앞서 한편의 시를 지었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

 

旣奪我田宅(기탈아전택) 이미 내 논밭과 집을 빼앗아가고

復謀我妻努(복모아처노) 다시 내 아내와 자식을 해치려 하네

此頭寧可斫(차두녕가작)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此膝不可奴(차슬불가노) 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되게 할 수 없도다.

 

이 시 한 구절에서 선생의 기개를 느낄 수 있다. 선생은 삭풍이 몰아치던 191115, 52세의 나이에 온 가족을 데리고 망명길에 올랐다. “공자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는 것이 망명의 변이다.

임청각은 석주선생이 독립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석 재산을 다 팔고 그것도 모자라서 집까지 세 번이나 판 것을 고성 이씨 문중에서 매번 다시 구입했다고 한다. 일제가 집의 맥을 끊기 위해 중앙선 철로(1936년 착공 1942년 개통)를 놓으면서 아예 집을 없애려는 것을 지역사회에서 결사적으로 반발하여 그나마 현재의 형태로 남아 있다고 한다.

 

임청각(臨淸閣)1990년 자신의 옛 주인을 맞아 방문객으로 분주한 적이 있었다. 이상룡(李相龍)선생의 유해가 중국으로부터 봉환되었던 것이다.

슬퍼 말고 옛 동산을 잘 지키라. 나라 찾는 날 다시 돌아와 살리라는 고별시를 남긴 채 독립운동을 위해 이곳을 떠난 지 79년만의 조용한 귀국이요, 귀가였다.

선생의 유해는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석주 이상룡선생 아우인 이상동, 이봉희 삼형제의 자녀들인 이준형,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석주의 손자 이병화 등 한 집안에서 9명이 독립운동으로 건국훈장을 받았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임청각의 주인들이 보여주는 정신적인 자긍심, 역사의 진실, 역사의 향기인 지조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교사가 먼저 그 역사의 현장에서 생생한 체험을 해야만 가능하지 않겠는가.

 

 독립투사인 석주 이상룡 선생 생가인 임청각의 맥을 끊기 위해 놓았던 중앙선이 개통된 지도 어느 새 거의 칠십 수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 우리는 끊어진 맥을 이어놓을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다.

잘못 놓인 중앙선도 정상적인 곳으로 옮기고, 탑도 원형에 가깝게 복원을 해야 할 때가 이미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음 여정인 퇴계종택으로 향했다.

 

퇴계종택으로 향하는 길에는 시골의 정취가 아직도 온전히 남아 있다. 특히 수박농사를 참 많이도 짓고 있다. 수박이 종이 봉지에 싸여 있다. 어떤 이유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 햇빛에 수박이 노출되면 수박 고유의 색을 유지하지 못하고 누렇게 바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햇빛을 받지 않으면 당도에 문제가 있을 것 같다.

차는 도산서원 입구로 접어들고 있다. 도산서원 가는 길은 언제 보아도 절경이다. 넓은 평야와 제법 너른 강물이 흐르고 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황지에서 시작된 낙동강이 도산에 이르면 거룻배가 다닐 만큼 넓게 형성되었다라고 한 말이 실감이 나는 대목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에 도착을 했다. 도산서원은 많이 와 본 곳이어서 들르지 않고 바로 퇴계종택으로 향하였다. 퇴계종택은 도산서원 주차장을 지나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한다. ‘퇴계 종손은 경상감사보다도 더 좋다는 퇴계 종손분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종택이 있는 곳의 지명 전체는 토계(土溪 혹은 兎溪)이나 이곳은 조금 상류에 위치하고 있어 상계(上溪)라 한다. 퇴계선생은 토계의 토를 물러날 퇴(退)로 고쳐 호를 퇴계(退溪)라 했다고 한다. 이 토계의 개울을 건너면 종택이 나온다.

우리들은 종택의 대문에 있는 정려를 보러 갔다. 종택 대문 위에 烈女通德郞行司 署直長李安道妻恭人安東權氏之閭(열녀통덕랑행사 서직장이안도처공인안동권씨지려)란 긴 정려 글씨가 쓰여 있다.

 

 

열녀는 퇴계선생의 손부 권씨이다. 즉 이안도(李安道)의 부인이다. 권씨는 남편이 죽은 후 밥을 먹지 않고 좁쌀미음으로 연명했다. 머리는 빗질을 하지 않은 채 23년을 띠를 풀지 않았다.

"내가 죽지 못하고 명을 이어가는 것은 다만 후사(後嗣) 때문이다. 만일 후사를 세우지 못하고 죽으면 저승에서 무슨 낯으로 그이를 대할 것인가!" 했다고 한다.

결국 후사는 조카 억으로 결정되었다. 억이 혼인하여 며느리와 함께 들어오는 날 목욕재계한 후 소복을 입고 자결했다. 열녀 정려는 초상 중에 내려왔고, 부인의 시신은 열녀문을 나와 발인되었다고 한다.

 

 

종택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秋月寒水亭(추월한수정)이라는 현판이 붙은 건물을 만난다. 추월한수정 마루에는 고등학생들이 진지한 모습으로 연수를 받고 있었다.

 

 추월한수정은 1715년에 도산서원 원장인 권두경이 이집 종손과 논의하여 영남사림의 모금으로 지었고, '秋月寒水亭'의 편액은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先生之心 如秋月寒水 (선생지심 여추월한수. 선생의 마음은 마치 물에 비친 가을 달과 같다 )'에서 취했다고 한다.

 

학생들의 연수가 끝나자 종손님이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그동안 몇 번이나 뵌 적이 있다. 7년 전 101세로 돌아가신 종손님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백 세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얼굴이 맑고 표정이 온화했다. 그 분의 아들인 지금 종손님도 얼굴의 혈색과 표정, 공손한 언어가 부자지간에 많이 닮았다.

 

그런데 종손님은 3년상을 치르면서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옆에 계시는 분이 필담으로 우리들의 말을 전달해 주었다. 부산 해운대 신도시에 있는 신도중학교에서 왔다고 하자. 맑은 웃음으로 인사를 하신다. 종손님 역시 27년 반 동안 교장을 하신 분으로 알고 있다. 직접 붓글씨로 쓴 가훈들을 전 선생님들에게 한 편씩 주신다. 참 고마운 선물이다. 우리선생님들은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종택 앞 다리 건너기 전 천 원짜리 지폐의 뒷면에 나오는 계상서당이 있다. 23세의 율곡 이이(李珥)가 계상서당을 찾아와 58세인 퇴계선생과 도학을 논했다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 선생님들에게 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어 강세황이 그렸다는 계상서당도와 지금의 경치를 맞추어 보라고 했다. 그림과 차이가 나는 것은 도로 때문이다. 도로가 없다고 생각하면 같을 것이라고 하자 정말 맞네라고 하면서 즐거워한다.

 

다음 코스는 이육사문학관이다. 육사는 퇴계선생의 후손이다. 퇴계종택이 있는 곳이 상계이고, 퇴계의 셋째 손자 동암 이영도(1559-1637)가 터를 잡은 곳이 하계다. 퇴계가 상계를 개척했고, 손자 동암이 하계를 열었다. 그리고 동암의 증손자가 원촌을 개척했다. 상계는 16세기, 하계는 17세기, 원촌은 18세기로 대략 100년을 간격으로 열어 나갔다. 따라서 이 일대는 퇴계선생의 후손들이 땅을 개척하고 살아온 동네다.  

 

원촌마을에서 육사가 태어났다. 원촌마을은 풍광이 빼어나다. 낙동강이 청량산을 돌아 원촌에 와서야 제법 강의 자태를 나타낸다. 더 넓은 들판을 배경으로 호연지기를 기를 만한 곳이다. 풍수상으로는 오지탄금형(五指彈琴型)이라고 한다. 이는 마을 뒤로 뻗어 내려온 다섯 산줄기와 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물의 조화는 다섯 손가락으로 비파를 타는 형국이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이육사문학관으로 갔다. 그런데 문학관은 사라지고 다시 그곳에 문학관을 지으려고 하고 있다. 처음부터 잘 지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을 지은 지 10여 년 남짓된 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시 짓는다는 것은 얼마나 낭비인가. 행정을 하는 사람들은 의사결정에 신중에 신중을 다해야한다는 것을 한 번 더 느끼게 한다.

 

 

우리들은 육사생가터로 갔다. 이곳 역시 대대적인 수리를 시작하고 있다. 그나마 청포도 시비는 남아 있어 사진에 담아두고는 오늘의 숙박지인 농암종택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