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에메랄드 사원과 왕궁
신도중 부장연수로 태국을 다녀왔다.
2015년 12월 29일 저녁 8시 50분 김해국제공항을 이륙하여 예정된 시간에태국 방콕 수완나폼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작년 겨울에 간 캄보디아의 씨엠립공항까지 가는 시간과 비슷하게 걸렸다. 방콕도 라오스나 캄보디아와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보다 2시간이 늦다. 여기 시간으로 이미 자정이 넘었다.
그런데 방콕공항이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알고 보니 인천공항을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수완나폼 공항은 홍콩 국제공항과 싱가폴 창이 공항과 함께 아시아 3대 공항에 속한다. 규모면에서도 압도를 한다. 공항 수속은 비교적 빠른 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가이드는 공항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 태국 현지가이드가 우리 일행을 처음으로 맞이해준다. 자국민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공항뿐만 아니라 왕궁에서도 현지가이드만 설명할 수 있다. 관광버스 안에도 반드시 자국의 가이드가 함께 탑승해야만 관광이 가능하다. 관광수입을 늘리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지난 해에 다녀온 라오스, 캄보디아도 이와 같았다. 태국사람들은 태국을 쁘라텟 타이(Prathet Thai)로 부른다. 즉 ‘자유의 나라’란 뜻이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태국(泰國), 영어권에서는 타일랜드(Thailand)라고 표기하고 있다.
방콕은 ‘천사들의 도시’ 라는 뜻을 가진 인구 천백 만이나 되는 태국의 수도이다. 1782년 라마 1세 국왕 때 세워졌다.
늦은 시간에 로얄오키드쉐라톤 방콕호텔에 도착을 했다. 4시간 정도 잠을 잤는데 창문이 훤해져 저절로 잠이 깼다. 창문 밖으로 강이 보인다. 강가에는 작은 유람선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타고를 반복하고 있다. 주변 건물들이 다 높아서 방콕에 온 것을 실감나게 했다.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는 8시에 왕궁으로 향했다. 왕궁에 들어갈 때 옷차림에 주의해야 한다. 위에는 어깨를 덮는 옷을 입어야 한다. 민소매 티도 안 된다. 반바지도 안 된다. 심지어 종아리가 조금 나오는 7부 바지조차도 입으면 안 된다. 반드시 발목까지 다 덮는 바지를 입어야 한다. 신발은 뒤에 끈이 없는 슬리퍼 착용은 금지된다.
왕궁은 왕이 살고 있는 신성한 장소라서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국왕인 라마9세는 이 궁전에서 거주하지 않고 차로 약 15분 거리에 위치한 치틀라타 궁전에 살고는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규칙을 정해놓은 것이다.
우리 일행 중 한 분이 7부 바지를 입었는데 가이드가 입장불가라고 한다. 빌리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면서 우리 돈 5천원을 주고 치마를 샀다. 이런 규정도 관광수입을 올리기 위한 방편으로 보이기도 했다.
날씨는 너무 좋은데 햇살이 너무 강렬하다. 자외선 차단제를 발랐지만 피부가 따끈거린다. 자외선이 한국보다 8배나 강하다고 한다. 그런데 오전 8시 반인데도 인산인해다. 중국 유명관광지보다도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인다.
왕궁의 전체적인 느낌은 화려하다. 황금으로 된 원뿔탑을 위시하여 금박 잎새, 자기, 유리 등으로 장식되어 현란하고 눈이 부시다. 황금색의 건물들의 대부분은 금도금이지만 뾰족한 꼭대기들만 진짜 황금이라고 한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에메랄드 사원이다. 이 사원은 태국에서 가장 신비하고 신성한 에메랄드 불상 ‘프라깨우’가 보존돼 있어 에메랄드 사원으로 불린다. 영국의 대문호인 ‘서머세트 모음’이 태국의 사원에 대해 쓴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들은 세상의 어떤 것들과도 다르다. 그래서 당신은 놀랄 것이다.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처럼 환상적인 것들이 우울한 이 세상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당신은 즐겁게 웃게 될 것이다. 그들은 멋지다! 금빛과 순백색이 서로 어우러져 반짝인다. 결코 경박한 화려함이 아니다. 밝은 하늘과, 눈부신 햇살 속에서, 마치 자연을 농락하는 것 같지만, 인간의 창조적인 솜씨와 유쾌한 대담성이 그 부분을 채운다.”
이러한 사원들 중에서도 최고의 사원으로 평가받고 있는 곳이 에메랄드 사원이다. 사원의 공식 명칭은 “왓 프라 시 라타나 사사다람(Wat Phra Si Rattana Sasadaram)”이며 ‘아름다운 보석으로 만들어진 성스러운 스승의 상을 봉안하고 있는 사원’이라는 뜻이다. “왓 프라 깨오(Wat Phra Kaeo)”라 약칭하며 ‘에메랄드사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현지가이드는 사원의 회랑 밑에다 신발을 벗어놓고 들어가라고 한다. 신발은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는 신발을 아주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약간 서투르지만 제법 또렷하게 우리말을 아주 잘 한다.
자신의 태국이름은 너무 길기 때문에 가르쳐줘 봐도 우리들이 기억을 잘 못한다고 하면서 자신을 ‘홍명보’로 불러주면 된다고 한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영락없는 축구선수 홍명보 동생쯤으로 보인다. 서구의 피가 많이 섞인 것 같다. 키도 크고 코도 크다. 피부색도 현지인들보다는 희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이유는 에메랄드 사원이 신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원 회랑을 돌아서 들어갔다. 화려하기 그지없다. 온통 금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모음의 말이 한 번 더 떠올랐다. ‘결코 경박한 화려함이 아니라 밝은 하늘과, 눈부신 햇살 속에서, 인간의 창조적인 솜씨와 유쾌한 대담성’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 화려함을 다 표현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사원 입구가 나왔다. 사원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불상 앞에 여러 줄로 앉아 있었다. 나도 빈자리를 찾아 앉아서 불상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에메랄드의 푸른빛이 옅게 느껴진다. 짙은 비취색의 옥 불상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은은한 색상이다.
금으로 된 옷이 더 화려하게 보인다. 에메랄드불상은 높은 제단 위에 앉아 있다. 이러한 제단을 ‘부사복(Busabok)’이라고 부른다. 이는 왕들이 사용하는 어좌다.
그 앞 양쪽으로 화려하게 서 있는 불상은 라마 3세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는 선왕인 라마 1세와 2세를 위해 봉헌된 불상이다. 라마 1세와 2세의 유골이 이 불상들의 머리 안에 들어가 있다. 이곳은 1932년 군주제가 폐지될 때까지 이 불상 앞에서 신하들의 충성맹세의식이 거행되었다고 한다.
에메랄드불상은 높이 75cm, 폭 45cm의 한 개의 비취옥으로 조각된 불상이다. 비취옥으로 조각된 불상에 금으로 옷을 입혔다. 금으로 된 옷은 국왕이 손수 1년에 3번 즉 하기, 우기, 건기의 세 계절마다 옷을 갈아 입히는 의식을 거행한다고 한다.
비취옥으로 만들어진 불상이지만 에메랄드불상으로 이름 붙여진 데에는 처음 발견한 스님이 녹색의 옥을 에메랄드인 줄 잘못 알고서는 에메랄드 사원으로 불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옛사람들은 옥을 천지의 정수이며 음양에 있어 지극히 순결한 것이라 생각하고 대지의 정물(精物)로 여겨왔다. 또한, 옥을 품에 지니고 장식을 하면 약효가 나타나고 잡귀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에메랄드는 행운과 행복, 친절을 상징하는 선명한 녹색의 보석이다.
‘에메랄드(Emerald)’라는 말은 ‘녹색’을 뜻하는 라틴어 ‘스마라그두스(Smaragdus)’에서 유래되었다. ‘에메랄드그린(Emerald green)’이라는 이름의 색이 있을 정도로,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녹색 빛깔이 특징이다.
이 불상은 얼굴 모습 등으로 보아 15세기 경 태국 북부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나, 가부좌로 앉아 명상에 든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 때문에 훨씬 이전시대인 인도나 스리랑카 제작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 불상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다수설은 다음과 같다.
1434년 태국 북부의 치앙라이의 한 사원에서 탑이 번개에 맞았다. 번개를 맞은 탑은 무너지고 그 탑 안에는 껍질이 벗겨진 불상이 발견되었다. 석고에 덮여 있었던 불상이었다. 그런데 겉에 있는 석고를 벗겨내자 벽옥으로 조각된 불상이 속살을 드러냈다.
이 영롱하고 아름다운 불상이 영험한 불상으로 소문이 퍼져 나갔다. 소문을 들은 란나타이 왕국의 왕이 1436년 이 불상을 수도인 치앙마이로 옮기고자 했으나, 운반하던 코끼리가 람팡에서 움직이지 않아 그곳의 ‘왓 프라깨오돈타오’라는 절에서 봉안케 되었다. 1468년에 이르러서야 ‘틸로카랏’ 왕이 불상을 수도 치앙마이로 옮겨 ‘왓제디루앙’ 사원에 봉안하였다.
이로부터 80년이 지난 1548년에는 태국을 떠나서 라오스로 옮겨지게 된다. 라오스의 왕자로서 치앙마이를 통치하던 전왕의 외손자 ‘세타티랏’왕자가 라오스의 왕위를 잇기 위해 수도 루앙프라방으로 되돌아가면서 에메랄드 불상도 가지고 간 것이었다. 버마의 위협이 증가함에 따라 그는 1564년 수도를 비엔티안으로 옮겨 ‘왓 프라깨오’라는 사원을 짓고 에메랄드 불상을 이곳에 봉안하였다.
이때로부터 약 200년 후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이 버마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아유타야 출신의 ‘딱신’이 버마 세력을 몰아내고 ‘톤부리’ 지역에 새로운 태국 왕조를 수립했다. 1778년에는 ‘딱신’왕의 오른팔인 ‘짜오프라야 차끄리’ 장군이 라오스를 침공하고, ‘에메랄드’ 불상과 ‘프라방’ 불상을 전리품으로 가지고 와서 ‘톤부리’ 왕조의 왕실사원인 ‘왓챙’에 봉안하였다.
딱신왕의 오른팔인 짜오프라야 차끄리 장군이 딱신왕을 죽이고 새로운 왕조를 만들었다. 라따나꼬신 왕조(1782년–현재)가 훗날 라마 1세가 되는 짜끄리 장군에 의해서 개창되었다.
따라서 ‘에메랄드’ 불상은 1782년 차끄리 장군의 반란으로 ‘딱신’이 실각하고 ‘짜오프라야 차끄리’가 새 왕조의 왕이 되면서, 1784년 새 왕실사원인 에메랄드사원으로 옮겨져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 불상의 형태로 보아 15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나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 불상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인도의 유명한 학승인 나선(나가세나) 스님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후 모종의 이유로 스리랑카로 옮겨지게 된다. 11세기에 들어 버마를 최초로 통일한 빠간(Pagan) 왕조의 아누룻(1044-1077)왕이 불교로 개종을 하면서 스리랑카에 에메랄드 불상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배에 싣고 오던 중 표류하면서 캄보디아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캄보디아를 거쳐 최종적으로 치앙라이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불상을 손에 넣기 위해 버마, 란나타이, 라오스, 태국 등 당대의 각국 영웅들이 각축전을 펼치는 노력이 전설 또는 기록으로 남아 이 불상의 위상을 더 높여 준 것이다. 그래서 이 불상을 가진 나라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전설이 생겼을 정도라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에메랄드 불상은 국가의 수호신(팔라디움,palladium)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2천 년에 걸쳐 인도-스리랑카-캄보디아-캄펭펫-치앙라이-람팡-치앙마이-루앙프라방-브엉찬-톤부리-방콕이라는 긴 여정을 보내고 지금은 이곳 방콕에 있는 셈이다.
이 불상은 태국이 주변국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차지하는 위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들은 아주 자존심이 강하다. 서구열강의 식민지가 된 적이 없다는 의미에서도 찾아 볼 수 있겠지만 에메랄드불상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태국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역할도 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가이드에게 ‘이 불상이 라오스에서 뺏어온 불상이 아니냐?’ 라고 묻자 ‘라오스는 태국 땅’이라고 우리말로 단호히 대답을 한다. 즉 아직까지 찾지 못한 땅이라는 의미로 느껴졌다.
그런데 작년에 라오스 루앙프라방에서 만났던 라오스의 현지 가이드는 라오스의 2대 국보는 '황금불상'과 '에메랄드 불상'이라고 주장했다.
태국의 식민지 시절에 둘 다 씨암족들이 빼앗아 가 황금불상은 돌려주어 지금 루앙프라방에 있지만, 에메랄드 불상은 아직도 돌려주지 않고 있어 언젠가는 다시 찾아와 본래의 자리에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강조를 한 기억이 또렷이 난다.
불교사원인 이곳 지붕 정면과 벽 사이에 힌두교의 대표적인 세 명의 신, 즉 창조의 신 브라흐마,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가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사원의 복도 벽면에는 여러 힌두신의 모습과 함께 힌두교의 유명한 서사시 ‘라마야나’의 내용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불교와 힌두교가 융합된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가 처음 들어올 때 토속신앙과 결합되면서 우리나라 절에만 산신각이 있듯이 이곳 불교사원 역시 기존의 힌두교와 융합되어 태국식의 불교로 자리매김한 느낌이다.
에메랄드사원을 나와 뒤쪽으로 가자 황궁이 나왔다. 황궁 입구에는 태국 근위병 한 명이 지키고 있다. 그 옆에는 입구가 철문으로 잠간 궁전이 보인다. 이 궁전은 외국의 국빈이 방문하면 영빈관으로 쓰인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이 궁전을 숙소로 이용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국가원수는 태국에 오면 총리만 만나고 간다. 국왕을 만나고 이곳 궁전에서 잘 수 있는 외국 원수들은 그리 많지 않다.
태국은 6·25전쟁에 참전한 혈맹국으로 1958년 10월 1일 외교관계를 수립한 후에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해왔다. 아웅산테러 때 희생자들의 시신을 국왕 전용기를 내어주어 옮길 수 있었다고 한다.
현 국왕인 라마 9세는 특히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아웅산 테러 때 돌아가신 고 이범석 외무장관과는 아주 절친 사이라고 한다.
이곳 왕궁은 라마 1세부터 현재의 라마 9세까지 살았다. 그런데 라마 9세는 관광수입을 증진시키기 위해 이 궁전을 개방하고 자신은 이곳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치틀라타 궁전으로 옮겼다고 설명을 한다.
그러나 국가의 중요한 행사나 왕실의 중요한 행사는 지금도 이곳에서 거행되고 있다. 궁전의 형태는 서양과 동양이 혼재된 느낌이다. 역대 국왕들이 영국과 친하게 지낸 관계로 영국을 많이 모방했다. 궁전 근위병의 교대식도 영국의 근위병 교대와 똑 같이 한다. 그리고 차 운전석도 오른 쪽에 있다.
왕궁 안에는 한 무리의 태국 중학생들이 견학을 하러 왔다. 여학생은 단발머리이고 남학생은 짧은 머리를 하고 있다. 80년대의 우리나라 중학생의 모습과 흡사하여 정겨운 기분이 들었다.
관람을 하면서도 교복을 입고 질서를 지키면서 한다. 그런데 줄을 맞추기에 급급하여 정말 보아야 하는 것은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보고 가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일행은 왕궁을 뒤로하고는 강가로 나왔다. 강은 제법 넓고, 깊어 보인다. 이 강은 태국을 가로질러 흐르는 차오프라야강이다. 차오프라야강은 비옥한 중앙 평원을 통해 남쪽으로 365㎞ 이상을 흘러 타이만으로 들어간다.
역사적으로 태국의 수도들이 모두 이 강변에 위치했다. 이 물줄기를 통해 태국의 주요 수출품인 티크와 쌀이 운송된다. 태국인들은 여러 세기 동안 이 강과 여기에 딸린 운하시설을 배수·오락·어업·수원 등으로 이용해왔다.
우리 일행은 여기서 유람선을 탔다. 유람선에 오르자 제일 먼저 가이드는 이 물이 똥물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 동안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똥물이라고 말했는지가 짐작이 간다. 내가 느끼기에는 낙동강에 홍수가 났을 때 볼 수 있는 흙탕물이다. 물의 탁도가 높아서 그렇지 오염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유람선을 타고 조금 가다보니 멋진 탑이 보인다. 가이드가 캄보디아 사람들이 천 년 전에 아무런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건설한 탑이라고 설명을 한다.
탑의 높이는 67m라고 한다. 천 년 전에는 이곳이 크메르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리고 보니 앙코르와트 사원과 많이 닮아 보인다.
운하를 따라 계속 가자 서민들이 살고 있는 수상가옥이 나타났다. 좁은 공간에 각종 나무와 꽃이 심어져 있다.
바나나 나무, 야자나무 종류 등이 보이고 부겐베리아와 라오스 국화로 알려진 독참파 또는 프랜지파니로 불리는 꽃도 많이 보인다. 수상가옥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에 더위를 피하기 위해 물가에 집을 짓고 산다고 한다.
배가 제법 큰 절 앞에 멈추었다. 이곳은 물고기를 방생하는 곳이라고 했다. 강물에 식빵을 던지자 고기들이 많이 몰려 왔다. 가이드가 우리말로 ‘물반고기반’이라고 설명을 한다. 다시 출발한 장소로 되돌아 왔다.
우리 일행은 차오프라야 강을 뒤로 두고는 30분 정도 더 달려서 우리 교민이 운영하는 한국식당에서 점심을 먹고는 파타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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