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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시대의 희생양 국보 16호 신세동칠층전탑

by 황교장 2007. 6. 28.
 

시대의 희생물 국보 16호 신세동칠층전탑


삼태사묘를 나와 안동댐으로 향하면 중앙선 철길 넘어 우뚝 선 탑이 보인다.

이 탑이 국보 16호인 신세동칠층전탑이다.

철길 방음벽에 가려 가까이 가서 보지 않으면 겨우 윗부분만 보여 탑의 본 모습을 느끼기 어렵다. 철길만 없다면 멀리서도 전체를 다 조망할 수 있을 텐데 철길이 저렇게 놓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신세동칠층전탑


수 년전에 충주 남한강가에 있는 중원탑평리칠층석탑(국보 6호, 일명 중앙탑)을 보면서 친구와 내기를 한 적이 있다. 진 사람이 그날 술값 책임지기.

내기의 내용은

‘중원탑평리칠층석탑과 감은사지삼층석탑 중 어느 탑이 더 높은가? ’였다.

나는 감은사지삼층석탑에, 친구는 중앙탑에 걸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감은사지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은 13.4m, 중앙탑은 14,5m...

결국 그날 술값은 모두 내 몫이었다.

우리나라 석탑 중에서 제일 높은 탑이 중앙탑이다.


그런데 신세동칠층전탑의 높이는 16.8m이다.

전탑을 포함시킨다면 단연 최고 높이의 탑은 신세동칠층전탑이다.


안내판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 탑은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다. 탑의 높이는 16.8m, 기단 폭은 7.75m이며, 단층기단에 7층의 몸돌(塔身)을 차츰 크기를 줄여가며 쌓아 올려 놓았다.

이 탑이 있는 일대가 법흥동인 점으로 미루어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되었다는 법흥사가 있었다는 것으로 추측되나, 탑 이외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이 터에는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이 있다.

이 탑은 기단부(基壇部)와 탑신부(塔身部) 및 탑두부(塔頭部)로 되어 있었으나, 현재 탑두부는 노반(露盤)이 남아 있고, 상륜부(相輪部)는 유실되었다.

기단부에는 네모꼴로 팔부중상(八部衆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 한 판석이 축조되어 있으며 팔부중상과 사천왕상의 조각수법에는 서로 차이가 있다.

각층 지붕 윗면에는 기와를 이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는 목탑이 전탑보다 앞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안동의 역사서인 ‘영가지’에는 조선 성종(成宗) 18년(1487)에 고쳐졌고, 당시까지 법흥사가 3칸 정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간결하면서도 잘된 설명이다. 어려운 용어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팔부중상 : 부처가 설법할 때 항상 따라다니며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8종류의 신장상(神將像)

사대천왕 : 수미산 중턱에 살면서 사방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는 4명의 대천왕으로, 동방에 지국천왕(持國天王), 서방에 광목천왕(廣目天王), 남방에 증장천왕(增長天王), 북방에 다문천왕(多聞天王)을 말한다.

절에 가면 천왕문 안에 무서운 형상으로 조각해 놓은 것이 사대천왕이다.


석가모니가 열반(涅槃)하여 화장(火葬)을 하니 사리(舍利)가 나왔다. 이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지은 축조물이 탑의 기원이다.

탑(塔)은 탑파(塔婆)의 준말로 범어인 stupa를 한자(漢字)로 표기한 것이다.

탑의 형태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형 되었다.


중국은 목탑과 팔각형의 전탑이 주류를 이루나, 우리나라로 넘어 오면서 풍토와 환경에 맞게 변형이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화강암이 많아 화강암을 사용한 석탑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돌을 벽돌처럼 보이도록 다듬어서 만든 모전석탑과 나무로 만든 목탑, 벽돌로 만든 전탑이 있다.


전탑(塼塔)은 흙을 구워서 만든 벽돌로 쌓아올린 탑이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전탑은 모두 다섯 기가 전부다.


1. 안동 신세동 7층전탑(국보 16호)

2. 안동 동부동 5층전탑(보물56호)

3. 안동 조탑동 5층전탑(보물57호)

4. 칠곡 송림사 5층전탑(보물189호)

5.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225호)


이처럼 안동 중심으로 전탑이 많이 세워진 데에는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대체적으로 이 지역이 퇴적암 지대라서 화강암을 구하기가 어렵고, 벽돌을 구울 수 있는 양질의 펄이 생산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비교적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처럼 현존하는 전탑은 매우 귀한 존재다.


전성기 때의 신세동칠층전탑을 상상해보면 탑신에 기와가 있는 것을 볼 때 목탑형식을 취한 전탑이 아닐까? 즉 기와지붕을 얹고 상륜부에는 송림사 오층전탑의 상륜보다도 훨씬 화려한 금동상륜으로 장식된 아름답고 기품이 있으면서도 당당하고 웅장한 탑이었을 것이라고 상상된다.

 

 목탑의 흔적인 기와가 남아 있는 모습


하지만 이렇게 귀한 탑이 받는 대접은 아마도 우리나라 국보 중에서는 가장 푸대접이 아닐까 생각된다.

중앙선 철길이 바로 앞에 놓여 열차가 지날 때마다 진동으로 인해 탑의 붕괴 위험이 늘 상존한다.

또한 이 탑을 1916년 일제 강점기 때 보수공사를 하면서 기단부 위에 시멘트를 발라 수리한 것은 흉물 그 자체다. 팔부중상과 사천왕상의 판석 배열도 엉성하고 탑의 일부가 균열이 간 부분도 많다.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안동시에서 발행한 관광지도로 중앙선 철로 노선을 자세히 살펴보면 북후면의 옹천역부터는 누가 보아도 국도 5호선을 따라 안동역으로 직선에 가깝게 노선을 내는 것이 그 길이가 짧아 공사비 등 여러 측면에서 훨씬 유리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제가 굳이 먼 거리를 우회한 것은 신세동칠층전탑과 임청각의 지맥을 끊어 더 이상 독립투사가 나오지 않기위해 이곳으로 철도를 놓았다고 한다.

일제가 우리의 문화유산인 신세동칠층전탑과 독립투사인 석주 이상룡 선생 생가 임청각의 맥을 끊기 위해 놓았던 중앙선이 개통된 지도 어느 새 거의 7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 우리는 끊어진 맥을 이어놓을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다.

잘못 놓인 중앙선도 정상적인 곳으로 옮기고, 탑도 원형에 가깝게 복원을 해야 할 때가 이미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이상룡 선생의 생가 임청각으로 향했다.

 탑의 세부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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