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륜산 대둔사와 서산대사
완도수목원을 나오면 갈림길이다. 왼쪽은 해신 촬영한 세트장이 나오고 오른쪽은 완도대교 방향이다. 해남으로 가려면 완도대교로 가야 한다. 날이 맑고 가시거리가 좋아 바다 건너편에 산세가 매우 빼어난 산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미황사가 있는 달마산이다. 달마산이 오라고 유혹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너무 덥다. 계곡이 좋은 대둔사가 더욱 아름답게 유혹을 한다. 완도를 나와 대둔사로 향하는 길가에 유명한 해남 화산고구마를 곳곳에서 팔고 있다. 그 지방의 특산물을 맛보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이다. 고구마를 샀더니 인심 좋은 아주머니가 옥수수를 덤으로 준다. 화산고구마는 밤보다도 더 타박이다. 지형적으로 화산면 일대가 황토밭이라고 한다. 이 황토밭에서 나오는 고구마만이 이러한 맛을 낼 수 있다고 한다.
두륜산 대둔사 일주문
어느새 대둔사 입구에 도착했다. 그 동안 대둔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왔다. 그런데도 올 때마다 새로운 것을 하나씩 배우고 간다. 오늘 날씨는 정말 덥다. 마침 매표소 옆에 전에는 보지 못한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팥빙수를 팔고 있다. 평소에는 이런 곳에 잘 가지 않는데 오늘은 날이 너무 더워 팥빙수에 끌렸다. 팥빙수를 먹고 나니 한결 더위가 가신 느낌이다.
개울에는 물이 많다. 비가 많이 왔다는 증거다. 매표소를 조금 지나면 편액에 頭崙山大芚寺(두륜산대둔사)라고 적힌 일주문을 만난다. 일반적으로 대둔사라면 잘 모르고 대흥사라고 해야만 사람들이 안다. 이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두륜산은 중국의 곤륜산(崑崙山) 줄기가 한반도로 흘러 백두산(白頭山)을 이룬다. 백두대간을 타고 마지막으로 맥을 맺은 곳이 바로 이곳이라 하여 백두산의 두(頭)자와 곤륜산의 륜(崙)자를 따서 두륜산이라 불렀다. 대둔사를 예전에 이곳에서는 한듬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은 우리말로 ‘크다’는 뜻이고, ‘듬’은 ‘둥글다’ 또는‘덩어리’라는 뜻이다. 즉 ‘큰 덩어리’라는 뜻이다. 이것을 다시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 ‘대둔’이다. 따라서 대둔사가 되었다고 한다.
두륜산 정상
이 ‘대둔사’라는 이름이 일제 때 지명을 새로 표기하면서 頭輪山大興寺(두륜산대흥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즉 산 이름 륜(崙)이 바퀴 륜(輪)으로, 싹 나올 둔(芚)이 흥할 흥(興)으로 바뀐 것이다. 일제 때 바뀐 이름을 바로잡은 것이 1993년이다. 그러니 이젠 원래대로 ‘대둔사’라 불러야지 ‘대흥사’라고 하면 일제의 잔재를 인정하는 꼴이다.
편백나무 숲
일주문을 지나면 울창한 숲길이 십 리나 이어져 있다. 우리나라의 절에는 절집까지 걸어가는 데 운치 있는 길이 많다. 통도사의 소나무길, 내소사와 월정사의 전나무길, 청도 운문사 길 팔공산 은혜사길 등 아름답고 운치 있는 길이 많다. 그러나 대둔사만큼 숲이 울창하면서 긴 길은 아마 드물 것이다. 여름 한낮인데 그 쨍쨍한 햇살을 다 가려준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숲 터널을 만들었다. 우선 눈에 보이는 나무만도 다양하다. 갈참나무, 졸참나무, 단풍나무, 산벗나무, 동백나무, 느티나무, 삼나무, 편백나무 숲 등 다양한 수종들이 어울려 울창한 숲을 형성하고 있다.숲길을 즐기면서 걸어가다 보니 바로 앞에 유선여관이 보인다. 작년 12월 말에 학교에서 단체로 문화체험연수를 왔다가 밤에 너무 소란스럽게 한다고 주인한테 혼난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유선관을 지나면 바로 피안교(彼岸橋)다. 차안(此岸)의 세계에서 피안(彼岸)의 세계로 넘어온 것이다. 옛날 매표소가 있던 입구를 지나면 시원한 샘물이 나온다. 샘물을 한 잔하고 조금만 더 가면 부도밭이 나온다.
대둔사 부도밭
서산대사 부도를 비롯하여 13대종사 13대 강사의 부도밭이다. 부도의 수가 총 56기다.아마 우리나라 부도밭 중에서 가장 클 것이다. 지난 겨울 직원 연수 때에 달밤의 고즈넉한 부도밭을 감상하려고 자정 경에 나왔는데 입구에서 막아 가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25년 전에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풀이 우묵이 자라 있고 담장도 없어 운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담장을 둘러 문도 잠겨있어 가까이 가 보지를 못한다.
우선 담장을 따라 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것은 초의선사탑비이다. 이 탑비에 예서체로 ‘초의대종사탑명’이라는 글자가 뚜렷하게 보인다. 이 비석 뒤에 있는 것이 추사 김정희와 동갑이면서 절친한 친구인, 동다송의 저자이자 마지막인 13대 대종사이며 다성인 초의선사의 부도이다.
초의선사탑비
이 부도밭의 안내판에는 “대흥사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 1347호)”라고 써져 있는데 정작 이 많은 부도 중 어느 것이 서산대사 부도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늘 궁금했다. 유물전시관에서 사진으로 보고 절을 내려오면서 다시 실제로 확인한 것이 이번 여행의 수확 중 하나다. 안내판에 대둔사로 바꾸고 서산대사의 부도 사진이라도 같이 제시한다면 부도밭을 찾는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인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서산대사 부도
서산대사 부도에 새겨진 청허당 글씨가 선명하다
대둔사는 서산대사 때문에 유명해진 절이다. 서산대사가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을 앞두고 마지막 설법을 했다. 청허당 서산대사는 제자인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처영에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해남 두륜산에 두라고 부탁했다. 불가에서 가사와 발우를 전하는 것은 자신의 법을 전하는 것을 뜻한다.
세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첫째, 三災不入之處(삼재불입지처)다. 즉 전쟁과, 기근, 전염병이 없는 땅이다. 둘째, 萬歲不毁之處(만세불훼지처)다. 대둔산은 기화이초가 항상 아름답고 옷과 먹을 것이 항상 끊이지 않아 만세토록 이어지는 땅이다. 셋째, 宗統所歸之處(종통소귀지처) 여러 제자들이 남쪽에 있고 내가 머리 깎은 곳도 지리산이니 남쪽은 종통이 돌아갈 곳이다.
그리고 자신의 영정 뒷면에다 마지막 법어를 적었다. 법어의 내용은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팔십년전 거시아, 팔십년후 아시거)’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이더니, 팔십 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구나” 라고 써 놓고 결가부좌한 자세로 입적했다. 85세의 연세였고 법람 67년이었다. 대단한 공력이시다. 제자들은 시신을 다비한 후 묘향산 보현사와 안심사 등에 부도를 세워 사리를 봉안하고 영골(靈骨)은 금강산 유점사 북쪽 바위에 봉안했다. 금란가사와 발우는 유언대로 대둔사에 모셨다.
그런데 여기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분명히 금란가사와 발우만 가지고 왔다는 데 청허당이라고 쓰인 서산대사의 부도가 보물로 지정이 되어 있는 것이다.
대둔사는 구역을 네 곳으로 나누어서 보아야 한다. 대웅전이 있는 북원과, 천불전과 요사체가 있는 남원, 그리고 나라에서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표충사 영역, 마지막으로 표충사에서 북암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대광명전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대웅전으로 향했다. 대웅전은 대둔사에서 제일 낮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절이 처음 지을 때는 아담하게 남향으로 지어진 것이다. 풍수 상으로도 배산임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뒤쪽은 산으로 둘러져 있고 앞에는 내가 흐르고 있다. 입구에 있는 침계루를 지나면 대웅전이 나온다.
침계루
침계루의 현판의 글씨가 독특하다. 동국진체의 완성자 원교 이광사의 행서체 글씨다. 대웅보전 현판도 이광사의 글씨다. 원교 이광사는 동국진체를 완성한 분이다. 동국진체의 창시자는 녹우당 현판을 쓴 옥동 이서를 시작으로 공제 윤두서, 백하 윤순을 거쳐 이광사가 완성했다고 한다.
무량수각 현판(추사글씨)
대웅보전(왼편에 사람들이 들고 가는 것이 괘불임)
그 옆 무량수각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대웅보전 현판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추사선생이 제주도로 유배를 가면서 대둔사에 들렀다. 현판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인 초의선사에게 촌스러운 이광사의 글을 떼어 내고 자신이 직접 쓴 ‘대웅보전’ 현판을 걸게 하였다. 이때 ‘무량수각’ 현판도 하나 더 써 주었다. 9년 후 유배에서 풀려 대둔사에 다시 들렀다. 이때 초의선사에게 이전에 떼라고 한 이광사의 현판을 도로 걸게 하고는 자신의 글씨를 떼어내게 했다고 한다.
나의 모자라는 눈으로 두 현판의 글씨를 한창 비교를 했다. 그러나 우열을 가릴 수는 없었다.
대웅전에서 마침 괘불을 말리고 도로 넣는 광경을 목격했다. 조금만 더 일찍 갔더라면 괘불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아서 도로 접어 넣는 광경만 보아 아쉬웠다. 괘불을 말리는 것은 10년에 한 번 볼까 말까하는 풍경이라고 한다.
응진전 앞 삼층석탑
대웅전 좌우에 명부전과 범종각, 응진전이 나란히 있다. 응진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이 보물 제320호다. 이 탑의 높이는 4,3m로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형태를 따라 만들어졌다. 단아하면서도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신라 석탑의 영향이 한반도 서남해안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도 그 의미가 크다고 한다.
천불전
북원에서 대웅전을 본 후 천불전을 보기 위해서는 남원으로 다시 나와야 한다. 천불전에 들어가는 입구가 가허루다. 가허루의 현판글씨는 전주에서만 활약했다는 창암 이삼만의 글씨이고, 천불전 현판 글씨는 이광사 글씨다. 천불전의 불상은 석공 열 사람이 6년 동안 경주 불석산 옥돌로 천불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불상을 배 3척에 나누어 싣고 해남으로 출발을 했는데 그만 한 척이 풍랑에 표류하다가 일본 나가사키현으로 흘러갔다. 옥불을 본 일본사람들은 절을 지어 모시려고 하는데 그들의 꿈에 불상들이 나타나 자기들은 해남 대둔사로 가는 길이니 여기에 머물 수 없고 대둔사에 가야한다고 했다. 이에 다시 돌아온 것이라고 한다. 일본에서 다시 돌아온 불상의 어깨나 좌대 아래에 일(日)자를 써 넣어 표시했다고 한다. 일자를 찾아 보려고 하니 불상마다 다 옷을 입혀 놓아서 볼 수가 없었다.
천불전 안 불상
천불전은 문창살의 문양이 아름답게 만들어져 유명하다. 천불전에서 보는 두륜산 정상은 정말 아름답고 멋이 있다.
천불전 창살
천불전에서 본 두륜산 정상(가련봉, 703m)
다음은 서산대사를 모신 표충사로 향한다. 표충사는 유물전시관 뒤에 있다. 절집 같지 않고 서원에 온 느낌을 주는 곳이다.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사명대사와 뇌묵당 처영스님을 함께 봉안하고 있다. 표충사 현판의 글씨는 금물로 쓴 정조대왕의 친필이고 어서각의 현판 글씨는 추사의 제자인 신관호의 글씨다.
따라서 당대 명필의 글씨는 이 곳 대둔사에 다 모여있는 셈이다.
표충사 현판(정조어필)
이젠 마지막 구간인 대명광전구간이다. 대명광전은 초의스님과 소치 허련, 위당 신관호가 추사 김정희의 유배가 풀리기를 기원하면서 지었다는 곳이다. 대명광전의 편액은 추사의 제자인 신관호 글씨고, 단청은 초의선사가 직접 했다고 한다. 한 번 볼 욕심으로 들어가 보려 했으나 지금은 선원으로 사용하므로 일반인들은 출입을 할 수 없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간 곳이 유물전시관이다. 이곳에는 서산대사의 가사와 발우, 친필선시, 신발, 선조가 내린 교지 등 유물과 정조가 내려준 금병풍 등이 보관되어 있다. 가운데에는 고려시대 동종인 탑산사 동종(보물 88호)도 함께 보관되어 있다. 전남 장흥군 대덕읍 연지리에 있던 탑산사 종이었으나, 일본 헌병대와 만일암 등을 거쳐 지금은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탑산사 동종
또 다른 한 칸에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전시실이 하나 더 있다. 초의 선사에 관한 전시실이다. 초의 선사가 저술한 책과 직접 그린 불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초의선사가 그린 불화
이젠 암자만 빼면 대둔사를 거의 다 본 셈이다. 암자는 내일 새벽에 등산 겸 답사할 계획으로 이젠 숙소로 내려 가야 한다.
내려가다가 보니 피안교 다리 밑에서 동동주를 마시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참새가 방아간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시원한 막걸리에 도토리묵이 감칠맛을 낸다. 냇가에 발도 담그고 보니 맞은편이 바로 유선관 담장이다.
막걸리 한 잔 하고 발 씻는 모습(앞 기와집이 유선관)
소동파의 상심16사(嘗心十六事 : 16가지를 즐겁게 감상하는 마음)의 세 번째가 '여름 시냇물에 발씻기'라더니 나는 오히려 첫번째가 아닌가 싶었다.
알딸딸한 기분으로 십 리 숲길을 더운 줄도 모르고 콧노래 부르면서 내려왔다. 이 기분은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평생을 살아도 모르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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