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여행2-백련사와 다산초당
선암사를 나와 강진 백련사로 가는 길은 전형적인 남도의 시골길이다. 이 길은 금둔사를 지난다. 금둔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찍 핀다는 납월홍매가 있다.
금둔사입구를 지나자 길가의 가로수는 연분홍꽃이 한창이다. 살구꽃이다. 살구꽃이 도화만큼 선정성인 색깔이라 정감을 더한다.
길은 벌교를 지나 조성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자 옆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이곳 기억나느냐? 라고 묻자 거침없는 대답이 연미정이라고 한다.
순간적으로 열화정이지 무슨 연미정이냐고 할 뻔했다. 이곳은 작년 가을에 국립순천대학교 총장을 지낸 자랑스런 대학 동기인 박총장의 아들 결혼식에 같이 온 곳이다.
결혼식이 저녁 시간이라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순천 근처에 있는
강골마을
열화정
강골마을과 열화정, 우천리 삼층석탑,
우천리 삼층석탑
초암정원
초암정원을 답사하고는 조성면사무소 근처에서 점심을 먹은 곳이 연미정이다.
사람마다 기억의 회로는 다 다른 셈이다. 하나 더 기억이 나는 것은 그날 비가 많이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차에서 내려 답사하면 비가 그치고, 차를 타면 비가 오고를 반복했다. 그런데 답사를 다 마치고 조성에서 순천에 있는 예식장으로 갈 때는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다가 폭우로 변했다. 지금까지 경험한 가장 심한 폭우였지만 무사히 예식장에 도착을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폭우 속에도 수많은 하객들이 참석했다는 점이다. 평소에 박총장이 얼마나 잘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면이었다. 예식이 시작되고는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요즘 예식장의 풍토는 주례자 없이 예식을 신랑 신부의 부모들이 주관한다. 박총장이 주례사를 시작하면서 서두에 가장 먼저 멀리 부산에서 20살에 만나 지금까지 함께한 대학동기들이 찾아와 주어 매우 고맙다는 말을 해주어 감동이었다. 주례사 역시 총장의 내공이 뭔지를 확실히 보여준 명주례사 였다. 총장친구가 더욱 자랑스러운 하루였다.
박총장은 고등학교 시절 당시 가장 유명한 잡지사인 진학사 주관 전국영어경시대회에서 전국 최우수상을 받았다. 토익과 토플도 만점받은 언어 천재이다. 88올림픽 때에는 VIP 통역관으로도 활약했다.
이번 여행에도 함께 하기로 했지만, 순천의 국제행사인 국가정원 박람회 행사의 통역요원들을 교육하는 총책임을 지고 있어 여행 참석은 못했지만 남도 여행 마지막 일정에 순천에서 점심을 함께 하였다. 퇴직 후에도 지역사회를 위해 재능을 기부하는 박총장의 모습은 참 좋아 보인다.
지나가는 풍광은 장흥을 지나 강진을 경유하고는 구강포를 옆에 끼고 백련사 일주문 앞 주차장에 도착했다.
백련사 일주문
내가 운전하는 차는 국도로 왔지만 다른 친구들은 고속도로로 와 이미 도착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련사 일주문을 보자 더욱더 반가웠다. 불과 20여 일 전에 단짝 친구들과 이곳에 와 동백꽃을 즐겼기 때문이다.
그날은 비가 와 분위기가 오늘과는 또 달랐다. 여행에는 날씨가 주는 영향이 제일 크다고 생각된다. 예전에는 여행은 누구와 같이 가느냐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날씨가 일단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같이 맑고 가시거리가 좋은 봄날은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백련사 해탈문
일주문을 지나니 바로 동백숲이다. 누가 뭐래도 백련사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천연기념물 제151호인 동백숲이다. 동백으로 유명한 곳으로 마량리 동백나무숲과 선운사 동백이 있지만 이곳의 동백이 더욱더 운치가 있고 정감이 간다.
선운사 동백은 뒷산의 경사가 많이 져서 접근성이 불편하고, 마량리는 한전의 공장들이 있어 아름다움이 덜하지만, 백련사에는 1,500여 그루의 동백이 주변의 비자나무, 후박나무, 왕대나무, 차나무 등과 함께 어우러져 자생하고 있어 자연의 본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 백련사가 위엄있게 우뚝 버티고 있다. 보통 일반 절집은 아늑함을 주는데 백련사는 위엄을 나타낸다.
구강포
대웅전을 등 뒤에 두고 이곳 풍수를 보면 우백호는 명당의 요건을 갖추고 있지만 좌청룡이 약하고 북현무가 너무 급경사이다. 좌청룡이 약한 덕에 구강포의 풍광이 일품이다. 구강포는 아홉 고을의 물길이 흘러든다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좌청룡에 결함이 있는 절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중간중간 사라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땅이라고 하는데 이곳의 풍수와 같이 백련사의 역사도 중간중간 끊어졌다가 이어져 왔다.
백련사는 구산선문 중 보령 성주산문을 연 무염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그후 절이 없어지고 터만 남았는데 고려 후기 무신정권 시절에 요세(1163-1245)스님이 백련결사를 조직하여 천태종의 법맥을 이어간다. 이후 120년간 8명의 국사를 배출한 대단한 절이었다. 그러나 고려말 왜구의 침략으로 백련사도 폐사되었다. 조선왕조에 와서 효령대군의 후원으로 행호 스님이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백련사 대웅전은 현판 글씨로 더 유명하다. 동국진체의 완성자인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이기 때문이다. 동국진체는 녹우당 현판을 쓴 옥동 이서를 시작으로 공제 윤두서, 백하 윤순을 거쳐 원교 이광사가 완성했다.
백련사에는 이광사의 글씨가 세 점이나 있다. 대웅보전, 만경루, 명부전이 그 주인공이다. 우리가 잘 아는 연려실기술의 저자인 이긍익이 이광사의 장남이다.
동국진체는 중국의 서체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추사체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독특한 필법이다. 지금은 동국이라는
말이 중국의 속국처럼 느껴져 잘 쓰지를 않고 이광사의 호를 따 원교체라고 한다.
동국진체 역시 추사체처럼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글씨다. 대가들의 글씨는 역시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 만경루의 이름도 이곳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는 경치가 너무 좋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백련사 명부전
개인적으로 백련사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만경루 앞에 있는 배롱나무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생긴 배롱나무가 아닌가 생각된다. 전국적으로 유서 깊은 곳에는 배롱나무가 많이 심겨 있다.
경주의 서출지와 안압지를 비롯하여 부산 양정의 정묘사에는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된 무려 800년이나 된 배롱나무가 있다.
정묘사 배롱나무
정묘사에 있는 세 그루의 배롱나무는 묘역에 있어 접근하기가 쉽지 않지만, 백련사 배롱나무는 만져 볼 수도 있고 손으로 간지럼을 태워볼 수도 있다. 여름방학에 이곳에 오면 목백일홍이 절정을 이룬다.
백련사 배롱나무
선국사 배롱나무
배롱나무는 대갓집 안채에는 절대 심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나무줄기의 매끄러움 때문에 여인의 나신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다. 즉 여인들이 벗고 있는 형상이어서 바람이 난다는 의미로 바람나무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반야사 배롱나무
그렇지만 절 마당에 많이 심는 것은 배롱나무가 껍질을 다 벗어 버리듯 스님들 또한 세상의 번뇌를 벗어버리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라는 의미이다.
병산서원 배롱나무
또 선비들이 생활하는 서원이나 향교에 심는 것은 배롱나무가 껍질 없이 벗고 있는 것처럼 선비들도 엉큼하게 감추지 말고 모든 생각과 행동을 청렴결백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선비나무라고 불리기도 한다.
명옥헌 배롱나무
그런데 가장 재미있는 것은 배롱나무의 꽃을 ‘못난이꽃’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평생 바람만 피우던 미운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남편의 묘 옆에 배롱나무를 심어준다는 것이다.
서출지 베롱나무
배롱나무 꽃은 향기가 없다. 즉 배롱나무는 더운 한여름에 향기도 없이 100일 동안 질리게 피어 있다는 의미다. 우리 속담에 여름 한 철은 ‘첩을 팔아서 부채를 산다’라는 말이 있다. 더운 여름에 사랑하는 첩도 싫어서 이를 팔아 시원한 부채를 산다는 의미다. 그런데 바람둥이 남편이 죽어서도 향기도 없는 여자와 한여름 백일 동안 묘 옆에서 같이 질리게 피어 괴로움을 당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백일홍은 질리는 꽃이 아니라 ‘가슴 아픈 사랑의 꽃’이기도 하다. 내가 가본 곳 중 영동의 반야사, 남원의 선국사, 병산서원, 도동서원, 명옥헌에 있는 배롱나무는 다시 보고 싶은 나무들이다.
안압지 배롱나무
백련사 경내를 둘러보고는 20일 전에 왔을 때에는 매화가 한창이었는데 이미 꽃잎마저 풍장으로 장사를 지내고 없어졌다. 시간에는 장사가 없는 셈이다. 백련사를 다 둘러보고 조금 내려오면 갈림길 왼편에 ‘다산초당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왜구의 공격에 대비하여 쌓았다는 돌담길을 지나간다. 들어오는 입구의 동백숲도 아름답지만, 진짜 동백은 이곳의 동백이다. 몇백 년을 버텨온 아름드리 고목 동백이다.
백련사 승탑
동백숲 사이에는 이름 없는 스님들의 승탑이 드문드문 서 있다. 이곳에는 야생녹차밭도 넓게 조성되어 있다. 녹차밭을 지나 고개를 하나 넘으면 다산초당이 나온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과 혜장선사(1772-1811)가 유불(儒佛)의 경계를 넘어 우정을 나누면서 오고 갔던 길로 알려져 있다. 혜장선사는 나이 서른에 불교학술대회를 주도할 만큼 대단한 학승이다. 혜장선사는 다산보다 열 살 연하였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아주 깊었다고 한다. 다산은 혜장을 통해 차를 알게 되었고, 그 후에 혜장을 통해 초의 선사 의순(1786-1866)과도 교류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연이 있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지만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 차로 다산초당이 있는 귤동마을로 갔다. 늦은 시간이라 주차장에는 차가 한 대도 없다.
우리 일행뿐이다. 다산초당은 정약용선생이 18년에 걸친 강진 귀양살이 중 10년을 지낸 곳이다. 선생의 호가 다산인 것은 다산(茶山)이 차나무가 많았던 만덕산의 별칭이었기 때문이다.
다산초당은 해남윤씨들의 마을이다. 다산의 모친이 공재 윤두서의 친손녀이다. 이 마을 윤씨들은 다산의 먼 외가뻘이다. 마을을 지나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가면 다산초당이 나온다. 원래 이곳은 처사 윤단의 초당이었다.
다산초당
다산은 초당 좌우에 동암과 서암을 짓고, 서암은 주로 윤단의 아들과 손자들의 거처로, 초당은 교실로 썼다고 한다. 초당에 걸린 다산초당 현판과 동암에 걸린 보정산방 현판은 모두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보정산방
이중 다산초당은 추사 글씨를 여기저기 집자해 만든 것이지만, 보정산방은 추사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는 다산보다 24년 연하로 평소 다산을 몹시 존경했다고 한다.
다산동암
동암에는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다산동암이라는 현판도 함께 걸려 있다. 동암을 나오면 천일각이 있다.
천일각
천일각에서 바라다보는 구강포의 경관은 일품이다. 다산선생 당시에는 이 누각은 없었다. 당시에 있었던, 1821년에 지은 자찬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무진년(1808) 봄에 다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축대를 쌓고 연못을 파기도 하고 꽃나무를 벌여 심고 물을 끌어다 폭포를 만들기도 했다. 동서로 두 암을 마련하고 장서 천여 권을 쌓아두고 즐겼다. 다산은 만덕사의 서쪽에 위치한 곳인데 처사 윤단의 산정이다. 석벽에 ‘정석(丁石)’ 두 자를 새겼다.”
정석
이 글을 통해 보면 당시에 있었던 건물은 다산동암과 보정산방 뿐이었다. 지금은 기와로 잘 지어져 있지만 당시에는 초가였다. 위대한 저서들이 이곳에서 집필되었다. 오랜 유배생활이 목민심서와 같은 거작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여러 가지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개울물이 졸졸 흐르는 비탈길을 따라서 내려와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주작산 자연휴양림이다.
이곳은 강진군청에서 운영하는 휴양림으로 시설도 좋고, 경치도 좋고, 같이하는 사람들도 좋아 모두가 대만족이다.
삶이 힘들고 고달플 때는 여행이 최고라고 생각된다. 그동안 사주팔자를 고칠 수 있는 개운(改運)법 중에서 여행이 으뜸이라고 여겨왔다. 여행은 일상의 고민이나 고통에서 벗어나 이를 극복하는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유적지가 있는 곳은 나보다 먼저 살다가 간 선현들의 자취가 배어 있고, 선현들의 아름다운 삶이 시공을 넘어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한편으로는 외롭고 쓸쓸한 존재이다. 이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 중 오래된 친구들과 함께 낮선 곳에서 밤을 같이 하는 여행이 좋은 대안이 된다. 20대 초반에 만나 거의 50여 년을 지내 온 대학동기생들과 하는 이번 여행은 그런 의미를 충족시켜 주었다. 좋은 기운이 가득한 곳에서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아봐주는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맛있는 한 끼를 먹는 것, 그것 더 이상 바랄 것이 있는가!
여기서 다산의 삶을 알아보자. 다산의 부친은 진주목사를 지낸 분이고, 모친은 해남 윤씨다. 다산의 친가는 나주 정씨로 문과 급제자를 64명이나 배출된 명문 집안이다. 9대에 걸쳐 옥당(玉堂)이 나온 집안은 나주 정씨뿐이라고 한다. 정조대왕도 “옥당은 정가지세전물(丁家之世傳物)이로고”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옥당은 홍문관(弘文館)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옥당은 홍문관의 부제학 이하 교리•부교리•수찬•부수찬 등 실무를 담당하는 관원을 총칭하여 부르는 말로 과거 급제자 중에서도 학문과 인품이 뛰어나야만 옥당에 들 수 있다고 한다. 옥당에 들었다는 것은 가문의 대단한 영광으로 여겼다고 한다.
다산의 외가를 보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인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가 공재 윤두서로 공재의 친손녀가 다산 선생의 생모다. 형제는 남자가 5명 여자가 6명 즉 11남매 5형제다. 동복형제는 정약전, 정약종, 이승훈에게 시집간 누이와 함께 3남 1녀다.
다산의 학문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 도움을 준다. 자찬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육경사서(六經四書) 이지수기(以之修己) 일표이서(一表二書) 이지위천하국가(以之爲天下國家) 소이비본말야(所以備本末也) 즉 육경(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 악기)과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로 자기 몸을 닦게 하고 일표이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로 천하국가를 다스릴 수 있게 하려고 한 것이었으니, 이로써 근본과 말단을 갖추었다고 하겠다. 이는 경학(육경, 사서)을 근본으로 하고, 경세학(일표이서)을 말단으로 한다는 뜻이다.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여유당이다. 여유당은 생가의 당호다. 당호를 지은 데는 다음과 같은 연유가 있다.
“노자의 말에 여(與, 의심이 많은 동물) 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 유(猶, 두려움이 많은 동물) 여! 사방이 두려워하는 듯 하거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도다, 이 두 마디의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깎는 듯할 테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
여유당이란 당호도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비로소 써서 붙여놓고 이름을 붙인 이유를 기록해서 자녀들이 보도록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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