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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와 서포 김만중

by 황교장 2026. 3. 18.

사씨남정기와 서포 김만중

1, 사싸남정기 줄거리와 고찰

명나라 가정 연간에 금릉 순천부에 사는 유현이라는 명신이 늦게서야 아들 연수를 얻는다. 유연수(劉延壽)는 15세에 장원 급제하여 한림학사가 된다. 유연수는 사정옥(謝貞玉)과 혼인하였으나, 9년이 지나도록 소생이 없자 사씨는 남편에게 새로운 여자를 얻기를 권한다.

유연수는 사씨의 권유를 거절하다가 사씨의 거듭된 설득에 마지못해 교채란(喬彩鸞)을 첩으로 맞이해 아들 장주를 얻는다.

교씨는 천성이 간악하고 질투와 시기심이 강한 여자로, 겉으로는 사씨를 존경하는 척하나 속으로는 증오한다. 사씨가 뒤늦게 아들 인아를 낳게 되자 교씨는 문객 동청과 모의하여 남편 유연수에게 사씨를 모함한다. 유연수는 처음에 교씨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교씨가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그 죄를 사씨에게 뒤집어 씌우자, 유연수는 사씨를 내쫓고 교씨를 본처로 맞이한다.

교씨의 간악함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몰래 정을 통하던 동청과 함께 남편인 유연수를 천자에게 참소하여 유배를 보낸다.

유연수를 고발한 공으로 지방관이 된 동청은 교씨와 함께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이때 조정에서 유연수에 대한 혐의를 풀어 그를 다시 불러들이고 충신을 참소한 동청을 처벌한다.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유연수는 교씨와 동청에게 속은 것을 깨닫고 사방으로 탐문하여 사씨의 행방을 찾는다. 한편 남편인 유연수가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은 사씨는 산사에서 나와 남편을 찾으려 나서왔다가 유연수를 길에서 우연히 만난다.

유연수는 사씨에게 지난날의 잘못을 사과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훗날 예부상서까지 오른 후 그간 수소문해오던 교씨의 행방을 알게 된다. 그러나 교씨가 자신이 예부상서인 것을 모른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예부상서라고만 밝힌 채 첩으로 삼겠다며 교씨를 불러들인다.

교씨는 부푼 꿈을 안고 예부상서의 집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유연수와 사씨를 마주하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하고 뒤늦게 사죄하며 목숨을 구걸했으나, 유연수는 그녀가 지은 죄를 낱낱이 늘어놓은 후 처형한다. 그리고 다시 사씨를 본처로 맞이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구운몽이 원작이 한문본이냐 국문본이냐를 두고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은 데 비해, 사씨남정기는 국문본이 원작으로 밝혀져 있다. 김만중의 종손자인 김춘택이 그렇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춘택의 기록에 의하면, “김만중이 이 작품을 국문으로 지은 이유는, 일반 부녀자들로 하여금 다 읽고 외어 감동하며 볼 수 있게 한 것이었으니, 어쩌다 그런 것이 아니다”라 했다.

이 작품이 국문만 아는 여성 독자층을 위해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장희빈을 왕비로 맞아들였던 숙종 임금이 어느 날 밤 궁녀가 읽어주는 사씨남정기를 듣다가, 유연수가 무죄한 사씨를 축출하는 대목에 이르러 “천하의 고약한 놈”이라고 했다.

그 결과 숙종이 장희빈을 내쫓고 인현왕후를 다시 맞아들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작품을 분석해보면 단순히 선인은 항상 선인이며 악인은 항상 악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나에게 잘하면 선인이고 나에게 못하면 악인이다.

사씨와 교씨 사이에는 애정을 쟁취해야 하는 갈등의 측면이 있기에 어느 한쪽은 무조건 선인이고 다른 한쪽은 무조건 악인이라고만 할 수 없을 것이다.

김만중은 사씨를 재주와 성품을 겸비한 현모양처이며 외모 또한 ‘연꽃 같은 미인’으로 굉장히 뛰어난 편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교씨는 ‘새봄에 피어난 모란’같은 미녀로 사씨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절세미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교씨는 남편 유연수를 유혹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가기(歌妓)였던 가희를 스승으로 모셔 창법을 배워서 노래 솜씨뿐만 아니라 거문고 실력까지 일취월장하게 되어 세상에 존재하는 고금(古今)의 악보 중 모르는 것이 없는 경지에 도달한 인물로 표현한다.

이때부터 유연수가 교씨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더 이상 사씨의 침소를 찾지 않게 된다. 교씨의 연주를 듣게 된 사씨는 교씨에게 음악을 하지 못하게 했다.

이는 도덕적 엄숙주의로 교씨를 부당하게 억압한 것이다. 이처럼 애정 관계의 대립에서 자신에 유리하게 하려고 한 점은 사씨가 잘못했다고 할 수 있다. 교씨가 사씨를 모함한 것은 나쁘지만 애정 성취를 위한 적극적인 활동으로 볼 수도 있다.

 

2. 김만중의 문학론

김만중은 문학의 가장 근원적인 요소로 문자가 아닌 말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 입에서 나오면 말이 된다. 말이 절주(節奏, 리듬)를 가지면 가(歌), 시(詩), 문(文), 부(賦)가 된다. 사방의 말은 비록 같지 않으나, 말을 할 줄 아는 자라면 각기 그 말로써 절주를 삼아, 모두들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통할 수 있다. 중국에서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말은 어느 민족에게나 존재한다. 김만중은 말로 된 문학을 긍정함으로써 중국의 한문학에 한정된 문학론을 극복하는 논리를 마련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당시의 현실에서는 매우 진보적이고 파격적인 인식의 전환을 보여준 사례다.

 

무엇보다도 김만중이 위대하다고 느낀 점은 주자학의 근간을 부정한 데 있다. 김만중은 당대 성리학의 불변의 원리인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파격적인 글을 남겼다.

 

“중용(中庸) 서(序)에서 ‘인심(人心)은 도심(道心)의 명령을 듣는다’라고 한 한마디는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 무릇 마음의 허령(虛靈)하면서 지각(知覺)하는 것이 하나일 뿐이다’라고 했는데 인심과 도심이 어찌 두 마음일 수 있는가?”라고 주장했다.

 

주자가 지은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는 “중용은 어찌하여 지었는가? 자사자(子思子)가 도학(道學)의 전함을 잃을까 걱정하여 지으신 것이다”로 시작하여 “일찍이 논하건대, 심(心)의 허령(虛靈)과 지각(知覺)은 하나일 뿐인데,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다름이 있다고 한 것은, 인심은 형기(形氣)의 사(私)에서 나오고, 도심은 성명(性命)의 올바름에서 근원하여 지각(知覺)으로 삼은 것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도심(道心)으로 하여금 항상 일신(一身)의 주장이 되게 하고, 인심(人心)으로 하여금 매양 도심의 명령을 듣게 하면 위태로운 인심이 편안하게 되고 은미한 도심이 드러나게 되어 동(動), 정(靜)과 말하고 행하는 것이 저절로 과(過), 불급(不及)의 잘못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은 중국 유학과 한국 유학에서 핵심적인 문제였다. 중국철학사에서 인심도심 문제를 처음 제기한 기록은 서경(書經)이다. 서경의 대우모(大禹謨) 편에는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희미하니, 오직 정밀하게 살피고 순일하게 지켜서 진실로 그 중(中)을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중국 상고시대 순(舜) 임금이 제위를 우(禹)에게 물려주면서, 두 가지 상반된 특성을 가진 마음을 삼가서 살피라는 취지로 한 말이다.

 

주자는 누구나 형기를 지니고 있으므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인심이 없을 수 없고, 누구나 성(性)을 지니고 있으므로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도심이 없을 수 없다. 인심과 도심은 한 마음속에 섞여 있는데, 그것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위태로운 인심은 더욱 위태로워지고, 은미한 도심은 더욱 은미해져서 마침내 천리(天理)의 공평함이 마침내 인욕(人欲)의 사욕을 이기지 못하게 된다. ‘정밀하게 한다’는 것은 인심과 도심의 경계를 분별하여 섞이지 않게 하는 것이고, ‘순일하게 한다’는 것은 본심의 올바름을 지켜 그것을 잃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주자는 인심과 도심이 다른 까닭을, 도심은 선천적인 본성에서 나오고 인심은 신체적인 형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도심은 순수한 도덕적 양심에 근거하여 욕구를 배제하고 도덕적 행위를 추동하지만, 인심은 형기의 영향을 받아 욕망으로 흐르기 쉽다고 보았다. 그래서 ‘서경’에서는 도심을 ‘유미(惟微)’하다고 하였으며, 인심을 ‘위태롭다[惟危]’고 한 것이다.

 

주자는 인심과 도심의 이러한 특성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중도에 맞게 지켜내는 노력으로서 정일집중(精一執中)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중용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주희는 “반드시 도심이 한 몸의 주인이 되도록 하고, 인심이 언제나 그 명령을 따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심도심설은 조선 성리학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는 인심과 도심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제시하였다.

이황은 인심과 도심을 칠정(七情)과 사단(四端)에 각각 분속시켜, 전자는 선악이 섞여 있으나 후자는 순선(純善)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인심은 칠정이 되고, 도심은 사단이 된다”고 하여 인심도심설을 사단칠정론과 연결하였다. 이황은 인심을 인욕으로 이해하여, 곧 욕구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부정적으로 보았다.


또한 이황은 사단은 성발(性發)이지만 도심은 심발(心發)이라고 보았다. 그는 도심이 의향을 포함한 마음이라 하였고, 사단의 발현은 자연스럽게 일어나 인위적으로 안배할 수 없지만, 선한 의향은 인간이 형성해 낼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황에게 인간의 주체적 도덕성은 도심에 의해서 확보될 수 있으며, 도심은 단순히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한 의향을 발동시키는 근거로 이해되었다.

 

이이의 인심도심설은 이황의 주장과는 뚜렷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는 인심과 도심을 마음의 작용인 감정[情]이 구체적인 현상으로 드러날 때의 양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이는 “사람의 정이 발동할 때 도의를 위하여 나타나는 것이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고,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측은히 여기며, 의롭지 못할 때 부끄러워하고, 종묘를 지날 때 공경하는 것 등이니, 이것을 도심이라 한다. 또 정이 발동할 때 몸을 이롭게 하기 위해 나타나는 것이 있다. 배고플 때 먹고 싶어 하고, 추울 때 입으려 하며, 힘들 때 쉬고자 하고, 정기가 성하면 이성을 생각하는 것 등이니, 이것을 인심이라 한다”라고 했다.

또한 이이는 “도심은 순수하게 천리이므로 선만 있고 악은 없으나, 인심은 천리도 있고 인욕도 있으므로 선도 있고 악도 있다. 먹을 때 먹고 입을 때 입어야 하는 것은 성현도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것은 천리이고, 음식과 성욕으로 말미암아 악한 곳으로 흐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인욕이다”라고 하였다. 즉 인심도 때와 상황에 맞으면 천리 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인욕이 된다. 이는 결과적인 가치판단에 가깝다. 따라서 이이는 인심을 처음부터 억제할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될 때 지나치지 않도록 조절하는 노력을 중시하였다. 이이에 따르면 인심과 도심은 이황처럼 근원에서 갈라져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인심이 도심이 되기도 하고 도심이 다시 인심이 되기도 한다. 곧 인심과 도심은 상호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 학계에서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전후한 시기부터 인심도심설을 둘러싼 다양한 이론적 견해와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인심도심설은 거의 모든 학자가 언급할 정도로 당대 수양론의 핵심적인 철학 주제였다.

결론적으로 인심은 발현되었을 때, 선하기도 악하기도 한 것이어서 심성의 수양을 통하여 바른 곳으로 나아가고 옳고 선한 것으로 발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이 인심도심설의 요체이다.

따라서 문학도 이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가치를 가진다고 하는 것은 당시에는 절대적 지위를 누렸다. 그런데 김만중은 이를 근본에서부터 부정했다. 김만중은 문학이란 재도지기(載道之器), 즉 문학은 도를 전하는 그릇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김만중은 “우리나라 시문은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배우므로, 설사 십분 비슷하다 해도 그것은 앵무새가 사람 말을 하는 짓이다. 일반 백성들이 사는 거리에서 나무하는 아이나 물 긷는 아낙네가 ‘이아’ 하면서 서로 화답하는 노래는 비록 천박하다고 하지만, 만약 진실과 거짓을 따진다면, 참으로 학사, 대부의 이른바 시(詩)니, 부(賦)니 하는 것들과 함께 논할 바가 아니다.”라고 했다.

학사, 대부의 시와 부가 초동급부의 민요 자락보다 진실성에서 한참 못 미친다고 한 것은 구비문학의 가치를 인식하여 한문학 중심에서 자국어문학의 가치를 알고 자국어문학의 진실성을 강조한 것이다.

김만중은 “송강의 관동별곡과 전후 사미인가는 곧 우리 동방의 이소(離騷)인데, 한문으로서는 그것을 쓸 수가 없고 악인(樂人)의 무리가 입으로 서로에게 주고받거나 혹은 국문으로만 전한다. 관동곡을 칠언시로 번역한 사람이 있지만, 능히 아름답지 못하였다.”

이는 송강의 가사처럼 한문으로 번역할 수 없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지닌 자국어문학은 자국어로써 형상화할 때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는 논리다. 특히 송강의 가사 작품 셋 가운데 속미인곡을 으뜸으로 친 것은 다른 두 편에 비하여 한자어의 사용이 적고 우리말을 더욱 아름답게 구사하였기 때문이다. 즉 문학이란 ‘언어의 질서 속에서 형상화되는 미적 실체’라는 점을 김만중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는 인간의 마음이 둘일 수 없다고 하여 인심과 도심을 나누고 인심이 도심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성리학적 심성론에서 벗어난 주장이다.

즉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이치는 인심과 도심의 관계로 설명할 것이 아니라 문학과 같은 갈래가 본래 가진 감동의 요인으로 접근해야 가능하다는 인식이다.

문학이 주는 자기 발견의 감동은 일반 백성이나 선비, 남녀노소, 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문학의 향유층을 특정 계층에 제한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열어 놓는 문학론의 출발점을 김만중이 마련한 것이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는 이러한 김만중의 주장을 절대로 받아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김만중이 사문난적에 몰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가문이 노론의 핵심 가문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3. 김만중의 생애

서포 김만중(1637~1692)은 조선이 병자호란을 겪고 있던 1637년(인조 15) 2월 10일 강화도에서 나오는 피난선 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호는 서포(西浦), 자는 중숙(重淑)이다. 그의 아명은 ‘배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뜻의 ‘선생(船生)’이다.

김만중이 태어나기 약 3달 전인 1636년 12월 9일에 청 태종 홍타이지가 직접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청군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진군하여 5일 만에 서울 근처까지 왔다. 놀란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을 결정하였다. 이때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金益兼)도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청군은 1월 22일 강화도를 함락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원임대신 김상용(金尙容)은 화약 상자에 불을 붙여 자폭하였는데, 김익겸도 같이 순절하고 그의 어머니도 뒤따라 자결하였다.

김만중의 어머니는 이때 21살로, 만삭이었다. 남편이 죽은 것을 알고는 자결하려 하였으나 주변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는 얼마 안 있어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김만중이다.

김만중은 3살 때부터 어머니에게 글을 배웠다. 그는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외가에서 자랐는데, 그가 4살 때에 경제적, 정신적으로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외조부가 사망하자 어머니 윤씨는 몸소 베를 짜고 수를 놓아 생계를 꾸렸지만, 땔나무가 없어 술통을 쪼개 땔감으로 쓸 정도로 가난했다. 이렇게 궁핍한 살림이었지만 자식들 교육에만은 투자를 아끼지 않고 곡식과 옷감을 바꾸어 책을 사 읽혔다고 한다.

이러한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여 김만중은 16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1665년(현종 6)에 정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해 5월 1일 성균관 전적으로, 22일에는 예조좌랑을, 이듬해 11월에는 정언을 제수받으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김만중은 순절자의 아들이자, 예학에 으뜸가는 집안의 후예라는 후광을 입고 청요직을 두루 거치며 국왕의 최측근에서 활동하게 된다.

김만중은 주로 홍문관, 사헌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여 자주 임금에게 꾸짖음을 당하였다고 한다. 1670년(현종 11)에는 형 김만기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집안의 정치적 입지와 위상은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나 남인의 영수인 허적이 1673년 영의정이 되자, 김만중은 군자의 당과 소인의 당이 조정에 동시에 있을 순 없다며 소인인 허적을 허용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현종은 매우 화가 나서 김만중의 유배를 결정하였다.

결국 그는 강원도 금성(지금의 고성)으로 유배를 떠났다. 김만중은 첫 번째 유배에서 2달 만에 풀려났다.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즉위하여 그의 조카딸인 인경왕후가 왕비로 책봉되었기 때문이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 이후 김만중은 1682년(숙종 8)에 예조참판에 제수되고, 그 이후 대사헌, 예조판서, 병조판서, 좌참찬 등을 거쳐 1686년(숙종 12)에는 양관 대제학을 겸하게 됨으로써 문신으로 최고의 영예를 누리게 된다.

1687(숙종 13)년 김만중의 형 김만기가 사망했다. 김만중은 경연사로 있으면서 김수항이 아들 창협의 비위까지 도맡아 처벌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宣川)에 유배되었으나 1688년 풀렸다. 하지만 숙종 15년(1689)에 소의 장씨(장희빈) 소생의 아들(경종)을 원자로 정하는 문제로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기사환국으로 김만중은 남해 노도로 유배된다.

유배 중에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은 데다 온갖 질병 때문에 몸이 쇠약해져 1692년 4월 10일 유배지인 노도에서 56세의 일기로 숨을 거둔다.

노도에 가묘로 묻혔다가 광주 노치에 장사 지냈다. 그리고 1711년 경기도 장단군 서도면 대덕산으로 이장했다. 지금은 DMZ 안의 북측 구역이라 갈 수가 없는 곳이 되었다.

 

4. 김만중의 가문

김만중의 집안은 광산 김씨로 당대 최고의 명문가 중 하나였다. 광산 김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63명(문과 갑과 장원급제자 12명), 정승 5명, 대제학 7명, 청백리 4명, 왕비 1명을 배출한 가문이다.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이 그의 증조부이며, 김집이 종조부이고, 조부 김반(金槃)은 참판을 지냈다.

김만중의 어머니 해평 윤씨(海平 尹氏, 1617~1689)는 영의정을 지낸 해남부원군(海南府院君) 윤두수(尹斗壽)의 4대손이자,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文翼公) 윤방(尹昉)의 증손녀이고, 이조 참판 윤지(尹墀)의 딸로 당대 최고의 가문 중 하나였다.

김만중의 증조할아버지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다.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있는 돈암서원은 인조 12년(1634)에 김장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현종 원년(1660)에 왕이 ‘돈암(遯巖)’이라는 현판을 내려 주어 사액 서원이 되었다. 이후에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추가로 모셨다. 서원이 처음 세워진 숲말 산기슭에 있던 ‘돈암’이라는 큰 바위의 이름을 따서 사액을 받았다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주역의 의미와 주자가 만년에 사용하던 호 돈옹(遯翁)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측된다.

돈(둔,遯)은 주역 33괘로 천산돈(天山遯)이다. 상괘인 건(乾)이 하늘이고, 하괘인 간(艮)이 산이다. 산이 아무리 높아도 하늘에 다다를 수 없고, 산이 높으면 하늘이 물러나기 때문에 돈(遯)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둔(遯)괘의 괘사는 ‘은둔생활을 해야 형통하다. 소인은 마음을 곧게 가져야 이롭다(遯亨小利貞)’는 뜻이다. 즉 물러나야 할 때에는 물러나는 것이 좋다는 의미이다. 이는 김장생의 생애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물러나 말년에 조용히 제자들을 양성하는 교육에만 힘을 쓴 것일 게다.

서원의 명칭을 임금이 사액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인 김장생은 문묘에 종사된 동국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송익필과 이이, 성혼 등의 제자이자 계승자로 기호학파를 형성, 확장하는 데 기여하였다.

사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김집은 그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아버지 김계휘의 친구가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이었으므로 특별히 그들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또한 아버지 김계휘는 사암 박순, 기대승 등과도 친구로 지냈으므로 훗날 사계는 그들의 문인들과도 인맥을 형성하였다.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함으로써 목은 이색-포은 정몽주-야은 길재-강호 김숙자-점필재 김종직-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정암 조광조-휴암 백인걸-율곡 이이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학통을 수학하여 마침내 유학의 종장(宗匠)이요 예학(禮學)의 태두가 되었다.

김만중의 할아버지는 김반(金槃,1580~1640)이다. 그는 특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이후 이조 정랑, 사간원 정언, 홍문관 교리 등을 두루 지냈다.

김만중의 큰할아버지는 김집(金集, 1574-1656)이다. 이언적, 이황, 이이, 송시열, 박세채와 함께 인신(人臣)으로서 최고 영예인 문묘와 종묘 종사를 동시에 이룬 6현 중 한 분이다.

김집은 이이의 학문을 이어받아 예학(禮學)을 일으킨 부친 김장생의 뒤를 이어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박세채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이이의 학맥을 계승하여 기호학파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김만중의 아버지는 김익겸(1614~1636)이다. 첫째 아들 서석 김만기(瑞石 金萬基,1633~1687)의 딸인, 손녀 인경왕후(仁敬王后)는 숙종(肅宗)의 정비(正妃)이다.

김익겸은 1635년 생원시에 장원 급제하여, 이어 같은 해 1635년 진사시에 3등 합격하였다. 이후 성균관에서 강독관(講讀官)을 지내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군사들로부터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1636년 12월 30일 강화도로 가서 의병을 일으켜 강화산성을 사수하다가, 결국 1637년 2월 16일에 강화산성이 청나라 군사들로부터 함락되기 직전에 남문으로 올라가 분신 자결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23세였다. 그의 어머니 서씨(徐氏) 또한 1637년 2월 22일 음독으로써 자결하여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우국충정으로써 순절하자 충청도 회덕군 구즉면 전민리 즉 지금의 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에 매장되고 이후 그의 일가 묘역이 일대에 조성되었다. 증(贈)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에 증직되고, 1662년(현종 3) 묘비가 세워졌으며, 묘비문은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짓고 썼다. 1661년(현종 2년) 강화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후일 그의 묘 아래에 아버지 김반의 묘가 조성되었다.

다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가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비록 23년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첫째 아들 서석 김만기(瑞石 金萬基)는 숙종(肅宗)의 정비(正妃)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이고, 분신 자결 순국한 후 유복자로 출생한 그의 막내아들 서포 김만중은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인물을 둔 셈이다.

육조고사

김익겸은 순천 선암사 ‘만세루’에 있는 유명한 현판인 ‘육조고사(六朝古寺)’라는 글씨를 남겼다. 육조고사(六朝古寺)의 뜻은 중국의 선승 육조(六祖) 혜능이 중국의 조계산에 살았던 것과 같이 선암사가 조계산에 위치한 인연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육조(六祖)를 뜻하는 글자를 육조(六朝)로 달리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서포김만중선생문학비

김만중 정려각

김만중의 묘소는 DMZ 안이라 갈 수가 없지만, 그의 정려각과 조부와 부친의 묘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에 있다.

김장생묘역 일원

김만중의 증조부인 김장생의 묘소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고, 종조부인 김집의 묘소는 논산시 벌곡면 양산리에 있다.

김반 김익겸의 묘

증조부가 살았던 사계고택은 충남 계룡시 두마면 두계리에 위치해 이곳들을 한번 답사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사계고택

친구들과 2024년 4월 28일과 29일 동안 논산에 있는 양촌 자연휴양림에서 박을 하면서 돈암서원과 근처에 있는 김장생 선생 묘소 일원과 탑정호 출렁다리와 대둔산 등산, 화암사, 송광사를 답사하여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은 일이 다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