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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경주여행

불국사 다시 보기 1-청운교 백운교, 다보탑, 석가탑-

by 황교장 2012. 8. 19.

불국사 다시 보기 1

-청운교 백운교, 다보탑, 석가탑-

 

  2012년 8월 8일부터 10일까지 2박3일 간 국립공원관리공단 경주국립공원사무소에서 실시하는 교직원직무연수에 참석을 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자연공원법 제44조 및 제80조의 규정에 따라 국립공원관리청인 환경부장관의 권한을 위탁받아 국립공원의 보호 및 보전과 공원시설의 설치·유지·관리를 효율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국민의 보건 및 여가와 정서생활의 향상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목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일환으로 교직원 직무연수를 통하여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재교육을 시키기 위해 이 연수가 실시되었다. 이 연수는 아주 인기가 있어서 재빨리 신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운 좋게도 이 연수에 당첨이 되었다.

 

 첫날은 경주교육문화회관에서 4시간동안 고고미술사학 박사이신 신현웅님의 신라역사에 관한 강의를 듣고 오후 3시에 불국사로 향했다. 나로서는 불국사에 참으로 오랜만에 왔다. 경주는 부산과 가까운 곳이라 자주 오지만 정작 불국사는 스쳐 지나가기만 하였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너무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오늘은 그다지 복잡하지가 않다. 폭염 때문일 것이다.

일주문 앞에서 문화유산해설사로부터 불국사에 대한 기본 설명을, 천왕문에서는 4대천왕의 역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어 청운교 백운교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불국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다. 또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불국정토의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랑리에 태어난 대성은 워낙 가난하여 부자 복안의 집에서 품팔이를 한다. 흥륜사 법회를 위하여 시주를 하면 시주한 것의 만 배를 얻고 안락하고 장수한다는 소리를 듣고 어머님을 설득하여 고용살이를 하면서 얻은 밭을 보시한다. 그 뒤 대성은 죽고 보시한 덕분에 부귀영화의 상징인 재상 김문량의 집에 다시 태어나 전생의 홀어머니도 모셔다가 함께 봉양한다.”는 내용이다.

 

  불국사는 크게 두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하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청운교, 백운교, 자하문, 다보탑, 석가탑 등이 있는 구역이고 다른 하나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안양문 등이 있는 구역이다. 또한 네 개의 영역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대웅전 영역, 비로전 영역, 관음전 영역, 극락전 영역이다.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은 대웅전 영역이다. 대웅전으로 가려면 청운교 백운교를 건너 자하문으로 연결되어 대웅전으로 통한다.

 

 

 

 

  국보 제23호인 청운교 백운교는 2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래에 있는 것이 청운교로 길이 6.3m에 17계단으로 되어 있다. 위에 있는 것이 백운교로 길이 5.4m에 16계단으로 되어 있다. 이들 계단을 합치면 33계단이다. 이는 부처님이 계신 도리천을 의미하며, 33이라는 숫자는 욕계 제2천인 33천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청운교 백운교 계단을 올라서면 자하문이다. 자하문(紫霞門)은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자줏빛 금색이 안개처럼 서려 있는 문’이라는 뜻이다. 이는 부처님의 몸을 자금광신(紫金光身)이라고 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청운교 백운교 옆을 자세히 보면 수구가 있다. 석축 아래는 원래 구품연지(九品蓮池)였다. 구품연지는 청운교 백운교 아래에 있던 타원형 연못이다. 구품연지의 크기는 가로 49미터, 세로 39미터 정도의 크기로 추정되고 있으나 지금은 메워져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단지 지금 계절이면 만발했을 연지를 상상해 볼 뿐이다.

불국사 창건 당시에는 배를 타고 구품연지를 건너 청운교, 백운교를 올라 불국사 경내로 들어갔다고 한다. 배를 타고 구품연지를 건너는 것은 사바세계인 차안(此岸)에서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토(佛國土) 즉 피안(彼岸)으로 건너고자 하는 신라인의 간절한 염원을 현실세계에서 표현한 것이다. 당시에는 토함산 물을 끌어들여 연못으로 물이 떨어지면 물보라에 무지개가 떴다고 한다.

 

 

 

청운교의 아래 부분은 무지개 모습의 홍예문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곳에 무지개가 나타나면 환상적인 경치가 펼쳐질 것을 상상할 수 있겠다.

 

  청운교 백운교로는 올라갈 수가 없다. 따라서 옆으로 돌아서 올라가야 한다. 옆으로 올라가는 길에 보물 제1523호로 지정된 석조(石槽)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모서리를 둥글게 한 것이 특이하다. 특히 내부 바닥면의 화려한 연화문 조각은 통일신라시대 불교미술의 뛰어난 조형의식과 높은 예술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경주 최부자집 사랑채 앞에 놓여있는 석조와 닮았다. 그 석조도 통일신라시대 것이라고들 하는데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상태로 있는 것을 보았다.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그 가치를 명확히 따져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국사 대웅전 마당에 들어섰다. 이곳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곳이 다보탑(국보 제20호)과 석가탑(국보 제21호)이다. 보는 순간 숨이 막힌다. 회를 좋아하는 부산 사람들은 회를 배울 때 붕장어(보통 아나고 라고 함)회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온갖 회를 다 먹어보고는 결국은 아나고회 맛이 최고라고 한다. 그래서 ‘회는 아나고회에서 시작해서 아나고회로 끝이 난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곳 불국사에 와 보니 우리나라 문화유산 답사도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불국사에서 시작하여 결국은 불국사에서 끝이 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전국의 유명한 탑들은 다 보았지만 이 두 탑을 능가하는 탑은 보지 못했다.

 

  이곳에 다보탑과 석가탑을 세운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법화경에 다보여래(과거의 부처)는 평소 “내가 부처가 된 뒤 누군가 ‘법화경’을 설법하면 내가 그 앞에 탑 모양으로 솟아나겠다.”라고 약속했다. 먼 훗날 석가여래(현재의 부처)가 ‘법화경’의 진리를 말하자 다보여래가 실재로 탑이 되어 그 앞에 불쑥 솟아났다. 탑은 온갖 보물과 오천 개의 난순(欄循, 난간)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즉 다보탑은 과거불인 다보여래가 현재불인 석가여래의 설법이 옳다고 증명한다는 내용을 탑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다보탑은 법화경의 내용에 맞게 화려하게 꾸몄다. 그리고 옆에 있는 석가탑은 현재불인 석가여래를 나타낸 것이다. 석가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이다.

 

다보탑은 목조건축 양식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1층은 사각, 2층은 팔각, 3층은 원으로, 그 위에 옥개석을 올렸고 다시 그 위에 상륜부가 있다. 상륜부는 8각의 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석가탑의 상륜부는 실상사 석탑의 상륜부를 모방하여 복원했다지만 다보탑의 상륜부는 원래의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탑의 상륜부를 모방했는지 자료를 찾지 못했다. 다보탑은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다보탑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특징은 사자 조각이다. 원래 네 마리 사자 조각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3구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나마 남아 있는 한 마리는 마모가 심해서 가져가지 않아 남아 있다고 한다.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말이 떠올랐다.

 

 

 

다보탑에서 옆으로 눈길을 돌리면 석가탑(釋迦塔)이라 불리는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이다. 높이 10.4m이며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불린다. 무영탑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이 탑은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대표한다. 신라 3층석탑의 교과서격인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과 상륜부가 있다. 각 부분의 체감비율이 황금 비율로 되어 있다고 한다. 상·하 기단의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각각 2개씩 새겨져 있고 다른 조각은 없다. 탑신을 받치는 갑석은 4매의 돌로 되어 있다. 윗면은 경사가 져 있으며 2단의 탑신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신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그 위에는 2단의 옥신받침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만 남아 있었는데 1973년 실상사탑을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백장암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모방했다는 설과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모방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과 백장암 삼층석탑이 혼재된 느낌이다.

 

 

실상사삼층석탑

 

백장암 삼층석탑

 

탑 주위에 장방석을 돌려서 형성한 탑구(塔區)에 연꽃무늬를 조각한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가 있는 것과 탑의 기단부를 자연석이 받치고 있는 것 등이 특이하다.

  석가탑은 1966년 도굴범에 의하여 훼손되었다. 석가탑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2층 탑신 안에 있었던 한변 41cm, 높이 19cm인 사리공, 그 작은 공간 안에 18cm의 금동제 사리장엄구(舍利裝嚴具·사리를 봉안하는 장치)가 비단에 싸인 종이뭉치 위에 놓인 채 발견되었다. 중심부에 놓였던 사리외함과 함께 계란형으로 생긴 은제의 사리 내·외합과 금동사리합,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그외 각종 유물들이 함께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국보 제137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다. 사리함의 바깥 기단부 바닥에 비단에 쌓인 종이 뭉치가 발견되었는데, 종이가 한데 뭉쳐져 글의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묵서지편' 불렸는데 후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석가탑 중수기’로 밝혀졌다. 이 모두를 국보 126호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각각의 유물들이 고유번호를 가지고 있다. 국보 제131호인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를 시작으로 국보 제159호인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중수문서’까지 29개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석가탑은 2010년 말 기단석에서 길이 1.32m, 폭 최대 5mm의 균열이 확인된 후 논의 끝에 전면 해체해 복원하기로 결정됐다. 전문가들은 석가탑 기단 내부에 돌, 흙 등을 채워 넣은 적심(積心)이 비게 되면서 탑 하중이 균형 있게 분산되지 못해 균열이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해체 및 수리, 복원 등 전 과정은 불국사에서 진행되며 일반에 공개된다. 1966년 도굴 미수 사건으로 탑의 일부가 훼손돼 부분 해체 수리한 이후 46년 만의 일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9월 중순 시작해 내년 초까지 석가탑을 전면 해체하고, 복원 설계를 한 후 다시 쌓아올려 2014년 말까지 복원을 끝내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다시 한번 실감하였다. 많이 알면 많이 보이기도 하지만 많이 느끼기도 한다. 그동안 전국의 절집을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탑들을 보아왔다. 그러다 보니 다시 찾은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 다보탑, 석가탑은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게, 크게 다가왔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더니 역시 이름값을 하였다. 1300여년이 흘렀지만 화강암으로 만들었기에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큰 감동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