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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경주여행

재송여중 부장 워크숍2-경주 보리사

by 황교장 2013. 2. 23.

재송여중 부장 워크숍2-경주 보리사

 

  서출지를 나와 화랑교육원과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소를 지나면 보리사 입구 표지판이 나온다.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경주시 배반동 갯마을이다. 갯마을은 옛날 형산강을 통해 이곳까지 나룻배가 닿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서 길이 세 갈래로 나누어져 있어 잘못 들어갔다. 다시 마을 주민에게 물어서 바른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제법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면 전망이 탁 트인 주차장이 나온다. 보리사는 거의 10여 년만에 오는 것 같다. 보리사가 자랑하는 것은 보물 제136호로 지정된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과 보리사마애석불(경북유형문화재 193호)이다. 먼저 보리사마애석불부터 찾아 나섰다. 이 마애불은 이십 수 년 전에 온 기억이 있다. 경주 남산에 빠져 정신없이 남산 일대를 헤매고 다닐 때일 것이다. 그 동안 오지를 않아 길을 잘못 들어 다시 되돌아와 찾을 수 있었다. 인간의 기억이란 이처럼 한계가 있다.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바위에 규칙적으로 파놓은 홈이 보인다. 큰 바위를 깨뜨릴 때 만들어진 흔적이다. 겨울철에 홈에다 물을 부어 얼려서 바위를 깨뜨리거나, 나무쇄기를 박아서 물을 부어 나무가 부풀어 오르는 힘으로 바위를 깨뜨렸다고 한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자 보리사마애석불이 나타났다. 이 마애석불은 동쪽을 향하고 있다. 바위벽을 얕게 파 높이 1.5m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약 0.9m 정도의 작은 부처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웃는 듯한 모습으로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이다. 불상의 조각기법은 전체적으로 정교하지는 못하다. 그래서 보물급이 안 되는 것 같다.

남산에 있는 마애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칠불암 위에 있는 신선암 마애보살상과 용장사터 마애여래좌상이다. 이 두 마애불과 많이 닮았다. 마애불이 조성된 곳은 대부분 경관이 참 좋다. 이곳 역시 경관이 빼어나다. 멀리 토함산이 보이고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이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고, 사천왕사, 망덕사, 황룡사도 한 눈에 들어오고 바로 밑에는 산림환경연구소가 보인다.

 

 

  이태호, 이경화의 ‘한국의 마애불’에는 마애불에 대해 아주 알기 쉽게 정리가 잘 되어 있다.

마애불이란 갈 마(摩), 낭떠러지 애(崖), 부처불(佛)을 뜻한다. 절벽으로 된 바위에 새긴 부처가 마애불이다. 즉 벼랑에 선각이나 환,부조로 새긴 부처님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산과 바위가 많아 예부터 산과 큰 바위를 섬기는 토착신앙(숭산신앙, 바위신앙)이 있었고 청동기시대의 산악숭배, 고인돌과 암각화 등 거석문화가 불교와 만난 것이 마애불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숭상의 대상이 불교의 도입으로 부처로 바뀌어 갔으며 이를 巫佛思想(무불사상)이라 한다. 숭상의 대상이던 큰 바위(큰지바위, 작은지바위, 남산부석, 동물을 닮은 바위나 性石 등)나 산의 최정상을 피하였고 보통 산의 8부 능선 정도에 새긴 공통점이 있다. 다른 나라의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산신각의 호랑이와 신선, 선인, 도인의 그림은 불교 토착화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마애불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그 형식적 기원은 인도나 중국의 석굴사원에서 출발한다.

<6세기경>

서산, 태안마애불이 발견된 마애불 가운데 우리나라 최초이다. 지리적으로 바다 건너 5-6세기 중국 북위와 동위 산동지역의 영향을 직접 받은 듯하다.

< 6세기 후반-7세기 초반>

신라-통일신라 초기작으로 추정되고 모두 강변의 산기슭에 조성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접경지역으로 치열한 전쟁터라는 것이 공통점이다. 중원 봉황리 마애불상군, 영주 가흥동마애삼존불, 영주 신암리마애사방불, 봉화 북지리마애불좌상

<7세기>

신라는 고구려 백제보다 150년 정도 뒤늦게 불교를 수용하여 마애불이 늦게 나타난다. 평면적인 표현으로 고졸한 묘사로 조각미는 떨어지나 후대 선각마애불의 출현을 예고한다. 불곡 감실마애불좌상, 신선사 마애불상군, 윤을곡삼존불, 삼화령삼존불, 탑곡 마애불상군

<7세기 후반>

본격적으로 양감을 살린 마애불시대가 열린다. 선도산 마애삼존불

<8세기>

조각은 귀족층의 우아한 예술미를 반영하여 화려한 예술미가 펼쳐진다. 칠불암마애불상군, 신선암마애보살상, 굴불사지사방불, 남산용장사지마애불좌상

< 8세기 후반- 9세기>

신체의 비례미가 떨어지고 표정이 무표정한 특징이 있다. 두대리마애삼존불, 상선암마애불좌상, 남산선각육존불, 백운대마애불입상

< 10세기-11세기>

고려시대 초기 지방호족의 성장하여 그 위세를 나타내는 시대적 특징으로 전망 좋은 곳에 조각된 거대불이 많다. 머리는 따로 큰 바위를 환조로 섬세하게 조각하여 올렸으나 몸은 거대한 바위 위에 선각으로 조각하여 아래로 갈수록 희미해지는 특징이 있다. 파주용미리마애불, 선운사도솔암마애불, 안동이촌동제비원석불, 약수골 마애불, 법주사마애불

 

이광표의 ‘살아있는 역사문화재2’에 보면 '마애불의 한국적 미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마애불은 돌을 떼어내 불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위를 있던 자리에 그대로 둔 채 불상을 새기는 것을 이른다. 그래서 마애불은 여전히 바위의 일부이며, 바위의 형상과 질감 또한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 까닭에 땅과 자연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러니 마애불은 처음부터 소박하고 자연과 잘 어울릴 수밖에 없다. 마애불을 만들어낸 불교는 자연을 정복하는 종교와 예술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하는 종교이자 예술이다. 자연과 맞서지 않고 자연과 하나 되어 자비로운 부처님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던 평화로운 마음씨를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들은 마애불을 만들면서 특별하고 화려하게 치장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소박하지만 진실한 마음을 담으려 했던 것이다.

마애불은 근본적으로 불상이지만 사찰에 있는 불상과는 다르다. 마애불은 절 밖으로 걸어 나온 불상이다. 절 밖으로 나왔다는 것은 불교적 교리의 틀에 갇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굳이 엄숙하거나 지나치게 성스러울 필요가 없다. 마애불이 사찰의 불상처럼 엄숙하지 않고 때로는 서툴고 때로는 거칠게 만들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보리사 마애불을 보고난 뒤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와 보리사로 올라갔다. 보리사는 비구니승이 상주하는 절이라서 그런지 단 한 분의 스님도 만나보지 못했다. 오늘도 우리 일행뿐이다. 대웅전 마당을 지나 멋있게 생긴 바위 앞에 잘생긴 부처님이 앉아 계신다.

 

 

기독교 신자인 모 부장이 큰소리로 ‘정말 미남이다’ 라고 감탄을 한다. 석굴암 본존불보다도 더 잘 생겼다고 하면서 석굴암 본존불은 권위적으로 생겼는데 이곳의 부처는 너무 가슴에 와 닿는 미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의 풍수가 장난이 아닌 것 같다. 불상 뒤에 있는 바위가 기를 응축시키고 있다. 명당이다. 명당에 불상이 서 있다. 이 명당 덕분에 지금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 부처의 공식 명칭은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이지만 골짜기의 이름을 따서 ‘미륵불’이라고도 하고, 광배 뒤에 동방약사여래가 있다고 해서 ‘서방정토 아미타불’이라고도 하고, 수인을 보면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어 ‘석가모니불’로도 불린다.

 

 

  이에 문화재청과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설명을 종합해 보면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은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불 가운데 가장 완전한 불상이다. 통일신라 시대인 8세기 후반의 제작으로 보이며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의 대작이다. 머리는 나발이고, 이목구비가 크게 표현된 자비로운 인상이다. 목에는 삼도가 있고, 머리부터 삼도까지를 딴 돌로 조각하여 끼웠다. 법의는 통견이고, 몸을 덮은 평행 옷주름은 힘이 빠져 평평한 느낌이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이다.

 

 

 팔각복련의 하대석과 팔각의 중대석, 앙련이 새겨진 상대석으로 조성된  대좌(臺座)위에 석조여래좌상이 앉아 있다.

 

 

 

불상과는 별도로 마련해 놓은 광배(光背)는 매우 장식적인데, 광배 안에는 작은 부처와 보상화·덩쿨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불상의 코를 갈아서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에 남산에 있는 대부분의 불상들은 코가 떼어지고 없으나 이 불상만은 코가 온전히 남아 있다. 예전에는 법당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세월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으며 노천에서 불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광배(光背)의 상단에는 금이 가고, 대좌도 부서진 부분이 있어 아쉽기는 하지만, 옛 모습을 짐작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좋은 편이다.

 

광배 뒷면에는 얕은 돋을새김으로 약사여래 좌상이 새겨져 있다. 오른 손은 가슴 앞으로 들고 있으며, 왼손은 약그릇을 들어 무릎위에 얹고 설법을 하는 모습이다. 머리 위에는 둥근 두광과 몸체 뒤에는 타원형의 신광을, 그리고 가장자리에는 화염이 새겨져 있고 연화대좌 밑에는 피어오르는 구름이 새겨져 있다.

이는 보물 제493호인 밀양 무봉사(無鳳寺) 석조(石造) 여래 좌상이나 경북대학교 소장의 광배 등에서 희귀하게 나타나는 예로서 석불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경주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여기서 불상의 전래에 대하여 정리하고 가자.

 

기원전 6세기 인도 사카족의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세속의 인연을 끊고 성자가 되기 위해 수행을 하던 가운데 깨달음을 얻어 석가모니가 되었다. 석가모니의 깨달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의 가르침과 사상을 바탕으로 불교가 탄생했다.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사람들은 곧 바로 탑을 만들었지만, 불상을 만든 것은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난 지 약 500년이나 흐른 뒤인 서기 1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이렇게 불상을 늦게야 만들게 된 것은 당시 인도의 관습 때문이었다. 이 무렵 인도 사람들은 위대한 성자의 얼굴과 몸을 조각물로 만드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불상을 처음 만든 것은 간다라 지역 사람들이었다. 간다라의 인도인들이 불상을 처음 만들게 된 데에는 그리스의 영향이 컸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 북부 도시국가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가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인도의 서북쪽 지역까지 점령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점령한 지역에는 자연스레 그리스의 문화가 전파되었다. 그리스 문화가 전파되면서 인도인들은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그리스 사람들은 신을 조각한 형태로 표현해 왔다는 것이다. 성스러운 부처의 모습을 조각으로 표현하는 것을 금지해 왔던 인도인들에겐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부터 간다라 사람들은 석가의 모습을 조각으로 표현하게 되었고,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은 탓인지 초기의 간다라 불상들은 대부분 유럽사람 같은 얼굴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기 불상을 중심으로 꽃피웠던 불교 미술을 특별히 간다라미술이라고 부른다.

불상은 부처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재창조해 낸 미술 조각물이기도 하지만, 불교의 교리와 불교적 이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배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처의 얼굴이나 몸을 표현하는 방식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간다라지역에서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불상은 중국, 한국, 일본 등지로 전해지면서 각 지역마다의 고유한 특성에 맞게 변했다. 즉 일정한 형식이나 틀로 굳어지지 않고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 사람들의 심성과 문화의 영향을 받아 서로 다른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다.

출처 : 살아있는 역사문화재2 / 이광표 글

 

마애불과 불상의 전례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려오고 있는데 모 부장님이 ‘삼릉 앞에 있는 소나무들은 굽은 소나무들인데 이곳의 소나무들은 왜 쭉쭉 뻗어 있지’가 궁금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경주 근처에 있는 소나무들은 대체적으로 굽어 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좋은 재질의 소나무는 다 각각의 용도에 사용하고 쓸모없는 굽은 나무만 남겨두어 열성유전이 된 것이라고 한다. 즉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속담처럼 쓸 만한 소나무는 다 베어 버리고 굽은 것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의 소나무들이 곧은 까닭은 아마도 이곳 지형의 경사가 급경사여서 운반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곧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뭔가 미진한 부분이 많다. 우리 일행은 다음여정인 부처바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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