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송여중 부장 워크숍3-탑골 마애조상군(부처바위)
보리사를 나와 부처바위로 향했다. 갯마을에서 반월성 쪽으로 400여 m만 가면 탑골마을이 있다. 마을이 끝나는 곳에 있는 계곡을 따라가면 옥룡암이 나온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옥룡암을 불무사라 하였는데 이제는 다시 옥룡암으로 불리고 있다.
혼자 답사를 할 때에는 보통 마을 입구에 주차를 하고는 걸어서 간다. 오늘은 일정상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옥룡암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는 옥룡암 안으로 바로 들어갔다. 요사채 앞에 제법 큰 진돗개가 한 마리 누워 있다.
관상이 순하게 생겼다. 개에게도 관상이 있다. 눈이 찢어지고 짖는 소리가 앙칼진 개를 나는 싫어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앙칼진 목소리와 사나운 눈을 가진 여성도 쉽게 친해지지 않는다. 공자는 논어에서 교언영색 선의인 (巧言令色 鮮矣仁, 얼굴색이 좋고 말을 능숙하게 하는 사람 중에는 어진 자가 드물다.)라고 했지만 현대의 관상학에서 보면 교언영색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밝은 표정으로 기분 좋은 말을 하면 인간관계가 좋아진다. 찌푸린 얼굴로 남을 헐뜯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러니 교언영색을 꼭 아부나 아첨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대웅전 앞을 지나면 거대한 바위가 나타난다. 보물 제201호로 지정된 탑골마애조상군(부처바위)이다. 불무사에 대해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32대 효소왕 8년(697)에 망덕사 낙성회를 베풀고 왕이 친히 가서 공양했는데, 모습이 초라한 한 중이 뜰에 구부리고 서서 청했다. “빈도도 재에 참가하게 해 주십시오.” 왕이 그에게 말석에 앉기를 허락했다. 재가 끝날 무렵에 왕이 희롱 삼아 물었다.
“그대는 어느 절에 사는가?”
“비파암에 삽니다.”
“이제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공양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라.”
중이 웃으면서 말했다. “폐하께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진신석가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치자 중은 몸을 솟구쳐 공중으로 떠서 남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왕은 놀라고도 부끄러워 급히 동쪽언덕에 올라가 그가 가버린 쪽을 향해 멀리서 절을 했다. 왕이 사람을 시켜 찾았더니 그 스님은 남산 참성곡 혹은 대적천원이라는 곳에 이르러, 바위 위에 지팡이와 바리때를 놓고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 일이 있은 뒤 효소왕은 비파암 아래에 석가사(釋迦寺)를 세우고 스님의 흔적이 사라진 곳에 불무사(佛無寺)를 세웠다. 그가 남긴 지팡이와 바리때를 나눠 간직했다. 두 절은 지금까지 남아 있지만 지팡이와 바리때는 없어졌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지은 시기를 1282년으로 볼 때 무려 580년 이상 불무사와 석가사가 존속했다. 비파골은 용장골에서 경주쪽으로 700m쯤 가면 나오는데 이 골짜기에 불무사지와 석가사지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정확한 고증은 아니라고 한다. 만약에 스님이 이곳 불무사에서 사라졌다면 바로 부처바위 속으로 사라진 것은 아닌가라고 상상되었다.
부처바위는 높이가 9m, 둘레가 30m나 되는 거대한 바위의 4면에 불상·보살상을 비롯하여 승상(僧像)·비천(飛天)·속인(俗人) 등 23구의 인물상과 탑·사자(獅子)·나무 등을 얕은 부조와 선각으로 빈틈없이 조각한 조상군(彫像群)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처바위를 북면 서면 남면 동면으로 사방불을 새겨놓은 것은 사방불신앙의 현장이라고 한다. 사방불신앙이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뒤 화엄정토의 세계가 바로 이 땅에서 실현되었다는 자신감을 반영한 것인데, 헤아릴 수 없이 광대한 불법의 세계를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동서남북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면
<북면>
북면이 부처바위의 중심이 되며 면적이 가장 넓다. 북면에는 석불좌상과 9층과 7층 목탑이 있다.
1. 석불좌상
두 탑 사이의 바위 가운데 연화대좌 위에 앉은 석가여래상으로 보인다. 머리 위에는 천개가 있다. 천개는 인도와 같은 더운 나라에서는 햇빛을 가려 주기 위한 양산 같은 것이었으나,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높은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법당이나 옥좌 위에는 반드시 천개가 있다.
2. 탑
석불좌상을 중심으로 양쪽에 목탑이 서 있는데 동편의 탑은 9층이고, 서편의 탑은 7층이다. 추녀 끝마다 풍경이 달려 있고 탑 꼭대기에는 상륜부가 있다. 수연, 용차, 보주, 찰주 등 상륜부 가 온전하게 조각되어 있어서 신라 목탑의 형태를 아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다음은 2012.12.12.에 조선일보에 ‘황룡사 9층 목탑 복원’에 관하여 실린 내용이다.
탑의 외형은 황룡사 옛 터가 보이는 경주 남산 옥룡암 부근 일명 부처바위(탑곡 마애조상군)에서 발견된 9층 탑 암각화를 바탕으로 했다. 높이 79.2m인 실제 탑의 1대1 복원 작업은 2016년부터 10년간 진행될 예정이다.
문화재청과 경주시가 추진하는 황룡사 전체 복원사업의 예산(2900억 원) 중 절반이 넘는 1500여억 원이 목탑을 짓는 데 쓰일 예정이다.
최홍락 황룡사복원팀장은 "하루빨리 황룡사가 복원돼 온 국민의 자랑거리이자 세계가 주목하는 관광자원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선덕여왕 14년(645년) 신라의 수도 서라벌 황룡사(皇龍寺)에 세워졌던 '황룡사 9층 목탑'의 최종 복원안이 확정돼 현재 10분의 1 축소 모형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탑 축조 1367년 만에 벌어지는 재현 작업이다. 모형 탑을 토대로 2025년까지 현재 경북 경주시 황룡사 옛 터에 79.2m 높이의 똑같은 목탑이 복원된다.
황룡사 9층 목탑은 선덕여왕 12년(643년) 당시 고승이었던 자장(慈藏)의 건의로 2년여 만에 지어졌다.
9개의 층은 신라 변방 9개 나라를 의미했다고 한다. 1238년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황룡사와 함께 완전히 불타 사라졌으며, 당시의 건축 방식이나 설계 방식 등은 알 수 없는 상태다.
이번 복원팀은 2006년 복원사업을 시작한 이후 전통건축·사학·사적 전문가 15명으로 자문위원회를 꾸려 수십 차례에 걸쳐 회의와 보고회를 가졌다. 백제 건축양식이 전해진 일본의 법륭사(法隆寺)·약사사(藥師寺), 중국의 9층 목탑인 육화탑(六和塔), 뇌봉탑(雷峰塔) 등 해외 건축물 답사만 26곳을 다녔다.
2025년에 계획대로 황룡사가 복원이 된다면 정말 멋질 것이다.
< 서면의 여래좌상>
서면은 면적이 좁아서 불상 하나와 몇 가지 장식물, 비천 하나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남면의 불상>
1. 감실의 삼존불
남면 바위 면에 얕은 감실을 파고, 그 안에 세 불상을 새겼는데 본존불은 큰 연화대좌위에 앉아 있고, 양쪽 협시보살은 모두 합장을 하고, 본존불을 향하여 고개를 바싹 가까이하고 있다. 삼존불을 모실 때는 본존불이 앉으면 협시보살은 서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서는 삼존이 모두 앉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붉은색이 남아있는 것은 채색의 흔적이라고 한다.
2. 입체여래상
석조여래입상은 몸통과 다리부분이 다른 돌로 만들어져 서 있다. 대석에는 발만 새겨져 있고 발목 윗부분만 하나의 돌로 된 불상이다.
3. 삼층 석탑
단층 기단 위에 서 있는 삼층 석탑은 옥개 받침이 삼단으로 되어 있다. 이 탑은 높이가 4.5미터의 작은 탑이지만 높은 언덕에 있어서 멀리서도 잘 보인다. 이 탑은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77년에 다시 모아서 복원한 것이다.
<동면의 불상>
동면은 이 바위에서 가장 화려한 면이다. 동면은 3개의 바위로 구성되었는데 왼쪽에는 삼존불상과 천의자락을 휘날리며 날고 있는 6구의 비천상(飛天像)이 표현되어 있고, 그 아래로는 삼존불의 본존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승려가 있다. 동면의 중앙에 있는 바위에는 두 그루의 보리수 아래 앉아 참선하는 승상과 그 바위 앞에 조각된 보살상 등 모두 11구의 불상·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탑골 마애조상군을 다 보고는 원위치로 내려왔다. 다시 대웅전을 지나 요사채를 거쳐 주차장으로 나왔는데 조금 늦게 온 김부장이 “요사채 앞에 있는 보살님을 보았는지” 묻는다.
보지 못했다고 하자. “너무 미인이고 교양도 있어 보였다”라고 하면서 그 보살님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다음에 올 때는 밖에 있는 큰 길로 다니지 요사채쪽으로 다니지 말라’고 했다면서 ‘교장선생님이 그 얼굴을 보았다면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다시 가서 보살님의 관상 한 번 보고 오라’고 한다.
내가 대답하기를 ‘산문이 높은 까닭은 부귀빈천과 귀찮음을 가리지 않기 때문인데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속 이 좁은 보살이겠구만. 김부장이 사람 보는 눈이 없겠지’ 라고 농담을 하고 내려왔다.
이곳 옥룡암에 오면 이육사 시인이 생각난다. 이육사 시인은 퇴계선생의 후손이자, 안동시 도산면 원촌이 고향이다. 원촌은 내 초등학교 친구의 처가가 있는 곳이어서 몇 번 전임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이육사문학관과 생가터를 방문한 적이 있다. 시인은 1942년 8월에 병고로 인하여 이곳 옥룡암에 머문 적이 있는데 이 때 쓴 “경주 옥룡암에서 신석초에게” 란 시조가 있다.
-경주 옥룡암에서 신석초에게- 이육사
뵈올까 바란 마음 그 마음 지난 바램
하루가 열흘같이 기약도 아득해라
바라다 지친 이 넋을 잠재울까 하노라.
잠조차 없는 밤에 촉 태우고 앉았으니
이별에 병든 몸이 나을 길 없으매라
저 달 상기 보고 가오니 때로 볼까 하노라.
신석초 시인은 스승인 정인보선생의 소개로 이육사와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 이육사는 1904년생이고 신석초는 1909년생이다. 다섯 살의 차이인데도 지기(知己)를 넘어 사랑하는 연인(戀人)의 애정을 느끼는 것 같다. 지기와 연인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다음 여정인 감실할매부처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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